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교하노씨시조(交河盧氏),노강필(盧康弼),교하노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3 15:22 수정일 : 2018-03-05 12:39

교하노씨의 연원

교하노씨의 비조(鼻祖)는 동이족(東夷族) 산동성(山東省)의 삼황 중 두번째 황제인 炎帝 신농황제(神農皇帝)이다.

신농황제(神農皇帝)는 강수(姜水)라는 땅에서 성장하였는데 그곳은 양을 치는 축산업을 하여 양羊아래 여자 女(계집녀)자를 쓴 강수라는 지명(地名)에서 姜을 姓으로 삼았으니 세계강씨의 시조(始祖)가 된다.

강씨는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發祥地)인 황하(黃河)강가를 중심으로 한 중원과 중원북부의 땅에서 문명을 창출(創出)하기 시작하였다.

그 단적인 예로 신농황제는 농사법(農事法)을 가르쳐 하느님과 같이 받들었으니 하느님 神과 농사 農의 칭호를 붙여 신농황제(神農皇帝) 라 하고 불을 사용하여 무기를 만들어 사냥과 농기를 제작하였으니 불꽃 炎과 황제 임금帝를 붙여 염제(炎帝)라 하였고 초목으로 약재를 발견하여 신농본초경으로 유명한 황제다.

신농(神農)은 의약(醫藥)의 태두(泰斗)로 각종 자연약. 즉 韓藥(중화족 즉 지나족으로 넘어가서 漢藥으로 바뀜)을 발견하고 이를 전수하였으며 해독(解毒)하는 방법으로는 茶나무의 차을 우려내어 마셨으니 차를 마신 효시(瑞矢)로 茶皇帝이다.

5일장을 처음 개설하여 농민들이 필요한 물건을 서로 물물교환케 하였으니 시장을 처음 열은 황제가 신농이다.

신농황제(神農皇帝)의 강씨는 5,000여년이라고 하는 데 그 후 대대로 황제(皇帝)의 가문으로 내려오다. 강씨의 역사 가운데 특출한 분이 3.100여년전의 강태공(姜太公) 땅 여상(呂尙)으로 문왕의 스승이며 齊나라의 제후(王)에 봉했다.

강태공은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기록된 학자로 태공왈(太公曰)이라는 명언은 강태공의 철학이다. 강태공의 11세손 고혜(姜)께서 노현(盧縣)땅의 노국국왕(盧國國王)이 되었으니 호랑이무늬검울 盧자를 따서 노씨(盧氏)가 되었다.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 장청현 황하강변으로 유적표석이 있으며 노고산성 (盧故山城) 이 묻혀 있다.

세계노씨원류연구회 창립총회를 2000년 6월 18일 득성시조 발상지인 장청현의 중화인민공국 인민정부 장청현청에서 세계 각국에서 노씨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여 초대 명예고문에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을 추대하였고 대한민국의 노씨중앙화수회장 노종상이 대회장으로·선출되었다. 공식명칭 : 노씨세계종친회 중국. 태국 등 각국, 각 지역 대표를 임원으로 선출하여 현재 활동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에는 3,100만명, 대한민국에는 23만명. 태국 15만명. 대만(자유중국), 베트남, 미얀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립핀, 몽골 등지도 널리 분포.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려에서 벼슬을 하여 많은 선조들이 부원 군(府院君), 君(군)에 봉작되고 왕비(王妃)와 수상(侍中, 효자충신, 학자를 배출하고 조선조에서도 영의정2. 우의정1. 육조판서1. 대제학3, 문형2. 효제충신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현대에 대통령2. 국무총리3. 육군대장2. 국회부의장1 등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제 13대통령 노태우(盧泰 愚). 제16대대통령 노무현(盧武鉉). 임시정부 국무총리 노백린(盧伯麟), 대한민국 정부 국무총리 노신영(盧信 永). 국무총리 노재봉(盧在鳳), 국회부의장 노승환(盧承 煥) 등 관계와 노재현(盧載鉉) 육군참모총장. 노태우(盧 泰愚) 육군대장. 학계. 실업계. 법조계, 각 분야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다.


교하노씨시조 및 교하노씨유래(본관)

교하노씨(交河盧氏)는 도시조(都始祖) 노수(盧種)의 둘째 아들 노오(盧陽)가 신라 말에 아버지를 따라 동래 (東來)하여 교하백(交河伯)에 봉해졌으므로 본관(本貫)을 처음 취득하게 되었다.

교하(交河)는 경기도(京畿道) 파주시(坡州市)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시대에 천정구현 (泉井口縣) 또는 굴화(居火) · 어을매곶(於乙買串)이라 하였고.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제 35대왕, 재위기간:742-765)때 교하군(交河郡)이라 개칭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양주(楊州)에 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교하현(交河縣)으로 강등하고 1687년(숙종 13)에 파주군(坡州郡)에 편입시켰으며, 1733 년(영조 9) 파주군에서 갈리어 교하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다시 파주군에 편입. 그 후 한두번의 변천을 거쳐 파주군의 교하면(交河面)이 되었고 현재 행정지명은 파주시 교하읍(交河邑)이다.


씨족사 개요

「교하노씨세보(交洞「盧氏世譜)」에 의하면 노오(盧堤)의 후손 노강필(盧康弼)이 신라 말에 기계(祀溪)에 세거(世居)하면서 학문(學問)이 현달(顯達)하여 문명(文名)을 떨쳤고, 태조(太祖)를 도와 고려 창업에 공(功)을 세우고 통합삼한개국공신(統合三韓開國功臣)으로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랐으며,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해 졌고 후대에 장산(경북경산)으로 옮겼다가 노척(盧頭)의 장남 노제(盧i齊)가 교하가 속한 주군의 지명인 서원을 취하여 서원군(瑞原君)에 봉군되는 계기로 교하(交 河)로 복관(復貫)하였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교하(交河)로 삼고, 노강필(盧康弼)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人材)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 門)의 기초를 다졌디\

가문을 일으킨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기세조 노강필이 고려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에 선성부원군으로 봉작되고, 2세손 노안맹(盧安孟)이 동서면 병마사 상장군(東西面 兵馬使 上將軍)를 역임했고, 그의 아들 영순(永醉)은 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총리)를 지낸 후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라 가문을 중흥시켰으며, 시호는 懿貞公이다. 장남 노탁유(盧卓儒)는 상장군 형부상서, 차남 노효돈(盧孝敦)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부총리)를 지냈으며 이부상서(吏部尙書) 노 영수(盧願秀;중문하시중평장사)의 아들 노척(盧頭)은 경녕옹주와 혼인하고 충목왕(忠穆王)때 좌정승(左政丞:儉議政丞)으로 경양부원군(慶陽 府院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4형제는 모두 봉군(封君)되어 노제(盧濟) 서원군(瑞原君), 노진(盧模) 창성군(昌城君), 노은(盧誓) 경원군(慶原君), 노영(盧漢) 신양군(新陽君)의 봉군 작위(爵位)를 받아 교하노씨 4파가 되었다.

교하노씨 (交河盧氏)에서 고려 공민왕 때에 노지유(盧智儒)가 판도판서를 지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군(封君)되어 신창노씨로 분적(分籍;分貫)하였으므로 교하노씨 는 모두 5君派가 되었다.

한편 창성군(昌城君) 노진(척의 둘째 아들)은 딸이 고려 공양왕의 왕비(王妃)인 순비(順妃)로 출가하여 국구(國男)가 되었고. 그의 아들 노한(盧l¥l)은 태종대왕의 국구(國男)인 민제의 딸과 혼인하여 태종(太宗)과 동서지간으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고, 명나라 사신(使臣)의 방자한 횡포를 저지시켜 명외교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천하(天下)의 효자(孝子)로 모친의 병환에 극진히 효성을 바쳐 완쾌 후 5년여를 사시다 89세로 장수하였으며, 3년간 시묘(侍墓) 후에 모친을 그리는 효사정(孝思亭)을 노량진 머리에 지었는데 중간에 실호하여 후손들 의 청원에 의해 11년전에 서울시건설본부에서 복원, 시민들의 휴식처와 효성의 교육장이 되고 있다. 서울시 동작구 흑석 1동 141-2

세종(世宗)과 성종대(成宗代)의 명신(名臣) 노사신(盧思愼)은 돈령부사(敦寧府事) 노물재 (盧物載)의 셋째 아들이며, 상신(相臣) 노한의 손자(孫子)로서 세조 (世祖)때 익대좌리공신(翊戴佐理功臣)으로 선성부원군 (宣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성종(成宗)때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했다.

특히 그는 단종(端宗)을 보필하다가 세조조(世祖朝)의 정권에 참여한 훈구파(動舊派)의 중신(重臣)으로 영남 출신의 신진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했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때 많은 선비들을 구출하여 명망이 높았으며, 학 문(學問)이 뛰어나 세조와 성종의 두터운 신망을 받아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을 집필했고, 서거정(徐居正)등과 함께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국역(國譯), 강희맹(姜希孟) · 양성지(梁誠之)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覺)」을 편찬하여 눈부신 업적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파주시 파주읍 백석리 선영하 재실 앞 신도비에 기록되었다.

노사신의 아들 4형제 중 장남 노공필(盧公弼)은 세조 (世祖)때 알성문과(調聖文科)에 급제하고 성종(成宗)때 6조(曹)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후 연산군(燕山君)의 단상법(短喪法)을 지키지 않고 구제(舊制)대로 했다 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때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 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大提學) 문형(文衡)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어 중종이 명나라에 여러번 외 교관을 보냈으나 승습을 받지 못하자 노공필이 종친, 신하 등 1,300여명의 서명을 받아 해박한 지식과 정연한 논리로 명 조정에 청원하여 승습(承襲)을 허락받아 그 공로로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그 외 현감(縣監) 노홍우(盧弘祐)의 아들 노직(盧稷)이 선조(宣祖)때 알성문과(關聖文科)에 장원금제하고 형조좌랑(刑曹左郞)이 되어 형옥(刑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 그의 아우 노직(盧稷)은 임진전쟁 때 병조참판(兵曹恭判)으로 왕을 호종(區從)했고,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접반부사(接伴副使)로 (明)나라와 병사(兵事)를 논의했다. 벼슬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고, 글씨에 뛰어나 예서(隸書)와 전서(蒙書)에 일가를 이루었다.

또한 학행 (學行)과 문장(文章)으로 가문(家門)을 중흥 시킨 인물로는 노경기(盧景ill;)의 아들로 선조(宣祖) 때 이름을 떨친 노계원(盧繼元)과 노후원(盧後元), 노종원(盧從元), 노일원(盧一元)의 체화당(棟華堂) 4형제가 유명했고, 덕행이 높아 4촌 서암공 盧德元과 함께 5인을 체화당사에 모시고 그 학문을 드높이기 위하여 선조대왕 이 사액한 체화당(1康華堂)이 훼손되어 체화서원을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에 수년 전 건립하였다.

인조조(仁祖朝)에 능주목사(陵州牧使)를 역임한 노문한(盧文漢)은 진사(進士:) , 노명흠(盧命欽) 노긍 부자(父子)와 함께 충효의열(忠孝義烈)과 학자(9代進士)의 전통가문(傳統家門)인 교하노씨의 문맥(文脈)을 이었다.

광복운동에 헌신한 대표적인 인물은 충남 부여 출신 노명우(盧明愚)로 30여년간 일제에 저항하며 배재고보와 고향 등에서 활동하다 공주형무소에서 모진 고문으로 출옥 후 곧 순국하였고 그 부인은 유관순의 남동생 유준석을 돌보기도 했다. 같은 동네의 일가 노재철(盧載喆)은 자금을 대는 등 광복운동 공헌으로 건국훈장을 받았다. 그들의 공적은 부여군 귀암면 합송리 공적비에 기록되었다. 경산 종래 祖

현대에 와서도 교하노씨는 훌륭한 인재(人才)를 많이 배출시켜 나라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국가원수인 대한민국 제13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과 국회부의장 노승환(盧承;煥), 육군대장 노재현(盧載鉉), 층남도지사 노명우(盧明愚),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 노병인(盧秉仁)을 배출하고, 노승우(盧lJ(禹 서천:서울 동대문구), 노인도(盧仁道 아산:전국구)국회의원에 이어. 17대 국회에 청주 盧英敏(亨鎬)의원, 서울 마포 盧雄來 의원이 등원하였고, 학계, 실업계, 연예계, 각계 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교하노씨(交河盧氏)는 남한(南韓)에 61,74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교하노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

노강필: 교하노씨 기세조(起世祖)로 877년에 출생하여 태조왕건과 동년배(同年輩)이며 개국공신(開國功臣)이다. 일본불교사전과 고려사의 기록예 의하면 신라화랑장으로 후삼국통일에 기여하여 개국공신에 올랐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의 후예로 학문이 높고 현달하여 태자태사에 제수되고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사후에 삼한공(三韓公)으로 시호를 받았으며 묘소는 경기도 개풍군 평화리(大鳥足里) 증산 간좌에 있다.

노안맹(盧安孟) : 고려조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노영순 : 1140-1208년 시호는 경숙(敬肅).

내시(內待:고려초기에는 문관(文官)을 내시로 임명하였음)로서 합문지후(闇門祗侯)가 되어 병부낭중(兵部郞中) 김장(金莊) 등과 함께 동북면(東北面) 및 춘주도 (春J州道)에 횡행하는 도적의 두목을 잡아 죽이고 그 일당을 토평(討平), 승선(承宣)에 올랐다. 1170년(의종 24년)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호종(區從)하던 신료(臣僚)들이 거의 모두 화를 입었으나, 그는 본래 병가 (兵家)의 아들이며, 또한 무신(武臣)들과 친했으므로 화를 면했다. 명종(明宗) 즉위 후 정중부 등과 함께 참지정사(恭知政事)가 되고, 이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겸 감수국사(監修園史)에 이르렀다.

노탁유 : 1135 - 1191 (명종 21) 참지정사(恭知政事) 노영순의 아들. 음보(藤補)로 양온승동정(良局丞同正)이 되고, 의종(懿宗)때 영화궁녹사(永和宮錄事)를 지냈다.

1171년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용호군 낭장(龍虎軍 郞將)이 되고, 뒤에 장군(將軍)에 승진, 1179년(명종 9)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금오위홍위위좌우위(金吾衛 興威衛左右衛) 겸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지냈다. 그 후 용호군대장군(龍虎軍大將軍) · 홍위위상장군을 역임, 형부상서(刑部尙書) · 용호군상장군(龍虎軍上將軍)에 이르렀다. 묘소 영일군 기계면 홍인리 失傳誌石發見

노효돈(盧孝敦): 1150(의종 4) 1211 (회종 7) 문하

시중평장사(平章事) 노영순의 아들. 음보(藤補)로 기용되어 명종(明宗)때 금(金)나라에 사신으로 두번 다녀 왔으며, 뒤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올랐다. 여러 번 전공(戰功)을 세웠고, 희종(熙宗)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노충악 : 고려 (高麗)때 응양군상장군(應揚軍上將軍)을 지냈다.

노중모 : 고려조에 도감녹사(都監 錄事)를 역임

노연: 고려조(高麗朝)에 좌간의대부(左練大夫) 겸 한림원시강학사(翰林院侍講學士), 지제고(知制]話)를 역임하였다.

노경륜 : 고려 때 민부총랑(民部擔郞) · 문하찬성사 (門下贊成事)를 지냈다.

노영수(盧願秀): 시호는 의열(懿烈). 고려조에 좌승선(左丞宣) 겸 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거쳐 이부상서 (吏部尙書)를 지내고 증손녀가 왕비가 되어 삼대 추증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북 경산시 중산동.

노척(盧 頭): 1300-1356(공민왕 5) 평양공(平陽公) 현의 딸 경녕웅주(慶寧公主)와 결혼하여 도가로 등장, 충목왕(忠穆王)때 좌정승(左政丞)이 되고 경양부원군 (慶陽府院君)에 봉해 졌다. 1355년(공민왕 4) 딸이 원나라 순제(順帝)의 며느리 즉 태자비(太子妃)가 되어 순제(順帝)로부터 원나라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에 임명되었다. 아들 4형제 모두 봉군(封君)되어 교하노씨 는4派가 됨

노제(盧 濟) : 고려 때 낭중(郞中)을 지내고, 서원군(瑞 原君)에 봉(封)해져서 서원군파의 파조가 됨

노진(盧 稙): 시호는 계효(齊孝). 공양왕(恭讓王)의 장인. 1372년(공양王 21) 사은사(謝恩使)로 명 (明)나라에 다녀와서 평리(評理)가 되었으며. 1374년 폭우(暴雨)로 영전(影殿)에 빗물이 세어 든 책임을 지고 찬성사(贊成事) 한방신(韓方信)과 함께 장형(丈刑)을 받았다.

뒤에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져서 창성군파의 파조(派祖)가 되고. 1389년(창왕 1) 딸이 순비(順妃)가 되었다. 순미묘소는 고양시 원당동 高陵.

노은(盧 音):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경원군(慶原君)에 봉(封)해 져서 경원군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 設壇

노영(盧 漢): 고려에서 신양군(新陽君)에 봉(封)해져 신양군파의 파조(派祖)가 되었다.

노유(盧 諭): 서원군의 아들로 고려조예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거쳐 조선 초에 공조의랑(工曹議郞)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 추중. 묘 여주 대신면 상구리

노선 : 황주 순천파조 고려에서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노숙: 고려(高麗)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노윤보(盧允寶) : 도감(都監)의 판관(判官)으로 낭장(郞將)을 지냈다. 판관공은 한산. 서천(舒川) 입향조. 낭장공파라고 함

노균 : 공숙공의 선고(先考) 고려조에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을 지냈다. 初諱는 金傍균 공 숙공(恭肅公)의 부친. 묘 개풍군 대조족리

노향(盧 明): 고려에서 판삼사사(判三司事) 역임.

노전 : 고려 (高麗) 때 관찰사(觀察使) · 병부 전서(兵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선성군(宣城君) 封君

노운봉(盧雲鳳) : 고려 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지냈다.


조선시대 인물

노쌍룡(盧雙龍): 고려조(高麗朝)에 부사(府使)역임

노경(盧 敬): 조선(朝鮮)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공조의랑(工曹議郞)올 지내고,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노신(盧 信): 조선에서 별제(別提)를 지냈다

노승세 : 조선조(朝鮮朝)에 민부전서 (民部典書)를 지냈다.

노한(盧 開) : 1376 (우왕 2) - 1443 (세종 25)

자는 유린(有麟), 호는 효사당(孝思堂), 시호는 공숙(恭肅), 침의정승(ft議政丞) 척의 증손. 음보(藤補)로 등용되어 지사간원사(知司陳院事)를 거쳐 1403년(태 종 3)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고, 이듬해 이조전서 (吏曹典書)를 거쳐 경기도도관찰사(京畿道都觀察使)를 지내고 1405년 동지총제(同知抱制), 다음에 풍해도 도 관찰사(豊海道都觀察使) 등을 역임, 1408년(태종 8)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이르렀다.

태종대왕의 동서로 이듬해 부인 민씨(閔民)의 남동생 민무구(閔無智) 형제의 사건에 연좌, 파직되어 14년간 양주에 은거, 1422년(세종4) 태상왕(太上王:태 종)이 세종(世宗)에게 그의 무죄를 밝힘으로써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복관(復官), 형조판서 (刑曹判書) · 참찬(恭贊) · 판한성부사를 거쳐 1432년 찬성사(贊成事), 1434년 찬성사(贊成事) 겸 대사헌(大司憲), 이듬해 우의정 등을 지내고 1437년 사직했다. 묘소는 노량진에서 1940년 庚辰에 파주읍 백석리로 이장. 옛 신도비(原有)있음. 교하노씨공숙공파종회

노종덕(盧tJE德): 조선조(朝鮮朝)에 침절제사(ft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노신의(盧信義): 조선 때 판사(判事) 역임하였다.

노신례(盧信禮): 조선(朝鮮)때 부사(府使)를 역임

노중온(盧中溫): 조선조에 훈도(訓導)를 지냈다.

노극: 조선조(朝鮮朝)에 판사(判事)를 역임.

노이산(盧異山):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검교군기시정(檢校軍器寺正)을 역임했다.

노운산 : 조선 때 좌익 원종공신 (佐翼原從功臣)으로 승정원도승지(承政院都承旨)를 지냈다.

노천허 : 조선조에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예의총랑(禮議擔郞)을 역임하였다.

노물재(盧物載): 1394 1446 우의져 노한의 아들로 영의정 심온의 딸과 혼인하여 세종대왕과 동서간이다. 조선 (朝鮮)때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 돈령주부(敦寧主薄) 등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고, 의정부 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었다. 교양부원군(交陽府院君)에 봉작되고 순층보조공신에 책록되었다. 슬하에 4형제를 두었는데 3남이 대제학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이다. 묘소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삼정골

노보(盧 淸): 조선(朝鮮)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노식(盧 湜)·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 역임 . 世祖가 太子때 貧賤之交맺음.

노계손(盧綿i&) : 조선 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노효신(盧孝信) : 조선 (朝鮮) 때 감찰(監察) 역임 .

노철강(盧鐵剛): 조선에서 장령(掌令) · 지명(持平) · 좌통례(左通禮)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노식견(盧石堅) : 자는 정보(正甫). 조선에서 보국숭록대부 (輔國崇綠大夫)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오위도총 부도총관을 지냈다.

노회신 : 노물재의 장남으로 조선(朝鮮)때 여홍도 호부사(麗興都護[府二使) 겸 권농병마단련부사(歡農兵馬 團練副使)를 역임하였다. 묘소는 원주 문막읍 동화리에 있고 장명등과 문관석(文官石)이 있다.

노사신 : 1427(세종 9) - 1498(연산군 4)

자는 자반 호는 보진재(保眞齋) · 천은당(天隱 堂), 시호(論號)는 문광(文匡),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 府事) 노물재(盧%J載)의 아들. 1451년(세종 33) 생원 (生員)이 되고 1453년(단종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집현전박사(集賢殿博士)가 되었다가 사가독서(賜H假謨[書)를 하였다. 그 후 지평(持平) , 문학(文學)을 거쳐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아 한 해 동안에 5품계를 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 도승지(都承旨) ·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466년(세조 12) 발영시(拔英試) 에 장원 , 등준시(登俊試)에 2등으로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듬해 호조판서(戶 曹判書)로서 대제학(大提學)을 겸직했다. 1468년(세조 14)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좌찬성(左贊成)이 되고 선성군에 봉군되었다가 선성부원군(宣城府院君)에 봉작 됐으며, 1471년(성종 2) 다시 좌리공신(佐理功臣) 3 등이 되어 좌찬성(左贊成)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겸직했고,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어 「삼국사절 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였다. 70세에 사직을 원하였으나 불윤(不允), 궤장(凡丈)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갔다. 1487년(성종 8) 우의정(右議政), 1491년 좌의정(左議政), 1495년(연산군1) 3월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10월에 사직,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戊午士禍)때 훈구파(動舊派)의 중신(重臣)으로서 류자광(柳子光) 등과 김종직(金宗直)의 규탄에 동조했으나 사림파(士林派) 전부를 몰아내려는 데에는 홀로 반대, 많은 선비들을 구출했다. 학문에 조예가 깊어 세조 · 성종의 신망을 받아 세조 때에 「경국대전(經國大典)」의 호전(戶典)을 편찬하고, 성종(成宗)때에는「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서거정(徐居正)과 함께 국역(國譯),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을 강희맹(姜希孟) · 양성지(梁誠之) 등과 편찬했다. 묘소는 노량진에 서 파주읍 백석리로 이장(移葬). 옛 신도비(原有)있음.

노호신 : 영의정의 막내 아우. 조선때 선공감정(總工監正) ·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

노수강(盧壽剛): 조선조(朝鮮朝)에 판사(判事)역임.

노인방(盧彦邦): 조선에서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를 지냈다.

노인수(盧彦壽): 조선(朝鮮)때 부사(府使)를 역임

노확 : 자(字)는 원실(元實). 조선에서 세자익위 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거쳐 대구도호부사(大丘都護府使)를 지냈다. 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전곡리(노가리 ) 종회 : 대구도호부사공파종회

노사충(盧思忠): 조선조(朝鮮朝)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昌原 입향조 盧廷直 校理의 부친

노원의(盧原義): 조선조(朝鮮朝)에 역임했다.

노수정(盧守敬): 자(字)는 경심(敬心). 조선 때 사용(司勇)을 지냈다.

  • (盧公弼): 1445(세종 27) 1516(중종 11)

자는 희량(希亮), 호는 국일재(菊逸齋), 영의정 노사신(盧思愼)의 아들. 1462년(세조 8) 사마시 (司馬試)를 거쳐 1466년 알성문과(關聖文科)에 급제, 홍문관전한 (弘文館典翰) ·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병조 · 이 조 · 예조의 참의(恭議)를 역임한 후 도승지(都承旨) . 대사헌(大司憲)에 승진했다.

1489년(성종 20) 공조판서 (工曹判書)가 되고, 이어 6조(六曹)의 판서(判書)를 역임, 대제학, 문형(文衡)에 올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추앙 받았다. 이어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로 나갔으며 , 1498년(연산군 4) 참찬(恭贊), 뒤에 찬성(贊成)에 올랐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에 무장(茂長)으로 장배(杖配)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우찬성(右贊成)에 영경연사(領經廷事)로 특진, 이듬해 중종(中宗)의 승습(承襲)을 청하러 명나라에 간 사신이 승인을 못 받고 귀국하자 노공필이 재차 사절로 가서 명제(明帝)의 승인을 얻고 귀국,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70세에 사직하고자 했으나 불윤하며 궤장(凡丈)을 하사받고 퇴임 王도 입사하는 기로소(耆老所: 耆老社)에 들어 갔다.

노공저 : 영의정 노사신의 아들. 조선(朝鮮)때 현릉(顯陵:동구릉 文宗大王陵) 참봉(恭奉) 역임.

노공석(盧公奭): 영의정 노사신의 아들. 조선(朝鮮)때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 묘 원주 문막 건등리

노공유(盧公裕): 노사신의 아들. 자(字)는 중후(仲厚).

조선(朝鮮) 때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 승문원우부승 지(承文院右副承旨)를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역임했다. 묘소 파주읍 백석리

노유근 : 자(字) 신지(愼之) 授散官三品 行司를 지냈고 領相 皇甫仁 政禍로 서원(西原:청원군)에 입향. 경원군파 淸州 入鄕祖 묘: 남일면 신송리

노세보: 노유근의 아들로 자(字)는 국경 (國卿) 조선에서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를 지냈다.

노세필 : 노유근의 아들. 조선조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를 지냈다.

노대령(盧大齡): 조선(朝鮮)때 문과(文科)에 급제, 원종 공신(原從功臣)에 오르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찰방(察訪) 함경도사(咸鏡都事)를 역임하였다.

노홍우(盧弘祐): 자(字)는 길보(吉甫). 조선때 남평현감 (南平縣監)을 지냈다. 증좌의정(贈左議政)

노덕우(盧德佑): 초명(初名)은 귀천(貴千).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노천허 : 조선조(朝鮮朝)에 예조의랑(禮曹議郞)을 역임하였다.

노정직(盧廷直): 조선 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겸 지제교)를 역임하였다. 경남 마산 창원입향조로 첨두서원과 여산사에 배향했다. 마산시 내서읍 삼계리 교하노씨 교리 공파종회

노치 : 조선(朝鮮)때 직장(直長)울 역임했다. 노유담(盧有淡): 자(字)는 수여(壽汝). 조선에서 호조정랑(戶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노섭 : 조선 때 사옹원 직장(司壅院直長) · 사복시첨정(司僕寺儉正)을 거쳐 풍저창수(豊偉倉守)에 이르렀다.

노찬(盧 燦): 조선(朝鮮)때 제용감봉사(濟用監奉事)를 역임하였다.

노종(盧 種): 자(字)는 덕부(德夫). 조선 때 문과(文科) 에 급제하고 봉정대부(奉正大夫)로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노호(盧 浩) : 조선조(朝鮮朝)에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노태주(盧台柱): 자(字)는 중경(重卿). 조선(朝鮮)에서 봉사(奉事)를 역임하였다.

노경인 : 자(字)는 천상. 호(號)는 사물당 (四物堂).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 ·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노경표 : 조선(朝鮮)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부사직(副司直)을 지 냈다.

노직(盧 稙): 1536(중종31)- 1587(선조20)

자(字)는 사치 (士稚), 호(號)는 별유(別'ff) . 호폐헌(好閉軒), 시호(盆號)는 헌민(憲敏), 현감(縣監) 노홍 우(盧弘祐)의 아들. 1569년(선조2) 알성문과에 장원금제(壯元及第),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 어 형옥(刑獄)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선조의 신임을 얻게 되면서부터 청환직(淸官職)을 맡았다. 1573년 정언을 거쳐 이듬해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이 되고 수찬(修撰) · 지평 (持平) · 동부승지 (同副承旨) .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1585년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묘소 양평군 개군면 내리

노욱 : 자(字)는 사율(士栗). 조선 때 상의원별제(尙衣院別提) 역임. 묘소 양평군 개군면 향리

노색(盧 稙): 자(字)는 사영(士類). 조선조(朝鮮朝)에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정산 현감(定山縣監)을 지내고 호조참의 (戶曹恭議)에 추종 묘소 양평군 개군면 향리

노직(盧 稷) : 1545(인종 1)-1618(광해군10) 자(字)는 사형 (士馨) 현감(縣監) 노홍우(盧弘祐)의 아들. 1570년 (선조3) 생원(生員)이 되고, 158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검열(檢聞)을 지냈으며, 글씨에 뛰어나 선조의 발탁으로 승정원주서를 전직했다. 이어서 여러 청환직을 역임, 1592년 (선조25) 임진전쟁 때 병조참판(兵曹慕判)이 되어 왕을 호종(區從),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때는 접반부사(接伴副使)로 명나라 군사를 맞아 병사(兵事)를 논의했다. 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병조판서 (兵曹判書)를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가 되었다. 예서 (隸書)와 전서(蒙書)에 뛰어났다. 묘 개군면 향리

노중령(盧從齡) : 자(字)는 성로(成老) . 조선 때 사헌부 감찰 (司憲府監察) · 남원도호부사(南原都護府使)을 지내고, 조일전쟁(朝日戰爭:임진왜란)때 순절

노응령(盧應齡): 자(字)는 계로(季老). 조선조(朝鮮朝)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지냈다.

노형(盧 洞): 자(字)는 군징(君澄). 조선에서 예빈시정(禮賓寺正)을 지냈다.

노변린(盧變麟) : 자(字)는 득세(得世), 호(號)는 고암(高菴).

조선 때 예조정랑(禮曹正郞) · 춘천부사(春ill府使) · 북계관찰사(北界觀察使) 등을 지냈다.

노첨 : 조선에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돈령부부정(敦寧府副正)을 역임하였다.

노찬(盧 瓚): 자(字)는 국미(國美).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慈府監察)을 지냈다.

노종원 : 자(字)는 순백(順伯) 호(號)는 매헌(梅軒).

1561년(명종16)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언(正 言) · 지평(持平)을 거쳐 임실(任實) · 의성(義城) · 천 안(天安) · 금산(錦山) 등지의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체화당 묘소 청원군 남일면 신송리 체화당사제향. 체화서원 배향

노국함 :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역임하여 부사공 파종회의 파조이며 묘 공주시 장기면 제천리

노경종(盧景宗): 호(號) 명암(明庵). 조선 때 침지중추부사 (儉知中樞府事)역임. 마산시 내서읍 여산사 제향

노성복(盧成福) : 조선에서 훈련원 봉사(訓練院奉事) · 주부(主簿)률 역임하였다.

노문한(盧文漢) : 조선 때 능주목사(綾:HI牧使)를 지냈다.

노경린(盧慶麟):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