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풍천노씨시조(豐川盧氏),노지(盧址),풍천노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3 16:10 수정일 : 2018-03-05 12:41

풍천노씨시조 및 풍천노씨유래(본관)

풍천노씨(豐川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셋째 아들 노지(盧址)가 고려조(高麗朝)에 출사(出仕)하여 풍천백(豐川伯)에 봉해졌고, 그의 후손 ()는 국자진사(國子進士)로 풍천(豐川)에 세거(世居)한 연유로 후손들이 유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풍천(豐川)으로 하게 되었다.


풍천(豐川)은 황해도(黃海道)에 있었던 옛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구을(仇乙) 또는 굴천현(屈遷縣)이었는데, 고려(高麗) 초에 풍주(豐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때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1018(현종 9)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가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 처음으로 진()을 두어 병마사(兵馬使)로써 지주사(知州事)를 겸하게 하였으며, 태종(太宗)이 풍천(豐川)으로 고쳤다.

그후 은율현(殷栗縣)과 합하여 풍율군(豐栗郡)으로 개칭하였다가 1895(고종 32) 송화군(松禾郡)에 합하였고, 별칭(別稱)으로 서하(西河)라 불리기도 하였다.


풍천 노씨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세종(世宗) 때「치평요람(治平要覽)」의 편찬에 참여하여 문명(文名)을 떨친 숙동(叔仝)이 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그의 손자 우명(友明)은 정여창(鄭汝昌)에게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함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삼주(三珠)>로 불리웠고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추천으로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으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었다.

한편 우명(友明)의 아들 4형제 중 둘재 진()30여 년 간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청백(淸白)하기로 이름났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선조조명신편(宣祖朝名臣編)>에 그에 대한 기록이 아래와 같이 전한다.

들에 밭이 없고 서울에 집이 없었다. 여러 고을의 원을 지냈고, 영호남에서 두번 감사를 역임하였으나 쓸쓸한 객사에서 손()이 와도 담요 한 장 없이 지냈으며, 출세를 즐기지 않고, 항상 은퇴의 뜻이 있어 벼슬길에 나온 지 30년에 달하였으나 벼슬한 날수는 3년을 차지못하였다.”

특히 그는 아무리 높은 자리에 있었을 때도 남다른 척하지 않고 겸허하였기로 일찍이 이율곡도 <인망(人望)이 높았다>고 격찬 하였으며, 모나게도 살지말되 또 시풍에 영합하여 때에 따라 처신하며 살지도 말라는 처세신조로 일생을 보냈다. 함양(咸陽)의 효자(孝子)로도 8도에 소문났었고, 당대의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선조(宣祖)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증조부(曾祖父) 숙동(叔仝)과 함께 청백리(淸白吏)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그외 임진왜란 때 동래성(東萊城)을 지키다가 순절한 개방(蓋邦 : 계동의 6세손)과 인조(仁祖) 때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아 <팔미군자(八美君子)>의 별호(別號)가 붙었던 형하(亨夏 : 진의 증손)가 유명했고, 우량(友良)6세손 전(: 군수홍기의 셋째 아들)은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 兵馬節度使)가 되어 군비확장과 변방경비에 눈부신 업적을 납겨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낸 광두(光斗)와 함께 명문의 전통(傳統)을 지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천 노씨(豊川盧氏)는 남한(南韓)에 총 7,978가구, 33,3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45,20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풍천노씨조상인물

노숙동(盧叔仝) 1403 (태종 3) 1463 (세조 9)

자는 화중(和仲), 호는 송재(松齋). 1427(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박사(博士)․교리(敎理)․감찰(監察)을 거쳐 집현전(集賢殿)의 수찬(修撰)․지제교(知製敎)를 지내면서「치평요람(治平要覽)」편찬에 참여했다.

143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여러요직을 거쳐 대사헌(大司憲), 호조․형조․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1448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에 올랐다.

1462(세조 8)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숙종(肅宗) 때 함양(涵養)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노윤(盧 昀) 조선(朝鮮) 때 사평(司評)을지냈다.

노분(盧 昐) 조선(朝鮮) 때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노돈(盧 暾) 조선(朝鮮)에서 지평(地平)을 지냈다.

노우명(盧友明) 1471 (성종 2) 1541 (중종 36)

자는 군량(軍糧), 호는 신고당(信古堂), 대사헌(大司憲) 숙동(叔仝)의 손자. 정여창(鄭汝昌)의 문인. 함양(咸陽) 출신.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형 우량(友良), 아우 우영(友英)과 함께 진사(進士)에 합격, 3()로 칭해졌다.

김안국(金安國)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있을 때 안 우(安 遇)․노 필(盧 王筆)․김대유(金大有)와 함께 추천을 받아 현릉 참봉(顯陵參奉)이 되었으나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파직되었다. 음운학(音韻學)에 조예가 깊었고, 해서(楷書)에 능했다.

1701(숙종 27) 함양(咸陽)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노진(盧 禛) 1518 (중종 13) 1578 (선조 11)

()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 시호는 문효(文孝), 예조 참판(禮曹參判) 숙동(叔仝)의 증손, 우명(友明)의 아들. 20세 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546 (明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禮曹)의 낭관(郎官)을 거쳐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치적이 많았고, 청백리(淸白吏)로 뽑혔다.

수찬(修撰)․교리(敎理)․지평(地平) 등을 거쳐 1558년 부응교(副應敎), 이듬해 사인(舍人)․직제학(直提學), 1560년에 형조참의(刑措參議)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1567년 이조 참의(吏曹參議)에서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전주 부윤(全州府尹)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71년 부모 봉양을 위해 곤양 군수(昆陽郡守)로 나갔다가 대사간(大司諫)이 되고 후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575년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나 사퇴, 다시 대사헌(大司憲)․예조 판서(禮曹判書)․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의 벼슬을 병 때문에 취임하지 못했다. 남원(南原)의 창주서원(創主書院), 함양(咸陽)의 당주서원(溏州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노개방(盧蓋邦) 1563 (명종 18) 1592 (선조 25)

자는 유한(維翰), ()의 아들. 1588(선조 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래 교수(東萊敎授)로서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鉉)과 함께 왜병에게 포위된 동래성을 끝까지 지키다가 전사했다. 동래(東萊)의 낙안서원(樂安書院), 밀양(密陽)의 충효사(忠孝祠)에 제향(祭享),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노홍기(盧弘器)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노형하(盧亨夏) 1620 (광해군 2) 1654 (효종5)

자는 장경(長卿), 판서(判書) ()의 증손. 최 온(崔 薀)의 문인. 1645(인조23)에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고 팔미군자(八美君子)의 별호가 붙었다.

1648(인조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 벼슬을 거쳐 정언(正言)에 이르러 요절(夭折)했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시()가 우수했다.

노전(盧 銓) 1634 (인조 12) 1690 (숙종 16)

자는 계형(季衡), 군수(郡守) 홍기(弘器)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여러 군현(郡縣)을 다스리고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가 되어 군비의 확장과 방위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 학문의 진흥에도 힘써 길주(吉州)의 임명서원(臨溟書院), 북청(北靑)의 노덕서원(老德書院)을 중수(重修)했다.

노광두(盧光斗) ()는 청지(淸之), ()는 감모재(感慕齋). 조선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다.

노태현(盧台鉉) ()는 경옥(敬玉), ()는 경원(經園). 조선조(朝鮮朝)에 교리(敎理)를 역임하였다.

노세하(盧世夏) 조선(朝鮮) 때 장령(掌令)을지냈다.

노세남(盧世南) 조선(朝鮮)에서 학유(學諭)를 역임하였다.

노백린(盧伯麟) 1875 (고종 12) 1926

호는 계원(桂元). 황해도 풍천(豊川) 출신.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普通科)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육군 정령(正領)에 임명되어 관립무관학교(官立武官學校)의 교육국장․교장 등을 지내고, 1907(융희 1)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국권 회복을 위해 활약했다.

이 해 군대가 해산당하자 고향에 내려가서 광산(鑛山)․피혁상(皮革商) 등을 경영하다가 1914년 하와이에 건너가 박용만(朴容萬) 등과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캘리포니아에 이주(移住), 31운동 후 상해(上海)에 가서 임시정부의 군무총장(軍務 總長)을 지내고, 1920년 캘리포니아에 가서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 비행사를 양성하고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항일운동에 종사, 그후 다시 상해에 돌아와 병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服裝)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