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연안김씨(延安金氏),연안김씨시조,김섬한,연안김씨유래,연안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19 13:02 수정일 : 2018-01-08 18:47

연안김씨시조 및 연안김씨유래(始祖 本貫由來)

연안(延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있는 고장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동음홀(冬音忽) 또는 시염성(豉鹽城)이라 부르다가 신라(新羅) 때 해고군(海皐郡)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고려에서는 염주(鹽州)․영응현(永膺縣)․복주(復州)․석주(碩州)․온주(溫州) 등으로 고쳐 내려오다가 충선왕(忠宣王 : 고려 제26대 왕, 재위기간 : 13091314) 때 연안부(延安府)로 하였으며, 1914년 이웃 백천군(白川郡)과 합하여 연백군(延白郡)이 되었다.


연안김씨(延安金氏)의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명종(明宗 : 19대 왕, 재위기간 : 11701197) 때 사문박사(四門博士 : 국자감 안에 두었던 교육기간의 정 8 품 벼슬)를 지낸 김섬한(金暹漢)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신라(新羅)에 김알지(金閼智)의 후예인 두 왕자(王子)가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형()은 북빈경(北濱京 : 지금의 강릉), 아우는 시염성(豉鹽城 : 연안의 옛 지명)으로 유배되었는데, 아우의 후손이 바로 김섬한(金暹漢)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선조(先朝)의 유배지인 연안(延安)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면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하여 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명문대가(名門大家)로 일컬어졌다.


시조(始祖) 섬한(暹漢)5대손 도()는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올라 전주 사록(全州司祿)․정언(正言)을 거쳐 1371 (恭愍王 20) ()나라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 구현승(東昌府丘縣丞)에 올랐으나, 이듬해 노친봉양(老親奉養)을 이유로 사퇴하고 귀국하자 공민왕(恭愍王)<나복산인 김도장원(蘿葍山人金濤長源)>이란 여덟 자의 글을 써서 하사(下賜)했으며, 그가 살던 곳은 <팔자동(八字洞)>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의 아들 4 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세도가문으로써의 기틀을 다졌는데, 맏아들 자지(自知)는 조선 태종(太宗) 때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음양(陰陽)․천문(天文)․지리(地理)․음율(音律)․의약에 이르기까지 능통했으며, 둘째 여지(汝知)1389(창왕 1)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예조 좌랑(禮曹佐郞) 등을 역임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판관(判官)․헌납(獻納)을 거쳐 태종(太宗)때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러 1416(태종 16)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공조(工曹)와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로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하던 조선시대 최고의 행정기관의 정2품 벼슬)을 겸직했고, 셋째 치지(致知)는 예빈시윤(禮賓寺尹)을 지냈으며, 막내 학지(學知)는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세조(世祖) 때 원종공신(`從功臣)에 책록된 원신(元臣)은 파주 현감(坡州縣監)과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역임하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었으며, 우신(友臣)은 성종(成宗)의 잠저(潛邸)때 사부(師傅)였던 인연으로 그가 즉위하자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발탁되어 1490(성종 21) 단양군수(丹陽郡守)로 부임하여 선정(善政)을 베출었고 뒤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연안 김씨는 우신(友臣)의 아들 심()․흔()․전() 3 형제가 크게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는데, 1479(성종 10)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한 심()은 사관(史官)과 부제학(副提學 : 홍문관의 정3품 당상관 벼슬)을 거쳐 연산군(燕山君) 때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으나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불취하고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올랐으며, ()은 어려서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검열(檢閱)․부교리(副校理)․직제학(直提學) 등을 거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그리고 1489(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전()은 호당(湖當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했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예안 현감(禮安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고,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연루되어 남해(南海)로 유배당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 다시 등용되어 대사헌(大司憲)․좌찬성(左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520(중종 15)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청백리(淸白吏 : 청렴결백한 벼슬아치)에 뽑혔다.


한편 부사(府使) ()의 아들 근사(謹思)는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고, ()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으로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었으며, 석철(錫哲)은 중종(中宗)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수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중종(中宗) 때의 명신(名臣) 희락당(希樂堂) 안로(安老)는 가문의 중흥을 가져온 중추적인 인물로서 1506(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當)에 뽑혔고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이조 판서(吏曹判書) 등을 역임한 수, 아들 희()가 효혜공주(孝惠公主)와 혼인한 뒤부터 권력 남용이 잦아 당시 권신(權臣) 남 곤(南 袞)․심 정(沈 貞) 등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풍덕(豊德)에 유배되었으나, 1529(중종 24) 풀려나와 도총관(都摠管)․판서(判書)․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


조선 말기(朝鮮末期)에 와서는 정조(正祖) 때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익()과 그의 아들 재찬(載贊 : 순조 때 영의정을 역임), 유연(有淵 : 재찬의 손자로 고종 때 우의정을 역임)이 뛰어났으며, 통덕랑(通德郞) 재혁(載奕)의 아들 후(金厚 : 순조대 대사간에 이름)와 재칠(載七)의 아들 준(金睿 : 정조 때 좌참찬․좌부승지를 지냄)은 정조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한 선(), 순조(純祖) 때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내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날린 위()와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연안김씨(延安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93,38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연안김씨조상인물

고려시대(高麗時代) 인물(人物)

김섬한(金暹漢) 국자감사문박사(國子監四門博士)

김준구(金俊龜)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김준린(金俊麟) 대장군(大將軍)

김경성(金景成)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유간(金裕簡)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지문하성사

김 우(金 祐) 문과(文科) 사간(司諫) 비서윤(秘書尹)을 거쳐 문하찬성사감춘추관사(門下贊成事監春秋館事) 증 대광보국(贈大匡輔國)

김대의(金大義) 밀직부사(密直副使)

김광후(金光厚) 봉익대부밀직제학(奉翊大夫密直提學)

김 백(金 伯) 한림학사(翰林學士)

김 실(金 實) 호군(護軍)

김 도(金 濤) ():장원(長源)():나복산인(蘿葍山人) 문과, ()나라 제과(制科)120명 급제자 중 25등으로 급제하여 동창구현승(東昌丘縣丞)을 제수받고 2년 후 귀국하여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이른 항원유학자(抗元儒學者)로서 친원파(親元派)의 무고(誣告)로 양백연(楊伯淵)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나산서원(蘿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김신검(金信劒) 보승중무랑(保勝中武郞)

김승석(金勝碩) 정순대부대호군(靖順大夫大護軍)

김안주(金安柱) 봉익대부개성부윤(奉翊大夫開城府尹)

김안보(金安寶) 한림학사(翰林學士)

김 선 (金 善) 공부전서(工部典書)

김경수(金敬壽) 내금위사직(內禁衛司直)

김광택(金光澤) 지단주사(知端州事)


조선시대(朝鮮時代) 인물(人物)

김자지(金自知) ():원명(元明) ():일계(逸溪)시호(諡號):문정(文靖) 18세에 문과 (文科) 사헌부집의(執義),평안도관찰사(觀察使),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개성유후사유후(留後司留後)를 역임하였다.음양(陰陽) 복서(卜筮)천문(天文)지리(地理) 의약(醫藥) 음율(音律)에 통달하였다. 나산서원에 배향되고 지방유적(地方遺蹟)에 책정되었다.

김여지(金汝知) ():자행(子行) ():창주(滄洲) 시호(諡號):문익(文翼) 공양왕(恭讓王) 원년 문과장원(壯元) 사헌부규정(糾正)으로 출사하여 지신사(知申事) 공조(工曹) 예조 (禮曹)판서(判書), 한성부사(漢城府事), 형조판서(刑曹判書)를 거쳐 의정부(議政府) 참찬 (參贊)으로 문명(文名)이 높았다. 나산서원에 배향되고 지방유적 3호로 책정되었다.

김여지(金汝知) ():가행(可行) 예빈시윤(禮賓寺尹)

김학지(金學知) 자헌대부(資憲大夫)행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김 로(金 輅) 시호(諡號):공희(恭僖) 무공(武功)으로 개국좌명공신(開國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연성군(延城君)에 봉작(封爵)되었다.

김만수(金萬壽) 시호(諡號):장양(莊襄) 상호군(上護軍) 도안무사(都按撫使)겸 판길주사 (判吉州使)를 거쳐 평안도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로 대마도 정벌(征伐)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정헌대부(正憲大夫)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김효근(金孝根) 철원부사(鐵原府使)

김남수(金南秀) 시호(諡號):장양(莊襄) 공민왕 때 출사하여 이()()()조의 전서(典書)를 거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태조(太祖) 태상왕(太上王)이 공의 사제(私第)로 일시 피병(避病)도 하였고 공조판서를 거쳐 판좌군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김효성(金孝誠) 시호(諡號):효양(孝襄)황해도조전병마절제사(助戰兵馬節制使)로 대마도 정벌에 참전 전공을 세웠고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육진(六鎭)인 부령성(富寧城)을 개척하였으며 문종(文宗) 즉위년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어 연산군(延山君)에 봉작되고 숭록대부(崇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불천지위(不遷之位) 봉사(奉祀)

김 위(金 偉) 중직대부(中直大夫)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원종공신(原從功臣)

김 경(金 徑) 통정대부 도관찰사(通政大夫都觀察使)

김 잉(金 仍) 중훈대부 재령군수(中訓大夫載寧郡守)

김 유(金 攸) 가선대부 중추부사(嘉善大夫中樞副使)

김 수(金 脩) 가선대부 황해도 도관찰사

김 해(金侅) 통정대부 내자시윤(內資寺尹) 원종공신(原從功臣)

김 준(金 晙) 통훈대부 고원군사(高原郡事)

김 구(金 昫) 통정대부 연안부사(延安府事)

김 승(金 昇) 봉정대부 성균관 직강(直講) 원종공신

김 황(金 滉) 가선대부 예조참판 원종공신

김처의(金處義) 무관으로 출사하여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되고 연안군에 봉작되어 우상대장(右廂大將)에 올랐으나 역고변(逆告變)에 연루(連累)되어 참화를 당하였다.

김처례(金處禮) 가선대부 병조참판

김양신(金良臣) 문과 통훈대부행 삭령군수

김순신(金舜臣) 무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 륜(金 崙) 문과 장흥부사

김경조(金敬祖) 문과 가선대부사헌부대사헌

김 지(金 漬) 문과 사간원사간

김용보(金用寶) 통훈대부 통례원우통례

김 봉(金封)():산룡(山龍)시호(諡號):공간(恭簡)문과(文科)가선대부수()지중추부사

김우신(金友臣) ():시빙(侍聘)시호(諡號): 호간(胡簡) 성종왕 즉위전 자산군때 사부 로서 자헌대부 지충주부사

김제신(金悌臣) ():순경(順卿) 문과 병조참판때 정조부사(正朝副使)로 명나라를 다녀왔고 연산군의 생모(生母) 입주입묘(立柱入廟)의 부당함을 수차 지적하였고 연산군의 인정전(仁政殿) 안에서 말을 탄 금원기마(禁苑騎馬)사건을 수차 상계하였다. 예조참판을 거쳐 전주부윤(全州府尹)에서 서거하였다. 연산10년 연산군은 부관참시(部棺斬屍)의 잔악한 형벌을 가하였다. 인조반정 후 호조판서에 증직(贈職)

김 심(金諶)():군량(君諒)시호(諡號):문정(文貞)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김 흔(金訢) ():군절(君節)():안락당(顔樂堂) 문과장원 사가독서(賜暇讀書) 통훈대부 공조참의 문장가(文章家)

김원신(金元臣) 가선대부 행 안동대도호부사

김석현(金錫賢) 통훈대부 수원부사

김석철(金錫哲) 진사과장원,무과장원 경상우도절제사로 삼포의 난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었고 한성부윤으로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특진관으로서 정조사로 명나라를 다녀와서 병조참판을 거쳐 가선대부 수()지중추부사지훈련원사

김순해(金順海) 오위도총부 부호군

김 규(金 珪) 첨지중추부사

김태준(金台俊) ():사미(士美) 통정대부부평도호부사

김계우(金季遇) ():경안(景顔) 문과 가선대부호조참판

김승박(金承朴) ():성보(誠甫)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

김몽남(金夢南)가선대부행 교동수사(喬洞水使)

김안정(金安鼎) ():진경(震卿) 문과 가선대부 이조참판

김 전(金 詮)():중륜(仲倫)():나헌(懶軒)시호(諡號):충정(忠貞) 문과장원 사가독서 이()()공조(工曹)판서를 거쳐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世子師) 청백리 향토유적

김안로(金安老)():이숙(㶊叔)():희락당(希樂堂) 문과장원 사가독서 이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의정부좌의정으로서 권간(權奸)으로 탄핵을 받았으며 윤원형의 참소로 사사 당하였다.

김 희(金 禧) () 효혜공주(孝惠公主) 연성위(延城尉) 상의원제조(尙衣院提調)

김 면(金 勉) 통정대부행 남원부사

김근사(金謹思)():명통(明通)문과 경차관(敬差官) 한성판윤 산릉도감제조 등을 거쳐 의정부영의정으로 중종32년 윤원형의 참소로 하동으로 귀양감

김 감(金 勘)():자헌(子獻)():선동(仙洞)문과 사가독서 예조판서겸 홍문관예문관 대제학 의정부좌찬성판중추부사로서 연산군의 우의정 제수를 거절하다 경상도 관찰사로 좌천되어 상경(上京)중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의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연창부원군(延昌府院君)에 봉작되었다.

김 엽(金 曄) ():광언(光彦) 진사 통훈대부행 담양부사

김세근(金世勤)():언보(彦輔) 통훈대부행박천군수

김 확(金擴)():사곤(士琨) 문과 강릉부사 청백리에 선()

김사결(金事結) 문과 통훈대부행 양양부사

김광이(金光頤) 통훈대부행 의빈부경력(儀賓府經歷)

김덕윤(金德潤) ():경함(景涵) 선무원종 공신 통훈대부행 평창군수

김태수(金台秀) 통정대부 대호군

김덕의(金德懿) ():인술(仁述) 통정대부 행용양위부호군

김 훤(金 暄)():온여(溫汝)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승경(金承慶)():중길(中吉) ():우당(遇堂)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 협(金 恊) ():자옹(子雍) 문과 정국원종공신 가선대부 전주부윤

김세공(金世功) 무과 절충장군 경상좌도 수군절도사

김세적(金世勣) ():보덕(輔德) 어모장군 행 미전진첨절제사(美錢鎭僉節制使)

김 위(金 瑋)():경온(景溫)문과 통훈대부 행 영천군수

김계한(金繼韓)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책록되고 연양군(延陽君)에 봉작되었으며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증직되었다.

김충일(金忠一) 무과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제남(金悌男) ():공언(恭彦) 연천현감으로 문과급제하고 이조정랑으로 제2가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책봉되어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작되고 영돈녕부사로 외손자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이이첨 등의 무고로 사사(賜死)당하였다. 중종 반정으로 신원되고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증직되었으며 시호(諡號):의민(懿愍) 의민사(懿愍祠)에서 불천지위(不遷之位) 봉사

김 래(金 徠)():자옥(子玉) 청주목사로서 아버지(연흥부원군)와 같이 계축(癸丑)옥화 에 연루 되어 참화를 당하였다.

김 관(金瓘)():백온(伯溫) 문과 통훈대부 행 사헌부집의

김원(金瑗)():백옥(伯玉)():오교(午橋) 문과 성균관사예(司藝)를 역임하였고 효행 이 지극하여 정려(旌閭)를 받아 정문이 세워짐.

김종득(金宗得) ():이로(以魯) 무과 통정대부 온성도호부사

김찬선(金纘先) ():공서(公緖) 문과 통정대부 원주목사

김 제(金 褆) ():계완(季緩) ():양송거사(養松居士) 국광(國光)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조산대부(朝散大夫)사포서사포(司圃)로 서화에 당세의 삼절이라 일컬었다. ()에 최간이(崔簡易),()에 한석봉(韓石峯),서화(書畵)에 김제(金褆)

김개국(金盖國) ():공제(公濟)():만취당(晩翠堂) 문과 임진왜란에 창의군을 초모하여 의병장으로 크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옥천군수를 역임하였으며 효자정려를 받았고 삼봉서원(三峰書院)에 배향되었다.

김백련(金百鍊) 무과 훈계첨절제사(訓戒僉節制使)

김 암(金巖) 무과 양근군수(楊根郡守)

김인택(金仁澤) ():공망(公望)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광재(金光載) ():희장(希張) 알성문과 통훈대부 청주목사

김성형(金聲逈) ():진지(進之) 인조 5년 곽산 능한산성에 침입한 후금(後金)의 수어(守禦)에 의병으로 아들을 이끌고 참전 순절하여 충절의 정려가 내리고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에 증직되었다.

김성원(金聲遠) ():근지(近之) 능한산성 후금의 수어에 의병으로 백형(聲逈)과 같이 참전하여 순절하였다. 충절(忠節)의 정려가 내리고 통훈대부행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증직되었다.

김득남(金得南) 능한산성에 침입한 후금의 수어에 의병으로 많은 청년들을 이끌고 참전 순절하여 충절의 정려가 내리고 예빈시첨정(禮賓寺僉正)에 증직되었다.

김득해(金得海)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 돈(金 墩) 생원(生員)과장원 통훈대부행 고성군수(固城郡守)

김 치() ():중후(仲厚) 통훈대부 김천찰방 서화에 능하여 유품이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음.

김 근(金 瑾) ():자유(子瑜) 통훈대부행 진산군수(珍山郡守)

김천석(金天錫) ():명휴(命休) 통훈대부 행 광흥창수(廣興倉守)

김위수(金渭竪) 무과 통정대부행 온성도호부사(穩城都護府使)

김준남(金俊男) ():사언(士彦) 수문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 크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낭천현감 등을 거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김홍석(金弘錫) ():경보(敬保) 진사 통정대부 행 안성군수(安城郡守)

김대형(金大炯) ():광유(光瑜)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

김석지(金錫之) ():시우(時遇) 문과 통훈대부 풍천부사(豊川府使)

김중윤(金重胤) ():이술(而述) 통훈대부 정평부사(定平府使)

김 주(金 鑄) 가선대부행 단천도호부사(端川都護府使)

김운장(金雲長)():우경(羽卿) 문과장원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

김군석(金君錫) ():승휴(承休)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하석(金夏錫) ():하경(夏卿) 진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수오(金粹五) ():자순(子純) 문과 통정대부 종성도호부사(鍾城都護府使)

김시연(金是) ():여수(汝粹)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

김수익(金壽益) ():천노(天老) 문과 문천군수

김덕의(金德懿) ():신백(信伯)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김성하(金聖河) ():덕윤(德潤)():우유당(優遊堂)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김신지(金愼之) ():시격(時格) 무과 수군 절제사

김하서(金夏瑞) ():정경(鼎卿) 무과 가선대부 옹진방어사(瓮津防禦使)

김 협(金 浹)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상훈(金相勛) ():요부(堯夫)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김 관(金 爟) ():경융(景融)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김상원(金相元) ():조경(調卿) 문과 가선대부 개성유수

김 횡(金 澋) ():중심(仲深)():만촌(晩村) 문과 가선대부 한성부우윤

김상직(金相稷) ():시여(時汝) 문과 가선대부 형조참판

김 호(金 灝)():중호(仲浩)():위은(渭隱)무과 보사원종공신 어모장군훈련원도정

김하보(金夏寶)():덕삼(德三) 절충장군 행 용양우위부호군

김 호(金 灝)():여습(汝習)():심락재(尋樂齋) 문과 보사원종공신 통훈대부행 울산부사

김 경(金 熲) ():현보(顯甫) 통훈대부행 온양군수

김명대(金鳴大) ():익호(益皓)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필형(金弼炯) ():군태(君泰)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광현(金光鉉) ():길보(吉甫) 문과 통정대부 첨자중추부사

김문서(金文瑞) ():사옥(士玉) 문과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인서(金麟瑞) ():사상(士祥) 문과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봉현(金鳳顯) ():윤백(允伯) 운산군수

김오서(金五瑞) ():옥여(玉汝)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성청(金聖淸) 통정가선을 거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김안후(金安厚)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남수(金南壽)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우량(金宇亮 ():여고(汝高) 보공장군 첨절제사

김 원(金 源) ():공록(公麓)무과절충장군 삼척진영장 겸 병마절제사

김상덕(金相德) ():계옥(季玉)():매와(梅窩) 이인좌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참전 하여 분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가선대부 인산첨절제사(獜山僉節制使)

김상석(金相奭) ():군백(君伯)():시은(市隱) 문과 한성부윤 이조판서 등을 거쳐 숭정대부 판돈녕부사 기로사에 입사하고 시호:정간(貞簡)

김 영() ():경락(景樂) 통훈대부행 성주목사

김재대(金載大)():유칙(惟則) 통훈대부행 김포군수

김재구(金載久)():성통(聖通) ():송음 (松陰) 통훈대부행 연안부사

김 걸(金 杰) ():자흥(子興) 영조 을미 군공(軍功)으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상신(金相紳)():공화(公華)():양한재(養閑齋) 시호:희정(僖靖) 대사간 등을 거쳐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김상옥(金相玉)():언장(彦章) ():소와(疎窩) 알성문과장원 암행어사 황해도관찰 사를 거쳐 가선대부 이조참판

김 노(金 魯)():도원(道源)통훈대부 상의원첨정(尙衣院僉正)

김상립(金相立)():언보(彦輔) ():춘강(春岡)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 훤(金 煊) 문과 가선대부 승정원승지

김훼()():회숙(晦淑)():서포(西浦) 무과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초섭(金初燮) ():자화(子和) 문과 통정대부행 부호군

김기환(金基煥) ():덕여(德汝)():서암(瑞巖) 문과 통정대부 병조참의

김태희(金泰熙) ():광보(光甫) 문과 통정대부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

김종무(金宗懋) 홍경래의 난에 의병을 일으켜 참전한 공로로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용전(金龍銓) ():성전(聖田) 문과 통훈대부행 부호군

김지태(金持泰) ():사형(士亨) 문과 통훈대부행 부호군

김대언(金大彦) ():여언(汝彦) 문과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치현(金致鉉) ():태성(泰性) 문과 통훈대부행 부호군

김장만(金長萬)():맹진호():미동(美洞)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동후(金東垕) ():자건(子建) 가선대부 오위장

김인화(金仁和) ():사형(사형) 문과 사헌부장령

김양척(金良倜) ():자익(子翼) 문과 어천찰방 문천군수

김대원(金大元)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김재권(金載權) 통정대부 병조참의

김재연(金載淵) 성천부사(成川府使)

김지택(金智澤)():익수(翼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

김 굉(金 鍠)():여능(汝能)():눌헌(訥軒) 문과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김 필(金 鏎)():앙여(仰汝)():만취헌(晩翠軒) 문과장원 가선대부 호조참판

김 선(金 銑)():택지(澤之) 시호(諡號): 효헌(孝憲) 자헌대부 형조판서

김 여(金 鑢) ():사정(士精)():담정(潭庭) 진사 실학자로서 생물학 분야인 우해이어보(牛海異魚譜)를 간행하여 후세의 연구자료로 크게 기여하였음. 통훈대부행 함양군수

김 용(金 鎔)():장백(莊伯) ():백석(白石) 통훈대부행 무주도호부사

김난수(金蘭秀) ():욱지(郁之)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김 익(金 熤) ():광중(光仲) ():죽하(竹下)시호(諡號):문정(文貞) 문과 예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배수되었으나 선부군(先府君)의 유지에 따라 연흥부원군의 5대 손으로 그 큰 피해를 상기하여 권좌인 이조, 병조는 삼가하라는 뜻을 지켜 수십차 상소로 판중추부사가 되고 두번째 영의정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사양하니 정조는 의소묘(懿昭墓)재실에서 교지를 직접 내리니 받고는 그 자리에서 도승지에게 돌려주고 고양(高陽) 옥으로 들어가 대죄하였다.

김재찬(金載瓚)():국보(國輔) ():해석(海石)시호(諡號):문충(文忠) 영의정 익공의 장자로서 판서를 거쳐 좌의정을 대배하고 평안도 일대에 창궐한 홍경래 난에 자진출전하여 평정하였고 삼도감(三都監)도제조를 사임한 후 순조왕이 재차 영의정을 대배했으나 끝내 사양하고 고양감옥에서 석고대죄를 하였다. 순조묘에 배향되었다.

김 노(金 鏴)():경유(景由)():설암(雪嵓)시호(諡號):문헌(文獻) 문과 효명(孝明) 세자를 모시었고 암행어사를 거쳐 공조판서로서 효명세자 병중에 의약지시를 잘못했다는 탄핵을 받아 한때 남해로 귀양을 갔었으며 정헌대부이조판서 지실록사(知實錄事)를 겸하였다 익종묘에 배향되었다.

김 유(金 鍒)():맹강(孟剛) 진사과 장원 통훈대부 부평부사

김재인(金載人)():사립(斯立) ():율리(栗里) 문과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김 겸(金 鎌)():청여(淸如) ():인암(寅庵)문과 가선대부 예조참판

김 후(金 鍭)():수민(秀民)():간송관(澗松觀)문과 사간원 대사간

김 강(金 剛)():중유(仲柔) ():파서(芭棲) 통훈대부행 영천군수

김조연(金祖淵) ():이현(而玄) 생원 통훈대부행 충주목사

김 석(金 鉐) ():치견(致堅) 문과 통정대부 이조참의

김 형(金 瑩) ():의겸(義兼)():괴헌(槐軒) 문과 통훈대부행 사헌부장령

김재익(金載翼) 문과 통정대부 승정원승지

김상규(金相圭) ():언서(彦瑞)():일헌(逸軒) 통훈대부행 신천군수

김재순(金載順) ():응덕(應德)():상헌(常軒) 문과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김재택(金載澤) ():염지(念之)():추포(秋圃) 무과 병마절제사

김정식(金庭植) ():경삼(敬三)():눌암(訥菴) 문과 승정원승지

김용환(金容煥) ():취여(取汝) 문과 사헌부장령

김지무(金持懋) ():건오(建五)():정남(鼎南) 문과 사간원 사간

김양순(金養純) ():사왕(士旺) 문과 사헌부장령

김병섭(金秉燮) ():자헌(子憲)():서암(瑞庵) 문과 병조참의

김용현(金龍鉉) ():중빈(重彬)():수암(壽庵) 문과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

김지현(金之鉉) ():자용(子用) 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

김영묵(金瑛黙) ():진여(珍汝) 문과 사헌부집의

김현철(金顯喆) ():측문(則文) 문과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김병철(金秉喆) ():취영(就英) 문과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김사섭(金思燮) 무과 병마첨절제사

김중기(金重紀) 절충장군행 용양위부호군

김문환(金文煥) 문과 사헌부장령

김승연(金升淵) ():일여(日汝) 무과 첨절제사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 용(金 鎔) ():사홍 무과 절충장군행 용양위호군

김 정(金 鉦) ():원여(元汝)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김석연(金昔淵) ():민여(民汝) 통훈대부행 장성부사

김 육(金 錥)():온지(溫之)무과 절충장군 황해도중군

김일연(逸淵金)():임지(任之) 문과 가선대부 공조참판

김재겸(金載謙) 진사 통훈대부행 양근군수

김유연(金有淵) ():원약(元若)시호(諡號): 정익(貞翼) 문과 삼사(三司)를 거쳐 변방인 함경도관찰사를 두 차례나 다녀왔고 호조판서로서 우의정에 제수 되었으나 선대의 유훈을 지켜 끝내 사양하고 총리내무부사를 역임하였고 대원군의 부당함을 수차 지적한 바 있다.

김 헌() ():경회(景誨)():석장(石丈) 통정대부 승정원좌부승지

김시연(金始淵) ():원초(元初)():송하(松下) 문과 자헌대부 형조판서

김재완(金載琬) ():국서(國序)():선산(船山) 통정대부 무주부사

김위(金 鍏)():경용(景容)시호(諡號):문익(文翼) 정헌대부 예조판서 효행으로 정려를 받았음

김 주(金 銖) ():숙중(叔重) 통정대부 광흥창수(廣興倉守)

김응연(金應淵) ():사응 통정대부 돈녕부도정

김박연(金博淵) ():유성(惟誠) 통정대부 형조참의

김관수(관수) ():지빈()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김 건(金 鍵) ():교여(敎汝)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김지원(金持元) ():일선(一善) 문과 대동찰방 중화부사

김영제(金永濟) ():사즙(士楫) 문과 사헌부장령

김학제(金學濟) ():사민(士敏) 문과 사헌부지평

김진현(金鎭衡) ():문옹(文翁) 문과 정언 사헌부지평

김진암(金鎭巖) 통정대부 용양위 부호군

김홍규(金弘圭) 문과 사헌부장령

김성기(金聖基) 문과 시독관비서승

김명기(金命基) ():윤문(允文)():수남(水南) 문과 승정원부승지

김석연(金錫淵) 진사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지태(金祉泰) 문과 조봉대부 사헌부장령

김세기(金世基) ():대현(大賢)():송석(松石) 문과 자헌대부 의정부 찬정(贊政)

김환수(金桓秀) ():덕화(德化)():송정(松亭) 무과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겸수(金謙秀) ():공익(公益) 통훈대부행 천안군수

김 선() ():사홍(士鴻)():병원(屛園) 문과 성균관 대사성

김기수(金綺秀) ():수지(秀芝)():창산(倉山) 문과 고종12년 예조참의로 수신사(修信使)로서 단원 75명을 인솔하고 일본을 다녀왔고 일동유기(日東遊記) 수신사일기 등을 찬하였다.

김사중(金思重) ():자후호():소창(小倉) 진사 영양군수

김사준(金思準) ():순명(舜明)():예헌(藝軒) 진사 자헌대부 의정부찬정

김택기(金澤基) ():백춘(伯春)의친왕총판(義親王總辦) 덕산군수

김성기(金聖基) ():인성(人成) 나주군수

김영기(金永基) ():명초(命初) 의령군수

김흥기(金興基) ():민초(民初)():정산(靖山) 양양부사 통정대부행 성주목사

김사욱(金思燠)():경기(敬綺) 통정대부행 남해군수

김만수(金晩秀) ():대여(大汝)():석하(石下) 문과 자헌대부행 궁내부특진관

김근수(金謹秀) ():은숙(誾叔) 무과 절충장군 용양위 부호군

김완수(金完秀) ():백중(伯仲)():존재(存齋) 문과 자헌대부 장예원경

김윤수(金允秀)():백중(伯仲)통훈대부행 청양군수

김회수(金晦秀) 자헌대부행 규장각 제학

김명수(金明秀) 가선대부 영국대리공사

김만수(金萬秀) ():지형() 문과 가선대부 이조참판

김영수(金英秀) ():지삼() 문과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김창수(金昌秀) ():문초(文肖) 문과 대사간 자헌대부 공조판서

김사준(金思準) ():원평 문과 통정대부 승정원 부승지

김사철(金思轍) ():자유(子由)():유당(由堂) 문과 암행어사 의정부찬정

김석기(金奭基) ():경소(敬召) 통정대부 비서감승

김근연(金近淵) ():성원(聖遠)():구초(九樵) 문과 통정대부행 홍문관 응교(應敎)

김덕연(金德淵) ():극원(極元) 통정대부 비서감승

김갑수(金甲秀) ():치원(稚元) 진주목사 공조참의

김양연(金亮淵) ():문헌(文憲) 문과 통정대부 승정원 좌부승지

김헌수(金瀗秀) ():치홍(稚洪) 대흥군수 장성부사

김사형(金思衡) ():내평(乃坪)():매간당(梅澗堂) 감역(監役)으로 출사하여 가선 대부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김종관(金鍾琯) ():보경(寶卿)():구간(龜澗) 문과 통정대부 비서감승

김상기(金商基) ():덕중(德重)():신계(莘溪) 통정대부 충청도 서리관찰사

김봉수(金鳳秀) ():내숙(來肅) 가선대부 동지돈녕부사


정려(旌閭)

1.충절(忠節)

김중국(金重國) 인조14(1633) 병자호란에 순절 호조참판에 증직

김득남(金得南) 인조5(1627) 능한산성의 후금(後金) 침입에 순절 첨정(僉正)에 증직

김성형(金聲逈) 인조5(1627) 능한산성 후금의 수어에 순절,장예원판결사에 증직

김성원(金聲遠) 인조5(1627) 능한산성 의병으로 참전순절 예빈시주부에 증직


2.효행(孝行)

김 원(金 瑗) 문과 통정대부 내자시정 효종6(1655) 정려

김 진() :미중(美中):간촌(簡村) 첨지중추부사 현종10(1669) 정려

김상선(金相宣) :한경(翰卿) :정와(靜窩) 기주관에서 효행으로 이조참의 증직

김덕지(金德之) :시일(時逸) :춘동(春洞) 효행으로 정려 형조참의에 증직

김익(金熤) :광중(光仲):죽하(竹下) 문과 의정부영의정 시호:문정(文貞) 효자정려

김 직():이장(以章):자기옹(自棄翁) 오능참봉 효행으로 정려

김재명(金載明) :택중(宅中) :오은(茣隱) 효행으로 1899년 정려

김세웅(金世雄) :진생(震生) 경종 원년졸 효행으로 夫婦 쌍정려

김 헌():경회(景誨):석장(石丈)승정원좌부승지 효행으로 정려

김위(金偉) :경용(景容)시호:문익(文翼) 문과 예조판서 효행으로 정려

김 함(金 鋡):덕용(德容):신암(莘菴)순조 3279세로 별세 효행으로 정려

김 찬(金 鑽) :석지(錫之) 효행으로 정려1

김석연(金碩淵) 효행으로 정려를 받고 통훈대부행 사헌부감찰에 증직

김귀철(金貴哲) 절충장군 첨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고 효행으로 정려

김국희(金國禧) 90세의 상수로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를 받고 효행으로 정려

김주연(金珠淵) 노모에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려

남평문씨(南平文氏) 金采淵의 부인으로 효행이 지극하여 孝婦정려

김상대(金尙大) 繼母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려

김치순(金致洵) 효행이 지극하여 정려를 받고 童蒙敎官에 증직

김재수(金在秀) :윤욱(潤郁) 효행으로 정려를 받고 童蒙敎官에 증직됨

김건수(金健秀) :경천(敬天) 효행이 출중하여 효자정려

김윤수(金玧秀) :사흠(士欽)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정려

김기조(金基祚) :군화(君和) :용암(龍巖) 철종13년에 졸하고 고종2년 효자정려

김치윤(金致允) :신화(信和) 효행으로 효자 정려

김사의(金思義) 孝子玧秀공의 제2로 아버지의 효행을 본받아 효자정려

김기철(金基喆) 효행으로 효자정려

죽산박씨(竹山朴氏) 金履貞의 부인으로 淑人에 증직되고 孝婦정려

김진환(金進煥) :聖道 철종13년에 별세하고 효자정려

김관묵(金觀黙) 철종1480세로 별세하였고 효자정려

김지항(金持恒) 從叔에게 출계하여 養父母에게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정려

김지주(金持周) 효행이 지극하여 효자정려


 3.열행(烈行)

덕수김씨(德水金氏)(1582-1637)金重國의 부인으로 병자호란에 夫君이 순절하자 따라서 순절하여 열녀정려

밀양박씨(密陽朴氏)는 현감 金三俊의 부인으로 병자호란 때 위기에 처하자 은장도를 뽑아 자결을 기도하여 節烈로 열녀정려

허씨(許氏)는 김시태(金始兌)의 부인이고 허습(許熠)의 따님으로 夫君이 세상을 떠자 따라서 순절하여 열녀정려

경주김씨(慶州金氏)金精旭의 부인이고 金慶遐의 따님으로 夫君19세로 하자 遺腹이 딸인지라 해산후 순절함

철원임씨(鐵原林氏)金載讓의 부인이며 林光遠의 따님으로 夫君이 정조1818세로 하니 즉일로 순절하였슴

연안이씨(延安李氏)(1723-1778)夫君55세로 별세하니 뒤를 따라 순절하였슴

한양조씨(漢陽趙氏)金汲의 부인이며 趙垸의 따님으로 18세에 夫君을 따라 순절하였음

함양박씨(咸陽朴氏)(1783-1807)金鍈의 부인이며 朴鍾和의 따님으로 21세에 夫君을 따라 순절하였슴

여주이씨(驪州李氏)(1723-1789)金瑞郁의 부인으로 효행이 지극하였고 일찍이 死別하였다. 孝烈의 정려

선산김씨(善山金氏)金思甲의 부인,金圭炫의 따님으로 出嫁3년에 夫君死別하고 遺腹子家統을 이은 烈行으로 정려.

수원백씨(水原白氏)(1874-1893)金思明都事白箕鎭로서 夫君하자 22세로 일점혈육없이 뒤를 따라 순절 烈行 정려

남양김씨(南陽金氏)(1810-1861)金相燕夫君하자 7일만에 순절 정려

전주이씨(全州李氏)(1812-1884)金洛賢夫君30세에 하여 시부모를 극진 히 모시고 11養育하고 家勢를 일으킴

한양조씨(漢陽趙氏)(1763-1792)夫君께서 23세로 早世한지 7일만에 一點血肉없이 순절하여 烈行으로 정려

수원백씨(水原白氏)(1878-1883)金昌培夫君22세로 早世하니 3喪期를 마치고 一點血肉없이 순절하여 烈行정려

三稀堂 辛光烈女史(1860-1946)金宅銓과 결혼하고 신행전 夫君16세로 病死하자 素服하고 흰가마를 타고 시집으로 가서 24세의 과부 맞동서와 10세의 시동생에게 소망과 생애를 걸고 근검과 절약으로 家勢를 일으킨 烈婦이다.

金 秀女史金近淵의 따님으로 永川 李在球와 결혼하고 신행전 夫君病死하자 素服 하고 흰가마를 타고 시집을 가서 환갑인 홀媤父를 권하여 再婚케 하여 繼母가 출산한 시동생을 養育하여 그에게서 출생한 조카를 養子하여 家統을 이은 孝烈婦이다.


근대인물(近代人物)

김공선(金公善)(1940):현당(玄堂)1919년 기미 독립만세 시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조선농민사(農民社)를 창설하여 월간농민과 농민순보를 간행 전국에 배포한 독립운동가

김관기(金寬基)(19041956)경기안성(원곡면)에서 기미 독립만세운동에 참가, 양성면 주 재소와 우체국 방화 등으로 일경에 쫓기고 부친의 전 가산을 몰수당함. 2002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추서

김근훈(金瑾薰)(1904)곽산 태생으로 독립군 장교로 흑룡강 전투에서 장렬히 순국한 독립투사

김기홍(金起鴻)(18981962)기미독립 만세때 일본 관헌에 의해 불타 버린 오산학교 재건에 뜻을 두고 조부 명의로 된 토지문서를 담보로 당시 금액 7만원을 희사, 학교를 재건하여 192630만원의 재단법인으로 오산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경영에 진력하였음

김명근(金明根)(18971926) :해일(海一) 정주태생으로 전재산을 처분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에 배달학교를 창설, 농토를 구입하여 독립투사들의 교육과 의식주 해결에 전력하다 일본군의 토벌로 통이현으로 탈출 창신학교를 설립,국민부(독립군 각파의 통합체)로 개편되자 학교장 역임, 19262월 과로사, 만주에서 사회장으로 장례

김사만(金思晩)(18911945 191955일 양양군 강현에서 만세운동,1926년 신간회 공제부장으로 농민운동 및 야학지도, 1932년 일경에 체포되어 26개월간 원산 및 함흥에서 옥고를 치루고 귀향,농민지하운동 전개 하다가 19452월 고문후유증으로 서거.

김사용(金思容)(1875) 일제에 항거하여 독립운동 중 사유재산 논 3000평을 지방학교 육영사업에 기증하고는 만주지방으로 떠난 후 소식이 단절됨.

김사정(金思珵)(1879)1905년 일본과 을사조약이 체결됨을 개탄하고 1906년 충청도 은산지역에서 의병을 모병하여 왜군과 교전 중 순국한 독립투사

김사집(金思潗)(18861936) 법관양성소를 수료 후 판사를 거쳐 고등변호사, 항일 독립 운동 중 왜경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외무부차장으로 활약중 19322월 순국한 애국지사

김석보(金錫甫)(1874) :지구(持九) 기미독립만세시위를 모의하고 각면에 연락 중 일본헌병의 검문에서 품속의 독립선언서가 발각되자 헌병을 때려 눕히고 그의 눈을 뽑아 버리고(掘目大將이라는 별명을 얻음) 달아나 서북청년위원장 선우기성씨의 자당의 도움으로 피신 망명했던 독립운동가.

김 연(金 鍊)(18901943)함흥태생으로 일본 조도전대 법대를 나와 귀국 고려신학교를 거쳐 목사가 되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펴다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사함.

김여제(金輿濟)(18961959)정주태생으로 오산학교와 조도전대학을 졸업. 1920년 상해로 망명,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실장, 초대 사료편찬위원, 독립신문 편집위원,오산학교장을 거쳐 연희전문교수를 역임.

김용열(金龍烈)(18811961)정주태생으로 만주 흥경현에서 이시영 등과 함께 신흥무관 학교를 설립하고 간부가 되어 왜군과 수십차 교전함.상해임시정부 만주 통의부 도총관을 역임한 독립투사

김은제(金殷濟)(1905)정주태생으로 1924년 중국으로 망명,황포군관학교 기마과와 항공 과를 졸업,일등비행사로 중국공군 창설에 참여하여 중일전쟁 중 많은 전공을 세워 중국정부로부터 많은 표창을 받았으나 난주지방 전투에서 전사함.

김이제(金利濟)(1891)정주태생으로 의열단에 가담 독립운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운동가.

김장각(金長脚)(19091988) :우하(宇下)

오산학교 출신으로 동아일보기자 및 편집 담당,광복후 전주일보사장 역임

김종철(金鍾哲)(19231990)1944년 일본군으로 징병되었다가 중국 한구에서 탈출, 국부 군 유격대에 합류, 1945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배속되어 대일전투에 투신, 그 후 광복군사령부의 명에 따라 제9전구산하 일선유격대에서 첩보수집과 분석 등 활동하다가 19466월 귀국,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받음.

김종호(金鍾浩)(18811945)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졸업, 육군참위, 강계수비대장, 1903년 육군정위로 무관학교 교관 재직 시 일본의 국권 찬탈로 대한제국 육군 해산됨.

김종택(金鍾澤)(18871920)영광출신으로 19192월 상해 임시정부에 자금을 원조 할 목적으로 임시정부사령서 국민대회선포문 13도대표 고유문을 지참하고 귀향, 독립자금 935원을 모금하는 등 활동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 중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208월 서거함. 1990년 광복절에 건국공로훈장 애족장 추서.

김주항(金周恒)(18991987)정주태생으로 오산학교와 미국유학후 청소년교육과 농촌계 몽운동에 진력하였음. 1978년 당시 6억원 상당의 홍은동 농장을 연세대 농업개발원에 기증.

김중전(金仲銓)(18841947)정주태생으로 오산학교 교사 재직 중 3.1만세운동에 가담, 만 주로 망명, 여경현 삼성학교교사, 새배달신문사 창설,1922년 귀국, 오산학교교장 재직 시 왜경의 감시로 1926년에 망명, 귀국 후 횡성에 사립교를 설립하여 후학에 진력.

김지환(金智煥)(18921972):일천(一泉) 19192월 기미독립운동 모의, 미국윌슨 대 통령에게 보내는 독립탄원서를 상해임시정부에 전하고 3.1만세 시 구속되어 2년간 옥 고를 치름.건국공로훈장 받고 독립유공자 심사위원역임. 3.1독립운동 48인중 한 분.

김진의(金鎭懿)(1894):문세(文世) 기미

3.1만세 운동시 시위를 지휘하여 체포령이 내림.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독립신문 기자로 활약, 항주도서관 한국국사자료 수집에 열중하다 병사,1979년 건국공로훈장추서.

김진팔(金鎭八)(1873)():방암(方菴)

천도교 종법사로 기미독립만세 때 2만여 주민들을 지휘 만세운동 전개, 이 날 48명이 희생되고 천도교당과 오산학교가 전소됨. 향리에서 현명학교를 설립, 인재 양성에 힘쓴 독립운동가.

김찬영(金瓚泳)(18891973):심농(心農)

당진 태생으로 구한말 법관양성소(서울법대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약관 20세에 구 한국 재판소 영동지원 판사로 취임, 2년 후 경술국치를 당하자 그 직을 버리고 재야법조인으로 애국동포들의 변호를 담당하다가 광복 후 1946년 검찰총장, 1948년 대법관역임. 정년퇴임 후 변호사회 회장에 피선

김창섭(金昌涉)(1889) 공성단원(共成團員)으로 기미독립만세운동을 주동 일경에 체포되어 7년간 옥고를 치룬 독립운동가

김창의(金昌義)(1886) 정주태생으로 기미만세운동을 선도하고 만주로 망명, 상해, 임 시정부의 연통제시행 사명을 띄고 국내로 잠입 조직결성 후 다시 탈출하여 상해에서 독립신문기자 통의부 비서 겸 재정부장으로 활약 중 의군부(義軍府)사건 때 적군으로 오인되어 순국,1963년 건국공로훈장 추서.

김태영(金泰泳)(1909) 영광출신으로 광주사범 재학 시 비밀결사, 성진회(광주학생사건 의 모체)를 조직, 항일사상 운동전개중 193010월 일경에 체포되어 약 4년간의 옥고를 치룬 후 향리에서 백수국민학교를 설립(1939)인재양성에 진력, 1982년 독립유공 포장 받음.

김형기(金亨基)(18841966) 평양숭실학교 교사로 있다가 도미,신학대학을 나와 목사가 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고를 치룸. 광복 후 미군정청 고문 겸 통역관 역임.

김중업(金重業)(1922)():여천(如泉)

공학박사, 미국 하-바드대학 교수,서울대학 교수를 거쳐 건축계에 투신하여 국내외에 많은 건축물을 설계하였으며 특히 올림픽공원의 정문(正門)설계를 한 대건축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