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파평김씨시조(坡平金氏),김장수(金長壽),파평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9 18:07 수정일 : 2018-04-10 17:20

시조 및 본관의 유래

파평김씨(坡平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전하나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없어 상고(祥考)할 수 없다.

「파평김씨신해보(坡平金氏辛亥譜)」에 의하면 시조(始祖) 김장수(金長壽)는 염주인(鹽州人)으로 일찌기 당나라 명신(明臣)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 성주 이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닦아 지식이 해박하고 경술(經術)이 뛰어났으며, 1361년(공민왕 10) 상호군(上護軍)으로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 겸 도지휘사(都指揮使)에 올랐다.

1363년(공민왕 12) 중신(重臣) 김용(金鏞)이 공민왕(恭愍王)이 흥왕사(興王寺)에 있음을 기회로 왕을 시해(弑害)하려고 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이를 평정(平定)하려 싸우다가 순절하였다. 난(亂)이 평정(平定)되자 왕이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겨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하고 봉익대부(奉翊大夫)로 개성윤(開城尹)에 추증하였으며 파평군(坡平君)에 추봉(追封)한 후 시호(諡號)를 충간(忠簡)으로 하사(下賜)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파평(坡平)으로 삼게 되었으며, 장수(長壽)의 아들 인기(仁奇)가 보승중랑장(保勝中郞將)을 거쳐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됨을 시작으로 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파평(坡平)은 경기도(京畿道) 파주군(坡州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파해평사(波害平史) 또는 액봉현(額蓬縣) 이라 불리우다가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파평(坡平)으로 고쳐져 내소(來蘇 : 양주)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1398년(태조 7) 서원(瑞原)과 파평(坡平)을 합하여 원평군(原平郡)이라 하고, 1461년(세조 6) 세조(世祖)가 왕비(王妃)의 고향 이라고 하여 파주목(坡州牧)으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장수(長壽)의 현손(玄孫) 효신(孝新)은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안주 목사(安州牧使)로 나갔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3형제가 뛰어났다.

맏아들 확(鑊)은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장사랑(將仕郞)에 올랐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울산(蔚山)에 유배, 중종(中宗) 때 풀려나 후릉 참봉(厚陵參奉)에 등용되었으나 사양했으며 선조(宣祖) 때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차남 석(錫)은 상서원 직장(尙瑞院直長)을 지냈고, 막내 대(鐓)는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파평 김씨(坡平金氏)는 아들 확(鑊)․석(錫)․대(鐓) 3형제의 후대에서 크게 번성하여 인재공파(忍齋公派)․동향촌파(東向村派)․평양파(平壤派) 등 11파(派)로 나누어졌으며, 누대(累代)로 황해도(黃海道) 옹진(甕津)․장연(長淵)․신천(信川)․해주(海州) 등지에서 가문의 위세(威勢)를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파평 김씨(坡平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5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파평김씨조상인물

김인기(金仁奇) 고려 때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역임하였다.

김안상(金安常) 고려 시대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김건(金 乾) 고려 때 사인(舍人)을 지냈다.

김효신(金孝新)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했다.

김확(金 鑊) 조선 때 장사랑(將仕郞)에 올랐다.

김석(金 錫) 조선조에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세복(金世福) 조선 때 적순부위(迪順富尉)를 역임하였다.

김서구(金瑞龜)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린(金 麟) 조선 시대에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김언호(金彦豪)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김우건(金友騫) 조선조에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우달(金友達)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김로(金 路) 조선 시대에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김림(金 琳) 조선 때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김취례(金就禮)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김취온(金就溫)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김취량(金就良)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김익선(金益善) 조선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열(金 洌) 조선 때 진무사(鎭撫使)를 역임하였다.

김단(金 湍)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하(金 河)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수(金 洙)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하였다.

김환(金 渙)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결(金 潔)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활(金 活)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개(金 鍇) 조선 시대에 부장(部將)을 지냈다.

김갑(金 鉀) 조선 때 봉직랑(奉直郞)에 올랐다.

김탁(金 鐸) 조선조에 사직(司直)을 지냈다.

김추(金 錘) 조선조에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전(金 銓)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재창(金再昌)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경창(金景昌) 조선 시대에 봉직랑(奉直郞)에 이르렀다.

김기창(金起昌)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순창(金順昌)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유창(金裕昌)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만창(金萬昌)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경지(金景址)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경태(金景泰)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경휘(金景輝) 조선 시대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경요(金景耀)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경주(金景冑) 조선 때 봉직랑(奉直郞)에 이르렀다.

김원과(金元金戈)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건오(金健五) 조선 때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다.

김생오(金生五)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명오(金命五)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이명(金爾溟)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이하(金爾夏)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천수(金天壽) 조선 시대에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김광두(金光斗)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광원(金光元) 조선 때 통선랑(通德郞)에 올랐다.

김광연(金光淵)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태세(金泰世)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관세(金冠世)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익세(金益世) 조선조에 봉직랑(奉直郞)에 올랐다.

김준(金 埈)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종제(金宗濟)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종택(金宗澤)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종욱(金宗煜)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종덕(金宗德)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종구(金宗九)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종한(金宗翰)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종후(金宗垕)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종열(金宗說)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종건(金宗健) 조선 때 봉훈랑(奉訓郞)에 올랐다.

김상옥(金相玉) 조선 때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였다.

김백원(金百源) 조선 때 교관(敎官)을 지냈다.

김백창(金百昌)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정황(金精煌)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주택(金柱宅) 조선 때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역임하였다.

김정윤(金精潤)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현장(金顯章)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현모(金顯謨) 조선 때 봉직랑(奉直郞)에 이르렀다.

김취희(金就禧) 조선조에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김취번(金就蕃) 조선 때 봉훈랑(奉訓郞)에 올랐다.

김취려(金就礪) 조선 때 호군(護軍)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