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신창노씨시조(新昌盧氏),노지유(盧智儒),신창노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4-03 11:42 수정일 : 2018-04-06 15:5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신창노씨(新昌盧氏)는 교하노씨(交河盧氏)의 일세조(一世祖) 노강필(盧康弼)의 증손(曾孫) 지유(智儒 : 평장사 영순의 둘째 아들)가 고려(高麗) 공민왕(恭愍王)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으로 나라에 무공(武功)을 세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교하 노씨에서 분적(分籍)하여 노지유(盧智儒)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신창(新昌)을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신창(新昌)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아산군(牙山郡)에 속해있는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굴직현(屈直縣)을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기량현(祁梁縣)으로 고쳐 온정군(溫井郡 : 온양)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 (高麗)초에 신창현(新昌縣)으로 개칭하여 1018년(헌종 9)에 천안부(天安府)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그후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조(太祖)가 만호(萬戶)를 없애고 1414년(태종 14)에 온수현(溫水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였다가 신창현이 되었으며,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아산군(牙山郡)에 속하여 지금의 아산군 신창면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일세조 지유(智儒)의 아들 후(珝)가 고려조(高麗朝)에서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냈으며, 후의 손자(孫子) 순(純)은 사마시(士林派)에 합격했으나 벼슬의 뜻을 버리고 향리(鄕里)로 돌아가 학문(學問)에만 진력하며 저서(著書)로 일생을 마쳤다.

한편 선조(宣祖) 때 무명(武名)을 떨친 순(錞)은 당세에 유명한 성리학자(性理學者) 남명(南冥) 조 식(曺 植)에게서 글을 배우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량 보급을 담당했으며, 이듬해 영변 부사(寧邊府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정(鋌)은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하여 용양위 부호군을 지낸 천익(天翼), 참의(參議) 희창(喜昌)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창노씨(新昌盧氏)는 남한(南韓)에 2,1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歷代人物) - 신창노씨조상인물

노 후(盧 珝) 고려(高麗) 때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다.

노 순(盧 純) 고려조(高麗朝)에 진사(進士)였다.

노후륜(盧厚倫) 고려(高麗) 때 진사(進士)였다.

노규부(盧赳夫) 조선(朝鮮) 때 습독관(習讀官)을 지냈다.

노미수(盧眉壽) 조선에서 사직(司直)을 역임하였다.

노 식(盧 軾) 조선 때 부장(部將)을 지냈다.

노 집(盧 輯)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노경운(盧景雲) 조선(朝鮮)에서 인의(引儀)를지냈다.

노경림(盧景霖) 자(字)는 응윤(應潤). 조선조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노 주(盧 鑄) 자(字)는 백수(伯粹). 조선조(朝鮮朝)에 호군(護軍)을 역임하였다.

노대유(盧大有) 자(字)는 숙보(肅甫). 조선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노 순(盧 錞) 1551 (명종 6) ~ ?

자(字)는 자협(子協), 호는 매와(梅窩). 조 식(曺 植)의 문인.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군량 수집을 맡았고 이듬해 영변 부사(寧邊府使)가 되었다. 영변의 상음서원(霜陰書院), 삼가(三嘉)의 귀연서원(龜淵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노 정(盧 鋌) 자(字)는 자원(子元). 조선조(朝鮮朝)에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지냈다.

노사립(盧士立) 자(字)는 신보(信甫).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노천익(盧天翼) 자(字)는 만구(萬九).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했다.

노세신(盧世新) 조선(朝鮮)에서 만호(萬戶)를지냈다.

노희창(盧喜昌) 자(字)는 운백(雲伯). 조선조에서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