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노구(盧坵),장연노씨시조(長淵盧氏),장연노씨조상인물,노단(盧旦)

작성일 : 2017-04-03 15:56 수정일 : 2018-02-27 14:47

장연노씨시조

장연노씨(長淵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穗)의 넷째 아들 노구(盧坵 : 일명 점)가 고려조(高麗朝)에서 훈공(勳功)을 세워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 안필(安弼)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거란(契丹)의 침입을 토평(討平)하는데 공(功)을 세워 장강(長康 : 장연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장연(長淵)으로 하게 되었다.


본관의 유래

장연(長淵)은 황해도(黃海道) 서단(西端)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일찍이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서부터 장연(長淵) 또는 장담(長潭)으로 불리웠고, 고려(高麗) 현종(顯宗) 때 옹진군(瓮津郡)에 속했으며, 1106년(예종 원년)에 처음으로 감무(監務)를 두었다. 1392년(태조 원년) 만호(萬戶)로 하여금 현관(縣官)인 감무를 겸하게 하다가 태종(太宗) 때 진(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로써 판현사(判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그후 1414년(태종 14) 지금의 목감면(牧甘面) 서쪽에 있던 영강현(永康縣)과 합하여 연강(淵康)으로 개칭하였으며, 후에 청송현(靑松縣 : 지금의 신천군 용문면)으로 편입시켰던 해안현(海安縣)을 다시 합치고 장연으로 환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고, 영조(英祖) 때 현(縣)으로 강등하였다가 다시 부(府)가 되고, 순조(純祖) 때 다시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혁에 따라 군(君)으로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장연노씨을축세보(長淵盧氏乙丑世譜)」의 기록에는 도시조(都始祖) 한림학사(翰林學士) 노수(盧穗)로부터 기일세(起一世)하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7세손 단(旦 : 초명은 조) 이 고려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시어사(侍御史)․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와 좌․우복야(左右僕射)를 지내고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최 충(崔 冲)과 함께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교육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했는데 이를 12공도(公徒)의 하나인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하였다.

그의 후손에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정승(政丞)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에 오른 명신(命臣)은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이들이 모두 현달(縣達)하여 장연 노씨의 3대 산맥(山脈)을 이루었다.

명신의 맏아들 국주(國柱)는 충목왕조(忠穆王朝)에서 이부 판사(吏部判事)를 지내고 창녕(昌寧) 월미촌(月未村)으로 이거(移居) 하였으며, 둘째 태주(台柱)는 호군(護軍)을 역임했다.

세째 아들 성주(誠柱)는 삼한삼중대광보국벽상좌명공신(三韓三重大匡輔國壁上佐命功臣)으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에 올라 크게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찬(贊)이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으로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역임하여 가문을 대표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장연노씨(長淵盧氏)는 남한(南韓)에 10,9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歷代人物)-장연노씨조상인물

노안필(盧安弼) 자(字)는 승종(承宗). 고려조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노공여(盧公呂) 자(字)는 우삼(遇三). 고려 때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삼한벽상대광보국숭록대부(三韓壁上大匡輔國崇祿大夫) 일등공신(一等功臣) 겸 상장군(上將軍)에 봉해졌다.

노희연(盧希衍) 자는 경심(慶審). 고려조(高麗朝)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역임하고, 밀원군(密院君)에 봉군되었다.

노영절(盧穎節) 자(字)는 이제(異諸). 고려(高麗)에서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노영렬(盧穎烈) 자(字)는 이재(異哉). 고려 때 감문위 상호군(監門衛上護軍)을 지냈다.

노단(盧旦) ? ~ 1091 (선종 8)

초명(初名)은 조(朝), 시호(諡號)는 광헌(匡憲). 벼슬은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고 두번 지공거(知貢擧)가 되었다. 사숙(私塾)을 열어 후진교육을 시킨 바 이를 광헌공도(匡憲公徒)라 하며 12도(徒)의 하나이다.

노우(盧 祐) 자(字)는 길부(吉夫). 고려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내금위 선략장군(內禁衛宣略將軍)에 이르렀다.

노세겸(盧世謙) 자(字)는 자익(子益). 고려에서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노지명(盧之明) 자(字)는 주중(周仲).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다.

노영(盧 詠) 자(字)는 공군(公君). 고려에서 사재시령(司宰寺令)을 지냈다.

노진(盧 縝) 자(字)는 명중(明仲), 고려조(高麗朝)에 안강부원군(安康府院君)에 봉군되었다.

노륜(盧 綸) 자(字)는 용중(容仲).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했다.

노명신(盧命臣) 자(字)는 충로(忠老).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정승(政 丞)을 지내고,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 祿大夫)에 봉해졌다.

노국주(盧國柱) 자(字)는 지경(支卿).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이부 판사(吏部判事)를지냈다.

노태주(盧台柱) 고려조(高麗朝)에 호군(護軍)을 지냈다.

노성주(盧誠柱) 고려에서 삼한삼중대광보국벽상좌명공신(三韓三重大匡輔國壁上佐命功臣)으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역임하였다.

노신동(盧信仝) 조선에서 길주 목사(吉州牧使)를 지냈다.

노신건(盧信健)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노윤희(盧允禧) 자(字)는 천장(天章). 조선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노영희(盧永禧) 자(字)는 도장(道章). 조선조(朝鮮朝)에 의성 만호(義城萬戶)를 역임하였다.

노윤우(盧胤祐) 조선(朝鮮) 때 광주 부윤(廣州府尹)을 지냈다.

노윤창(盧胤昌) 조선조(朝鮮朝)에 선산 부사(善山府使)를 역임하였다.

노영발(盧英發) 조선(朝鮮)에서 감무(監務)를 지냈다.

노귀산(盧龜山) 조선에서 이조 판서(吏曹判書)․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한성부윤(漢城府尹)․함길도 관찰사(咸吉道觀察使) 등을 역임하였다.

노귀상(盧龜祥) 조선조(朝鮮朝)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노귀명(盧龜命) 조선(朝鮮)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했다.

노사영(盧士英)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내고,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노사원(盧士元) 조선(朝鮮)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노효공(盧孝恭) 조선 때 한성 판윤(漢城判尹)․고양 현감(高陽縣監)을 지냈다.

노효검(盧孝儉) 조선조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역임했다.

노계지(盧繼智) 조선(朝鮮) 때 군자감 참봉(軍資監參奉)을 지냈다.

노충언(盧忠彦) 자(字)는 국필(國弼). 조선조에 원주 판관(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노홍언(盧弘彦) 조선조에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노효온(盧孝溫) 조선에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하였다.

노계언(盧繼彦) 조선(朝鮮)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노세준(盧世峻) 조선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노승손(盧承孫) 조선조(朝鮮朝)에 죽산 현감(竹山縣監)을 지냈다.

노자용(盧自庸)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에 이르렀다.

노진(盧 瑨) 자(字)는 백인(伯仁). 조선에서 좌랑(佐郞)을 지냈다.

노극창(盧克昌) 조선조(朝鮮朝)에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노극일(盧克一) 조선(朝鮮)에서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지냈다.

노용(盧 嵱) 자(字)는 계인(季仁). 조선에서 지평(持平)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