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정나씨시조(安定羅氏),나천서(羅天瑞),안정나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1 15:15 수정일 : 2018-03-05 15:0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금성나씨(錦城羅氏)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전하는 안정나씨(安定羅氏)는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나총례(羅聰禮)의 10세손으로 고려(高麗) 때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지낸 나윤(羅允 : 일명 인)의 둘째 아들인 나천서(羅天瑞)가 공민왕(恭愍王)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으며 송참진(松站鎭)을 진무한 공(功)으로 안정백(安定伯)에 봉해지고 안정(安定)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관향(貫響)을 안정(安定)으로 삼게 되었다.

안정(安定)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의성군(義城郡) 비안면(比安面)의 옛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시대에 아시혜(阿尸兮) 또는 아을혜(阿乙兮)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안현(安賢)으로 고쳤으며 고려조(高麗朝)에 와서 안정현(安定縣)으로 개칭하였다. 조선(朝鮮) 세종조(世宗朝)에 안비현(安比縣)으로 하였다가 그후 비안현(比安縣)으로 고쳤다.

안정 나씨(安定羅氏)는 시조(始祖) 천서(天瑞)의 현손(玄孫) 유선(裕善)이 아들 33형제를 낳아 가문이 번성했는데,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지낸 맏아들 계종(繼宗)이 참군공파(參軍公派)로, 청산 현감(靑山縣監)을 지낸 차남 연종(連宗)의 후손에서는 호군공파로 분적(分籍)되었으며 막내아들로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사종의 후손에서는 경흥공파(慶興公派)를 이루었다.


대표적인 인물

조선조(朝鮮朝)에서 영남내륙(嶺南內陸)의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일컬어졌던 안정나씨는 시조 천서(天瑞)의 7세손 계공랑(啓功郞) 세걸(世傑)의 아들 대(代)에서 크게 명성을 떨쳤다.

세걸의 둘째 아들인 식(湜)은 당대의 석학(碩學) 조광조(趙光祖)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능참봉(陵參奉)이 되었으나 명종(明宗)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윤 임(尹 任)의 일파로 강계(江界)에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특히 그는

학행(學行)으로 팔도에 명망이 높았고 사사당할 때 태연하게 죽음에 임하는 태도를 지켜본 금부도사도 그의 인품을 칭찬했다.

그의 아우 숙도 중종조(中宗朝)에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부제학(副提學)에 올랐으나 왕실외척으로 전횡을 일삼던 윤원로(尹元老)를 탄핵하다 을사사화 때 형인 식(湜)과 함께 강계(江界)로 유배되어 죽음을 당했다.

천재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명성을 떨쳤던 익(瀷)은 숙의 아우로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서 탄핵당했다.

익(瀷)의 손자(孫子) 급(級 : 성균관 학유 윤침의 아들)은 선조조(宣祖祖)의 명관(名官)으로 많은 치적과 일화를 남겼으며, 그의 아들 만갑(萬甲)은 인조조(仁祖朝)의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다.

한편 목사(牧使) 성두(星斗 : 만갑의 아들)의 아들 양좌(良佐)가 학자(學者) 윤선거(尹宣擧)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숙종(肅宗) 때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홍좌(弘佐)는 어영대장(禦營大將)을 역임하며 장임(將任)의 거두(巨頭)로 일컬어졌다.

영조(英祖)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충사(忠仕)는 장령(掌令)을 거쳐 승지(承旨)에 이르렀으며, 익위(翊衛) 삼(蔘)의 아들 열(烈)은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내고 시(詩)와 글씨에 뛰어나 아우 걸(杰)과 함께 명성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정나씨(安定羅氏)는 남한(南韓)에 7,3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曆代人物)-안정나씨조상인물

나직경(羅直卿) 고려조(高麗朝)에 승봉랑(承奉郞)에 올랐다.

나 혼(羅 暉) 고려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보성 군수(寶城郡守)를 지냈다.

나경손(羅慶孫) 고려 때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죽산 현감(竹山縣監)을 지냈다.

나유선(羅裕善) 고려에서 명경과(明經科)에 급제,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다.

나계종(羅繼宗) 조선조(朝鮮朝)에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역임했다.

나연종(羅連宗) 자(字)는 중소(仲紹). 조선 때 청산 현감(靑山縣監)을 역임하였다.

나사종(羅嗣宗) 자(字)는 광체(光逮), 호(號)는 퇴수헌(退修軒). 조선조(朝鮮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나세걸(羅世傑) 자는 언지(彦之). 조선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다.

나원걸(羅元傑)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나문걸(羅文傑) 자(字)는 계준. 조선조(朝鮮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청산 현감(靑山縣監)을 역임하였다.

나도걸(羅道傑)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나운걸(羅云傑) 조선(朝鮮)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나식(羅 湜) ? ~ 1546 (명종 1)

자(字)는 정원(正源), 호(號)는 장음정(長吟亭), 참봉(參奉) 세걸(世傑)의 아들. 조광조(趙光祖)․김굉필(金宏弼)의 문인. 음보(蔭補)로 능참봉(陵參奉)이 되었다가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임(尹任)의 일파로서 파직, 흥양(興陽)에 유배되고, 이듬해 강계(疆界)에 위리안치 (圍籬安置)된 뒤 사사(賜死)되었다.

1568년(선조 1) 영의정(領議政) 이준경 (李俊慶)의 상소로 신원(伸寃)되었다.

나숙(羅 淑) ? ~ 1546 (명종 1)

자(字)는 선원(善源), 참봉(參奉) 세걸(世傑)의 아들. 1524년(중종 1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고 1538년(중종 33) 정언(正言) 등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역임, 1544년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45년(인종 1) 외척 윤원로(尹元老)의 전횡(專橫)을 탄핵, 유배케 했으나, 이해 윤원형(尹元衡) 등이 일으킨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흥양(興陽)에 유배, 이듬해 강계(江界)에 안치(安置), 사사(賜死)되었다가 선조 때 신원(伸寃)되었다.

나익(羅 瀷) 자(字)는 명원(明源). 조선 (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나윤(羅 潤) 자(字)는 호원(浩源). 조선 때 창성 부사(昌城府使)를 역임했다.

나부(羅 溥) 조선조(朝鮮朝)에 충무위 부사직(忠武衛副司直)을 지냈다.

나흡(羅 洽)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나빈(羅 濱) 자(字)는 언청(彦淸).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나윤지(羅允智) 조선(朝鮮)에서 현감(縣監)을지냈다.

나윤침(羅允忱) 자(字)는 언부(彦孚). 조선 때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를 지냈다.

나경신(羅敬身) 자(字)는 사성(士誠). 조선 때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다.

나윤복(羅允福)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충좌위 부사직(忠佐衛副司直)을 지냈다.

나윤달(羅允達) 자(字)는 여고(汝固). 조선에서 온릉 참봉(溫陵參奉)을 지냈다.

나 굉(羅 宏) 자(字)는 사원(士元).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나 진(羅 糸晋) 조선조(朝鮮朝)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나급(羅 級) 1552 (명종 7) ~ ?

자(字)는 자승(子升), 호(號)는 후곡(後谷), 학유(學諭) 윤침(允忱)의 아들.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천거(薦擧)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지내다가 1585년(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상의원 직장(尙衣院直長)․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병조 좌랑(兵曹佐郞) 등을 역임했다.

나위(羅 緯) 자는 찬오(粲五).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나응철(羅應哲) 자(字)는 호선(好善). 조선에서 예빈시 직장(禮賓寺)을 역임했다.

나선흥(羅善興) 자(字)는 경중(慶仲). 조선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나필흥(羅必興) 자(字)는 성중(成仲). 조선때부안 현감(扶安縣監)을 역임하였다.

나수흥(羅秀興) 자(字)는 사의(士義). 조선조(朝鮮朝)에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을 역임하였다.

나성규(羅星奎) 자(字)는 경명(景明).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나양좌(羅良佐) 1638 (인조 16) ~ 1710 (숙종 36)

자(字)는 현도(顯道), 호(號)는 명촌(明 村). 목사(牧使) 성두(星斗)의 아들. 윤선거(尹宣擧)의 문인. 송준길(宋俊吉)의 천거(薦擧)로 희릉 참봉(禧陵參奉)․동몽교관(童夢敎官)․상의원 주부(尙衣院主簿) 등에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다.

1683년(숙종 9) 평강 현감(平康縣監)을 잠시 지내고 사직, 1685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충청도 도사(忠淸道都事)․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삭령 군수(朔寧郡守)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 1687년 윤선거의 누명을 벗기력고 상소했다가 영변(寧邊)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었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에 자형(姊兄) 김수항(金壽恒), 매제(妹弟) 이사명(李師命)이 극형을 당하자 천리길을 달려가 이사명(李師命)의 상을 치르고 돌아왔다. 1706년(숙종 32) 처음으로 장령(掌令)을 지냈다.

나홍좌(羅弘佐) 조선(朝鮮) 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지냈다.

나충좌(羅忠佐) 자(字)는 양필(良弼). 1750년(영조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을 거쳐 승지(承旨)를 지냈다.

나열(羅 烈) 1731 (영조 7) ~ 1803 (순조 3)

자(字)는 자회(子晦), 호(號)는 주계(朱溪)․해양(海陽), 만갑(萬甲)의 5대손, 익위(翊衛) 삼(蔘)의 아들. 1753년(영조 29) 진사(進士)가 되고, 헌릉참봉(獻陵參奉)․익위(翊衛) 등을 역임,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산수(山水)를 즐기고 시(詩)는 두 보(杜 甫)를,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따랐고, 시와 글씨에 뛰어나 아우 걸(杰)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