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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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31 15:42 수정일 : 2018-01-22 15:3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우리나라 남씨(南氏)의 시원(始原)은 중국(中國) 봉양부(鳳陽府) 여남(汝南) 사람인 김 충(金 忠)이 당()나라 현종(玄宗) 천보(天寶) 14(신라 경덕왕 14)에 안렴사(按廉使)로 일본(日本)에 갔다가 귀로(歸路)에 태풍(颱風)을 만나서 신라(新羅)의 인근지역인 경북 영덕군 축산면 축산동 죽도(慶北盈德郡丑山面丑山洞竹島)에 표착(漂着)하였다.

그는 신라에서 살기를 원하여 경덕왕(景德王)이 이러한 사실을 당천자(唐天子)에게 알리자 이 소식을 전해들릉 당천자는 십생구사지신(十生九死之臣)을 신례(臣禮)로 부를 수 없으며 소원(所願)대로 하라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그 후 경덕왕은 그가 여남(汝南)에서 왔다고 하여〈남씨(南氏)〉로 사성(賜姓)하고 이름을 〈()〉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삼게 하고 후에 영의(英毅)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남씨(南氏)는 고려 중엽에 와서 시조(始祖) 남 민(南 敏)의 후손 3형제가 각각 중시조(中始祖)로 갈라져서 맏형인 홍보(洪輔)가 선조(先祖)의 대()를 이어 영양(英陽), 둘째 군보(君甫)는 영양(英陽)과 의령(宜寧), 막내 광보(匡甫)는 고성(固城)에 정착(定着)하여 살면서 세 계통으로 분관(分貫)하였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남씨(南氏)의 본관(本貫)60여 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들이 전국(全國)에 흩어져 살고 있는 지명(地名)에 불과하며,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영양(令孃)․의령(宜寧)․고성(固城) 3본이다.

영양(英陽)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의 고은현(古隱縣)을 신라 말(新羅末)에 영양(英陽) 또는 연양(延陽)이라 하였다가 940(고려 태조23) 영양현(英陽縣)으로 개칭하였다.

1018년 예주(禮州)에 속하였다가 명종(明宗) 때 감무(監務)를 두었고, 1413(조선태종 13)에 다시 영양으로 고쳐 숙종(肅宗) 때현()을 두었으며, 남면(南面)․동면(東面)․덕봉(德峰)․수비(首比)를 진보(眞寶)에 청기(靑杞)․석보(石保)는 다시 영해(寧海)로 예속시켰고, 1895(고종 3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氏族史 槪要

가문(家門)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영양 남씨에서 홍보의 손자 숙손(淑孫)이 고려 고종(高宗)과 충렬왕(忠烈王朝)에 걸쳐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을 지냈고, 숙손의 현손(玄孫) 영번(永蕃)은 신호위 보승중랑장을 역임하였다.

한편 조선(朝鮮) 최고의 역술가로 유명했던 사고(師古)는 이조 좌랑(吏曹佐郞) 희백(希伯)의 아들로 풍수(風水)․천문(天文)․점복․상법 등에 통달하여 그의 예언은 적중율이 높았다고 한다. 특히 그는 명종(明宗) 말년에 조정의 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했으며, 선조(宣祖)가 잠저(潛邸) 때 사직동(社稷洞)에 있다가 왕위(王位)를 이은 것을 사직동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예언으로 적중시켜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그의 임진왜란 때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로 경주(慶州)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된 의록(義祿)과 경훈(慶薰)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무공(武功)을 세운 율(: 감찰어사 수의 7세손)과 거창 부사(居昌府使) 노명(老明)은「남종통기(南宗通記」를 저술한 제명(濟明),계각촬요(溪刻撮要)」의 저자(著者) 공수(公壽)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으며,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역임한 구명(九明)은 숙종(肅宗)이 그의 이름을 대궐 기둥에 적어 모범으로 과시했다고 한다.

둘째인 군보(君甫)는 영양에서 의령으로 이거하였고 맏이인 공약(公若)의 후손은 영양(英陽)으로 관향(貫鄕)을 쓰고 있다.

남씨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재(人財)를 배출한 의령(宜寧) 계통은 군보(君甫)의 증손을번(乙蕃)․을진(乙珍)․을경(乙敬) 3형제가 유명했다.

고려조에서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냈던 을번은 조선개국 후에 입사(入仕)하여 익대보조찬화공신(翊戴補祚贊化功臣) 으로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재()는 초명(初名)이 겸()이었으나 공신(功臣)으로 봉해지는 것을 사면하려고 지방(地方)으로 피신하자 태조(太祖)가 그를 찾으려고 무척 애쓴 끝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반가와 이름을 ()로 사명(賜名)했다고 하며, 임금이 내려준 이름을 공경한다는 뜻으로 자()를 경지(敬之)라 했다 한다.

특히 그는 술을 좋아하고 도량이 컸으며 정승반열에 있으면서도 정사(政事)에는 항상 비판적이었다. 그가 손님이 오면 바둑두기를 좋아하여 그 까닭을 물으니 산 사람은 기운이 있으므로 반드시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게 되면 조정의 일에 말을 비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에 바둑을 두면 기휘(忌諱)에 저촉되는 말을 피할 수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아우 은()은 성품이 호기롭고 뛰어나 어릴 때부터 기묘한 계책을 좋아하였다.

우왕(禑王) 때 사직단직(社稷檀直)으로 있었던 그는 왜적이 침입해오자 자청하여 지군사(知郡事 : 군수)로 나가 기병(騎兵) 10여 명으로 적을 대파하여 크게 명성을 떨쳤다.

을번의 아우 을진(乙珍)은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을 버리고 사천(沙川 :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은현면 하패리)으로 은거(隱居)하여 조선이 개국된 후 수차에 걸친 태조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절의에 감복한 태조가 사천백(沙川伯)에 봉하자 더 깊숙히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살며 일생을 마치니 세상 사람들은 그가 거처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불렀다.

을진의 후손에서는 곡산 군수(谷山郡守)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치신(致信 : 을진의 손자)의 아들 포()와 곤()이 유명했다.

연산군의 난정을 개탄하여 청맹(靑盲)으로 행세하여 벼슬을 버리고 적성(積城)의 감악산(紺嶽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던 포는 항상 무명 베갓에 떨어진 옷을 입고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스스로 창랑거사(滄浪居士) 또는 소요자(逍遙子)라 일컬었고 가는 곳마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세상에서는 그의 얼굴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고 「연려실기술」에 전한다.

그가 병이 나서 감파동(紺波洞) 재사(齋舍)로 돌아와 아들 정진(廷糸縉)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네가 여덟 번 고을 벼슬을 제수받아 세 번을 사양하고 다섯 번을 나간 것은 노부모가 있으므로 뜻을 굽힌 것이나 우리집에는 선대의 토지와 집이 있어 족히 바람과 비를 가릴만하고 토지는 죽이나 밥을 이어 먹을만하니 나 죽은 뒤로는 다시 벼슬에 나갈 생각은 말라고 하였다.

태종(太宗)의 넷째 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혼인하여 부마(駙馬)가 되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진 휘()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도승지(都承旨) 조서로(趙瑞老)의 친족간음(親族姦淫)을 탄핵했던 지()는 재()의 손자로서 이들의 후손에서 많은 인재(人材)가 배출되어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켰다.

()의 손자(孫子)로 명장(名將)의 웅지(雄志)를 펴보지도 못하고 비명의 죽음에 그쳤던 이()는 태종(太宗)의 외손(外孫)이며 좌의정(左議政) 권남의 사위로 17세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고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여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서북방으로 건주위(建州衛 : 남만주 지역에 살던 여진족의 하나)를 토평하여 27세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나 역모를 꾸몄다는 류자광(柳子光)의 모함으로 예종(睿宗) 즉위년에 주살(誅殺)되어 시기와 질투로 점철된 조선의 역사속에 영원히 지워질 수 없는 아까운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그외 지()의 증손으로 성종(成宗)의 부마(駙馬)였던 섭원(燮元 : 성종의 딸 휘정옹주와 혼인하여 선천위에 봉해짐)과 치원(致元 : 성종의 딸 경순옹주와 혼인하여

선성위에 봉해짐)이 유명했고, 목사(牧使) 치욱(致勗)의 아들 언경(彦經)은 서경덕(徐慶德)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한수와 더불어 조선조(朝鮮朝) 경학(經學)의 쌍벽으로 일컬어졌으며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양근(楊根) 영천동(靈川洞)으로 돌아와 67세로 세상을 마쳤다.

조선 세조(世祖)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던 효온(孝溫)은 사림(士林)의 추앙받는 인물(人物)로 세조에게 물가에 이장된 소릉(昭陵 : 단종모 현덕왕후의 능)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과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이로부터 세상을 등지고 유랑생활로 일생을 마쳤다. 그가 만년에「육신전(六臣傳)」을 지었는데 그의 문인(門人)들이 화()가 두려워 말리자 어찌 죽기를 두려워 대현(大賢)의 이름을 영원히 잃게 할 수 있으리오하며 야사(野史)로 완성했으나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선조(宣祖) 때 좌의정(左議政)에 오른 이웅(以雄 : 참판 응운의 손자)과 인조조에서 대사헌(大司憲)과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이흥(以興)이 뛰어났으며, 숙종조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던 이성(二星 : 현감 식의 아들)과 예조 판서(禮曺判書)를 지내고 문장(文章)과 글씨에 뛰어났던 용익(龍翼)은 약천(藥泉) 구만(九萬)과 함께 조선말에 가문을 빛낸 인물이다.

1629(인조 7) 현령(縣令) 일성(一星)의 아들로 태어난 구만은 효종(孝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문장과 서화로 이름을 떨쳤고, 숙종조에 소론(少論)의 영수가 되어 대제학(大提學)과 영의정을 지내며 당파싸움이 격렬했던 당시 정계(政界)를 주름잡은 명신(名臣)이었다.

대제학 용익의 증손 유용(有容)은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대제학과 예조 참판을 지냈으며, 1764(영조 40) 우빈객(右賓客)이 되어 치사(致仕)한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고, 그의 아들 공철(公轍)은 좌․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당세의 명문장가로 손꼽혔다.

고성(固城) 계통의 인맥(人脈)으로는 고려에서 은청광록대부로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지낸 도정(途庭 : 광보의 증손)7세손 금()이 뛰어났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의 아들로 태어난 금은 조선조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 5형제 중 넷째 수문(秀文)은 세종 때 최초로 호당(湖堂)에 뽑힌 인물이다.

금의 손자 세주(世周)는 연산군 황음(荒淫 : 함부로 음탕한 짓을 함)을 직간(直諫)하다가 화()를 입었고, 계신(繼身)의 아들 추는 중종(中宗) 때 장원급제하여 글재주로 명성이 높았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삼계(森溪)로 물러가 시작(詩作)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외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던 수일(守一)과 정난공신(靖亂功臣)에 책록되었던 치공(致恭)이 대표적이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남씨는 남한에 영양남씨는 82,272명 고성남씨는 10,801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曆代人物)

 

<영양관(英陽貫)>

남홍보(南洪輔) 고려조(高麗朝)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역임하였다.

남겸(南 謙) 고려(高麗) 때 주부(主簿)․영동정(令同正)을 지냈다.

남숙손(南淑孫) 고려조(高麗朝)에 검교예빈시경(檢校禮賓寺卿)을 역임하였다.

남혁(南 奕) 고려조에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역임하였다.

남승경(南承敬)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녹사(錄事)를 지냈다.

남승고(南承顧) 고려(高麗) 공민왕조에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남유번(南有蕃) 고려 때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역임하였다.

남영번(南永蕃) 고려에서 신호위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지냈다.

남계문(南啓文) 고려 때 부위(副尉)를 지냈다.

남이(南 頤) 고려(高麗)에서 정읍 현감(井邑縣監)을 역임하였다.

남수(南 須) ()는 송정(松亭).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용담 현령(龍潭縣令)을 역임하였다.

단묘(端廟) 유신(遺臣)으로「영해부지(寧海府誌)」와「장릉사보(莊陵史補)」에 사적(史蹟)이 기재되어 있다.

남비(南 秠) 조선 때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을 지냈다.

남인록(南仁祿) ()는 중수(仲綏). 조선에서 예빈시 주부(禮賓寺主簿)를 지냈다.

남사고(南師古) 호는 격암(格菴). 역학(易學)․풍수(風水)․천문(天文)․복서(卜筮)․상법(相法)의 비결에 도통, 예언(豫言)이 꼭 들어맞아서 명종 말년(1567년경)에 벌써 1575(선조 8)의 동서 분당(東西分黨), 1592(선조 25)의 임진왜란 등을 예언했다 한다.

만년에는 천문 교수(天文敎授)를 지냈다. 일찍이 1564(명종 19)에 명년에는 태산(泰山)을 봉하게 되리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이듬해에 문정왕후(文政王后)가 죽어 태릉(太陵)에 장사 지내졌다. 1709(숙종 35) 울진(蔚珍)의 향사(鄕祠) 제향(祭享)되었다.

남의록(南義祿) ()는 계수(季綬).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1592(선조 25)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로서 출전(出戰)하여 경주(慶州)에서 많은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병기시 판관(兵器寺判官)을 역임하였다.

남경훈(南慶薰) ()는 응화(應和), ()는 난고(蘭皐). 조선 때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승전책(勝戰策)을 토의(討議)하였다. 부지(府誌)와「망우당집(忘憂堂集)」에 사실이 기재되어 있다.

남율(南 慄) ()는 자관(子寬). 1592(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창의(倡義)하여 곽재우(郭再祐)의 진()에서 싸웠고,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였다.

남붕익(南鵬翼) 조선(朝鮮) 때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높았고, 1672(숙종 5)에 예조좌랑(禮曹佐郞)이 되었으나 사임하고, 영산현(靈山縣)을 많이 남겼다.

남노명(南老明) ()는 태서(台瑞), ()는 만취헌(晩翠軒). 조선 때 진사시(進士試)를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에 여러 관직을 거쳐 거창 부사(居昌府使)로서 치적(治績)을 많이 남겼다.

남구명(南九明) 1661 (현종 2) 1719 (숙종 45)

자는 기서(箕瑞), 호는 우암(寓菴), 상주(尙周)의 아들. 1687(숙종 1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9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없어 고향에 내려가 10여년간 은거, 형노명(老明)의 강권으로 전적(典籍)을 지내고, 1711(숙종 37) 제주통판(濟州通判)으로 부임, 흉년에 도민 구호에 공을 세웠다. 뒤에 순천 부사(順天府使)를 지내고 다시 향리에 돌아가 풍류를 즐기다 세상을 떠났다. 순천에 동비(銅碑)가 세워지고, 제주의 죽림사(竹林祠)에 제향(祭享) 되었다.

남하명(南夏明) ()는 시서(時瑞). 조선 때 전적(典籍)을 지냈다.

남제명(南濟明) ()는 규서(圭瑞), ()는 수약당(守約堂). 조선조(朝鮮朝)의 학자(學者)로 학행(學行)이 뛰어났다.

남기만(南基萬) 1730 (영조 6) 1796 (정조 8)

자는 백온(泊溫), 호는 묵산(黙山), 국규(國珪)의 아들. 영해(寧海) 출신. 1774(영조 5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을 거쳐 1796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천주교(天主敎)의 탄압을 상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했다. 경학(經學)에 밝았 다.

남경희(南景羲) ()는 중은(仲殷), ()는 치암(癡庵). 조선(朝鮮)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남공수(南公壽) ()는 치도(穉道), ()는 영은(瀛隱). 조선 때 학행(學行)이 뛰어난 학자(學者)였으며,「계각촬요(溪刻撮要)」외에도 저서(著書)가 많이 남아 있다.

 

<의령관(宜寧貫)>

남군보(南君甫) 1186 (명종 16) 1264 (원종 5)

()는 백천(柏川). 고려 때 통헌대부(通憲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역임하였다.

남공약(南公若) 고려(高麗)에서 위위시승(衛尉寺承)․동정(同正)을 역임하였다.

남익지(南益胝) 고려조(高麗朝)에 풍저창 부사(豊儲倉副使)를 역임하였다.

남효윤(南孝允)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내고,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다.

남비(南 備)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제술과(製述科)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판중서문하시중(判中書門下侍中)․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요동 도지휘사(遼東都指揮使)를 역임하였다.

남을번(南乙蕃) 1320 (충숙왕 7) 1395 (태조 4)

시호(諡號)는 경렬(敬烈), 지영광군사(知靈光郡使) 천로(天老)의 아들.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조선 건국 후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된 아들 재()․은() 등의 공으로 검교시중(檢校侍中)이 되었다.

남을진(南乙珍) 공양왕(恭讓王) 때 참지문하부사(參知門下府事)가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정몽주(鄭夢周)․길 재(吉再)등과 교유가 있었다. 고려 말 정치가 문란하여 사천(沙川)에 은거, 1392년조선의 개국 후 태조(太祖)의 부름을 듣지않았다.

충절에 감복한 태조에 의해 사천백(沙川伯)으로 봉해지자 더 깊숙히 감악산(紺嶽産)에 들어가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 사후 그가 거처 한 자리를 남선굴(南仙窟)이라 했고, 영조(英祖) 때 사천서원(沙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남대번(南大蕃) ()는 손정(巽亭), 시호(諡號)는 충질(忠質). 고려 때 왕비부 우사윤(王妃府右司尹)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안렴사(按廉使)․첨의부 좌정승(僉議府左政丞)․판군부사사(判軍府司事)․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등을 지내고, 장함부원군(獐含府院君)에 봉()해졌다.

남유손(南有孫) ()는 석자(錫子). 고려에서 판도판서(判圖判書)를 지냈다.

남재(南 在) 1351 (충정왕 3) 1419 (세종 1)

초명은 겸(), 자는 경지(敬之), 호는 귀정(龜亭), 시호는 충경(忠景), 검교시중(檢校侍中) 을번(乙蕃)의 아들. 이 색(李 穡)의 문인.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좌부대언(左副代言)을 지내고 아우 은()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개국에 공을 세웠다.

1392(태조 1) 포상을 피하여 은거했으나 태조에게 처소가 알려져 재()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중추원 학사(中樞學士) 겸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다. 그후 판중추언사(判中樞院事)․참찬문하(參贊門下府事)를 거쳐 1396년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쓰시마도(對馬島)를 정벌했다.

1398(태조 7) 1차 왕자의 난에 아우은()이 살해됨과 함께 잠시 유배되었다가 혐의가 없어 다시 풀려나와, 1400(정종 2) 세자사부(世子師傅)가 되었다.

후에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러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 1416(태종 16)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경제(經濟)에 밝고 문장이 뛰어났으며, 산수(算數)에도 능하여 당시 남산(南算)이라 불렀다.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은(南 誾) 1354 (공민왕 3) 1398 (태조 7)

시호는 강무(剛武), 검교시중(檢校侍中)을번(乙蕃)의 아들 재()의 동생.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우왕(禑王)때 사직단직(社稷壇直)으로 있다가 삼척(三陟)에 쳐들어온 왜구(倭寇)를 격퇴,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다.

1388(우와 14)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 회군(威化島回軍)에 동조(同調)했고, 응양군 상호군(應揚軍上護軍) 겸 군부 판서(軍簿判書)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올랐다. 조 준(趙 浚)․정도전(鄭道傳)․윤소종(尹紹宗)․조 박(趙 璞) 및 형 재()와 함께 이성계 일파로 활약하다가, 1391(공양왕 3) 정몽주(鄭夢周)에 의해 원배(遠配), 이듬해 정몽주가 살해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이어 정도전․조 준․조인옥(趙仁沃) 52인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케 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개국1등공신(開國一等功臣)으로 의성군(宜城君)에 봉해졌으며,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겸 판상서원사(判尙書院事)․우군절 제사(右軍節制使)에 이르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함께 방원(芳遠 : 태조)에게 살해되었다. 태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실(南 實)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도평의사사(都評議司事)․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를 역임하였다.

남적(南 績) 조선조(朝鮮朝)에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역임하였다.

남의(南 毅) 조선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다.

남좌시(南佐時) 시호(諡號)는 양정(良靖). 1381(우왕 7) 강릉도 부수(江陵道副元師)로 밀직부사(密直副使) 권현룡(權玄 龍)과 함께 침입(侵入)한 왜구(倭寇)를 격파하여 정당상의(政堂商議)가 되었으며, 1383(우왕 9) 김화현(金化縣)에 침입한 왜구(倭寇)를 무찔러 의성 군(宜城君)에 봉()해지고 진현관 대제학(進賢館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남휘주(南暉珠) ()는 안명(岸明). 고려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기 철(奇 轍)과 권 겸(權 謙)의 역모(逆謨)를 토벌(討伐)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역임하였다.

남봉우(南鳳羽) 고려조(高麗朝)에 문화 현감(文化縣監)을 지냈다.

남경수(南景壽)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남경우(南景祐) 시호(諡號)는 안호(安胡). 조선조(朝鮮朝)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의령군(宜寧君)에 봉해졌다.

남양덕(南陽德) 조선 때 헌납(獻納)을 지냈다.

남계영(南季瑛) 부사(府使) ()의 아들. 1423(세종 5) 생원(生員)이 되고 1427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장원, 승문원 부교리(承文院副校理)가 되고, 1438년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 에 밝았다.

남성리(南成理) 조선(朝鮮) 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남침(南 深) 조선조에 좌명원종공신(佐命原從功臣)으로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상호군(上護軍)을 역임하였다.

남민생(南敏生) ()는 추원(追遠). 조선 충목왕(忠穆王) 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위위소윤(衛尉少尹)에 올랐다. 1392년에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자 전리(田里)로 귀은(歸隱)했는데 태종(太宗) 때 여러 차례 부름을 받고 나아가 평해 군사(平海郡事)를 거쳐 호군(護軍)에 오르고, 1406(태종 6)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남약생(南約生) 고려(高麗)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남득량(南得良) 고려조(高麗朝)에 수륙 병마절도사(水陸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남득공(南得恭) 고려조(高麗朝)에 단천 군수(端川郡守)를 지냈다.

남지(南 智) 자는 지숙(智叔), 시호는 충간(忠簡), 영의정 재()의 손자. 17세 때 음보(蔭補)로 감찰(監察)이 되었고, 세종 (世宗) 때 경상도 경력(慶尙道經歷)․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의성군(宜城君)을 습봉(襲封), 1435(세종 17) 형조 참판(刑曹參判)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헌(大司憲)․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형조 판서(刑曹判書),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1449(세종 31)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451(문종 1) 좌의정(左議政)이 되어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와 함께 단종(端宗)을 잘 보필해 달라는 문종(文宗)의 고명(顧命)을 받았으나 그 해에 풍질 (風疾)로 벙어리가

되어 정사를 볼 수 없게 되었다.

딸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의 아들 이우직(李友直)에게 출가, 1453(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안평대군 부자(父子)가 화를 당할 대도 풍질로 해서 화를 면했다.

남간(南 簡) 개국공신(開國功臣) ()의 손자, 경문(景文)의 아들. 1419(세종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음보(蔭補)로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고 1427(세종 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좌정언(左正言)을 거쳐 1430년 지평(持平), 2년 후 좌헌납(左獻納), 1436(세종 18) 장령(掌令)을 지내고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 學)에 이르렀다. 청백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남휘(南 暉) ? 1454 (단종 2)

시호는 소간(昭簡), 경문(景門)의 아들. 태종의 4녀 정선공주(貞善公主)와 결혼,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고, 1418(태종 18) 동지총제(同知摠制), 이듬해 판한성 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25(세종 7) 평양 선위사(平壤宣慰使)로 나갔으며 1426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28년에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아 이천(利川)에 부처(付處)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1433년 황주 선위사(黃州宣慰使), 이듬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남곤(南 袞) ()는 지족당(知足堂)․지정(止亭), 곡산 군수(谷山郡守) 치신(致信)의 아들.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문명을 떨쳤으며, 1489(성종 20) 생원시(生員試)․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 14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다.

부제학(副提學)․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서변(西邊)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대제학을 지냈다.

뒤에 찬성(贊成)을 지내고 1518년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宗系)를 변무(辨誣)하고 돌아와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1519(중종 14) 훈구파(勳舊派) 대신으로 심 정(沈 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집권자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을 숙청한 후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1523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으나, 만년에는 죄를 자책, 자신의 글로 뒤에 화를입을까봐 사고(私稿)를 불태웠다. 죽은 뒤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렸으나, 1558(명종 13) 관작(官爵)과 함께 삭탈당했다.

남상치(南尙治) ()는 쌍청헌(雙淸軒). 조선 때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지내고, 문장도덕(文章道德)이 뛰어나 명성(名聲)을떨쳤다.

남부량(南富良) ()는 대유(大有). 고려 (高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과의장군(果毅將軍)․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삼척진병마첨절제사(三陟鎭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남우량(南佑良) ()는 천여(天與), ()는 의의정(依依亭). 1418(태종 18)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조 참의(兵曹參議)․회령 도호부사(會寧都護府使)를 지냈다.

남치정(南致晶) 영양인(英陽人) 호는 원낙재(遠樂齋). 휘주의 증손으로 판서를 역임했다.

남회(南 薈) ()는 정일재(精一齋). 조선에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오읍(五邑)의 수령(守令)을 거쳐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지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다.

남구(南 俅) 조선조(朝鮮朝)에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역임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남의(南 儀) 조선(朝鮮)에서 참판(參判)을역임하였다.

남준(南 俊) 조선 때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다.

남척(南 倜) 조선조(朝鮮朝)에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냈다.

남걸(南 傑) ()는 희정(希正).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 하였다.

남숙(南 俶) ()는 시지(始之). 조선 성종(成宗)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를 역임하였다.

남수(南 脩) 조선 대 우봉 현령(牛峰縣令)을 지냈다.

남대온(南大溫) 조선조(朝鮮朝)에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올랐다.

남질(南 軼) 초명(初名)은 질세. 1435(세종 17)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442(세종 24) 문과(文科)에 급제, 병조참지(兵曹參知)를 거쳐 판봉상시소윤(判奉裳寺少尹)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남철(南 轍)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남정(南 鼎)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남계(南 悈) 조선조(朝鮮朝)에 부사과(副司果)를 역임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추증되었다.

남회(南 恢) ()는 자용(子容). 조선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남율(南 慄) ()는 자직(子直). 1472(성종 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89(성종 20)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남열(南 悅) 1441 (세종 23) 1469 (예종 즉위)

시호는 충무(忠武), 의산군(宜山君) ()의 손자, 태종의 외손(外孫). 좌의정 권남의 4녀와 결혼, 1457(세조 3) 17세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세조 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7세의 나이로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1469년 예종(睿宗)이 즉위한지 얼마 안되어 대궐 안에 숙직하던 어느날 밤 헤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이 깔릴 징조라고 말했다. 이에평소 그의 승진을 질투하고 있던 류자광(柳子光)이 이것을 엿듣고 역모를 꾸민다고 모함, 강 순(康 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순조 18) 관작(官爵)이 복구(復舊)되었다.

남적윤(南嫡胤) ()는 계보(繼甫). 조선조(朝鮮朝)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을 역임하였다.

남지(南 至) ()는 내숙(來叔). ()는 둔촌(遯村). 조선조(朝鮮朝)에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남계당(南季堂) ()는 희정(希正). 조선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남계응(南季膺) 조선 때 음보(蔭補)로 천안군수(天安郡守)를 지냈다.

남세웅(南世雄) ()는 희정(希正). 조선 때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남세평(南世枰)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남세준(南世準) ()는 정경(正卿). 조선 (朝鮮)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남세건(南世建) ()는 백순(伯順). 일찍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전한(典翰)을 거쳐 직제학(直提學)․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대사간(大司諫)․도승지(都承旨),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호조 참판(戶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남세언(南世彦) ()는 자준(子俊).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거쳐 인천 부사 (仁川府使)를 역임하였다.

남치욱(南致勗) ()는 욱지(勗之).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남치근(南致勤) ? 1570 (선조 3)

자는 근지((勤之), 시호는 무양(武襄), 좌의정 지()의 증손. 1528(중종 23)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여, 명종(明宗) 초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내고, 1552(명종 7) 왜구(倭寇)의 침입을 막지 못한 제주 목사(濟州牧使) 김충렬(金忠烈) 대신 목사(牧使)가 되어 이를 격퇴하였다.

1555년 전라도 좌방어사(左防禦使)로서호남지방에 대거 침입한 왜구를 남평(南 平)에서 대파, 전라도 병마절도사(全羅道兵馬節度使)가 되어 무비(武備)에 만전을 기했고, 1556년 다시 쳐들어온 왜구를 격멸시켰다.

1558년 전라도 순변사(巡邊使)를 지내고 1560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승진, 이해 경기․황해․평안남도 삼도 토포사(三道討捕使)가 되어 1562년 황해도의 의적(義賊) 임꺽정(林巨正)을 잡아 죽였다.

남흡(南 洽) ()는 화여(和汝), ()는 월계(月溪).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남효온(南孝溫) 1454 (단종 2) 1492 (성종 23)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 시호는 문정(文貞), ()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김시습(金時習)․안응세(安應世)와 친교가 있었다. 1478(성종 9) 앞서 세조의 꿈에 현덕왕후(顯德王后 : 단종모)가 나타나 아들의 살해를 책했다고하여 세조(世租)에 의해 물가에 이장(移葬)된 소릉(昭陵 : 형덕왕후릉)의 복위를 상소했으나 동승지(都承旨)임사홍(任士洪), 영의정(領議政) 정창손(鄭昌孫)의 저지로 상달되지 못하자 이로부터 세상사에 흥미를 잃고 유랑생활로써 생애를 마쳤다.

1504(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었다는 것과 소릉(昭陵) 복위를 상소했다 해서 부관참시(部棺斬屍)되었다. 만년에 저술한「육신전(六臣傳)」은 오랫동안 묻혀 있다가 숙종(肅宗) 때 비로소 간행되었다.

1513(중종 8) 소릉이 추복(追復)되면서 신원(伸寃)되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장흥(長興)의 예양서원, 의령(宜寧)의 향사(鄕祠), 고양(高陽)의 문봉서원(文峰書院), 함양(咸陽)의 서산서원(西山書院)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남효의(南孝義) 자는 중유(仲柔), 호는 지소재(志素齋), 영의정 재()의 현손(玄孫), 생육신 효온(孝溫) 종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25(중종 20) 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보덕(輔德)․사간(司諫), 1527년 동부승지(同副承旨), 1530년 대사간(大司諫) 2년 후 전주부윤 (全州府尹)을 지내고, 1533(중종 28)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공조 참판(工曹參判)․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 1537년 진하사(進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듬해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1540년 대사헌(大司憲) 다음해 한성부 좌윤(左尹) 등을 지내고 1544년 형조 판서(刑曹判 書)가 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남효옹(南孝雍) 조선 대 창신교위(彰信校尉)에 이르렀다.

남효양(南孝讓) ()는 자겸(子謙). 조선 때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이르렀다.

남경신(南敬身) 조선(朝鮮) 때 장흥고 부사(長興庫副使)를 지냈다.

남규(南 奎) 조선 대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남절(南 巀) ()는 중수(仲秀), 시호(諡號)는 양정(襄靖).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남증(南 增) 조선(朝鮮) 때 예빈시 봉사(禮賓寺奉事)를 역임하였다.

남곤(南 鵾) 조선 때 판관(判官)을 거쳐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남응정(南應禎)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남옥경(南玉經) 조선 때 예조 정랑(禮曹正郞)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에 증직되었다.

남분(南 玢) ()는 화옥(華玉). 조선 때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남처명(南處明) 조선에서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남의원(南義元) ()는 가의(可宜). 조선 성종(成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원종1등공신(願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남인(南 麟) ()는 서옹(瑞翁). 조선(朝鮮)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음보(蔭補)로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역임하였다.

남한성(南漢成) 조성 대 문과(文科)에 급제,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하였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남응운(南應雲) 1509 (중종 4) 1587 (선조 20)

자는 치원(致遠), 호는 국창(菊窓)․난재(蘭齋)․관원(灌圓), 참판(參判) 세건(世建)의 아들. 1535(중종 3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주소(注書)․강계 판관(江界判官)을 거쳐 1545(인종 1) 사성(司成)으로 참교(參校)를 겸직,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이 되어「중종실록(中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듬해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1545년 길주 목사(吉州牧使), 2년 후 판결사(判決事) 우부승지(右副承旨)․참찬관(參贊官)을 역임. 1552(명종 7)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554년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이어 형조․병조의 참의(參議)를 거쳐 1559년 우승지(右承旨)․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가 되고, 1561(명종 16)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보직, 1564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1584년 공조 참판(工曹參判)이 되었다.

일찌기 서총대의 시예(詩藝)에서 문무과(文武科)에 모두 장원하였으며, 전서․주서에 능했다.

남응룡(南應龍) ()는 경림(景霖) 호는()는 이락당(二樂堂). 조선 때 문과(文 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혔고, 벼슬은 직제학(直提學)과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남응식(南應植) ()는 사남(士男). 조선조(朝鮮朝)에 관찰사(觀察使) 겸 순찰사(巡察使)를 역임하였다.

남언순(南彦純) 1522 (중종 17) 1578 (선조 11)

자는 성보(誠甫), 府使) 치욱(致勗)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승지(承旨)․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지낸 후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에 이르렀다. 무관이었으나 학문에 밝고 글씨에도 능했다.

남언경(南彦經) 자는 시보(時甫), 호는 동강(東岡), 부사(府使) 치욱(致勗)의 아들, 언기(彦紀)의 형. 서경덕(徐敬德)의 문인. 1566(명종 2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지평 현감(砥平縣監)에 기용, 1573(선조 6) 양주 목사(楊洲牧使)가 되고,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전주 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가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謨叛事件)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92년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기용, 이듬해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이 요(李 瑤)와 함께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陽明學者)로서 이 황(李 滉)을 비판했다하여 주자학파(朱子學派)의 탄핵으로 삭직(削職)되고 여생을 학문연구로 보내다가 67세로 죽었다. 양근(楊根)의 미원서원(迷源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남순민(南舜民) 1484 (성종 15) 1569 (선조 2)

자는 가봉(可封), 충청도 수군절도사 효원(孝元)의 아들. 1519(중종 14)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2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검열(檢閱)을 지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다. 독서를 즐겼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았다.

남진(南 振) ()는 성보(盛甫), ()는 추계(秋溪). 일찌기 학문(學問)에 뜻을 두어 독학(篤學)하여 도학(道學)에 능()했으며 후진(後進) 양성에 힘썼다. 의양서원(宜陽書院)과 금계서원(錦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남응민(南應敏) ()는 중달(仲達).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남억년(南億年) 조선에서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남근(南 瑾) ()는 수헌(秀獻). 조선 때 진사(進士)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남의종(南懿宗) 조선조(朝鮮朝)에 의정부 녹사(議政府錄事)를 지냈다.

남공범(南公範) 조선 때 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올랐다.

남염(南 濂) 조선(朝鮮) 때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를 역임하였다.

남유(南 瑜) ? 1592 (선조 25)

직제학(直提學) 응룡(應龍)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1592(선조 25) 임진왜란때 나주 목사(羅州牧使)로서 이순신(李舜臣)을 도와 노량(露梁)에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남발(南 撥) 1561 (명종 16) 1646 (인조 24)

자는 공제(公濟), 호는 화은(華隱),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 언진(彦鎭)의 아들. 성 혼(成 渾)의 문인. 1588(선조 21)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602(선조 35)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다.

1610(광해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13년 헌납(獻納), 이듬해 장령(掌令) 지내고, 인조(仁祖) 때 상의원정(尙衣院正)에 이르러 사직하고 온양(溫陽)에 은거(隱居), 80세 때 노인직(老人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남대명(南大溟) ()는 우승(羽升), ()는 후계(後溪). 조선(朝鮮) 대 군수(郡守)를 지냈다.

남근(南 謹)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병절교위(秉節校尉)에 올랐다.

남경(南 璟)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호군(護軍)을 지냈고 이어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역임하였다.

남이웅(南以雄) 1575 (선조 8) 1648 (인조 26)

자는 적만(敵萬), 호는 시북(市北), 시호는 문정(文貞), 참판(參判) 응운(應雲)의 손자. 1606(선조 39)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해 사부(師傅)가 되었다가 세마(洗馬)․위수․통례(通禮)를 거쳐 1613(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 (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수찬(修撰)․응교(應敎)를 지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오위장(五衛將)․황해도 관향사(黃海道館餉使)․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역임, 이듬해 이괄(李 适)의 난때 황주 수성대장(黃州守城大將)으로 도원수(都元帥) 장 만(張 晩)을 도와 공을 세우고 진무3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춘성군(春城君)으로 봉해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 : 1636) 후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으로 잡혀갈 때 우빈객(右貧客)으로 시종, 돌아와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고, 1646(인조 24)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사사(賜死)를 반대하여 사직했다가, 1648년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남이신(南以信) ()는 자유(子有), ()는 직곡(直谷).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남이공(南以恭) 1565 (명종 20) 1640 (인조 18)

초명은 이경(以敬),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簑), ()의 아들. 1590(선조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1593년 사서(司書)가 되고, 이어 평안도 암행어사(平安道暗行御史)를 거쳐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역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 등과 북인(北人)의 수뇌가 당쟁에 가담, 당시의 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이화의를 주장했다 하여 탄핵, 파직시키고 1599년 북인이 분열될 대소북(小北)의 영수가 되었다가 류영경(柳永慶)과 함께 파면 당했다.

그 후 다시 기용되어 광해군(光海君) 초 형조 참의(刑曹參議)․예조참의(禮曹參議)․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등을 역임, 1615(광해군 7) 당쟁으로 파직된 후 평산(平山)․해주(海州)․송화(松禾)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1619년 풀려나와 대사헌(大司憲)․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 등을 거쳐 1637(인조 15)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승진,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직, 1639년 다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공조판서(工曹判書)가 되었다가 앞서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된 왕제(王弟)와 대신들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에 책임지고 파면당했다. 죽은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남이흥(南以興) 1540 (중종 35) 1627 (인조 5)

자는 자호(子豪), 호는 성은(城隱), 시호는 충장(忠壯), 나주 목사(羅州牧使) ()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부총관(副摠管)․포도대장(捕盜大將), 충청도와 경사도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구성 부사(龜城府使), 안주 목사(安州牧使) 등을 역임,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한때 탄핵을 받았으나 장 만(張 晩)의 변호로 무사했다.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장만의 휘하에서 관군을 이끌고 용전, 난을 평정하여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고 진무 1등공신(振武一等功臣)에 책록,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이어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로 영변 부사(寧邊府使)를 겸임,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안주(安州)에 나가 후금(後金)의 군사를 맞아 용전하다가 무기가 떨어지고 승산이 없어지자 성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 부원 군(府院君)에 추봉(追封),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남천택(南天澤) ()는 소우(蘇宇), ()는 태암(苔巖). 조선(朝鮮)때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경주 부윤(慶州府尹)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효자(孝子)로 정려(旌閭)가 세워지고, 이조 판서(吏曹判書)․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남천상(南天祥) ()는 서오(瑞吾). 조선 때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남몽뢰(南夢賚) ()는 중준(仲遵), ()는 이계(伊溪).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목사(牧使)를 지냈다. 이계서원(伊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남성익(南星翼) ()는 응칠(應七). 조선조(朝鮮朝)에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남용현(南龍見) ()는 덕중(德中).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남태운(南泰運) ()는 화보(和甫). 조선(朝鮮)에서 정랑(正郞)을 지냈다.

남치리(南致利) 1543 (중종 38) 1580 (선조 13)

자는 의중(義中), 호는 분지당(賁趾堂). 이 황(李 滉)의 문인. 안동(安東) 출신. 문과(文科)에 두 번이나 실패하고 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에만 열중했다. 안동(安東)의 노림서원(魯林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남후(南 垕) 자는 재원(裁元), 호는 퇴촌(退村).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남극엽(南極曄) 자는 수여(壽汝), 호는 수경(受景). 조선에서 교리(校理)를 지냈다.

남연년(南延年) ()는 수백(壽伯), 시호(諡號) 충장(忠壯). 조선조(朝鮮朝)에 영장(營將)을 역임하였다.

남대년(南大年) ()는 경백(景伯). 조선 때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을 지냈다.

남극년(南極年) ()는 노경(老卿). 조선(朝鮮) 때 참지(參知)를 지냈다.

남유성(南有星) ()는 시숙(蓍叔). 조선조(朝鮮朝)에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거쳐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역임하였다.

남필성(南弼星) ()는 우경(右卿).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남몽성(南夢星) ()는 징숙(徵叔).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남오성(南五星) ()는 취경(聚卿). 조선(朝鮮)에서 통제사(統制使)를 지냈다.

남계하(南啓夏) 조선의 시인. 자는 양백(養伯), 호는 귀봉(龜峰). 시에 뛰어나 명종․선조 시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벼슬은 시학 교관(詩學敎官)을 지냈다.

남덕하(南德夏) 자는 화숙(和肅). 조선(朝鮮) 때 병사(兵使)를 지냈다.

남혜원(南惠遠) ()는 관옥(寬玉). 조선 (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남부원(南副遠) ()는 보여(輔汝).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남지훈(南至熏) ()는 훈숙(熏叔). 조선조(朝鮮朝)에 승지(承旨)를 지냈다.

남한명(南漢明) ()는 득장(得章).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내고, 글씨에 뛰어나 충장(忠壯) 이흥(以興)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썼다.

남취명(南就明) ()는 계량(季良). ()는 이정(梨亭). 조선(朝鮮)때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하였다.

남선(南 銑) 1582 (선조 15) 1654 (효종 5)

()는 택지(澤之), 호는 회곡(晦谷)․대몽(大夢), 시호는 정민(貞敏), 무주 현감(茂朱縣監) 복시(復始)의 아들. 1606(선조 3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관직을 단념, 용인(龍仁)에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태릉 참봉(泰陵參 奉)․고산 현감(高山縣監) 등을 지내고 1629(인조 7)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을 거쳐 안악 군수(安岳郡守)가 되었다.

1632(인조 10)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승진, 이듬해 황해도․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거쳐 함경남도 병마절도사(咸鏡南道兵馬節度使), 1641년 동부승지(同副承旨), 이듬해 전라도․강원도의 관찰사를 거쳐 1645년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좌부승지(左副承旨), 1648년 도승지(道承旨), 1649(인조27)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 1652년 형조․예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1654년 우빈객(右賓客)․우참찬(右參贊) 및 이조․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많은 지방 관직을 역임하는 동안 선정(善政)을 베풀어 가는곳마다 그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남해준(南海準) 1598 (선조 31) 1667 (현종 8)

자는 효재(孝哉), 호는 신촌(新村), 판결사(判決使) 세우(世佑)의 증손. 이 시의 문인. ()․한() 시대의 고문(古文)을 탐독, 박학하 기로 이름이 높았다. 스승이 시의 아우 이 강(李 茳)은 광해군의 총신(寵臣)으로 그 집안이 모두 벼슬을 구하자 스승과 절교, 학문에 전심했다.

남천한(南天漢) 1603 (선조 36) 1667 (현종 8)

자는 장우(章宇), 호는 고암(孤巖). 1630(인조 8)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46(인조 2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간원(司諫院)․사헌부(司憲府)의 요직을 지내고 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남노성(南老星) 1603 (선조 36) 1667 (현종 8)

자는 명서(明瑞), 호는 운곡(雲谷), 참의(參議) 언경(彦經)의 증손. 1631(인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163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조 정랑(吏曹正郞)․문학(文學)․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해학(諧謔)을 즐겨 익살을 잘 부렸다.

남선(南 銑) 1609 (광해군 1) 1656 (효종7)

자는 백원(伯園), 호는 창명(滄溟), 163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41년 정언(正言)이 되고 이듬해 지제교(知製敎), 이어 부수찬(副修撰)․동부 승지(同副承旨), 1651(효종 2)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승지(承旨), 1655년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남이성(南二星) 1625 (인조 3) 1683 (숙종 9)

자는 중휘(仲輝), 호는 의졸(宜拙), 시호는 장간(章簡), 현감(縣監) ()의 아들. 1657(효종 8)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62(현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75(숙종 1)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라 1675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부처(付處)되자 그를 변호하다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

1678(숙종 4) 풀려나와 좌부승지(左副承旨)․부제학(副提學)을 역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와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문장에 능했으며, 앞서 1669년 송준길(宋浚吉)과 함께「어록해(語錄解)」를 증보(增補), 간행했다.

남용익(南龍翼) 1628 (인조 6) 1692 (숙종 18)

자는 운경(雲卿), 호는 호곡(壺谷), 시호는 문헌(文憲), 부사(府使) 득붕(得朋)의 아들. 1646(인조 24) 진사(進士)가 되고, 164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효종(孝宗) 3()의 여러벼슬을 지냈다.

1655(효종 6) 통신사(通信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본에 다녀와 사가독서(賜暇牘書)하고, 1656년 문과중시에 장원, 좌참찬(左參贊)․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거쳐 1683(숙종 9)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되고, 1687년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이어 이조 판서(吏曹 判書)가 되었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명천(明川)에 유배,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에 뛰어났다.

남구만(南九萬) 1629 (인조 7) 1711 (숙종 37)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미재(美齋), 시호는 문충(文忠), 현령(縣令) 일성(日星)의 아들. 송준길(宋浚吉)의 문인. 1651(효종 2)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6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정언(正言), 1660(현종 1) 이조 정랑(吏曹正郞), 이어 집의(執義)․응교(應敎), 대사간․승지를 거쳐 1668년 안변부사(安邊府使)․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고, 1674(현종 15) 함경도 관찰사로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변경 수비를 튼튼히 하였다.

숙종(肅宗) 초 대사성(大司成)․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1679년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지내고 서인(西人)으로서 윤 휴․허견 등 남인(南人)을 탄핵하다가 남해(南海)로 유배되고, 이듬해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도승지(都承旨)․부제학(副提學)․대제학(大提學)․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했다.

1683년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폐사군(廢四郡)의 복치(復置)를 주장하여 무창(茂昌)․자성(慈城) 등의 2군을 설치했다. 이때 서인(西人)이 노소론(老少論)으로 분열되자 소론의 영수가 되었으며, 1684년에 우의정(右議政), 이듬해 좌의정(左議政), 1687년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득세하자 강릉(江陵)에 유배, 1694(숙종20)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고, 1696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1701년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처벌에 대해 중형(重刑)을 주장하는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赫) 등 노론의 주장에 맞서 경형(輕刑)을 주장하다가 숙종이 희빈장씨의 사사(賜死)를 결정하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그 후 부처(付處)․파직 등 파란을 겪다가 서용(敍用), 1707(숙종 33) 치사(致仕)하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문사(文祠)․서화(書畵)에도 뛰어났으며, 시조「동창이 밝았느냐」가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전한다. 숙종 묘정(廟廷)에 배향(配享), 강릉(江陵)의 신석서원(申石書院), 종성(鍾城)의 종산서원(鍾山書院), 무산(茂山)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남극표(南極杓) 1639 (인조 17) 1701 (숙종 27)

자는 명세(明世), 창하(昌夏)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60(현종 1)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정국의 혼란으로 벼슬을 단념하고 있다가 1694(숙종 20) 인현왕후(仁顯王后) 복위 후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장녕전 참봉(長寧殿參奉)을 거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남익훈(南益熏) 1640 (인조 18) 1693 (숙종 19)

자는 훈중(熏仲), 호는 파은(坡隱), 관찰사 선의 아들. 1672(현종 1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사관(史官)이 되었다가 설서(說書)․검열(檢閱)을 역임,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경상도와 함경도의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고대소설「옥루몽(玉樓夢)」의 작자라는 설이 있다.

남계하(南啓夏) 1643 (인조 21) 1705 (숙종 31)

자는 자장(子長), 호는 은계옹(隱溪翁) 진위장군(振威將軍) 문성(文星)의 아들. 윤원거(尹元擧)의 문인, 윤 증(尹 拯)에게 가례(家禮)를 배우고, 천거로 선공 감역(繕工監役)에 보직, 후에 내섬시 주부(內贍 寺主簿)․활인서 별제(活人署別提)․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역임, 청하 현감(淸河縣監)에 이르렀다.

남상하(南相夏) ()는 중보(仲輔). 조선 때 보덕(補德)을 지냈다.

남두북(南斗北) 조선(朝鮮) 때 무과(武科)에급제하여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고보사공신(保社功臣)으로 의풍군(宜豊君)에봉()해졌다.

남치훈(南致熏) 1645 (인조 23) ?

자는 훈연(熏然), 호는 지산(芝山), 참판(參判) 익훈(益熏)의 동생. 1678(숙종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3()의 여러 벼슬과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역임하고 도승지(都承旨)를 거쳐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소론(小論)으로 앞서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세자 책봉이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한 송시열(宋時烈)을 탄핵, 그를 몰아내는 데 협조했다.

남서(南 恕) 자는 여급(汝及). 조선 (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남국경(南國經) 자는 성중(誠仲), 호는 고송(孤松). 조선 때 좌윤(左尹)을 지냈다.

남정중(南正重) 1653 (효종 4) 1704 (숙종 30)

자는 백진(伯珍), 호는 기봉(基峰), 판서(判書) 용익(龍翼)의 아들. 1681(숙종 7)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내시 교관(內侍敎官)․사도시 주부․호조좌랑(戶曹佐郞)을 역임, 포천 현감(抱川縣監)에 올라 1689(숙종 1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 다. 이해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파직,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인형왕후(仁顯王后)가 복위되자 기용되어 지평(持平)․수찬(修撰)․교리(敎理)응교(應敎)를 역임, 이어 헌납(獻納)․사간(司諫)을 지내고 이조 정랑(吏曹正郞)․보덕(輔德)을 거쳐 부모의 봉양을 위해 양양현감(襄陽縣監)으로 나갔다.

1700년 동부승지(同副承旨)․공조 참의(工曹參議)․삼척부사(三陟府使)․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지내고, 이듬해 광주 부윤(廣州府尹)이 되어 기사환국이 있던 해에 과거에 응했다는 탄핵을 받고 사직, 후에 대사헌(大司憲)으로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 문장에도 능했다.

남한기(南漢紀) 1675 (숙종 1) 1746 (영조 22)

자는 국보(國寶), 호는 기옹(寄翁), 관찰사 정중(正重)의 아들. 1710(숙종 36)에진사(進士)사 되고, 1712년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보직, 여러 벼슬을 거쳐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영평 현감(永平縣監)․익찬(翊贊)을 거쳐 1744(영조 20) 아들의 추은(推恩)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승진, 이어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總管) 등을 역임했다.

남하정(南夏正) 1678 (숙종 4) 1751 (영조 27)

자는 시백(時伯), 호는 동소(桐巢), 진사(進士) 수교(壽喬)의 아들. 공주(公州) 출신. 일찌기 고아가 되어 학문에 전심,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하고 문장도 뛰어났다. 1714(숙종 40)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진위(振威)의 동천(桐泉)에서 후진 양성으로 일생을 보냈다.

남태혁(南泰赫) ()는 여휘(汝揮).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남태온(南泰溫) 1691 (숙종 17) 1755 (영조 31)

자는 치화(稚和), 진사(進士) 효명(孝明)의 아들. 1714(숙종 40) 생원(生員)이 되고, 1728(영조 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사관(史官)에 기용되고,이듬해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경종실록(景宗實錄)」편찬에 참여하고, 1730년「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했다.

이 해 당파싸움한 죄로 삭직(削職), 후에등용되어 1734년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여러 청환직(淸宦織)을 거쳐 1745년 대사간(大司諫)에 오르고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 만년까지 대사간과 승지(承旨)를 수차 역임했다.

남태징(南泰徵) ? 1728 (영조 4)

숙종(肅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 공주영장(公州營將)을 지내고 경종(景宗)이 즉위하자 소론(小論)에 가담,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금군 별장(禁軍別將)․평안도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통제사(統制使) 등을 지냈다.

1724(경종 4) 한때 파직되었으나 1727(영조 3)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小論)이 재등용되자 다시 금위장(禁衛將)에 기용되어 이인좌(李麟佐)․정희량(鄭希良) 등과 공모, 반란을 일으켜 서울에서 호응했으나 실패, 참형(斬刑)을 당했다.

남유상(南有常) 1696 (숙종 22) 1774 (영조 50)

자는 길재(吉哉), 호는 태화자(太華子), 대제학 용익(用翼)의 증손, 동지돈령부사 (同知敦寧府使) 한기(漢紀)의 아들. 1713(숙종 39) 진사(進士)가 되고 1727(영조3)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사부(師傅)로 천거되었다.

이 해「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춘추관 기사관 (春秋館記事官)이 되어「숙종실록(肅宗實錄)」편찬에 참여, 이어 수찬(修撰)․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내고 1728년 소론(小論)의 영수이광좌(李光佐)를 논척(論斥)하다 당론을 일으킨 자라하여 영암(靈巖)으로 유배, 곧 풀려나왔다. 글씨를 잘 썼다.

남유용(南有容) 1698 (숙종 24) 1773 (영조 49)

자는 덕재(德哉), 호는 뇌연(雷淵)․소화(小華), 시호는 문청(文淸), 대제학 용익(大提學用翼)의 증손,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한기(漢紀)의 아들. 이 재(李 縡)의 문인. 1721(경종 1) 진사(進士)가 되고, 강릉 참봉(康陵參奉)․세작익위사시직(世子翊衛司侍直)․영춘현감(永春縣監)을지낸 후 1740(영조 16)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이어 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된 뒤 오랫동안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에 있다가 1746(영조 22) 승지(承旨), 17509년 대제학(大提學)․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1754년 원손 보양관(元孫輔養官), 이듬해「천의리편(闡義理編)」찬집당상(纂輯堂上)을 겸직,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좌부빈객(左副賓客)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이되어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을 지냈다.

1757년 원손 사부(元孫師傅)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 1764년 우빈객(右賓客)이 되고, 1767년 치사(致仕)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문장과 시에 뛰어났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남태기(南泰耆) 1699 (숙종 25) 1776 (영조 52)

자는 낙수, 호는 죽리(竹裏), 시호는 정희(靖僖),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근명(近明)의 아들. 백부(伯父) 달명(達明)에게 입양(入養). 1732(영조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지내고 1747(영조 23) 승지(承旨)로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왔다.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러 사퇴, 고향에 돌아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문장이 뛰어나고 글씨에도 능했다.

남태제(南泰齊) 1699 (숙종 25) 1766 (영조 52)

자는 원진(元鎭)․관보(觀甫), 호는 담정(澹亭)․학야(鶴野), 시호는 청헌(淸獻), 참판(參判) 치훈(致熏)의 손자. 1723(경조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727(영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숙종실록(肅宗實錄)」편찬에 참여, 그후 정언(正言)에 올라 영의정(領議 政) 심수현(沈壽賢)을 탄핵하다가 진도 군수(珍島郡守)에 좌천되었으나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다시 중앙 요직으로 기용된 후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에들어갔다. 문장이 뛰어나고 시서(詩書)와 제자백가(諸子百家)에 통달했다.

남태회(南泰會) ()는 매옥(梅屋), 시호(諡號)는 헌민(獻敏).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과 정헌(正憲)을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남태저(南泰著) ()는 공회(公晦). 조선(朝鮮) 때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를 거쳐 양사관장(兩司館長)으로 치사(致仕)하였다.

남태량(南泰良) ()는 유능(幼能), ()는 광릉거사(廣陵居士). 조선 때 제학(提學)을 지냈다.

남혜로(南惠老) ()는 사양(士養). 조선조(朝鮮朝)에 보덕(輔德)을 지냈다.

남운로(南雲老) ()는 공서(公瑞). 조선 때 보덕(輔德)을 지냈다.

남덕로(南德老) ()는 기경(耆卿), ()는 이은(里隱). 조선(朝鮮)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남기로(南綺老) ()는 언호(彦皓), 호는 기포(杞圃). 조선에서 교리(敎理)를 역임했다.

남주로(南柱老) ()는 중례(仲禮).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남현로(南玄老) ()는 동보(同甫). 조선(朝鮮)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옥당(玉堂)과 삼사(三司)․승지(承旨)를 거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지내고,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남인로(南寅老) ()는 중빈(仲賓). 조선 때 진사시(進仕試)에 합격, 진주(晋州)․황주(黃州)․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지내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하였다.

남이익(南履翼) 시호(諡號)는 효정(孝貞).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강원도(江原道)․함경도(咸鏡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남명학(南溟學) 1731 (영조 7) 1798 (정조 22)

자는 성원(聖源), 오룡재(五龍齋). 함북 종성(鍾城) 출신. 한몽린(韓夢麟)의 문인. 20세 때 진사(進士)가 되고 참봉(參奉)․첨정(僉正)을거쳐 정조(正祖) 때 충청도의 지방관을 지냈으며,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이르렀다.

남공철(南公轍) 1760 (영조 36) 1840 (헌종 6)

자는 원평(元平), 호는 사영․금릉(金陵), 시호는 문헌(文獻), 대제학(大提學) 유용(有容)의 아들. 경전(經典)을 널리 연구, ()․당()․송()의 여러 글을 읽구 구양수(歐陽修)의 글을 숭상했다.

1784(정조 8) 음보(蔭補)로 세마(洗馬)에 등용, 산청(山淸)․임실(任實)의 현감(縣監)을 지내고 1792(정조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1800(정조 24)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 1807년 동지사(冬至使), 이듬해 이조 판서(吏曹判書), 1811년 원자 좌유선(元子左諭善), 1814년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 이어 예조 판서(禮曹判書), 1817년우의정(右議政), 1821년 좌의정(左議政), 1823년 영의정(領議政), 183 3(순조 33)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서 시와 글씨에도 뛰어나 많은 금석문(金石文)과 비갈(碑碣)을 썼다. 순조(純祖) 때 전사자(全史字)란 동활자(銅活字)를 만들었다. 순조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남석하(南錫河) ()는 의서(義瑞).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남치원(南致源) ()는 봉재(鳳哉).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남상기(南相虁) ()는 여극(汝極).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남승우(南承祐) ()는 무경(武敬).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남만회(南萬會) ()는 명원(明遠). 학문(學問)을 독구(篤究)하였고 부모(父母)에게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가 전염병(傳染病)으로 죽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서 피했으나 혼자서 염습부관(殮襲祔棺)의 절차(節次)를 예()에 따라 마치고 몸이 쇠약(衰弱)해질 지경에 이르도록 주야(晝夜) 호곡(號哭)하였으나, ()이 전염(傳染)되지 않으니 마을 사람들이 다 효성(孝誠)의 소치(所致)라고 칭찬하였다.

그 후 고운사(孤雲寺)로 들어가 주역(周易)을 읽고 정명도(程明道)와 정이천(程伊川)의 정성서(定性書), 그리고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와 이 황(李 滉)의 성학도(聖學圖)를 탐독(耽讀)하여 잠심복응(潛心服應)의 자료(資料)를 삼았다.

남주헌(南周獻) 1769 (영조 45) 1821 (순조 21)

자는 문보(文甫), 호는 의재(宜齋),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 인구(麟耈)의 아들. 1798(정조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세마(洗馬), 호조 좌랑(戶曹佐郞)․감찰(監察)을 거쳐 함양(咸陽)․무주(戊朱)․남원(南原)․임천(林川) 등 여러 고을을 다스리고, 1814(순조 14) 정시문과(廷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사간원(司諫原)․사헌부(司憲府)․홍문관(弘文館)․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여러요직을 역임, 형조 참의(刑曹參議)에 올랐다가 승지(承旨)를 거쳐 춘천 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