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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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28 17:19 수정일 : 2024-02-06 19:07

유래

 

울산김씨의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둘째왕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935(신라 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양위(讓位) 하려 하자 형 태자(太子)처럼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太子)와 함께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울산김씨족보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그의 14세 환()이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1품 관계) 광록대부(光祿大夫) 이르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환()을 중시조로 하고 학성의 별호인 울산(蔚山)을 본관으로 하였다.

 

 

 

예로부터 호남에서는 조선 중종 때의 명유(名儒)인 하서 김인후(金麟厚) 집안을 4대 명족의 하나로 꼽고 있다.

 

 

 

본관 역혁

 

울산(蔚山)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는 진한(辰韓)의 땅이었으나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하였다. 신라 효공왕(901) 때 학()이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왔다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 불렀다. 고려 태조(930) 때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으나, 성종(995) 때 다시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고 별칭으로 학성(鶴城)이라 불렀다. 고려 현종(1018) 때 울주(蔚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 4(1404)에 울산(蔚山)으로 고쳤다.

 

 

 

대표적 인물

 

- 김인후(麟厚) : 호는 하서(河西). 조선 중종 때 이름난 유학자. 문묘 종사.

- 김기하(器夏) : 호는 각재(覺齋). 조선 숙종 때 후릉참봉을 역임한 문신 . 성리학자. 연호사 배향

- 김병로(炳魯) : 호는 가인(街人). 초대 대법원장

- 김성수(性洙) : 호는 인촌(仁村). 2대 부통령.

- 김상협(相浹) : 호는 남재(南齋). 국무총리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환()의 아들 계흥(季興)이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냈다. 증손 흥려군(興麗君) ()1387(우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고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돌아와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밀양부사를 거쳐 가선대부 여산군(麗山君)에 봉군되었다. 양주목사때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때 처가인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피화를 당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울산 김씨가 자랑하는 인물로는 성리학의 대가인 인후(麟厚)를 들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조선 전기의 명신인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여 1540(중종 35)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한 후 박사·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부수찬에 올라 문신으로 처음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옥과 현감으로 나갔다. 그 후 1545(인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도 정통했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경수(景壽)는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병 모집 크게 활약하여 공조참판·의금부동지사·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신남(信男)도 운봉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천록(天祿)은 용맹과 지략이 출중하여 정유재란때 여주 판관으로 전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광양군 옥곡에 정려가 세워졌으며, 대명(大鳴)은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그 외 광해군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역임한 종진(宗振), 숙종 때 후릉참봉을 역임한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연호사에 배향된 기하(器夏), 승지를 지낸 우휴(羽休)가 유명하고, 의금부 도사 경휴(敬休), 군수 봉우(鳳祐), 교리 진우(鎭祐), 시독 동수(東洙) 등이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에 와서는 학자 녹휴(祿休), 의병장 익중(翼中), 중추원 의관 대수(大洙), 군수 기중(祺中), 대법원장 병로(炳魯), 대한민국 제 2대 부통령 성수(性洙), 국무총리 상협(相浹) 등이 가문을 빛냈다.

 

 

 

인구수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울산 김씨는 남한에 총 11,270가구, 36,225명이 살고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울산김씨조상인물

김환(金 環)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김계흥(金季興)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김황(金 貺) 고려 시대에 전공 총랑(典工摠郞)을 지냈다.

김온(金 穩) 호는 학천(鶴川). 1387년(우왕 13)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가 되고, 그해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 들어가 급료관(給料官)을 맡았으며, 돌아와서 이조 좌랑(吏曹佐郞)이 되고, 1395년(태조 4) 회군원종공신(回軍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00년(정종 2) 좌명공신(佐命功臣)에 녹훈되었고, 이어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으며, 1413년(태종 13) 양주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김율(金 律) 고려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국로(金國老) 조선 시대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환(金 丸) 조선 때 훈도(訓導)를 지냈다.

김응두(金應斗) 자는 자추(子樞), 호는 서수헌(逝水軒). 1522년(중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사(府使)․광주 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김응문(金應文) 조선 시대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인후(金麟厚) 1510 (중종 5) ~ 1560 (명종 15)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시호는 문정(文正).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이 황(李 滉)과 함께 학문을 닦고, 1540년(중종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후에 정자(正字)․박사․설서․부수찬 등을 거쳐 옥과 현령(玉果縣令)을 지내다가 1545년(인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난 후에는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長城)에 돌아가 성리학의 연구에 정진, 누차 교리(校理)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했고, 이 항(李 恒)의 이기일물설(理氣一物說)을 반대 하여 이기(理氣)는 혼합해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백내(金百匂) 1549년(명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김경수(金景壽) 조선조의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김성종(金聖鐘) 조선 때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지냈다.

김치하(金致夏) 조선 대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정열(金廷說) 자는 은경(殷卿).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낙현(金樂賢) 자(字)는 희연(希淵), 호(號)는 맥구(麥邱).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대명(金大鳴) 자는 성원(聲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예조 좌랑(禮曹佐郞)․정랑(正郞) 등을 역임했다.

김신남(金信男)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운봉(雲峰)에서 공을 세워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 록되었고, 참판(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천록(金天祿) 자(字)는 성경(聖卿).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여주 판관(驪州判官)으로 있으면서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책록되고, 광양군(光陽郡) 옥곡면(玉谷面)에 정려(旌閭)가 세워졌다.

김종진(金宗振)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남중(金南重) 조선에서 선교랑(宣敎郞)에 이르렀다.

김시서(金時瑞) 호는 자연당(自然堂).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찰방(察訪)을 역임했다.

김수조(金壽祖) 조선조에 지평(持平)을 거쳐 장령(掌令)을 지냈다.

김우휴(金羽休) 1834년(순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교리(校理)를 거쳐 승지(承旨)를 지냈다.

김직휴(金直休) 자는 자응(子應).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흥환(金興煥) 자(字)는 이정(而禎), 호(號)는 원재(園齋). 좌랑(左郞)을 지냈다.

김기환(金箕煥) 자(字)는 은로(殷老), 호(號)는 송간(松磵).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성중(金聲中) 자는 도인(道寅), 호는 하남(河南).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김칠환(金七煥) 자는 겸오(兼五), 호는 우곡(愚谷). 조선조에 도정(都正)을 지냈다.

김상환(金相煥) 자는 여일(汝日).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김경휴(金敬休) 자(字)는 성여(成餘). 조선(朝鮮) 때 금부 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김봉우(金鳳祐)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진우(金鎭祐) 자는 사형(士衡). 1876년(고종 13) 식년전시(式年殿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지냈다.

김동수(金東洙) 1883년(고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시독(侍讀)을 지냈다.

김상호(金相昊) 1888년(고종 25) 식년전시(式年殿試)에 급제, 주서(注書)를 지냈다.

김상희(金相熙) 1891년(고종 2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을 지냈다.

김상기(金相璣) 조선조에 참서관(參書官)을 지냈다.

김대수(金大洙) 자는 중빈(仲彬), 호는 두암(斗庵).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했다.

김기중(金祺中) 1859 (철종 10) ~ 1933 호는 원파(圓坡), 부통령 김성수(金性洙)의 양부(養父). 전북 부안(扶安) 출신. 1886년(고종 23) 진사(進士)가 되고, 1904년(광무 8) 용담 군수(龍潭郡)守)를 거쳐 평택(平澤)․동복(同福) 등의 군수를 지냈다. 1906년(광무 10) 정삼품(正三品)에 올랐으나 나라가 기울어짐을 보고 사직, 재산을 투자하여 육영 사업을 시작, 1908년(융희 2) 영신학교(永新學校)를 설립하고, 1929년에 중앙학교(中央學校), 1932년에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해 운영했다.

김병로(金炳魯) 1887 (고종 24) ~ 1964 호는 가인(街人). 전북 순창(淳昌) 출신. 어려서 전 우(田 愚)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세 때 담양(潭陽)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서양인 선교사에게 산술과 서양사를 배웠다. 1905년(광무 9)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용추사(龍湫寺)에서 최익현(崔益鉉)의 열변을 듣고 동지 들을 모아 순창읍(淳昌邑) 일인 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했으며, 이해 창흥학교(昌興學校)를 설립, 신학문을 가르쳤다. 1910년 도일(渡日)하여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고 돌아와 형사 공동연구회(刑事共同硏究會)를 창설했으며, 1927년 신간회(新幹會)의 중앙집행위원장(中央執行委員長)이 되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한민당(韓民黨) 창설에 참여, 중앙감찰위원장(中央監察委員長)이 되고, 1953년 제2대 대법원장을 역임했으며, 1960년 자유법조단(自由法曹團)의 대표,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 최고위원을 지냈다.

김성수(金性洙) 1891 (고종 28) ~ 1955 교육자, 호는 인촌(仁村), 경중(璟中)의 아들. 전북 고창(高敞) 출신. 13세 때 사설 영어 학숙에 다니며 송진우(宋鎭禹)․백관수(白寬洙) 등과 교유, 1908년(융희 2)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 1914년 졸업후 귀국하여 중앙학교를 인수했고, 1919년 경성방직회사(京城紡織會社)를 창설, 사장이 되어 경제 자립과 민주자본 육성에 노력하는 한편 1920년에는 <동아 일보>를 창간했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를 인수했고, 1935년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손진태(孫晋泰)와 골동품을 수집, 외국유출을 막았다.

해방된 뒤 1947년 신탁통치 반대투쟁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1949년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 최고위원으로 1950년 제2대 부통령에 당선, 취임했다가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독재를 반대하여 이듬해 5월에 사임했다. 1962년 대한 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復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