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예안김씨시조(禮安金氏),김상(金尙),예안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8 16:29 수정일 : 2020-04-06 14:56

시 조

신라종성(新羅宗姓)의 후예인 예안김씨(禮安金氏)는 고려(高麗) 때 호장(戶長)을 지낸 김상(金尙)을 시조(始祖)로 하고 보승낭장(保勝郎將) 김로(金 輅)를 중시조(中始祖)로 계대(系代)한다.


본관의 유래

예안(禮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안동군(安東郡)에 속해 있는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시대의 매곡현(買谷縣)을 신라 (新羅)가 선곡(善谷)으로 고쳐서 내령(奈靈 : 순흥)군에 속하게 하였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예안군(禮安郡)으로 승격되었다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한때 선성(宣城)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413년(조선 태종 13) 현(縣)으로 강등되었고, 고종(高宗) 때 다시 군(郡)이 되었으나 1913년 안동군(安東郡)에 편입되어 일부지역은 예안면(禮安面)으로 남았다가 1976년10월 안동다목적댐이 준공됨에 따라 수몰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의 명신(名臣) 담(淡)은 로(輅)의 손자(孫子)로 역수(歷數)와 관상(觀象)에 밝아「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었으며 일영대(日影臺)와천문지(天文誌)․전세(田稅)․구등(九等)에관한 법을 모두 어명에 따라 선정(選定)하였다.

그는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여섯 번이나 소(疏)를 오려 벼슬을 사양하였으나 세종은 서운부정(書雲副正)을 삼고 천담복(淺淡服 : 엷은 옥색의 제복)을 내리며 “집에 있을 때에는 상복을 입고 조정에 와서는담복을(淡服)을 입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1456년(세조 2)에 급제한 수손(首孫)은 숙량(叔良)의 손자(孫子)로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과 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역임하며「경국대전(經國大典)」편찬에참여했다.

한편 담(淡)의 현손(玄孫) 늑(玏)은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을 잘하여 선조(宣祖) 때 직신(直臣)으로 유명했으며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올랐고, 임진왜란 때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백성들을 위우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광해군(光海君)이 생모(生母) 김씨(金氏)를 위해 궐내에 봉자전(奉慈殿)을 세우려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삭탈관직당하자 영주(榮州)로 낙향하여 구학정(龜鶴亭)과 천운정(天雲亭)을 지어놓고 당대의 석학(碩學) 이수광(李睟光)․한석봉(韓石峰)등과 교유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수손(首孫)의 증손(曾孫) 해(邂)가 임진왜란 때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아들 경원(慶遠)과 함께 싸움에서 순절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영조(英祖) 때의 동부승지(同副承旨) 약연(若鍊)은 뛰어난 문장(文章)으로「두암집(斗庵集)」을 남겨 선비들의 학문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었고 숙종(肅宗) 때의 사간(司諫)으로 송시열(宋時烈)을 탄핵했던 태일(兌一) 좌승지(左承旨)를 지낸 해일(海一)과 함께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안 김씨(禮安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15,60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예안김씨조상인물

김 로(金 輅) 고려 때 좌우위 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을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담(金 淡) 1416 (태종 16) ~ 1416 (세조 9) 자는 거원(巨源), 호는 무송헌(霧淞軒), 시호는 문절(文節). 1435년(세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정자(集賢殿正字)로 뽑으면며, 조선 역학(曆學)의 기본이 된「철정산 외편(七政算外篇)」을만들었다. 1447년(세종 29)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 충주 목사(忠州牧使)․안동 부사(安東府使)․경주 부윤(慶州府尹)을 역임한 뒤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 했다.

김 회(金 澮) 조선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윤석(金潤石) 자는 중수(仲粹).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 신(金 新) 1464년(세조 9) 별시문과(別時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을 역임했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지(金 祗)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금산 군수(錦山郡守)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김수손(金首孫) 자는 사윤(士允). 1456년(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했고,「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찬진(撰進)했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 적(金 磧) 자는 석린(石磷). 1510년(중종 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영산 현감(靈山縣監)을 지낸 후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반천(金半千) 1537년(중종 32) 문고에 급제하여 승정원 승지(承政院承旨)에 이르렀고,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흠조(金欽祖) 자는 경숙(敬叔), 효우(孝友)의 아들. 1501년(연산군 7)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506년(중종 1)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525년(중종20)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거쳐 이듬 해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김 늑(金 玏) 1540 (중종 35) ~ 1616 (광해군 8) 자는 희옥(希玉), 호는 백암(栢巖), 시호는 민절(敏節). 1576년(선조 9)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사간원(司諫院)․홍문관(弘文館)등의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84년(선조 17) 영월 군수(寧越郡守), 1592년(선조 25)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이어 대사헌이 되어 시무(時務) 16조(條)를 상소했다. 뒤에 형조 참판(刑曹參判)․충청도관찰사․안동 부사(安東府使) 등을 역임했다.

김 해(金 澥) 자는 사회(士晦), 호는 설송(雪松). 1564년(명종 1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원주․상주 목사(原州․尙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도승지(都承旨)․이조 참판(吏曹參判)․대제학(大提學)등에 추증(追贈)되었다.

김택룡(金澤龍) 조선 때 헌납(獻納)을 역임했다.

김경원(金慶遠)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상주 목사(尙州牧使)인 아버지와 함께 왜적과 대전(對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김현준(金賢俊) 자는 군수(君秀). 1582년(선조 15)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과 학론(成均館學論)․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등을 역임하였다.

김지선(金止善) 조선에서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지냈다.

김정후(金靜厚) 1576 (선조 9) ~ 1640 (인조 18) 자는 사외(士畏), 호는 동리(東籬), 현도(玄度)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613년(광해군 5) 보령 현감(保寧縣監), 인조 초에 예안 현감(禮安縣監), 뒤에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김 설(金 薛) 조선조(朝鮮朝)에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김현도(金玄度) 자는 홍지(弘之), 호는 인재(認齋). 1636년(인조 1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해주 목사(海州牧使)에 이르렀다.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곤(金 輥)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태일(金兌一) 1637 (인조 15) ~ 1702 (숙종28) 자는 추백, 호는 노주(蘆州), 단(鍴)의 아들. 곤(錕)에게 입양(入養). 1660년(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문학(文學)․보덕(輔德) 등을 지내고 1694년(숙종 20)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김만주(金萬柱) 조선조(朝鮮朝)에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김우일(金遇一)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역임했다.

김이만(金履萬) 조선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김 방(金 埅) 조선조에 사간(司諫)을 역임했다.

김 위 조선(朝鮮) 지평(持平)을 역임했다.

김약련(金若鍊) 조선 때 승지(承旨)를 역임했다.

김해일(金海一) 자는 종백(宗伯). 부윤(府尹)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