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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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28 20:41 수정일 : 2018-01-02 15:2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신라(新羅)의 왕족(王族)의성김씨(義城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 김 석(金 錫)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외선(外孫)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의성(義城)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의성(義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앙부(中央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三韓) 시대에 소문국(召文國)이었다. 그후 신라(新羅)에 병합되어 757(경적왕 16) 문소(聞韶)로 개칭되었다가 고려(高麗) 초에 지금의 의성(義城)으로 고쳐서 부르게 되었다.

한편 「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는 김 석(金 錫)이 경순왕의 넷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김씨 2천년사(新羅金氏二千年史)」․「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동국만성보(東國萬姓譜)」 등의 문헌(文獻)과 「신라김씨분파연원도(新羅金氏分派淵源圖)」에는 다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개국(高麗開國)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 김씨는 8세손 공우(公遇)의 아들대()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는데, 장자(長子)인 용비(龍庇)가 태자 첨사(太子諂事 :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를 지냈고, 차자(次子) 용필(龍弼)은 수사공(守司空), 막내 용주(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외 고려에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훤()과 우왕(禑王)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광부(光富)가 유명했고, 공조 전서(工曺典書)를 지내고 「삼국사기(三國史記)」의 발문(跋文)을 적은 거두(居斗)와 정당문학(政堂文學) 거익(居翼),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椿),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 평장사(平章事) () 등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옥()의아들 현주(玄柱)가 찬성사(贊成事)와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 찬제와 사명에 관한 일을맡아보던 관청의 종 2품 으뜸 벼슬)에 이르렀고, 영렬(英烈)은 태종(太宗) 때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佐命功臣)에 올랐다.

존성(存誠)의 아들 효손(孝孫)은 세종(世宗) 때 병조참의(兵曺參議)를 거쳐 형조 및 예조의 참판(參判)을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종 2품 으뜸 벼슬)을 역임했으며, 을방(乙邦)은 고려(高麗)의 문신(文臣)으로 국운(國運)이 다하자 통곡하며 예안(禮安)의 요성산(邀聖山)으로 내려가 초당(草堂)을 짓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조선조(朝鮮朝)에서 수차에 걸쳐 벼슬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기리며 불취하자 그가

살던 마을을 둔번리(遁煩里)라 불렀다고 한다.

연산군(燕山君)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흠조(欽祖)는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검열(檢閱)을 거쳐 단양(丹陽)․제주(濟州) 등지의 목사(牧使)를 역임한 후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으며, 윤석(潤石)은 중종(中宗) 때 등과(登科)하여 청종 부사(靑松府使)로 나갔다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대사성(大司成 : 유학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에 올라 군수(郡守) 세우(世堣)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 중기(朝鮮中期)에서 명문(名門) 의성 김씨(義城金氏)를 더욱 빛낸 인물(人物)은 모재(慕齋) 안국(安國)과 사재(思齋) 정국(正國)의 형제를 들 수 있다.

안국(安國)1478(성종 9) 참봉(參奉) ()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당대에 이름난 석학(碩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사 학문(學問)을 닦고, 연산군(燕山君)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어 부수찬(副修撰)과 부교리(副校理)․예조 참의(禮曺參議)를 거쳐 경상도(慶尙道)와 전라도(全羅道)의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권장하고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특히 그는 천문(天文)․주역(周易)․농사(農事)․국문학(國文學)을 비롯한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여 당시 유명했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쌍벽을 이루었고,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한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조(禮曺)와 병조(兵曺)의 판서(判書)를 거쳐 디사헌(大司憲)․대제학(大提學)․좌찬성(左贊成 : 의정부애 속해있던 종 1품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동몽성순(童蒙先習)」․「모재가훈(慕齋家訓)」을 비롯한 많은 저서(著書)를 남겼다.

안국(安國)의 아우인 사재(思齋) 정국(正國)은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글을읽고, 1509(중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며, 이조 정랑(吏曺正郞)을 거쳐 관찰사(觀察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고, 병조(兵曺)․예조(禮曺)․현조(刑曹)의 참판(參判)을 지낸 후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으며, 시문(詩文)이 당대에 뛰어났고, 의서(醫書)에 조예가 깊어 「성리대전절요(性理大全節要)」를 비롯한 훌륭한 저서(著書)를 많이 남겨 형과 함께 후세에 추앙받는 인물(人物)이 되었다.

한편 생원(生員) ()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대에 이름난 거유(巨儒) 토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아들 극일(克一)은 내자시정(內資시正), 둘째 수일(守一)은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셋째 명일(明一)은 효행(孝行)이 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넷째 성일(誠一)1568(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여 사성(司成)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日本)으 다녀왔다. 그후 1592(선조 5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로 참전하여 죽산(竹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사수하다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했으며 사후(死後)에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이조 판서(吏曺判書)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복일(復一)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겨처 1570(서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낭관(郎官)․전라도 어사(全羅道御使)를 거쳐 울산 군수(蔚山郡守)․창원 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와 풍기 군수(豊基郡守)를 지냈다.

그밖의 인물(인물)로는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 우옹(宇顒)이 명종(明宗)때 문과(文科)에 올라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병조 참판(兵曺參判) 등을 역임했고, 우굉(宇宏)은 대사성(大司成)을 거쳐 부제학(副提學)에 올라 숙종(肅宗) 때의 수찬(修撰) 여건(汝鍵), 대사헌(大司憲) 방건(邦杰)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영수(永銖)가 장기 군수(長鬐郡守) 겸 경주 병마절제사(慶州兵馬節制使)에 재임시 선정(善政)으 베풀어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고, 철종(哲宗) 때 「북천가(北遷歌)」를 지어 국문학(國文學)하상 중요한 업적을 남긴 진형(鎭衡)과 예조 참판(禮曺參判) (土宏)이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영남 유림(嶺南儒林)의 거두(巨頭) 흥락(興洛)은 수차에 걸쳐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學文)에만 전력하여 「서산집(西山集)」을 집필하였으며, 하락(河洛)은 의병대장(義兵大將)으로 무공(武功)을 세워, 독립운동가로 유명한 원식(元植)․동삼(東三)․창숙(昌淑)․붕준(鵬濬)․황() 등고 함께 가문을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의성 김씨(義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87,46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김용비(金龍庇) 고려 때 태자 첨사(太子詹事)를 지냈다.

김용필(金龍弼) 고려(高麗) 때 수사공(守司空)을 지냈다.

김용주(金龍珠) 고려조에 개성 부사(開城府使)를 지냈다.

김 의(金 宜) 고려 시대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김 영(金 英) 고려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

김공서(金公瑞) 고려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김국적(金國迪) 고려 시대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김성우(金聖佑) 고려 때 시중(侍中)을 지냈다.

김용은(金龍殷) 고려조에 군자감(軍資監)을 지냈다.

김성단(金成丹) 고려 시대에 찬성사(贊成使)를 역임했다.

김인지(金麟芝) 고려 때 상서(尙書)를 역임했다.

김서지(金瑞芝) 고려 때 소윤(少尹)을 지냈다.

김 춘(金 椿) 시호는 문정(文貞).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문하시중 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고, 광정대부(匡靖大夫)에 올랐다. 의성 김씨(義城金氏)에서 분파(分派)하여 예안 김씨(禮安金氏) 시조(始祖)가 되었다가 조선 말기에 예조(禮曺)의 영()을 받아 의성(義城)으로 환본(還本)하였다.

김인수(金仁守) 고려 때 시중(侍中)을 역임하였다.

김태권(金台權) 고려 때 좌사윤(左司尹)을 역임하였다.

김 옥(金 玉) 고려 시대에 좌사의(左司議)를 지냈으며, 정의대부(正議大夫)에 이르렀다.

김 연(金 衍) 시호는 문충(文忠). 고려 대 판무하시중 군국평장사를 역임했다.

김경복(金慶復) 고려 때 유수(留守)를 지냈다.

김인복(金仁復) 고려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광부(金光富) 1362(공민왕 11) 홍건적(紅巾賊) 격퇴의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고, 1379(우왕 5)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가수현(嘉樹縣)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순절했다.

김신검(金信劍) 고려조에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다.

김규훈(金奎焄) 고려 때 찬성(贊成)을 지냈다.

김기려(金기礪) 고려 시대에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김경운(金景雲) 고려 대 지사(知事)를 역임하였다.

김거두(金居斗) 고려조(高麗朝)에 공조 전서(工曺典書)를 지냈으며, 「삼국사기(三國史記)」후기 발문(跋文)을 썻다.

김거익(金居翼)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김 횡(金 鋐) ? 1374 (공민왕 23)

공민왕 초 왜구가 나주에 칩입하자 이를 격최, 그 공으로 전라도 포왜사(全羅道捕倭使)가 되고, 다시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함락된 개경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워 1등 공신에 녹훈(錄勳)되었다.

김효손(金孝孫) 1373 (공민왕 22) 1429 (세종 11)

1393(태조 2) 문과(文科)에 급제, 경기도 관찰사․형조 참판(刑曹參判)을 거쳐 예조 참판․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김현주(金玄柱) 시호는 문숙(文肅). 찬성사(贊成使)․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지내고, 삼중대광(三重大匡)․광정대부(匡靖大夫)에 이르렀다.

김남보(金南寶) 호는 월촌(月村), 시호는 문민(文敏). 고려조에 판도판사(版圖判書)를 거쳐 조선 때 이조 판서(吏曺判書)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을방(金乙訪) 호는 초당(草堂), 시호는 정절(靖節). 고려 때 생원문과(生員文科)에 급제, 우위보승랑장교찬(右衛保勝郞將校贊)을 지내고 봉순대부(奉順大夫)에 올랐다.

김영균(金永鈞) 조선 때 승의랑(承儀郞)에 올랐고,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 인(金 麟) 조선 때 강릉 참봉(江陵參奉)을 지냈다.

김용견(金用堅)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득수(金得水)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회보(金懷寶)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상(金 相) 조선조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 하(金 河) 조선조에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김 호(金 浩) 조선 시대에 병마사(兵馬使)를 역임하였다.

김용초(金用超) 조선조에 병마사(兵馬使)를 역임하였다.

김사윤(金斯潤)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경룡(金慶龍) 조선 때 유수(留守)를 역임하였다.

김자지(金子祉) 조선 시대에 개성부윤(開城府尹)을 지냈다.

김 섭(金 涉)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제학(提學)을 지냈다.

김영렬(金英烈) 호는 맹암(孟巖), 사호는 양조(良照). 1404(태종 4) 특명으로 추충분의좌명공신(推忠奮義佐命功臣)에 올랐다.

김지예(金之銳) 조선 시대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 순(金 淳)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예조 참의(禮曺參議)를 지냈다.

김 통(金 統) 1408 (태종 8) ?

함흥 소윤(咸興少尹) 호지(好智)의 아들. 1435(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부교리(副校理)․정언(正言) 등을 역임하고, 1451(문종 1) 예조 정랑(禮曺正郞)에 이르렀다.

김한계(金漢啓) 현감(縣監) 영명(永命)의 아들. 1438(세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454(세조 1)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2 등에 봉해졌다.

김양중(金養中)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주부(主簿)를 역임하였다.

김익령(金益齡)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운추(金運秋)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직강(直講)을 지냈다.

김한철(金漢哲) 조선 대 문과(文科)에 급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김흠조(金欽祖) 자는 경숙(敬叔), 호는 낙금당(樂琴堂). 1501(연산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506(중종 1) 검열(檢閱)이 되었다. 다음해 봉교(奉교)로서 왕에게 상소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를 당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을 신원(伸寃)케 하였고, 뒤에 재주 목사(濟州牧使)를 거쳐 판결사(判決使)를 지냈다.

김윤석(金潤石) 1515(중종 10)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청송 부사(靑松府使)․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김 양(金 瀁)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판결사(判決使)를 지냈다.

김철수(金鐵壽) 조선 때 문과에 급제, 전적(典籍)으 지냈다.

김세우(金世瑀)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인범(金仁範) 조선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안국(金安國) 1478(성종 9)1543(중종 38) 자는 국경(國卿), 호는 모재(慕齋), 시호는 문경(文敬), 참판(參判) 정국(正國의 형.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503(연산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 1507(중종 2)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장령(掌令)․예조 참의(禮曺參議)․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고, 1517(중종 12) 경사도 관찰사가 되어 각 향교(鄕校)에 「소학(小學)」을 권하고, 농서(農書)․잠서(蠶書)의 언해(諺解)와 「벽온방(辟瘟方)」․창진방(瘡疹方)」 등을 간인(刊印)하여 보급하였다.

1519(중도 14) 저라도 관찰사, 1537(중종 32) 예조 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을 역임했고,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주장했으나 급격한 개혁에는 반대했다.

김정국(金正國) 1485 (성종 16) 1541 (중종 36)

자는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66(명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병조 참의(兵曺參議)를거쳐 1582(선조 15) 충청도 관찰사를 지내고, 이어 부제학(副提學)․청송 부사(靑松府事)․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김우홍(金宇弘)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 홍(金 洪)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희삼(金希參)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극일(金克一)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인. 내자시정(內資寺正)을 지냈다.

김선계(金善繼) 조선 시대에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김우굉(金宇宏) 1524 (중조 19) 1590 (선조 23)

자는 국필(國弼), 호는 사재(思齋)․팔여거사(八餘居士), 시호는 문목(文穆), ()의 아들, 안국(安國의 아우.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509(중종 4) 벼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이조 정랑(吏曺正郞)․사간(司諫)․승지(承旨) 등을 거쳐 1518(중종 13)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삭직되어 고양(高陽)에 내려가 학문에만 전심했으며, 1537(중종 32)에 복관되어 이듬해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 참의(兵曺參議)․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김택룡(金澤龍) 자는 시보(施普), 호는 조성당(操省堂). 1678(숙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월 군수(寧越郡守)로 재직할 때 상서를 올려서 단종묘(端宗墓)를 장릉(莊陵)으로 승격하게 하고, 이조 정랑(吏曺正郞)과 헌납(獻納)으로 있으면서 권력에 치중하는 자는 직언(直言)으로써 경계하였다. 선무2(宣武二等)․정사 1등공신(靖社一等功臣)에 추증되었다.

김제민(金濟閔) 1527 (중종 22) 1599 (선조 32)

자는 사효(士孝), 호는 오봉(鰲峰), 시호는 충강(忠剛), ()의 아들. 이 항(李 恒)의 문인. 1573(선조 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형조의 낭관(郎官)을 거쳐 화순 현감(和順縣監)․순창 군수(淳昌郡守)․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 등을 지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을 맞아 싸웠다.

김유음(金有音) 조선조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호군(護軍) 등을 지냈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김만휴(金萬烋) 자는 사일(士逸), 호는 노노재(魯魯齋). 1660(헌종 1) 생원시(生員試)에 장원하였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정묘당(朝庭廟堂)에서 순릉 참봉(順陵參奉)과 지평(持平)을 제수하였으나 받지 않았다.

김우옹(金宇顒) 1540(중종 35)1603(선조 36) 자는 숙부(肅夫), 호는 동강(東岡)․직봉포의(直峰布衣), 시호는 문정(文貞), 삼척 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아들. 조 식(曺 植)․이 황(李 滉)의 문인. 1567(명종 2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곤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부수찬(副修撰)․전적(典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1583(선조 16) 대사성(大司成)․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1589(선조 22) 기축옥사(己丑獄事) 때 정여립(鄭汝立)과 교분이 두텁다는 이유로 연루, 유배되었다가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석방, 부호군(副護軍)이 되었고, 이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부제학(副提學)․이조 참판(吏曺參判)․대사성(大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김수일(金守一) 자는 경순(景純), 호는 구봉(龜峰). 1555(명종 1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여러 벼슬을 거쳐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김명일(金明一) 자는 언순(彦純), 호는 운엄(雲嚴). 퇴계(退溪)의 문인.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성일(金誠一) 1538 (중종 33) 1593 (선조 26)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시호는 문충(文忠), ()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68(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정언(正言)을 지낸 뒤 1577(선조 10)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장령(掌令)․부제학(副提學)․나주 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1590(선조 23) 사성(司成)으로 통신 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에 다녀온 뒤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를 거쳐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겸 순찰사(巡察使)를 지냈다.

김복일(金復一) 1541 (중종 36) 1591 (선조 24)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생원(生員) ()의 아들. 병마덜도사(兵馬節度使) 성일(誠一)의 아우. 이 황(李 滉)의 문인. 1570(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곤 학유(成均館學諭)․전적(典籍) 등을 거쳐 전라도 어사(全羅道御使)를 지냈고, 1587(선조 20) 울산 군수(蔚山郡守), 이어 경주 교수(慶州敎授)․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풍기군수(豊基郡守) 등을 역임했다.

김안계(金安繼) 자는 매은(梅隱). 김언기(金彦璣)의 문인.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를 역임했다.

김지수(金地粹) 1585 (선조 18) 1636 (인조 14)

자는 거비(去非), 호는 태천(苔川)․천태산인(天台山人), 시호는 정민(貞敏), 정랑(正郞) 재민(齋閔)의 손자. 1616(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서관 교감(校書館校勘)이 되고, 1617(광해군 9)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부령(富寧)에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병조 낭관(兵曺郎官)을 지냈다. 1636(인조 4)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장령(掌令)․핀선(弼善)․보덕(輔德) 등을 거쳐 종성 부사(鍾城府使)를 역임했다.

김지남(金地南) ? 1650 (효종 1)

자는 대보(大寶). 1638(인조 1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曺佐郞)․예조 좌랑(禮曺佐郞)을 거쳐 1641(인조 19) 지평(持平)을 지내고, 무장 현감(茂長縣監)을거쳐 1650(효종 1) 병조정랑(兵曺正郞)으로 부임 도중 병사했다.

김희율(金希律)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첨정(僉正)을 냈다.

김응룡(金應龍)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예조 정랑(禮曺正郞)을 지냈다.

김담수(金聃壽) ? 1603 (선조 36)

()는 태수(台叟), ()는 서계(西溪), 조 식(曺 植)․오 건(吳 健)의 문인. 1564(명종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천거로 참봉이 되었다.

김 용(金 涌) 1557 (명종 12) 1620 (광해군 12)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찰방(察訪) 수일(守一)의 아들. 안동(安東) 출신. 1590(선조 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검열(檢閱)을 지내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안동에서 의병을 규합, 항쟁하다가 행재소(行在所)에 가서 이조 좌랑(吏曺佐郞)․교리(校理)․제찰사(體察使)․종사관(從事館) 등을 지냈다. 이어 선산 부사(善山府使)․예천 군수(禮泉郡守) 등을 거쳐 1609(광해군 1) 태상시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했다.

김 집(金 潗) 1558 (명종 13) ?

자는 활원(活源), 호는 애경당(愛景堂), 성일(誠一)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97(선조 30)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임염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에 고향에서 의병장(義兵將)으로 추대되었다.

김시주(金是柱)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병조 좌랑(兵曺佐郞)을 지냈다.

김준업(金峻業) 자는 여수(汝修), 호는 동계(東溪), 직제학(直提學)의 영()의 후손.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의병을 일으켰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도 의병을 일으켜 척화(斥和)에 앞장섰다.

김이권(金爾權) ()의 셋째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후 장단 방어사(長端防禦使)를 지냈다.

김 욱(金 頊) 조선 대 문과(文科에 급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창(金 窓)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1651(효종 2) 진사시(進士試)에 급제, 정자(正字)․현감(縣監)․부사(府使)․목사(牧使) 등을 역임했다.

김시영(金是榮)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방걸(金邦杰) 1623 (인조 1) 1695 (숙종 21)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시온(是溫)의 아들. 1660(현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지내고, 1689(숙종 15)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인현앙후(仁顯王后)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낙향했다. 후에 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김학배(金學培) 자는 천휴(天休), 호는 금옹(錦翁). 예조 좌랑(禮曺佐郞)을 지냈다.

김성구(金聲久) 1641 (인조 19) 1707 (숙종 33)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五軒), 부제학(副提學) 우굉(宇宏)의 후손, 생원(生員) 추길(秋吉)의 아들. 의성 출신. 1669(현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1693(숙종 19)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이르렀다.

김덕제(金德濟) 조선조에 문과(文科)에 급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여건(金汝鍵) 1660 (헌종 1) 1697 (숙종 23)

자는 천개(天開), 성구(聲久)의 아들. 안동(安東) 출신. 1687(숙종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93(숙종 19)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김세호(金世鎬) 1652 (효종 3) 1722 (경종 2)

자는 경백(京伯), 호는 구주(龜州), 익기(益基)의 아들. 1690(숙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이르렀다.

김명석(金命錫) 1675 (숙종 1) 1762 (영조 38)

자는 여수(汝修), 호는 우계(雨溪), 덕성(德誠)의 손자. 이 재(李 裁)의 문인. 진사시(進士試)․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751(영조 27) 「주례(周禮)」의 전제(田制)를 인용하면서 정전법(井田法)의 시행을 청했다. 그 뒤 영조의 특명으로 「경륜보해(經綸補解)」를 지어 바쳤고, 세 차례나 경연(經筵)에 나갔다.

김성탁(金聖鐸)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1735(영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수찬(修撰) 등을 역임했다.

김 직(金 直) 자는 경지(敬之), 호는 지애(芝厓).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다.

김 굉(金 土宏) 1739 (영조 15) 1816 (순조 16)

자는 자야(子野), 호는 귀와(龜窩), 생원(生員) 광헌(光憲)의 아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77(정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87(정조 11) 전적(典籍)으 거쳐 단양 군수(丹陽郡守)․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예조 참판(禮曺參判)을 지냈다.

김한동(金翰東) 1740 (영조 16) 1811 (순조 11)

()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 조랑(佐郞) 경필(景泌)의 아들. 1789(정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어(正言)․부교리(副校理)를 거쳐 1797(정조 210 전라도 관찰사, 이듬해 대사간(大司諫), 1800(순조 즉위)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다.

김흥락(金興洛) 1827 (순조 27) 1899 (광무 3)

호는 서산(西山), 성일(誠一)의 후손. 류치명(柳致命)의 문인.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지평(持平)이 되고,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김진화(金鎭華) 자는 성관(聖觀), 호는 탄와(坦窩). 현감(縣監)․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김진형(金鎭衡) 1801 (순조 1) ?

자는 덕종(德綜), 종수(宗壽)의 아들. 1850(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53(철종 4) 교리(校理)로 이조 판서 옹기순(洪箕淳)의 배공달리(背公黨利)를 탄핵하다가 수찬(修撰) 남종순(南種順)에게 몰려 한때 명천(明川)에 귀양갔다. 그솟에서 귀양간 내력과 생활을 기록한 작품 「북천가(北遷歌)」를 지었다.

김영수(金永銖) 자는 학일(學一), 호는 만산(晩山). 1891(고종 28) 복시(覆試)에 진사(進士)로 합격, 1906(광무 10)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고 장기 군수 겸 경주 병마절제사(長鬐郡守兼慶州兵馬節制使)를 지냈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일어나자 사직하고 고향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김도화(金道和) 호는 탁암(拓菴). 유일(遺逸)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천거되었으며, 의병장(義兵將)으로서 공훈이 많았다.

김하락(金河洛) 호는 해운당(海雲堂). 1895(고종 32) 을미사변(乙未事變) 후 의병에 가담하여 노루목․이현(梨峴)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리고 의병대장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위훈(偉勳)을 세웠으며 영덕(盈德)에서 전사했다.

김동삼(金東三) 호는 일송(一松), 독립운동가. 1907(융희 1) 고향에 협동중학교(協同中學校)를 설립하였고, 1913년 만주에서 부민단(扶民團)을 조직했다. 그후 임시정부(臨時政府)에 관계하다가 1931년 만주사변 대 경찰에 체포되어 평야에 송환, 10년형을 선고받았고, 1937년 마포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이 수여되었다.

김원식(金元植) 자는 계서(繼緖), 호는 소창(笑蒼). 석주(石州) 이상룡(李相龍)․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함께 독입운동을 하였다. 19663 1 일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建國功勞勳章)이 수여되었다.

김창숙(金昌淑) 1879(고종 16)~1962 자는 문좌(文佐), 호는 심산(心山)․벽옹(躄翁), 성주(星州) 출신. 어려서 유학을 배웠고 문장에 능 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 유림(儒林) 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 단 진정서(儒林團陳情書)를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萬國 平和會議)에 우송했다.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당선되었고, 귀국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벌여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해방 후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을 지내고, 유도회(儒道會)를 조직했으며, 성균관대학(成均館大學)을 창립하여 초대 학장에 취임했다. 1952년 부산에서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조병옥(趙炳玉) 등과 반독재 호헌구국선언(反獨裁護憲救國宣言)을 발표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

김붕준(金鵬濬) 자는 기원(起元), 호는 당헌(棠軒). 보성중학교․상해 법정대학 졸업. 191931운동 후 상해(上海)로 망명, 임시정부(臨時政府) 수립에 참가했으며 1939년 제 15대 임시 의정원 의장(臨時議政院議長)․ 임시 국무위원(臨時國務委員)으로 조국 광복에 힘썻으며, 8.15 해방 후 귀국, 민주의원(民主議院)의원․ 헌법대책연구위원(憲法對策硏究委員)․과도정부 입법위원(過渡政府立法委員) 등으로 건국에 활약했다.

김 황(金 榥) 호는 중재(重齋).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정다화되자 당시의 외무대신(外務大臣)인 김윤식(金允植)에게 진정한 뜻을 만국에 밝히라고 주장했고, 1926년 김창숙의 독립운동자금 모금에 관련, 6개월간 옥고를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