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안동김씨(구),안동김씨시조,김숙승,안동김씨조상인물,안동김씨유래

작성일 : 2017-03-27 17:04 수정일 : 2018-01-01 20:07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안동(安東)은 경상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고대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에는 고타야국(古陀倻國), 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太祖)가 견 훤(甄 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永嘉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김숙승(金叔承 : 고려 때 공부 시량과 평장사를 역임)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손자이며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둘째 아들이다.

누대(累代)로 안동(安東)에 세거(世居)해 오던 안동 김씨는 숙승(叔承)7세손 방경(方慶)이 해동(海東)의 명장으로 고려사(高麗史)를 수()놓았다. 그는 병부 상서(兵部尙書)와 한림학사를 지내고 중서령(中書令)에 추봉된 효인(孝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음보(蔭補)로 양온서 동정(良醞署同正)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가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1247(고종 34)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이 되었다.

이때 몽고병(蒙古兵)의 침공으로 주민들과 함께 위도(韋島 : 지금의 정주)에 들어가 저수지를 만들고 쓸모없는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게하고 효율적인 물관리로 섬 사람들의 식수관리에 눈부신 업적을 남겼으며, 원종조(元宗朝)에 일어난 삼별초의 난을 평정한 후 1273(원종 14)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원세조(元世祖)의 부름을 받고 원나라에 을어가 금안장(金鞍), 채복(彩服), 금은촛대(金銀錠) 등을 하사받고, 돌아올 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배명되었다.

충렬왕이 즉위하자 도원수(都元帥) 홀독(忽篤)이 이끌고 온 원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대마도를 정벌하고 일본 본토를 공략하려다가 태풍으로 돌아왔다.

특히 그는 충직(忠直)하고 근검했으며 일찍이 그의 어머니가 임신할 때 구름과 안개를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하며 입과 코에서는 항상 운기(雲氣)가 맴돌았다고 한다. 평생 임금의 실책을 말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큰일이 생기면 퇴직 후에도 언제나 걱정했다.

고려말에서부터 조선중기에 이르기까지 명문(名門) 세도가문(勢道家門)으로 지위를 굳혀온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상락군(上洛君) 방경(方慶)의 아들과 손자대에서 크게 융성하여 훌륭한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시켰다.

방경(方慶)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 선()은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냈고, 슬하의 아들 승용(承用 : 보문각 대제학), 승택(承澤 : 중서시랑 평장사를 지내고 영창군에 봉해짐), 승우(承祐 : 상서)가 현달했다.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진 흔(: 방경의 셋째 아들)과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올라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진 순(: 방경의 셋째 아들)도 크게 명성을 떨쳐 가문을 빛냈으며, ()의 아들 영돈(永暾)과 영후(永煦) 형제가 조 적(曺 頔)의 난에 공을 세워 상락부원군(上洛府院郡)과 상락후(上洛候)에 각각 봉인되었다. 중시조(中始祖) 방경(方慶)의 넷째 아들인 논()은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와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에 이르렀다.

한편 대제학(大提學) 승용(承用)의 손자 칠양(七陽)은 가정(稼亭) 이 곡(李 穀)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 등과 성리학을 의논했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강진(康津)에 은거한 후 학문으로 생을 마쳤다.

고려말 정주학(程朱學)의 거두(巨頭)이며 학식과 덕망으로 세인(世人)의 추앙을 받았던 구용(九容)과 공민왕(恭愍王) 때 내사사인(內史舍人)으로 역신 신 돈(辛 旽)을 탄핵하다가 죽음을 당한 제안(齊顔)은 상락군(上洛君) ()의 아들로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아우 구덕(九德)과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었다.가문의 의맥(義脈)을 드높인 사렴(士廉)과 사형(士衡) 형제는 상락백(上洛伯) 영후(永煦)의 손자이자 영삼사사(領三司事)로 상락군(上洛君)에 추봉된 천()의 아들로서 고려의 멸망과 조선의 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가 반대의 길을 걸어갔다.

공민왕초에 문과에 급제한 사렴(士廉)은 벼슬이 문하시랑(門下侍郞)을 거쳐 안렴사(按廉使)에 이르렀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바른 말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명망이 높았으나 고려가 망하자 절의(節義)를 지켜 충청도 청원군(淸原郡) 오창면(梧倉面) 모정리(慕亭里) 도산(陶山)에 은거하여 두문불출하고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다.그는 평소에 한양을 향하여 앉지도 않았으며 수차에 걸쳐 이성계(李成桂)가 좌사간(左司諫)의 벼슬을 주며 불렀으나 불응하며 고려 신하로서 사직을 보존치 못산 천하의 죄인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돌아가서 선왕과 조상을 뵈이랴고 탄식하였으며 임종때 자손들에게 내가 죽거든 심산(深山)에 묻어주고 묘()도 쓰지말고 비석(碑石)도 세우지 말며 후일에 누구의 묘라고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하여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후일 숙종(肅宗)은 그의 충절을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으며 살다 죽었다는 충절(忠節)에 비유하여 <일편도산 만고수양(一片陶山萬古首陽)>이라고 극찬했다고 한다.

옛 친구로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창업에 공을 세운 사형(士衡)은 개국정사일등공신(開國定社一等功臣)으로 상락백부원군(上洛伯府院郡)에 봉해지고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으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한 번도 탄핵을 받은 일이 없었다.

학당공(學堂公) ()의 아들 익정(益精)과 익렴(益廉)의 형제는 학행으로 이름을 떨쳤고 효행이 뛰어나 부모상(父母喪)을 당하자 3년 동안이나 여막(廬幕)에서 시묘(侍墓)하여 나라에서 사액정려(賜額旌閭)를 하였으며, 익정의 손자 수령(壽寧)은 성종(成宗)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어 받으니 대사간(大司諫)으로 글을 올려 아뢰기를 학문을 한다는 것은 배가 물 위에 뜬것과 같으니 날마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날마다 뒤로 물러가게 됩니다하며 매일 경연(經筵)에 나와 시기를 놓치지 않고 공부에 열중하라고 자성(自省)을 촉구하였다.

세조(世祖)때 호조 좌랑(戶曹佐郞)으로경국대전(經國大典)<이전(吏典)>을 수교(讎校)한 유()는 벼슬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고, 지평(持平)을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충갑(忠甲)은 윤 임(尹 任)과 같은 마을에 살았다는 이유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유배(流配) 당햇으며, 제갑(悌甲)은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싸움에서 전사하자 아들 시백(時伯)과 부인 이씨도 따라 순절하여 충절로 가문을 빛냈다.

연산군의 폭정 때 뛰어난 재치로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했던 수동(壽童)은 상락부원군 사형(士衡)의 현손(玄孫)이며 첨지중주부사(僉知中樞府事) ()의 아들이다. 그는 일곱 살 때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글씨에도 뛰어나 특히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무게가 있고 지혜가 많아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기까지 아무도 그를 시비하지 못했다.

수동의 아우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삼등공신(靖國三等功臣)으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진 수경(壽卿)이며, 명종조(明宗朝)의 명신 충갑(忠甲)의 아들 시민(時敏)은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명장(名將) 응하(應河)와 함께 구국(救國)의 충절로 가문의 가백을 살린 인물이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한 시민은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을 때 군사에 관한 일을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건의한 것이 채택되지 않자 그 면전에서 군모를 벗어 땅에 짓밟고 벼슬을 사임한 기백으로 유명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을 구축하고 사천(泗川), 고성(固城),진해(鎭海), 금산(金山) 등지의 싸움에 크게 이겼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혈전인 진주성(晋州城)의 싸움에서 불과 38백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3만의 사상자를 내게 하고 적을 격퇴했으나 소탕한 적병을 순찰하던 중 시체 속에 숨었던 적의 저격으로 이마에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시민은 적탄을 맞은 뒤에도 몸을 돌보지 않고 북쪽을 향해 눈물을 흘리다가 이 달에 마침내 숨을 거두자 진중에서는 적이 알까 해서 발상(發喪)을 하지 못하였다.응하(應河)8척 장사로 소의 뒷다리 하나를 먹었다고 하며 활솜씨와 승마술이 뛰어났다. 1604(선조 37) 무과에 급제하고 광해군(光海君) 때 도원수(都元帥)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만주 요동의 청()의 세력을 제압하여 압록강을 건너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3천 군사를 이끌고 적과 대전하다가 중영(中營)의 고지에 있던 강홍립이 적에게 투항하므로 작전이 무너져 혈전 끝에 패하자 응하는 말을 잃고 걸어서 큰 버드나무를 방패로 활을 쏘아 적병을 무더기로 죽였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적을 베며 적진을 향해 투항한 강홍립을 크게 꾸짖었다. 칼 한 자루로 사방에서 달려드는 오랑캐를 혼자 감당하다가 칼 마저 부러지자 빈주먹으로 육박하며 버티다가 뒤로 숨어들어 적병의 창에 맞아 쓰러졌다.

()나라 신종(神宗)은 조서(詔書)로 응하를 요동백(遼東伯)에 봉하고 처자에게는 백금(白金)을 내리는 한편 차관(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나라에서는 용만(龍灣)에다 사당(祠堂)을 세우고 응하의 화상을 그려 충절을 기렸고 그의 행적과 만사(挽詞)를 기록하여충열록(忠烈錄)을 간행하였다.

문신(文臣) 박정길(朴鼎吉)은 시()를 짓기를 <백길의 심하(深河)와 만길의 산에는 지금까지 모래밭에 피 흔적이 얼룩졌네. 강 위에서 초혼(招魂)하지 말아라. 오랑캐 멸하지 않고는 돌아오지 않으리>

응하의 아우 응해(應海)도 희천 군수(熙川郡守)로 심하(深河)에 형과 함께 나설 것을 청했으나 응하의 만류로 가지못한 것을 애통해 하다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정방산성(正方山城)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스스로 목을 찌르고 쓰러졌다가 비장의 도움으로 다시 소생하자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의 충절은 곧 그의 형 응하에 못지않다고 칭찬하였다.

청백리(淸白吏) 시양(時讓)은 현감(縣監) 인갑(仁甲)의 아들로 1605(선조 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에 올라 향시(鄕試)를 주관하며 시제(詩題)에 왕의 실정(失政)을 풍자한 문제를 출제했다고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좌의정(左議政) ()의 현손 자점(自點)은 광해군(光海君) 말년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으로 대북파(大北派)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을 세워 정사일등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郡)에 봉해지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밖에 조선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관찰사 자행(自行)의 손자 희수(希壽)가 김종직(金宗直)의 신원(伸寃)을 상소하고 그림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해서(楷書)에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중종조(中宗朝)에 저작(著作)으로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비리를 논핵하다가 문의(文義)로 귀양갔던 노()는 조광조(趙光祖)의 구제를 상소하여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명종(明宗) 때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했던 홍도(弘度)는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 중에서도 정치의 폐단을 강력히 간()했고, 김일손(金馹孫), 박 은(朴 誾)과 함게 <삼대문장>으로 일컬어졌다.

한편 홍도(弘度)의 아들 첨(: 호당에 뽑히고 도승지를 역임)과 수(: 호조판서를 거쳐 영중추부사에 오름)도 가문의 문맥(文脈)을 이었고, ()의 아들 성립(誠立)은 유명한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남편으로 임진왜란 때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그외 고려가 망하자 경북 의성군(義城郡) 점곡면(點谷面) 사촌동(沙村洞)에 은거(隱居)했던 자첨(子瞻)의 증손 광수(光粹)가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개탄하여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청빈한 학자로 여생을 마쳤으며, 한말에 와서는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수도방위를 담당했던 선필(善弼)이 유명했다.

자주독립(自主獨立)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고 민권투쟁(民權鬪爭)의 선봉장이었던 백범(白凡) ()는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자랑하는 인물이다.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순영(淳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漢學)을 배우고 1893(고종 30)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했으며 명성황후(明星皇后)의 원수를 갚기위해 일본군 중위(中尉)를 때려 죽인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고종(高宗)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중 탈옥하여 마곡사(麻谷寺)의 중이 되기도 하였다.

그후 임시정부 주석(主席)에 선임되어 민족분단의 평화통일을 위해 앞장서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했고 한독당(韓獨黨) 당수로 있다가 경교장(京橋葬)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쓰러져 1949674세의 생애를 마침으로 충효의열(忠孝義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명문 안동 김씨의 전통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남한에 총 95,735가구, 398,24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는 남한에 총 519,71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김일긍(金日兢) 고려 때 태사(太師) 지냈다.

김이청(金利請) 고려 때 안동 태수(安東太守)를 지냈.

김의화(金義和) 고려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역임했.

김민성(金敏成) 고려 때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했다.

김효인(金孝印) ? 1253 (고종 40)

방경(方慶)의 아버지. 글씨를 잘썼고 1208(희종 4) 문과에 급제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김방경(金方慶) 1212 (강종 1) 1300 (충렬왕 26)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신라 경순왕의 후손, 효인(孝印)의 아들. 고종 때 음보(蔭補)16세에 산원(散員)이 되어 식목녹사(式目錄事)를 겸하고,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서북면 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 형부 상서(形部尙書),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등을 지냈다.

1270년에 장군 배중손(裴仲孫) 등이 승화후(承化候) ()을 왕으로 추대하고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난을 일으키자, 원나라 장군 흔도, 홍다구와 함께 삼별초를 쳐서 난을 완전히 평정했다. 그후 시중(侍中)이 되고 원()나라에 들어가 세조(世祖)로부터 금안(金鞍) 등을 하사받고, 돌아올 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작위를 더 받았다.

1274년 충렬왕이 즉위하자 원나라에서 합포(合浦 : 마산)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고, 일본을 정벌할 때 중군장(中軍將)으로 출정, 25천명의 여원(麗元) 연합군과 함께 쓰시마도(對馬島)를 친 다음 본토로 향하는 도중 풍랑으로 패하고 돌아왔다. 1281(충렬왕 7) 원나라가 다시 일본정벌을 할 때 고려군 도원수로 종군, 일본 이끼도(壹岐島)를 거쳐 하까다(博多)에 이르러 승리를 거두었으나 태풍(颱風)과 적의 기습을 당하여 참패하고 돌아와서, 벼슬을 사양하여 추충정난정원공신(推忠靖難定遠功臣)에 삼중대광(三重大匡), 첨의중찬(添議中贊),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세자사(世自師)로서 치사(致仕)하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충선왕 때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추증되었다.

김 선(金 愃) 고려 때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역임했다.

김 흔(金 忻) 고려 때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를 역임하였으며, 음보(蔭補)로 책정도판관(冊定都判官)을 거쳐 장군이 되었다. 1272년 아버지 방경(方慶)을 따라 삼별초(三別抄)를 토벌하고, 1290년 합단(哈丹)이 쳐들어오자 이를 연기(燕岐)에서 격파했으며, 죽전(竹田)에 이르러 나머지 적들을 소탕, 그 공으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고 뒤에 찬성사(贊成事), 도첨의사사(都僉議司事)에 삼중대광(三重大匡)이 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상락공(上洛公)에 봉해졌다.

김 순(金 恂) 1258 (고종 45) 1321 (충숙왕 8)

자는 귀후(歸厚), 시호는 문영(文英), 방경(方慶)의 아들. 1279(충렬왕 5) 문과(文科)에 급제, 낭장(郎將)에서 학사(學士), 직강(直講)에 전직, 원나라의 일본 정벌 때 종군하고 돌아와 전중시사(殿中侍史)가 되었다.

1297년 좌부 승지(左副承旨), 이듬해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우승지(右承旨),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에 이어 삼사 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312(충선왕 4) 중대광(重大匡),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고, 1316(충숙왕 3)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김 논(金 惀) 고려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다.

김 돈(金 惇)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김승용(金承用) ? 1329 (충숙왕 16)

시호는 충숙(忠肅), 방경(方慶)의 손자, ()의 아들. 문과에 급제, 충숙왕 때 내부령(內府令)을 거쳐 밀직사(密直史)가 되었다.

김승택(金承澤) ? 1358 (공민왕 7)

시호는 양간(良簡), 방경(方慶)의 손자, ()의 아들. 영창군(永昌君)에 봉해지고, 1342(충혜왕 복위 3) 앞서 조 적(曺 頔)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2등공신이 되었다. 1352(공민왕 1) 이제현(李齊賢), 한종유(韓宗愈) 등과 서연관(書筵官)이 되고, 이어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했다.

김승우(金承祐) 고려 때 상서(尙書)를 지냈다.

김승고(金承固) 고려 때 숭복도감 판관(崇福都監判官)을 역임했다.

김영돈(金永暾) 자는 나해(那海), 호는 균헌(筠軒), 시호는 문숙(文肅).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였으며, 1342(충혜왕 복위 3) 조 적(曺 頔)의 난 때 시종한 공으로 1등공신이 되고 상락부원군(上洛府院郡)에 봉해졌다.

김영휘(金永暉) 고려 때 상서(尙書)에 이르렀다.

김영후(金永煦) 1292 (충렬왕 18) 1361 (공민왕 10)

호는 온재(穩齋), 시호는 정간(貞簡), 방경(方慶)의 손자, ()의 아들. 여러 벼슬을 거쳐 충숙왕 때 삼사우윤(三司右尹)이 되고, 1341(충혜왕 복위 2) 사신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2년에는 앞서 심양왕(瀋陽王) ()의 모반에 쫓지 않고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시종(侍從)한 공으로, 추성보절동덕익찬공신(推誠保節同德翊贊功臣)으로 삼사 좌사(三司左使)가 되었다. 이어 제조정방(提調政房), 좌정승(左政丞), 우정승(右政丞)을 역임했으며, 1352(공민왕 1) 복창부원군(福昌府院郡)에 봉해졌다.

김영조(金永照) 고려 때 호조 전서(戶曹典書)를 지냈다.

김영요(金永曜) 고려 때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을 역임했다.

김 후(金 厚) 고려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지냈으며, 이어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김 구(金 玖) 고려 때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에 이르렀다.

김 묘(金 昴)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김 면(金 冕) 고려 때 안렴사(安廉使), 낭장(郎將) 등을 지냈다.

김지연(金之衍) 고려 때 좌윤(左尹)을 지냈다.

김지서(金之瑞) 고려 때 도첨의부사(都僉議府事)를 역임했다.

김 진(金 縝) 고려 때 판자혜원사(判慈惠院事)를 지냈다.

김 행(金 荇) 고려 때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역임했다.

김 천(金 蕆) 고려 때 염삼사사(領三司事)를 지냈으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김 장(金 萇) 고려 때 감찰사 장령(監察司掌令)을 지냈다.

김 행(金 杏) 고려 때 검교중추원사(檢校中樞院事)에 이르렀다.

김 송(金 松) 고려 때 총랑(摠郞)을 역임했으며,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되었다.

김 백(金 栢)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했다.

김칠우(金七祐) 고려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냈다.

김칠림(金七霖) 고려 때 개성윤(開城尹)에 이르렀다.

김칠양(金七陽) ()는 강온(康穩). 고려(高麗) 때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역임했다.

김성목(金成牧) 고려 때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길수 없다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인 충남 연기(燕岐)에서 은거했다.

김천순(金天順) 고려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했다.

김구용(金九容) 1338 (충숙왕 복위 7)1384 (우왕 10)

초명은 제민(齊閔), 자는 경지(敬之), 호는 척약재(惕若齋), 상락군(上洛君) ()의 아들.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 주부(德寧府主簿)를 거쳐 민부 의랑(民部義郞)겸 성균직강(成均直講)이 되었다.

친명파(親明派)로서 1375(우왕 1) 삼사 좌윤(三司左尹)으로 있을 때 이숭인, 정도전(鄭道傳), 권 근(權 近) 등과 북원(北元)에서 온 사신의 영접을 반대하다가 죽주(竹州)에 유배되었고, 1381(우왕 7)에 풀려나와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가 되고, 이듬해 대사성, 이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를 지냈다.

김제안(金齊顔) ? 1368 (공민왕 17)

 

 자는 중현(仲賢), 방경(方慶)의 증손, 상락군(上洛君) ()의 아들. 구용(九容)의 아우. 문과에 급제하고 1366(공민왕 15) 군부 좌랑(軍部佐郞)으로서 전녹생(田祿生)의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하남왕(河南王) 쿼쿼티 무르(擴廓帖木儿)에게 사신으로 가던 도중, 연경(燕京)에 이르렀으나 양국 수교에 반대하는 원나라 황태자에 의한 귀환 명령이 내렸다. 이에 녹생을 돌려보낸 후 병을 핑계하여 연경에 머물다가 홀로 하남에 가서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하남왕의 상주(上奏)에 의하여 중서 병부 낭중(中書兵部郎中) 추밀원사(樞密院使)를 지냈다.

김구덕(金九德) ? 1428 (세종 10)

시호는 안정(安靖), 상락군(上洛君) ()의 아들. 19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가 연안 부사(延安府使),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에 올랐다. 1401(태종 1) 딸이 태종의 명빈(明嬪)이 되자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부윤(漢城府尹), 강원도 관찰사,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등을 역임햇으며, 뒤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구정(金九鼎) 고려 때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지냈다.

김 윤(金 潤) 고려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 유(金 儒) 고려 때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김익달(金益達) 1380(우왕 6) 문과에 급제하고, 좌부 대언(左副代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 등을 거쳐 지공조사(知工曹事)에 이르렀다.

김 장(金 場) 고려 때 판삼사(判三司)를 지냈다.

김사겸(金士謙) 고려 때 판사(判事)를 역임했다.

김사렴(金士廉) 자는 공직(公直), 호는 오은(梧隱), 방경(方慶)의 손자. 문장에 능하여 공민왕 초엽 문과에 급제, 정몽주(鄭夢周), 이 색(李 穡)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이름을 떨쳤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청주(淸州)에 은퇴, 태조에 의해 수차에 걸쳐 좌사간(左司諫)에 기용되었으나 거절한 후 도산(陶山)에 가서 살았다.

김사안(金士安) ? 1391 (공양왕 2) 시호는 충강(忠康), 영후(永煦)의 손자. 창왕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이 색(李 穡), 이숭인(李崇仁)과 함께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공양왕 때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사형(金士衡) 1333 (충숙왕 복위 2) 1407 (태종7)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영후(永煦)의 손자. ()의 아들.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 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1377(우왕 3) 집의(執義), 개성부윤(開城府尹), 1390(공양왕 1) 밀직사(密直史)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특진, 뒤에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 : 태조)를 추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1398(태조 7) 1차 왕자의 난에는 장자(長子)에게 선위(禪位)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다. 이어 판문하부사(門下府事), 좌정승(左政丞),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지냈으며, 부원군(府院郡)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김 수(金 綏) 고려 때 서운관정(書雲觀正)을 지냈다.

김 길(金 吉) 고려 때 판서(判書)를 역임했다.

김 철(金 哲) 호는 양파(陽坡). 고려말에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을 지내고,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졌으며, 1392년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 이어 공조(工曹), 예조(禮曹)의 판서를 역임했다.

김 달(金 達) 고려조에서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

김천검(金天儉) 고려 때 유수(留守)를 지냈다.

김 승(金 陞) 조선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김 질(金 晊) 조선 때 집의(執義)에 이르렀다.

김성경(金成景) 호는 삼림(三林). 1373(공민왕 22) 진사(進士)가 되고, 그후 중랑장(中郞將), 관군백호 병마절도사(管軍百戶兵馬節度事) 등을 역임, 1408(태종 8) 안동군(安東君)에 봉해졌다.

김성호(金成浩) 호는 삼산(三山). 조선 때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다.

김종숙(金宗淑)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김자행(金自行) 자는 안이(安而).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를 지냈다.

김익정(金益精) 자는 자배(子裴). 1396(태조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1435(세종 17) 동지총제(同知摠制), 경창 부윤(慶昌府尹)이 되고, 이어 이조(吏曹), 형조(刑曹), 예조(禮曹)의 참판 등을 역임했다.

김익렴(金益廉) 1408(태종 8)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을 역임했다.

김 고(金 顧) 자는 경보(警甫). 1408(태종 8) 수령부승(壽寧府承)으로서 문과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사간(司諫)을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 진(金 鎭) 1414(태종 14) 문과에 을과(乙科) 3등으로 급제,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김 돈(金 墩) 1385 (우왕 11) 1440 (세종 22)

방경(方慶)의 후손. 1417(태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428(세종 10) 왕명으로서한이하 역대보계도(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撰進), 1434(세종 16)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으로 있을 때 동활자(銅活字)인 갑인자(甲寅子)의 주조(鑄造)에 참여했으며, 세종의 명으로 김 조(金兆)와 함께 간의대(簡儀臺), 보루각(報漏閣)을 만들었다. 승지(承旨)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김맹헌(金孟獻) 1426(세종 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김계우(金季友) 1436(세종 18)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사인(舍人)을 지냈다.

김 환(金 丸) 1442(세종 24) 사정(司正)으로서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판교(判校)를 지냈다.

김 질(金 礩) 1422 (세종 4) 1478 (성종 9)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종숙(宗淑)의 아들. 청음에 충의위(忠義衛)에 보직. 1450(세종 32)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뒤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 수찬(集賢殿修撰)에 뽑혔고, 성삼문(成三門), 최 항(崔 恒),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사예(司藝)가 되고, 공조 판서,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1468(세조 13) 우의정에 승진, 이어 좌의정이 되고, 이해 세조가 죽자 원상(院相)으로 서정(庶政)을 처리했으며, 1469(예종 1) 부원군(府院郡)에 진봉(進封)되었다.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이 되고, 1474년 우의정으로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했다.

김 적(金 磧) 자는 자고(子高),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김 무(金 碔) 자는 미보(美甫). 벼슬이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고,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풍양군(豊陽君)에 봉해졌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김수령(金壽寧) 1437 (세종 19) 1473 (성종 4)

자는 이수(頤叟), 호는 소양당(素養堂), 시호는 문도(文悼), ()의 아들. 1453(단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여러 벼슬을 거쳐 1471(성종 2) 좌승지(左承旨), 공조 참의(工曹參議) 등을 지내고 복창군(福昌君)에 봉해졌으며,세조, 예종의 실록(實錄)편찬에 참여하고 뒤에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김 한(金 漢) 1453(단종 1) 승의랑(承議郞)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고, 직강(直講)을 지냈다.

김자정(金自精) 자는 순서(純瑞), 호는 금백(金白).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

김 유(金 紐) 1420 (세종 2) ?

자는 자고(子固), 호는 금헌(琴軒)취헌(翠軒)쌍계재(雙溪齋)관후암(觀後庵), 방경(方慶)의 후손. 1464(세조 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1466년 발영시(拔英試), 같은 해 등준시(登俊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어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충청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대사헌이조 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했다.

김중연(金仲演) 자는 공량(公亮). 1466(세조 11) 진용교위(進勇校尉)로서 강원도 고성시(高城試) 문과에 3등으로 급제, 설서(說書), 공조 좌랑(工曹佐郞), 군수(郡守) 등을 역임하였다.

김숙연(金叔演) 자는 유량(유량).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서형(金瑞亨) 일명 극해(克諧). 1471(성종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작(金 碏) 1427 (세종 9) 1488 (성종 19)

자는 위경(衛卿), 호는 상곡(相谷), 시호는 효소(孝昭), 정승(政丞) 사형(士衡)의 증손. 1447(세종 29)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1477(성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병조 참지(兵曹參知) 등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김수동(金壽童) 1457 (세조 2) 1512 (중종 7)

자는 미수(眉叟), 호는 만보당(晩保堂), 시호는 문경(文敬), ()의 아들. 147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종 때에 정자(正字), 사인(舍人) 등을 역임했다. 연산군 초에 전라, 경상, 경기도의 관찰사를 거쳐 형조 판서 등을 지냈으며, 1505년 우찬성(右贊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우의정에 이르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으로 좌의정에 승진하고 영가부원군(永嘉府院郡)에 봉해졌으며, 1510(중종 5) 영의정에 올랐다.

김수경(金壽卿) 자는 이수(頤叟), 호는 양한재(養閒齋), 수동(壽童)의 동생. 1498년 사평(司評)이 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참여,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으로 영안군(永安君)에 봉해지고, 병조 참지(兵曹參知)가 되었으며, 1519(중종 14) 영흥 부사(永興府使)가 되고, 장단(長湍), 연안(延安)의 부사를 거쳐 1523년 이천 부사가 되었다.

김귀서(金龜瑞) 자는 상백(祥伯).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을 역임했다.

김 질(金 質) 1496 (연산군 2) 1561 (명종 16)

자는 문소(文素), 호는 영모당(永慕堂), 복중(福重)의 아들. 지극한 효자로 부친상을 당하자, 제사 때 꿩이 부엌에 날아들어 이를 제물로 썼다 하며, 48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廬幕)에 사는데 밤새 한 길이 넘게 눈이 내렸으나 여막 둘레만 내리지 않아 이에 탄복한 사람들이 그곳을 제청산(祭廳山)이라 불렀고, 김인후(金麟厚)는 그의 서재를 영모당(永慕堂)이라 이름지었다. 당시의 선비인 기대승(奇大升), 양응정(梁應鼎) 등이 모두 그와 교유했다. 사후 고향에 효자정문(孝子旌門)이 세워졌다.

김연수(金延壽) 자는 이용(而庸). 1483(성종 14) 춘장문과(春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다.

김의동(金義童) 시호(諡號)는 길안군(吉安君). 조선 때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성동(金誠童) 자는 명보(明甫). 1492(성종 23)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부평 부사(富平府使)에 이르렀고,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김광수(金光粹) 1468 (세조 13) 1563 (명종 18)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1501(연산군 7)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 볼 뜻이 없어 고향 의성(義城)에서 시가(詩歌)로써 청빈하게 생애를 보냈다.

김공량(金公亮) 자는 필지(弼之), 호는 양곡(楊谷). 조선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했다.

김공석(金公奭) 자는 주경(周卿). 1507(중종 2) 무과에 급제, 호조(戶曹)공조(工曹)형조(刑曹)의 참의(參議)를 거쳐 강릉 부사(江陵府使), 포도대장(捕盜大將),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럿다.

김공망(金公望) 1482 (성종 13) ?

자는 위수(渭叟), ()의 아들. 1506(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목사(牧使)에 올랐으며,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김공예(金公藝) 자는 중아(仲雅). 1513(중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보덕(輔德)전한(典翰)직제학(直提學)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하과, 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다.

김 식(金 湜) 자는 자심(子深), 호는 치은(治隱). 1506(중종 1)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령(掌令) 등을 역임했다.

김백내(金白匂) 자는 중보(重寶), 호는 십경(十景).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에서 통사랑(通仕郞)훈도(訓導)직장(直長) 등을 지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이 있어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 1등이 되었고, 마량진 수군첨절제사(馬梁鎭水軍僉節制使)에 올랐다.

김인명(金麟明) 자는 백소(伯昭) 1507(중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희수(金希壽) 1475 (성종 6) 1527 (중종 22)

자는 몽정(夢禎), 호는 유연재(悠然齋), 자행(自行)의 손자. 1507(중종 2) 참봉(參奉)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이 되고, 지평(持平)장령(掌令)을 거쳐 1523년 도승지(都承旨)에 승진, 1527년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김인상(金麟祥) 자는 상지(祥之). 1513(중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병조 정랑(兵曹正郞)겸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지냈다.

김 익(金 釴) 1484 (성종 15) ?

자는 군거(君擧), 언홍(彦弘)의 아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1545(인종 즉위) 전생서 주부(典牲暑主簿)를 거쳐 용담 현령(龍潭縣令)이 되었다.

김 언(金 漹) 자는 호원(浩源), 1521(중종 16) 문과에 급제, 원주 목사(原州牧使), 나주 목사(羅州牧使) 등을 역임하고, 1550(명종 5) 판결사(判決事)가 되었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 노(金 魯) 1498 (연산군 4) 1548 (명종 3)

자는 경삼(景參), 호는 동고(東皐), 희수(希壽)의 아들. 1525(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자 등을 거쳐 직제학(直提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 주(金 澍) 1512 (중종 7) 1563 (명종 18)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菴), 시호는 문단(文端), 안원군(安原君) 공량(公亮)의 아들. 1539(중종 3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내외직을 역임한 후 전라도, 경상도의 관찰사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1590(선조 23)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화산군(花山君)에 추봉되었다.

김덕용(金德龍) 자는 운보(雲甫), 호는 격곡(駱谷). 1546(명종 1)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 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고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김충갑(金忠甲) 자는 서초(恕初), 호는 구암(龜岩). 1546(명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헌납(獻納)북평사(北評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거쳐 사예(司藝)를 지냈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고 상락군(上洛君)에 추봉(追封)되었다.

김억령(金億齡) 자는 중노(仲老). 1552(명종 7) 문과에 급제, 좌승지(左承旨), 지제교(知製敎) 등을 거쳐 강원도, 황해도의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효갑(金孝甲) 자는 행초(行初). 1553(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다.

김제갑(金悌甲) 1525 (중종 8) 1592 (선조 25)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 시호는 문숙(文肅), ()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으로서 1553(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55년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가 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 정언(正言),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589년 창성 부사(昌城府使)가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 목사(原州牧使)로 왜장(倭將) 모리(森吉成)의 군사가 쳐들어오자 관, 의병(官義兵)을 이끌고 싸우다가 전사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 부활위원회(江原道愛國愛族復活委員會)에 의해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비(忠烈碑)가 세워졌다.

김덕곤(金德鵾) 자는 성보(成甫). 1553(명종 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역임했다.

김홍도(金弘度) 1524 (중종 19) 1557 (명종 12) 자는 중원(重遠), 호는 남봉(南峰), ()의 아들. 1548(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경연관(經筵官)을 지냈으며, 뒤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언침(金彦沉) 자는 정중(靜仲). 1548(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형조 참의(刑曹參議), 감사(監司) 등을 역임하였다.

김 인(金 轔) 자는 군발(君發). 1552(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을 지냈다.

김 방(金 昉) 자는 명원(明遠). 1567(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봉상시정(奉常寺正), 부사(府使) 등을 역임했다.

김 찬(金 瓚) 1543 (중종 38) 1599 (선조 32)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菴), 시호는 효헌(孝獻), 언침(彦沈)의 아들. 1567(명종 2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좌승지(左承旨), 대사간(大司諫)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대사헌으로서 선조를 호종(扈從)했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대사헌이조 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1596년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낸 후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다.

김수남(金壽男) 자는 인보(仁甫). 1574(선조 7) 무과에 급제, 함경도 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都事)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김 담(金 曇) 조선 때 무과에 급제, 재령 현감(載寧縣監)을 지내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시민(金時敏) 1554 (명종 9) 1592 (선조 25)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 충갑(忠甲)의 아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 1591년 전주 판관(全州判官)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죽은 목사(牧使)를 대신하여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목사로 승진되었다. 이어 진해(鎭海) 등지에서 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都事)에 올라 부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했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추록되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뒤에 영의정, 상락부원군(上洛府院郡)에 추증되었다.

김시회(金時晦) 자는 양오(養吾), 호는 양진재(養眞齋). 1567(명종 22) 무과에 급제하고, 여러 내외직을 거쳐 부평 부사(富平府使)를 지냈다.

김제현(金齊賢) ()는 사백(思伯). 1570(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개성 경력(開城經歷),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김 수(金 睟) 1537 (중종 32) 1615 (광해군 7)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시호는 소의(昭懿), 홍도(弘度)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인. 1578(선조 11)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홍문관 교리(弘文錧校理), 직제학(直提學), 승지(承旨)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어 부제학(副提學), 대사헌, 병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했으며, 1591년 다시 경상도 관찰사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우참찬(右參贊)호조 판서를 지내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 첨(金 瞻) 자는 자첨(子瞻), 호는 하당(荷塘). 1576(선조 9) 선무랑(宣務郞)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2년 교리(校理)를 거쳐 뒤에 도승지(都承旨)에 이르렀다.

김성립(金誠立) 1562 (명종 17) 1592 (선조 25)

자는 여견(汝見), 여현(汝賢), 호는 서당(西堂), ()의 아들.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남편. 1589(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했으며,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을 지냈다.

김 흠(金 欽) 자는 거경(居敬), 1583(선조 16) 직장(直長)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청주목사(淸州牧使),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김직재(金直哉) 자는 경어(景魚). 1585(선조 1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박사(博士) 등을 역임하였다.

김시헌(金時獻) 자는 자징(子徵), 호는 애헌(艾軒). 1588(선조 2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1597년 좌부승지(左副承旨), 충청도 관찰사(忠淸都觀察使)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우승지(右承旨),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선조(宣祖)가 죽은 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선조실록(宣祖實錄)편찬에 참여, 1611(광해군 3)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거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김시약(金時若) 1596(선조 29) 괴산(槐山) 선봉장(先鋒將)으로 창의병(倡義兵)을 거느리고 각지에서 왜적을 격파, 관찰사(觀察使)의 천거로 별장(別將)에 발탁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에 성이 함락되어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적에게 포로가 되어 죽었다. 1683(숙종 9) 정문(旌門)이 세워지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시백(金時伯) 자는 자장(子長).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역임했다.

김정립(金正立) ()는 노은(老隱). 조선(朝鮮) 때 대흥 군수(大興郡 守)를 지냈다.

김대래(金大來) 1564 (명종 19) 1608 (선조 41)

초명은 대유(大猷), 자는 희태(希泰), ()의 아들. 1590(선조 23) 중고아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 장령(掌令), 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했다.

김 치(金 緻) 1577 (선조 10) 1625 (인조 3)

자는 사정(士精), 호는 남봉(南峰), 심곡(深谷), 시민(時敏)의 양자. 1597(선조 3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설서(說書)를 지내고, 광해군 때 사복시정(司僕寺正), 이조 참의(吏曹參議), 동부승지(同副承旨), 대사간을 거쳐 병조 참지(兵曹參知), 경상도 관찰사를 지냈다.

김득신(金得臣) 1604 (선조 37) 1684 (숙종 10)

자는 자공(子公), 호는 백곡(栢谷), 귀석산인(龜石山人), 시민(時敏)의 손자, ()의 아들.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이 되고,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안풍군(安豊君)을 습봉(襲封)했다.

김정일(金鼎一) 자는 의중(義仲). 1599(선조 32) 선교랑(宣敎郞)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냈다.

김시양(金時讓) 1581 (선조 14) 1643 (인조 21)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시호는 충익(忠翼), 인갑(仁甲)의 아들. 1605(선조 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예조 좌랑(禮曹佐郞), 병조 정랑,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경상도,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1631(인조 9) 병조 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 사도체찰사(四都體察使) 등을 겸임했으며, 1641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할 때 판중추부사 겸 판춘추관사로서 이에 참여했다.

김응하(金應河) 1580 (선조 13) 1619 (광해군 11)

자는 경의(景義), 시호는 충무(忠武), 방경(方慶)의 후손. 1604(선조 37) 무과에 급제하여 삼수 군수(三水郡守), 북우후(北虞侯) 등을 역임하고, 1618(광해군 10) 건주위(建州衛)를 치기 위해 명나라에서 원병을 청하자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만주로 출정, 3천의 조선군으로 6만의 적군과 대전하다가 전사했다.

김응해(金應海) 1588 (선조 21) 1666 (현종 7)

자는 군서(君瑞), 방경(方慶)의 후손, 응하(應河)의 아우. 1616(광해군 8) 무과에 급제, 1620년 강계부사(江界府使), 이어 인동(仁同), 정주(定州)의 부사를 역임했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별장(別將)을 지냈으며, 1647년 어영대장(御營大將)에 올랐다.

김경운(金慶雲) 조선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천 부사(宣川府使)를 지냈으며, 안현(鞍峴)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뒤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김 희(金 憙) 자는 여구(汝懼). 1610(광해군 2) 문과에 급제, 형조(刑曹), 이조(吏曹)의 좌랑(佐郞)을 거쳐 장흥 부사(長興府使)를 역임했다.

김상윤(金相潤) 자는 수부(睟夫). 1610(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시정()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 욱(金 頊) 자는 여신. 1610(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김 적(金 適) 자는 선오(善吾). 1610(광해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 호(金 昈) 자는 회보(晦甫). 1610(광해군 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을 지냈다.

김 회(金 淮) 자는 여수(汝收). 1612(광해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역임했다.

김 언() 1589 (선조 22) 1636 (인조 14)

자는 여윤(汝潤), 시호는 민숙(愍肅), 낙서(洛瑞)의 아들. 이 이(李 珥)의 문인. 1615(광해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된 뒤 폐모론(廢母論)에 가담하지 않아 6,7년 뒤 겨우 봉상시 주부(奉常寺主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낭관(郎官)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서 흩어진 관병을 이끌고 관찰사 홍명구(洪命耈)에게 예속시켰다.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김 경(金 絅) 자는 사장(士章). 1615(광해군 7) 별좌(別座)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김 구(金 榘) 자는 방숙(方叔). 1615(광해군 7) 선교랑(宣敎朗)으로서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예조 좌랑(禮曹佐郞) 등을 거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 확(金 矱) 자는 정경(正卿), 호는 금사(金沙). 1618(광해군 10) 참봉(參奉)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상의원정(商衣院正),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김 연(金 璉) 자는 여곡(汝哭), 1621(광해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김 진(金 瑨) 자는 여헌(汝獻). 1623(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통례(通禮), 부사(府使) 등을 역임하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효건(金孝建) ()는 경옹(警翁). 1624(인조 2) 현감(縣監)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김태기(金泰基) 자는 형숙(亨叔). 1627(인조 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을 지냈다.

김 소(金 素) 자는 지백(知白), 호는 양졸와(養拙窩). 1635(인조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644년 성절사(聖節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왓으며, 뒤에 호조(戶曹)형조(刑曹)의 참의(參議)황해도충청도의 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 진(金 振) 자는 군왕(君王), 호는 낙봉(駱峯). 1635(인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지(承旨)를 거쳐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김이경(金以鏡) 자는 약회(若悔), 호는 졸재(拙齋). 1636(인조 14) 참봉(參奉)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김 경(金 坰) 자는 숙평(叔平). 1637(인조 15) 서령(署令)으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령(掌令),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김 휘(金 徽) 1607 (선조 40) 1677 (숙종 3)

자는 돈미(敦美), 호는 사휴정(四休亭), 만은(晩隱), 시양(時讓)의 아들. 1642(인조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봉교(奉敎)가 되었고, 1649(인조 27) 부수찬(副修撰)사간(司諫)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대사헌을 거쳐 1675(숙종 1) 이조 판서, 이듬해 예조판서가 되었다.

김자점(金自點) ? 1651 (효종 2)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5대손. 성 혼(成 渾)의 문인.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

인조반정 후 호조 좌랑(戶曹佐郞)에 이어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진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었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636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40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가 되고, 이어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 : 인조의 서녀)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으며, 1642(인조 20) 병조 판서에 승진, 1644년 좌의정으로 낙흥부원군(洛興府院郡)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김 식(金 鉽) 자는 정경(鼎卿). 1644(인조 22) 사과(司果)로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김 환(金 奐) 자는 연명(然明).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교리(校理)를 거쳐 사간(司諫)을 지냈다.

김성좌(金聖佐) 자는 임경(任卿). 1663(현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거쳐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정하(金正夏) 자는 자행(子行). 1675(숙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정언(正言), 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김귀만(金龜萬) 자는 원서(元瑞). 1678(숙종 4) 문과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시경(金始慶) 자는 선여(善餘). 1682(숙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군수(郡守)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세익(金世翊) 자는 양경(亮卿). 1686(숙종 12)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감사(監司)에 이르렀다.

김두남(金斗南) 자는 일경(一卿). 1687(숙종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헌납(獻納)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뽑혔다.

김 전(金 戩) 자는 여원(汝原), 호는 어고(於考). 1689(숙종 1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사예(司藝)를 지냈다.

김 환(金 鍰) 자는 자중(子中), 호는 낙애(樂涯). 1691(숙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인지(金麟至) 자는 성응(聖應). 1699(숙종 25) 서윤(庶尹)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김중희(金重熙) 1710(숙종 36) 통덕랑(通德郞)으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보덕(輔德)을 지냈다.

김중원(金重元) ? 1716 (숙종 42)

자는 선경(善卿), 응해(應海)의 증손. 24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 삼도 통제사(三道統制使)에 이르렀다. 이때 군기(軍紀)를 바로잡고 해현창(解縣倉)을 설치하여 어민(漁民)의 생활을 윤택케 했으므로 군민(郡民)이 비()를 세워 칭송했다.

김도응(金道應) 자는 행언(行彦). 1711(숙종 3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회인 현감(懷仁縣監)을 지냈다.

김서구(金瑞龜) 자는 국서(國瑞). 1721(경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정랑(正郞)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 호(金 浩) 자는 석직(石直). 1722(경종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 부윤(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김 성(金 聲) 자는 명원(鳴遠). 1723(경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양사(兩司)의 벼슬을 거쳐 통례원 좌통례(通禮院佐通禮)에 이르렀다.

김오응(金五應) 자는 군서(君瑞). 1723(경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병조좌랑(兵曹佐郞), 현감(縣監) 등을 역임했다.

김변광(金汴光) 1694 (숙종 20) ?

자는 경실(景實), 귀만(龜萬)의 손자. 1723(경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 용강 현령(龍岡縣令)을 거쳐 1765(영조 41)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천주(金天柱) 자는 격여(擊汝), 호는 주민(晝眠). 1728(영조 4) 이인좌(李麟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우 천장(天章), 아들 성옥(聲玉)등과 함께 의거(義擧), 난군(亂軍) 수십 명을 죽이고 적탄에 맞아 순사(殉死)했다. 철종(哲宗) 때 일문사충(一門四忠)의 정려(旌閭)가 명해졌다.

김광국(金光國) 1685( 숙종 11) ?

자는 대관(大觀), 준원(俊元)의 현손, ()의 아들. 1735(영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지내고 1757년 황주 목사(黃州牧使), 1769년 도승지(都承旨), 이어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냇다.

김회원(金會元) 자는 사혼(士渾). 1751(영조 2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필선(弼善)을 지냈다.

김복원(金復元) 자는 정지(貞之), 호는 인와(忍窩). 1765(영조 41)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 좌랑(吏曹佐郞), 감찰(監察), 정언(正言) 등을 거쳐 성환도 찰방(成歡道察訪)을 지냈다.

김종덕(金宗德) ? 1785 (정조 9)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53(영조 29) 생원(生員)에 합격, 1779(정조 3)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김항광(金恒光) 1773(영조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종경(金宗敬) 1774(영조 50) 전시문과(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장령(掌令) 등 양사(兩司)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김종발(金宗發) 자는 숙미(叔美). 1777(정조 1) 전시문과(殿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 등을 지냈다.

김우국(金遇國) 자는 사범(士範). 1782(정조 6) 전시문과(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을 지냈다.

김명저(金明著) 1786(정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김 경(金 憬) 자는 경심(景心). 1789(정저 1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김수신(金秀臣) 자는 사길(士吉). 1796(정조 20) 전시문과(殿試文科)에 장원하여 정언(正言) 등을 역임하였다.

김유헌(金裕憲) 호는 추산(秋山). 1804(순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김회명(金會明) 자는 광지(光之), 호는 석공(石公).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참봉(參奉)을 거쳐 사과(司果) 때인 1844(헌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김정호(金正浩) 1867(고종 4) 식년전시문과(式年殿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지냈다.

김희유(金羲裕) 호는 사촌(思村). 1835(헌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역임하였다.

김선필(金善弼) 1807 (순조 7) 1883 (고종 20)

자는 중필(仲弼), 정기(鼎基)의 아들. 1829(순조 29) 무과에 급제, 전라도 충정도의 병마절도사를 역임. 1866(고종 3)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부평만(富平灣)에 진을 친 선봉장(先鋒將) 이용희(李容熙)의 우익(右翼)으로 수도 방위를 담당했으며, 이어 진무 중군(鎭撫中軍)이 되고, 1882(고종 19) 지삼군사(知三軍事)를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김 구(金 九) 1876 (고종 13) 1949

아명(兒名)은 창암(昌巖), 초명은 구(), 창수(昌洙), 호는 백범(白凡), 초호는 연하(蓮下), 순영(淳永)의 아들. 15세에 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3(고종 30) 동학(東學)에 입교, 이듬해 해주에서 동학혁명(東學革命)을 지휘하였고, 일본군에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했다가 1896년 귀국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는다고 일본 육군 중위 쓰찌다(土田壤亮)를 살해, 체포되어 복역중 1898(광무 2) 탈옥, 1903(광무 7) 기독교에 입교했다.

3, 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과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 당수가 되어 항일 무력 활동을 지휘했다. 1933년 남경(南京)에서 장개석(蔣介石)을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일 전후방책을 협의했고, 1935년 한국 국민당(韓國國民黨)을 조직했으며, 1944년 임시정부편 광복군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훈련을 실시하다가 8, 15해방으로 귀국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 성명을 반대하여 반탁운동(反託運動)을 전개했다. 1948년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南北協商)을 제창, 북한에 가서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그 후 정부 수립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했다.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 1962년 대한민국 건구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