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화개김씨시조(花開金氏),김인황(金仁璜),화개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0 21:44 수정일 : 2020-04-22 15:35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화개 김씨(花開金氏)는 고려(高麗) 원종조(元宗朝)에 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화개위(花開尉)에 봉해진 김인황(金仁璜)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후 경남 고성(慶南固城) 지방에 세거(世居)하던 후손들이 처음에 관향(貫鄕)을 진양(晉陽)으로 사용해 왔고, 하동(河東)과 개성(開城) 지방에 살던 후손들은 화개(花開)로 칭관(稱貫)했으나 1876년(고종 13) 보첩(譜牒)을 처음 만들면서 본관(本貫)을 화개(花開)로 통일(統一)하였다.

화개(花開)는 경상남도(慶尙南道) 하동군(河東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고대(古代)의 합포(陜浦)를 승수(僧首)라 부르다가 후에 화개부곡(花開部曲)으로 바꾸었으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화개현(花開縣)으로 고쳐 하동군(河東郡)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高麗) 때 와서는 현종(顯宗)이 진주(晉州)에 속하게 하였고, 조선(朝鮮) 숙종(肅宗) 때 하동군(河東郡)에 합쳐져서 화개면(花開面)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대표하는 인물(人物)로는 인황(仁璜)의 아들 병수(秉洙)가 고려(高麗) 때 예의 판서(禮義判書)를 역임했고, 손자(孫子) 태문(泰文 : 병수의 아들)은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라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으며, 시조의 증손(曾孫)인 규진(奎震)은 고려말(高麗末)에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47명의 무사(武士)와 함께 보봉산(寶鳳山)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영조(英組)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행일(行一 : 오위장 우보의 아들)이 흥덕 현감(興德縣監)과 오위자(五衛將)을 겨쳐 1758 년(영조 34)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고, 그의 아우 연일(鍊一)과 진일(振一)은 통덕랑(通德郞)에 올라 가문을 일으켰다.

한말(韓末)에 학문(學門)으로 명성을 떨친 택영(澤營)은 을사조약(乙巳條約)으로 중국(中國)에 망명하여 통주(通州)에서 학문(學問)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특히 그는 고시(古詩)에 뛰어났으며 저서(著書)로 남긴「한국소사(韓國小史)」와「한사계(韓史綮)」등은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화개김씨는 남한에 565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화개김씨조상인물

김병수(金秉洙) 자(字)는 응려(應麗). 고려조에 예의 판서(禮義判書)를 지냈다.

김태문(金泰文) 자(字)는 경장(敬章).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김규진(金奎震) 자(字)는 성칠(星七). 음보(蔭補)로 벼슬이 군기소윤(軍器少尹)이 되 었다. 고려(高麗)가 망(亡)하자 무사(武士) 47명과 함께 보봉산(寶鳳山)으로 들어가 절의를 지키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김 훈(金 勳) 자(字)는 공단(功端). 호(號)는 매헌(梅軒). 조선(朝鮮)때 태자첨사(太子詹事)를 지냈다.

김광식(金光植) 자(字)는 지언(枝焉), 호(號)는 송암(松巖). 조선조에 명망있는 학자(學者)로 널리 알려졌다.

김구의(金求義) 자(字)는 효여(孝汝). 조선에서 통사랑(通仕郞)에 이르렀다.

김여생(金麗生) 자(字)는 여원(麗元). 조선때 진사(進士)였다.

김화적(金和積) 자(字)는 성간(聖看). 조선(朝鮮)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겸소(金兼素) 자(字)는 자익(子益).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덕원(金德源) 자(字)는 기윤(奇允). 조선조에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하였다.

김우보(金禹寶) 자는 욱재(郁哉). 조선에서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행일(金行一) 자(字)는 군범(君範). 1728년(영조 4) 무과(武科)에 급제, 인의(仁義)에 기용되었다. 그후 청단찰방(靑丹察訪)을 거쳐 1743년 주부(主簿)를 지내고 흥덕 현감(興德縣監)으로 전직되었다. 1753년 오위장(五衛將)에 승진, 1758년 희천 군수(熙川郡守)를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베풀어 유애비(遺愛碑)가 세워졌다.

김연일(金鍊一) 자(字)는 군칠(君七).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진일(金振一) 자(字)는 군대(君大).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종감(金宗鑑) 자는 자명(子明).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신영(金信榮) 조선조(朝鮮朝)에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을 역임하였다.

김택영(金澤榮) 한말(韓末)에 내각사적과장(內閣史籍課長)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