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풍산김씨시조(豊山金氏),김문적(金文迪),풍산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30 17:39 수정일 : 2018-02-24 13:28

시 조

풍산김씨시조(豊山金氏 始祖) 김문적(金文迪)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네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1세손으로, 풍산현(豊山現)에 살면서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을 하여 나라에 공(公)을 세우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록되어 판사사(判司事 : 밀직사의 종2품 으뜸 벼슬)에 올라 풍산백(豊山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기일세(起一世)하여 관향(貫鄕)을 풍산(豊山)으로 삼게 되었다.


본관의 유래

풍산(豊山)은 경상북도 북동(北東)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 신라(新羅)의 하지현(下枝縣)이었는데 영안(永安)으로 고쳐 부르다가 서기 923년(고려 태조6)에 순주(順州)로 하였고, 뒤에 풍산(豊山)으로 한 후 안동부(安東府)에 포함시켰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에서 빼어난 인물(人物)로는 참판(參判) 휘손(徽孫)의 아들 양진(楊振)이 정효항(鄭孝恒)의 문하에서 학문(學問)을 배우고, 1497년(연산군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부수찬(副修饌)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이 모비(母妃) 능묘(陵廟)의 호(號)를 추존하려하자 이를 반대하다가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그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 조랑(刑措佐郞)․이조참판(梨棗參判)을 지내고, 경주부윤(慶州府尹)․전라도(全羅道)․황해도관찰사(黃海道 觀察使)로 나갔다가 돌아와 대사간(大司諫 : 간쟁과 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정3품 으뜸 벼슬)을 거쳐 동지돈령부사(同知惇岺府事)에 올랐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청빈한 관리로서 뒤에 안동(安東)의 물계서원(勿溪書員)에 제향(祭享)되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순정(純情)의 아들 진(鎭)은 1549년 (명종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를 시작으로 관직에 나가 수찬(修饌)․이조좌랑(吏曹佐郞)등을 거치고, 종 1품의 관계(官階)인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라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통례원 좌통례(通禮原 左通禮)등을 지냈으며, 첨정(僉正) 의정(義貞)의 손자(孫子) 대현(大賢)은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성 혼(成 渾)의 문하에서 글을 일고 선조(先祖)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후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향병(鄕兵)을 모아 안집사(安集使) 김늑(金 肋)의 휘하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5년(선조28) 학문과 덕행(德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과 현감(縣監)을 지냈다.

한편 진(鎭)의 아들 수현(壽賢)은 1602년(선조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광해군(光海君)때 정주목사(汀洲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당상관에 오르고, 승지(承指)와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후, 이조(吏曹)와 예조(禮曺)의 참판(參判)을 거쳐 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그의 아들 7형제중 맏아들 봉조(奉祖), 둘째 영조(榮祖), 넷째 경조(慶祖), 여섯째 응조(應祖)가 유명했는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봉조(奉祖)는 1613년(광해군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항 전적(全積)․감찰(監察)․지평(持平)등을 거쳐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올랐으며, 아우 영조(榮祖)와 함께 영남지방에서 문명(文明)을 날렸다.

영조(榮祖)는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典籍)을 지낸후 당시 광해군의 혼란한 정치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10년간이나 은거(隱居)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삼사(三司)의 관직을 거쳐 여섯 차례나 어사(御史)로 나갔으며, 뒤에 대사간(大司肝)․부제학(副提學)을 지내고 병조(兵曹)와 예조(禮曹)의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그외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절도사(節度社)로 종군(從軍)한 경조(慶組)와 부사(府使) 응윤(應胤), 현감(縣監) 시필(時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하석(夏錫), 감찰(監察) 중섭(重燮), 참의(參議) 서우(瑞宇) 등이 유명했고, 서일(瑞一)은 영조(英祖) 때 노인직(老人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운동가(抗日運動家)로 유명한 종휴(宗烋)․순흠(舜欽)․지섭(祉燮)․의탁(義倬) 등이 가문의 전통을 이어 조국(祖國)과 민족(民族)의 무궁한 번영을 위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쳤으므로 가문을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풍산김씨(豊山金氏)는 남한(南韓)에 14,3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풍산김씨조상인물

김영현(金永玄) 고려(高麗) 때 호장(護將)을 지냈다.

김윤보(金允寶) 고려 때 판종부시사(判綜副寺事)를 지냈다.

김응(金 凝) 고려 때 전농시사(典農寺事)를 지냈다.

김안수(金安壽) 고려 때 예빈시정(禮嬪寺正)을 지냈다.

김안도(金安道) 고려(高麗) 때 예빈경(禮濱卿)을 역임했다.

김안정(金安鼎) 고려조에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김계학(金繼學)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갱(金 粳) 조선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김자량(金子良) 조선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자순(金子純) 조선(朝鮮) 때 직장(直將)을 지냈다.

김서장(金瑞張) 조선 때 봉교(奉敎)를 지냈다.

김서진(金瑞陳) 조선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였다.

김준(金 樽) 조선(朝鮮) 때 별제(別提)를 지냈다.

김종석(金從石)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강지(金江之)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한지(金漢之)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인손(金麟孫) 조선 때 판서(判書)를 지냈다.

김휘손(金徽孫)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했다.

김방로(金邦老) 조선조에 직장(直將)을 지냈다.

김명경(金命景) 조선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김양진(金楊震) 1497 (세조 12) ~ 1535 (중종 30)

자는 백기(伯起), 호는 허백당(虛白當), 진산군수(珍山郡守) 휘손(徽孫)의 아들. 정효향(鄭孝香)의 문인. 1497년(연산군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04년(연산군 10) 부수찬(副修撰)에 이르러 연산군이 모비(母妃) 능묘(陵廟)의 호를 추존하려 할 때 이를 반대하다가 예천(醴泉)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고, 이조참판(吏曹參判)․경주부윤(慶州府尹)을 거쳐 1520년(중종15)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대사간(大使諫)․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使) 등을 역임했다.

김유인(金有仁)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김원길(金元吉)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의정(金義貞)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김순정(金順貞) 1499 (연산군 3) ~ 1571 (선조 4)

자는 화직(華職), 호는 신암(愼庵), 1528년(중종23) 문과(文科)에 급제,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냈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이르렀다.

김진(金 鎭) 1522 (중종 17) ~ 1591 (선조 24)

자는 경인(景仁), 호는 서촌(西村). 1549년(명종4) 문과(文科)에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다. 그후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讚城)겸 판의금부사(判義金副使)․성균관사(成均館使)․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등을 역임했다.

김응윤(金應胤) 1611 (광해군 3) ~ 1683 (숙종 9)

자는 자승(子承). 조선에서 수안군수(修安郡守)․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등을 역임했다.

김시달(金時達) 1629 (인조 7) ~ 1701 (숙종 27)

자는 현경(縣卿). 1659년(효종10) 무과(武科)에 급제, 거제부사(巨濟府使)․어모장군(御模將軍)등을 역임하였다.

김중석(金重錫) 1650 (효종 1) ~ 1679 (숙종 5)

자는 군보(君寶). 용양위 사과(龍癢衛司果)를 지냈다.

김호(金 護) 조선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농(金 農) 조선(朝鮮) 때 사의(司議)를 지냈다.

김진(金 鎭) 조선 때 장령(掌令)을 지냈다.

김선(金 瑄) 조선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극충(金克忠) 조선(朝鮮)때 집의(執義)를 역임했다.

김덕운(金德雲) 조선때 의병장(義兵將)을 하였다.

김극방(金克邦) 조선때 직장(直將)을 지냈다.

김극가(金克家) 조선 때 사과(司果)를 지냈다.

김흥일(金興一)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김수봉(金壽鳳) 조선 때 사의(司議)를 지냈다.

김대현(金大賢) 1553 (명종 8) ~ 1602 (선조 35)

자는 희지(希支), 호는 유연당(幼然當), 의정(義貞)의 손자. 성 혼(成 渾)의 문인. 1582년(선조15) 진사시(進士詩)에 합격했고, 1595년(선조 28)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찰방(察訪)이 되고 뒤에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애현(金愛賢)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풍현(金豊賢)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오현(金五賢) 조선(朝鮮) 때 사과(司果)를 역임했다.

김정현(金庭賢) 조선 때 선교랑(宣敎郞)에 이르렀다.

김익현(金益賢) 조선 때 지평(持平)을 역임하였다.

김명현(金命賢)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상현(金尙賢) 조선(朝鮮) 때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김상(金 賞) 조선 때 주부(主部)를 지냈다.

김인(金 璘)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선(金 琁)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김형(金 珩)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황(金 璜)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김진(金 振)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유(金 喩)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다.

김연(金 捐)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전(金 詮)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이르렀다.

김세건(金世建) 조선(朝鮮)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김봉조(金奉組) 1572 (선조 5) ~ 1630 (인조 8)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 현감(縣監) 대현(大賢)의 아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사도시 직장(司導時直長)이 되었고, 이어 전적(典籍)․감찰(監察)․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김영조(金榮組) 1577 (선조 10) ~ 1648 (인조 26)

자는 효중(孝中), 호는 망와(忘窩), 현감(縣監) 대현(大絃)의 아들. 1612년(광해군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子)․전적(典籍)을 거쳐 1623년 인조반정 후 예조(禮曹)․병조(兵曹)의 낭관(郎官)에 이어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임하고 어사(御史)로 나갔다. 그후 대사간(大使諫) 부제학(副濟學)․형조참판(刑曹參判)․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했다.

김창조(金昌組)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경조(金慶組) 1583 (선조 16) ~ 1645 (인조 23)

자는 효길(孝吉), 호는 심곡(深谷), 1609년(광해군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내시교관(內侍敎官)․의령현감(宜零縣監)을 지내고,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경상도 권섭우절도사(慶尙道權攝右節度使)로 종군했다.

김연조(金延組) 조선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김응조(金應組) 1587 (선조 20) ~ 1667 (현종 8)

자는 효징(孝徵), 호는 학사(鶴沙)․아헌(啞軒), 현감(縣監) 대현(大賢)의 아들. 영천(永川) 출신. 류성룡(柳成龍)문하에서 수업. 1623년(인조즉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흥덕 현감(興德縣監)․선산부사(善散副使)등을 역임하고, 1634년(인조 12) 사직, 낙향했다가 1647년(인조 25) 부교리(副校理)에서 보덕(輔德)이 되고, 효종 초에 사간․동부승지(同副承旨)․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 1662년(현종3)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뒤에 한성부 우윤(漢城部右尹)을 지냈다.

김숭조(金崇組) 조선 때 주서(注書)를 지냈다.

김영윤(金英胤)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했다.

김응윤(金應胤) 조선(朝鮮) 때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중환(金重煥) 조선 때 조선 때 부윤(府尹)을 지냈다.

김시좌(金時左)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시필(金時弼)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중석(金重錫)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시직(金時稷) 조선 때 병조참의(兵曹參議)을 지냈다.

김하석(金夏錫)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김몽후(金夢后)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서응(金瑞應)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중섭(金重燮)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시일(金時鎰)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김서우(金瑞宇) 조선 때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김시백(金時伯)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秋府使)를 지냈다.

김시장(金時丈)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하였다.

김수현(金壽賢) 1565 (명종 20) ~ 1653 (효종 4)

자는 정수(庭受), 호는 둔곡(遁谷), 시호는 정헌(靖憲), 장령(掌令) 진(鎭)의 아들. 1602년(선조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정언(正言)․전적(典籍)․교리(敎理)를 거쳐 1617년(광해군9) 정주 목사(定洲牧使)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올랐다. 그후 승지(承旨)․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우참찬(右參贊)을 역임했다.

김심(金 沈) 조선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정(金 呈) 조선 때 판결사(判決使)를 지냈다.

김간(金 侃) 조선(朝鮮) 때 부사(副使)를 역임했다.

김서일(金瑞一) 1694 (숙종 20) ~ 1780 (정조 4)

자는 용만(用萬), 호는 전긍재(戰兢載), 1764년(영종 40) 천거를 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고, 1771년(영조 47) 노인직(勞人織)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이듬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역임했고, 자헌대부(自獻大夫)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김서응(金瑞應)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김종휴(金宗烋) 1783 (정조 7) ~ 1866 (고종 3)

자는 성호(聖浩), 호는 서소(書巢), 전적(典籍) 상온(相溫)의 아들, 1822년(선조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고, 고향에서 후진(後進) 양성에 전념했다.

김순흠(金舜欽) 자는 치화(穉華).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오적(五賊)의 매국 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討五迹門)을 사림(士林)에게 살포했고, 1910년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자 비분, 음독자결했다.

김지섭(金祉燮) 1884 (고종 21) ~ 1928

자는 위경(衛傾), 호는 추강(秋剛). 경북 안동(安東)출신. 3․1운동때 독립운동에 가담, 활약하다가 1920년 중국에 망명하여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고 상해(上海), 북경(北京) 등지에서 독립운동에 힘썼다. 1924년 일본 동경(東京)에 들어가 일본 궁성(宮城)의 니쥬우바시(二重橋)에 폭탄 3개를 던지고 현장에서 피체되어 복역하던 중 병으로 옥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