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함창김씨시조(咸昌金氏),고령가야왕(古寧伽倻王),김종제(金宗悌),함창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0 20:40 수정일 : 2018-04-12 13:40

함창김씨 시조

함창김씨(咸昌金氏)는 서기 41년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峯)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과 함께 금합(金盒)에서 태어난 고령가야왕(古寧伽倻王)의 후손이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를 알 수 없어 덕원군(德原君) 김종제(金宗悌)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선산군(宣山君) 세순(世珣)과 검교소감(檢校少監) 내(匂)를 각각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잇고 있다.


본관의 유래

함창(咸昌)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상주군(尙州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고대(古代)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인데 신라초(新羅初)에 고동람(古冬攬) 또는 고릉군(古陵郡)으로 불리웠고, 경덕왕(景德王)이 고령군(古寧郡)으로 고쳤다가 고려(高麗) 광종(光宗) 때 함녕군(咸寧郡)으로 고쳐 1018년(현종 9) 상주(尙州)에 속하게 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태종(太宗)이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며 뒤에 상주군(尙州郡)에 합해졌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의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고려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지(砥 : 세순의 증손)와 이부상서(吏部尙書) 효안(孝安), 형부상서(刑部尙書) 효신(孝信) 형제가 뛰어났다. 찬성사(贊成事) 택(澤)의 아들 요(饒)는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명성을 떨쳤고,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는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함녕군(咸寧君)에 봉해짐으로서 가문(家門)을 크게 중흥시켰다.

한편 중서(重瑞)의 아들 이음(爾音)은 조선이 개국된 후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를 역임했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세웠다.

그외 조선 선조(宣祖) 때 학문(學門)으로 이름을 떨쳤던 융(隆)은 일찍이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산법(算法)과 천문(天文)에 일가를 이루었고, 임진왜란 때는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렸다. 숙종(肅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시빈(始鑌)은 명천 군수(明川郡守)를 거쳐 울산 부사(蔚山府使)로 나가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다가 순절하여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다.


함창김씨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함창김씨(咸昌金氏)는 남한(南韓)에 , 28,34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 -함창김씨조상인물

김내(金 匂) 고려(高麗) 때 검교소감(檢校少監)․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김지(金 砥) 고려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김효안(金孝安) 고려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김효신(金孝信) 고려조(高麗朝)에 형부상서(刑部尙書)를 역임하였다.

김택(金 澤) 자헌대부(資憲大夫) 사조(思祖)의 아들. 고려 때 진사(進士)로 광정대부(匡正大夫)․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추증 되었다.

김요(金 饒) 찬성사(贊成事) 택(澤)의 아들. 1358년(고려 공민왕 7)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으며 문장(文章)과 절행(節行)으로 유명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함녕군(咸寧君)에 봉해졌다.

김찬(金 饌) 장령(掌令) 준(浚)의 아들. 고려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경고(金鏡高) 고려 때 예빈동정(禮賓同正)에 올랐다.

김유양(金有讓) 고려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지냈다.

김유석(金有錫) 고려조(高麗朝)에 문과에 급제하고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유양(金有目易) 고려 때 하동 현감(河東縣監)을 지냈다.

김만(金 鏋) 고려(高麗)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김중정(金中正) 어사(御使) 만(鏋)의 아들. 고려조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를 역임하였다.

김이음(金爾音) ? ~ 1409 (태종 9)

자(字)는 백옥(伯玉).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조선 왕조에 들어와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에 이르렀다. 효행(孝行)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김선(金 瑄) 자(字)는 우현(遇賢). 1468년(세조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강원 감사(江原監司)로서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4등공신(靖國四等功臣)에 책록되고 함원군(咸原君)에 봉해졌다. 함창김씨일파(咸昌金氏一派)의 파조(派祖).

김융(金 隆) 1525 (중종 20) ~ 1594 (선조 27)

자(字)는 도성(道盛), 호(號)는 물암(勿巖). 18세 때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중용(中庸)․대학(大學)을 연구했고, 산법(算法)과 천문학(天文學)에도 조예가 깊어 스승의 격찬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격문을 지어 여러 고을에 돌리고 이듬해에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이 되었다.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 영천(榮川)의 삼봉서원(三峯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김시빈(金始鑌) 1684 (숙종 10) ~ 1729 (영조 5)

자(字)는 휴백(休伯), 호(號)는 백남(白南), 통덕랑(通德郞) 정휘(鼎輝)의 아들. 영천(榮川) 출신.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1702년(숙종 28)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필선(弼善) 등을 지내고 장령(掌令)에 이르러 설화(舌禍)로 명천 군수(明川郡守)에 좌천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뽑혀 요충지인 울산(蔚山)의 부사(府使)로 나가 임지에서 죽었다.

김규오(金奎五) 1729 (영조 5) ~ 1789 (정조 13)

자(字)는 경휴(景休), 호(號)는 최와(最窩). 윤봉구(尹鳳九)의 문인. 1774년(영조 50)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한평생 공부에만 전심, 만년에는 경서(經書)로써 여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