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7-03-27 16:52 수정일 : 2020-03-31 12:3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始祖) 김선평(金宣平)은 신라말(新羅末) 고창군(古昌郡) 성주(城主)로서 서기 930년(고려 태조 13) 권행(權幸)․장길(張吉) 등과 함께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을 정벌하는데 공(功)을 세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 태사 아부(三重大匡太師亞父)의 벼슬에 이르렀다.
안동(安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고타야국(古陀耶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견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榮可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그로부터 문호(門戶)를 개방한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부정(副正) 습돈(習敦)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원손(遠孫) 계행(係行)이 조선(漕船) 성종(成宗) 때 대사간(大司諫)에 오른 것을 기점으로 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고 왕실(王室)의 외척(外戚)이 되어 세도가문(勢道家門)의 지위를 굳혔다.
계행(係行)의 증손(曾孫) 영(瑛)은 중종(中宗) 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화(禍)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케 했으며, 그의 아우 번(璠)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거쳐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나가 치적(治績)을 쌓았다.
광해군(光海君) 때 좌의정(左議政) 정유길(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던 극효(克孝)는 번(璠)의 손자로 글씨에 일가(一家)를 이루었고, 그의 아들 5형제 중 장자(長子) 상용(尙容)과 막내 상헌(尙憲)이 뛰어났다.
일찍이 석학(碩學)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한 상용(尙容)은 인조(仁祖) 때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원임대신(原任大臣)으로서 강화도(江華島)에 들어갔다가 성(城)이 함락되자 입었던 옷을 벗어 하인에게 주며 이르기를 “네가 만일 살거던 이 옷을 내 아이들에게 전하여 뒷날 허장(虛葬)하는 제구로 쓰도록 하라” 하고 남문으로 가서 화약궤에 걸터 앉자 측근에게 “가슴이 답답하여 담배가 피우고 싶으니 불을 가져오너라” 하여 화약에 불을 던졌다. 그의 손자(孫子) 수전(壽全)이 나이 13세로 곁에 있었는데 종에게 안고 가라고 명하였으나 아이는 옷을 잡아 당기며 울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죽겠습니다” 하며 가지 않아 종과 함께 모두 죽었다.
상용의 아우 상헌(尙憲)은 백부(伯父)인 대효(大孝)에게 출계(出系)하였으며 선조조(宣祖朝)에서 정시문과(庭試文科)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급제하여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다.
그는 관직에 있는 동안 강직하기로 이름이 나서 관민들이 아예 부정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어느날 조회때 장약관(掌藥官) 박시량(朴時亮)이 나라에서 금한 대분투(大分套 : 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겉에 신는 덧신)를 신었으며 부자(富者) 장현(張炫)은 집을 짓는데 부연(附椽 : 장연 끝에 덧 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을 하다가 대사헌(大司憲)으로 있던 상헌이 옥에 가두자 시량의 처자가 영의정(領議政) 오윤겸(吳允謙)에게 가서 모숨을 살려 줄 것을 청하였는데 윤겸이 말하기를 “비록 내 아들이 법을 범하였더라도 김공은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어찌 감히 부탁할 생각을 하겠느냐” 하며 마음으로 매우 불쌍하게 여겼지마는 끝내 구해주지 못했으며, 한 왕족(王族)의 공자(公子)가 산정(山亭)을 짓는데 나라에서 금한 둥근 기둥을 세웠다가 상헌이 대사헌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곧 기둥을 깎아서 모나게 하였다고 한다.
상용(尙容)의 아들 광현(光炫)은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으로 과거를 단념햇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일(遺逸) 천거되어 연원도 찰방(連源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였고,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있으면서 아버지 상용(尙容)의 유지를 받들어 청(淸)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을 하지 않았다.
한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재중흥을 일으킨 수증(壽增)․수흥(壽興)․수항(壽恒) 3형제는 우의정 상헌(尙憲)의 손자(孫子)이며 광찬의 아들들이다.
효종(孝宗) 때 생원(生員)으로 형조(刑曹)와 공조 정랑(工曹正郞)을 지낸 수증(壽增)은 숙종(肅宗)이 즉위하자 성천 부사(成川府使)로 나갔다가 아우 수항(壽恒)이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유배당하자 벼슬을 버리고 춘천(春川)의 곡운산(谷雲山)에 은거(隱居)했으며,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급제한 수흥(壽興)은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었다가 배소에서 죽었다.
수항(壽恒)은 1660년(현종 즉위)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성(服喪)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자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기년설(朞年設)을 주장했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을 지냈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올라「현종실록(顯宗實錄)」편찬에 총재관을 지냈다.
안동 김씨의 <육창(六昌)>으로 일컬어진 수항(壽恒)의 아들 6형제중 맏아들 창집(昌集)은 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둘째 창협(昌協)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셋째 창흡(昌翕)은 성리학(性理學)에 밝아 학자(學者)로 명성을 떨쳤으며, 창업(昌業)은 문장(文章)과 도학(道學)으로 창집(昌緝 : 직장을 역임)․창립(昌立 : 사부를 역임)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이들 육창(六昌)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첫째 창집(昌集)의 아들 제겸(濟謙)이 숙부(叔父) 창흡(昌翕)에게 수학하고 숙종말(肅宗末)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고, 손자(孫子) 이소(이소)가 정조(正祖) 때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한편 창집(昌集)의 현손(玄孫) 조순(祖淳)은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에 올라 그의 딸이 순조(純祖)의 비(妃 : 순원왕후)가 되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져서 철종(哲宗) 때의 안동 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기초를 마련했고 문장(文章)과 그림에 능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명순(明淳 : 창집의 현손)의 아들 중 홍근(弘根)은 헌종(憲宗) 때 공조(工曹)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응근(應根)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올랐다.
순조(純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흥근(興根)은 홍근(弘根)의 아우로 헌종(憲宗)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거쳐 철종(哲宗) 때는 좌의정(左議政)에 이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고 고종(高宗)이 즉위하자 지실록사(知實錄事)로「철종실록(哲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그외 창집(昌集)의 후손 중에서도 헌종(憲宗)의 국구(國舅)인 조근(祖根)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로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봉해졌고, 철종(哲宗) 때 영의정(領議政)을 세 번 역임한 좌근(左根)은 좌찬성(左贊成)에 오른 병기(炳基)와 함께 이름을 떨쳤다.
철종(哲宗)의 비(妃)인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아버지 문근(汶根 : 인순의 아들로 이순에게 출계)언 돈령부사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보해지고 몸이 비대하여 <포물대원군(包物大院君)>으로 별칭되었다.
대사성(大司成) 창협(昌協)의 인맥으로는 그의 손자(孫子) 원행(元行)이 왕세손(王世孫)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英祖)의 부름을 받았으나 소(疏)를 오려 사임하고 누차 벼슬에 임명되었을 때도 사양한 후 학문에 전력했다.
특히 그는 당시 성리학계(性理學界)의 2대 주류인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의 논쟁에서 이간(李柬)의 낙론을 지지하여 주리(主理)와 주기(主氣)를 절충한 학설(學說)을 주장했다.
그의 아들 이안(履安)도 아버지의 학문(學問)을 이어받아 학행(學行)으로 경연관(經筵官)에 천거되었고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學者)로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연구(實學硏究)에 앞장섰다.
거창 부사(居昌府使) 인순(麟淳)의 아들 수근(壽根)은 헌종(憲宗) 때 대사성(大司成)과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선혜청당상(宣惠廳堂上)에 이르렀으며, 수근(壽根)의 아들 병학(炳學)은 고종(高宗) 때 실록총재관(實錄總裁官)으로「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과 함께「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했다.
병국(炳國)은 철종(哲宗) 때 훈련대장(訓鍊大將)과 고종(高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로 영건도감 제조(營建都監提調)를 지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창흡(昌翕)의 후손에서는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던 달순(達淳)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며, 매순(邁淳)은 문장(文章)이 뛰어나서 홍석주(洪奭周)와 함께 <여한10대가(麗韓十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혔다.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으로 이름을 떨쳤던 창업(昌業)의 후손에서는 그의 아들 신겸(信謙)과 윤겸(允謙) 형제가 문장과 그림으로 유명했고, 양행(亮行 : 신겸의 아들)은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선천 부사(宣川府使) 익순(益淳)의 손자 병연(炳淵)이 조선의 이름난 시인(詩人)으로 전국을 방랑하며 해학(諧謔)과 재치가 넘친 시구(詩句)로 세상을 풍자하는 작품을 남겼고, 한말(韓末)에 와서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명규(明圭),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종한(宗漢), 시종원경(侍從院卿) 병익(炳翊)과 독립투사로 3․1운동에 참가했던 가진(嘉鎭)인 뛰어났다.
개화혁명(開化革命)의 기수 옥균(玉均)과 한일합방(韓日合邦)의 울분으로 음독자결한 석진(奭鎭), 유림의 대표로 곽종석(郭鍾錫) 등과 함께 피리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던 복한(福漢), 민종식(閔宗植)의 의병(義兵)에 가담했던 덕진(德鎭),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흑룡강(黑龍江)을 무대로 독립군 양성에 전력했던 좌진(佐鎭), 만주에서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여 민족운동에 앞장섰던 종진(宗鎭) 등이 명문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전통(傳統)을 살렸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김여중(金呂重) 고려 때 선군 별감(選軍別監)을 지냈다.
김남수(金南秀) 고려(高麗) 때 호장(戶長)을 역임하였다.
김 희(金 熙)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김 자(金 資) 고려 때 승사랑(承仕郞)․ 주부(主簿)등을 지냈다.
김근중(金斤重) 고려에서 정의대부(正義大夫)로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에 올랐다.
김지철(金之哲) 고려조(高麗朝)에서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지냈다.
김 기(金 琪) 고려 때 군기감정(軍器監正)을 지냈다.
김 규(金 珪) 고려 때 예의 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김계권(金係權) 조선조에서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역임했다.
김계행(金係行) 1431 (세종 13) ~ 1521 (중종 16)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 현감(縣監) 삼근(三近)의 아들. 성주(星州)․충주(忠州)의 교수(敎授) 등을 지냈으며, 연산군 때 대사간으로 척신(戚臣)들의 잘못을 논박했으나 시정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은거했다. 이조판서에 추증(追贈).
김 영(金 瑛) 1475 (성종 6) ~ ?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아들. 1506년(중종 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예문관 대교(藝文館待敎)로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 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케 하였다. 그 후 승지(承旨)를 거쳐 1527년 (중종 22)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 번(金 璠) 1479 (성종 10) ~ 1544 (중종 39)
자는 문서(文瑞),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아들. 1513년(중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거쳐 1516년 정언(正言)을 지냈다. 1518년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낸 후 문학(文學)이 되었다.
김 집(金 緝) 자는 경인(景引).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1570년(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영천 군수(永川郡守)를 역임하였다.
김기보(金箕報) 자는 문경(文卿), 호는 창윤(蒼荺). 조선 선조(宣祖) 때 거창(居昌)․회인 현감(懷仁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김상관(金尙寬) 자(字)는 중율(仲栗), 호(號)는 금시재(今是齋). 장연 부사(長淵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상준(金尙寯) 1561 (명종 6) ~ 1635 (인조 13)
자는 여수(汝秀), 호는 휴암(休菴), 군기시정(軍器寺正) 원효(元孝)의 아들. 15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뒤 병조좌랑(兵曹佐郞)․죽주 부사(竹州府使)를 거쳐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상용(金尙容) 1561 (명종 16) ~ 1637 (인조 15)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 시호는 문충(文忠), 극효(克孝)의 아들. 1590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정언(正言) 등을 거쳐 정주(定州)․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냈으며,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글씨가 뛰어났었고, 시조(時調)는 유고(遺稿)로 오륜가(五倫歌) 5편, 훈계 자손가(訓戒子孫歌) 9편, 그 밖에「가곡원류(歌曲源流)」등의 여러 편이 있다.
김상헌(金尙憲) 1570 (선조 3) ~ 1652 (효종 3)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시호는 문정(文正), 도정(都正) 극효(克孝)의 아들.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1608년(광해군 즉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각각 급제, 정언(正言)․직제학(直提學) 등을 역임, 1624년(인조 2) 도승지(都承旨)․대사성을 거쳐 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그 후, 좌의정․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김광욱(金光煜) 1580 (선조 13) ~ 1656 (효종 7)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상준(尙寯)의 아들. 1606년(선조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1611년(광해군 3)에 정언(正言)이 되었으며, 1615년의 폐모론(廢母論) 때에 정청(庭請)에 참여하지 않아 삭직(削職)당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비로소 복관(復官)되어 1649년(인조 27) 형조 판서를 지냈다.
김중청(金中淸) 1567 (명종 22) ~ 1629 (인조 7)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구전(苟全), 몽호(夢虎)의 아들.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역임하고 1621년 승지(承旨)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호남을 순회했다.
김광환(金光煥) 1579 (선조 12) ~ 1642 (인조 20)
자는 회숙(晦叔), 상용(尙容)의 아들. 1609년(광해군 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여러 벼슬을 거쳐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
김광현(金光炫) 1584 (선조 17) ~ 1642 (인조 25)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 상용(尙容)의 아들.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관(史官)으로 추천되었다.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수찬(修撰) 등을 지내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김수익(金壽翼) 1600 (선조 33) ~ 1673 (현종 14)
자는 성로(星老), 호는 청악(靑岳), 시호는 충경(忠景), 광위(光煒)의 아들. 1624년(인조 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630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랑(禮曹郞)․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했다. 1640년에는 괴산 군수(槐山郡守)에 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을 지냈으며, 1648년 병조참의(兵曹參議), 이듬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부임했다.
김중일(金重鎰) 1602 (선조 35) ~ ?
자는 백진(伯珍), 광수(光燧)의 아들. 1633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636년(인조 14)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었고, 뒤에 삼사(三司)․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벼슬을 거쳐 승지(承旨)․풍덕 부사(豊德府使)에 이르렀다.
김광혁(金光爀) 1590 (선조 23) ~ 1643 (인조 21)
자는 회경(晦卿), 호는 동림(東林), 장단 부사(長端府使) 상관(尙寬)의 아들. 1624년(인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뒤에 이조 정랑(吏曹正郞)․헌납(獻納)․사인(舍人)․광주목사(光州牧使)․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역임했다.
김주우(金柱宇) 1598 (선조 31) ~ 1644 (인조 22)
자는 만고(萬古), 호는 이면(易眠), 중청(中淸)의 아들. 1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624년(인조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여 지평(持平)을 거쳐 울진 현령(蔚珍縣令)을 지냈다.
김수인(金壽仁) 1608 (선조 41) ~ 1660 (현종 1)
자는 원보(元甫), 상용(尙容)의 손자.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 상원 현감(祥原縣監)을 지냈으며, 뒤에 의흥(義興)․창녕(昌寧) 현감을 거쳐 양주 목사(楊州牧使)․수원 부사(水原府使) 등을 보냈다.
김수증(金壽增) 1624 (인조 2) ~ 1701 (숙종 27)
자는 연지(延之), 호는 곡운(谷雲), 상헌(尙憲)의 손자. 1652년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 형조․공조의 정랑(正郞), 각 사(司)의 정(正)을 지냈으며, 1694년(숙종 20)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공조참판(工曹參判)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김수흥(金壽興) 1626 (인조 4) ~ 1690 (숙종 16)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시호는 문익(文翼), 상헌(尙憲)의 손자,. 1655년(효종 6)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병과(丙科)로,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병과(丙科)로 각각 급제, 현종 때에 대사간․도승지(都承旨) 등을 역임하였고, 1666년(현종 7) 호조판서, 1673년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가 되었다. 1680년(숙종 6)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이어 1688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김수항(金壽恒) 1629 (인조 7) ~ 1689 (숙종 15)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시호는 문충(文忠), 상헌(尙憲)의 손자. 165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1656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대사간에 오르고, 1659년(효종 10) 승지(承旨), 1661년(현 종 2)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듬해 대제학(大提學)에 특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1672년 우의정이 되었다.
1680년에 영의정에 올랐으며, 1681년「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 총재관(總裁官)을 지냈다.
김계광(金啓光) 자는 경겸(景謙), 호는 동원(東原).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660년(현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풍기 군수(豊基郡守)를 지냈다.
김창협(金昌協) 1651 (효종 2) ~ 1708 (숙종 34)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州), 시호는 문간(文簡), 상헌(尙憲)의 증손, 수항(壽恒)의 아들. 1682년(숙종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이조 정랑(吏曹正郞)․교리(校理)․대사간․동부승지(同副承旨)․대사성 등을 역임하고, 그 뒤에 대제학(大提學)․예조 판서․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 등에 수차 임명 되었으나 사퇴했다.
김성적(金盛迪) 자는 중혜(仲惠), 호는 일한재(一寒齋). 1684년(숙종 10) 문과에 급제,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이르렀다.
김수징(金壽徵) 자는 유문(悠文), 호는 벽오당(碧梧堂). 1673년(현종 1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지냈다.
김수홍(金壽弘) 1601 (선조 34) ~ 1681 (숙종 7)
우의정 상용(尙容)의 손자. 음보(蔭補)로 승지(承旨)․참판(參判) 등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창집(金昌集) 1648 (인조 26) ~ 1722 (경종 2)
노론(老論) 4대신의 한 사람. 자는 여성(汝成), 호는 몽와(夢窩), 시호는 충헌(忠獻), 상헌(尙憲)의 증손, 영의정 수항(壽恒)의 아들. 1681년(숙종 7) 내시교관(內侍敎官)을 지낸 후 1684년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병조 참의(兵曹 參議)를 역임했다. 후에 철원 부사(鐵原府使)를 거쳐 예조 참판(禮曹參判)․개성부 유수 등을 역임했으며, 1705년(숙종 31)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거쳐 좌의정을 지내고 1717년 영의정을 올랐다.
김성시(金盛始) 1681년(숙종 7)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성최(金盛最) 자는 최량(最良), 호는 일로당(佚老堂), 광욱(光煜)의 손자, 수일(壽一)의 아들. 1683년(숙종 9) 단양 군수(丹陽郡守)에 이어 내외직을 역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목사(牧使)에 이르렀다.
김시걸(金時傑) 1653 (효종 4) ~ 1701 (숙종 27)
자는 사흥(士興), 호는 난곡(蘭谷), 시호는 헌간(獻簡), 광현(光炫)의 증손, 성우(盛遇)의 아들. 1684년(숙종 10)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벼슬을 역잏마고 1694년 부사직(副司直)․사간(司諫) 등을 보냈다.
김창흡(金昌翕) 1653 (효종 4) ~ 1722 (경종 2)
자는 자익(子益), 호는 삼연(三淵), 시호는 문강(文康), 상헌(尙憲)의 증손, 수항(壽恒)의 아들. 1721년(경종 1) 집의(執義), 이듬해 세제 시강원 진선(世弟侍講院 進善)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했다. 성리학에 밝아 혈 창협과 더불어 이름이 있었으며, 형제가 모두 이이(李 珥) 이후의 대학자로서 명성을 떨쳤고,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창업(金昌業) 1658 (효종 9) ~ 1721 (경종 1)
자는 대유(大有), 호는 노가재(老稼齋), 수항(壽恒)의 4남, 창집(昌集)의 아우. 1681년(숙종 7) 진사(進士)가 되고, 송계에서 전원생활을 했다.
1712년(숙종 38) 큰형 창집이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갈 때, 그를 수행하고 연경(燕京)에 다녀와「연행일기(燕行日紀)」를 남겼으며,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山水)․인물(人物)을 잘 그렸다.
김창직(金昌直) 자는 계달(季達). 1686년(숙종 12)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문학(文學)․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토산 현감(兎山縣監)에 이르렀다.
김숭겸(金崇謙) 1682 (숙종 8) ~ 1700 (숙종 26)
자는 군산(君山), 호는 관복암(觀復庵), 수항(壽恒)의 손자, 창협(昌協)의 아들.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집안이 몰려나게 되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심했다.
김성대(金盛大) 1651 (효종 2) ~ 1710 (숙종 36)
자는 호연(浩然), 호는 지명당(知命堂). 1702년(숙종 28) 인제 현감(麟蹄縣監)에 이르렀다.
김제겸(金濟謙) 1680 (숙종 6) ~ 1722 (경종 2)
자는 필형(必亨), 호는 죽취(竹醉), 시호는 충민(忠愍), 창집(昌集)의 아들. 1710년 익위사세마(翊衛司洗馬), 이어 고양 군수(高陽郡守)를 거쳐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으로 1719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이르렀다. 좌찬성(左贊成) 에 추증.
김시찬(金時粲) 1700 (숙종 26) ~ 1767 (영조 43)
자는 치명(穉明), 호는 초천(苕川), 시호는 충정(忠正), 좌랑(佐郞) 성도(盛道)의 아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 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었고, 1740년(영조 16) 수찬, 1755년 대사 간이 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김윤겸(金允謙) 1711 (숙종 37) ~ ?
자는 극양(克讓), 호는 진재(眞宰), 창업(昌業)의 아들. 찰방(察訪) 을 역임.
김신겸(金信謙) 1693 (숙종 19) ~ ?
자는 존보(尊甫), 호는 노천(노泉), 시호는 문경(文敬), 창업(昌業) 의 아들. 1721년(경종 1) 진사시(進士試)에 장원했으며 교관(敎官)으 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김용겸(金用謙) 1702 (숙종 28) ~ 1789 (정조 13)
자는 제대(濟大), 호는 교교재(嘐敎齋), 창집(昌集)의 아들. 1748년 선공 감역(繕工監役)으로 취임 후 여러 벼슬을 거쳐 1786년 공조 판 서에 이르렀다.
김우갑(金禹甲) 자는 성서(聖瑞). 1723년(경종 3) 참봉(參奉)으로서 정 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 를 지냈다.
김시민(金時敏) 1681 (숙종 7) ~ 1747 (영조 23)
자는 사수(士修), 호는 동포(東圃)․초창(焦窓), 성후(盛後)의 아들. 1732년(영조 8) 선공 감역(繕工監役)이 되고, 장예원 사평(掌隸院司 評)․사직서령(社稷署令)․종묘서령(宗廟署令)을 역임, 1739년 사옹원 주부, 이어 사의(司議)․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진산 군수(珍山郡 守) 등을 지냈다.
김범갑(金范甲) 자는 중만(仲萬). 1735년(영조 11) 통덕랑(通德郞)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 인제 현감(麟蹄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김선행(金善行) 1716 (숙종 42) ~ ?
자는 술부(述父), 시서(時敍)의 아들. 1739년(영조 15) 알성문과(謁 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지평(持平)․수찬(修撰)․정언(正言)을 거쳐 수원 부사(水原府使), 1760년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768 년(영조 44) 예조 참판을 지내고 대사헌이 되었다.
김문행(金文行) 자는 토빈(土彬), 호는 화음(華陰). 해주 판관(海州判官) 으로서 1746년(영조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 고, 좌승지(左承旨)․대사간(大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김응순(金應淳) 1728 (영조 4) ~ 1774 (영조 50)
자는 회원(會元), 문충공(文忠公) 상용(尙容)의 후손. 1753년(영조 29)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지평(持平)․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1774년 상소 하여 사노비(私奴婢)를 폐지케 했으며,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
김면행(金勉行) 자는 경부(敬夫). 1755년(영조 31) 부수(副率)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좌윤(左尹)․참판(參判) 등을 역임했다.
김이헌(金履獻) 자는 존오(存吾). 1757년(영조 3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수찬(修撰)을 지냄.
김양행(金亮行) ? ~ 1779 (정조 3)
자는 자정(子靜), 호는 지암(止菴)․여호(驪湖), 시호는 문간(文簡), 영의정 수항(壽恒)의 증손. 경연관(經筵官)․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정조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이희(金履禧) 자는 치응(穉膺), 호는 지래헌(知來軒). 1759년(영조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승지(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 등을 역임, 이어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김진순(金晋淳) 자는 여전(汝傳). 1759년(영조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시보(金時保) 1658 (효종 9) ~ 1734 (영조 10)
자는 사경(士敬), 호는 모주(茅州), 광현(光炫)의 증손. 공조 좌랑(工曹佐郞)․간성 군수(杆城郡守)․무주 부사(茂州府使) 등을 거쳐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김이중(金履中) 자는 시가(時可). 진사(進士)가 되고 서흥 부사(瑞興府使)에 이르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
김시관(金時觀) 1677 (숙종 3) ~ 1740 (영조 16)
자는 장숙(莊叔), 호는 절곡(節谷), 상용(尙容)의 4대손, 성완(盛完)의 아들. 초야에 묻혀 도학(道學)을 탐구했고,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이의(金履禕) 자는 계성(季成). 진사(進士)가 되고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지냈다.
김이곤(金履坤) 1712 (숙종 38) ~ 1774 (영조 50)
자는 후재(厚哉), 호는 봉록(鳳麓), 상용(尙容)의 6대손, 시보(時保)의 손자. 만년에 음보(蔭補)로 세자익위사 시직(世子翊衛司侍直)으로 기용되었다.
김양근(金養根) 1734 (영조 10) ~ 1799 (정조 33)
자는 선오(善吾), 호는 동야(東埜), 제순(제순)의 아들. 1763년(영조 3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하여 이듬해 만녕전 별검(萬寧殿別檢), 이어 전적(典籍), 병조(兵曹)의 낭관(郎官)을 지냈다. 1799년(정조 23)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김노순(金魯淳) 자는 증약(曾約).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764년(영조 40) 충량과(忠良科)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다.
김이소(金履素) 1735 (영조 11) ~ 1798 (정조 22)
자는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시호는 익헌(翼憲), 창집(昌集)의 증손, 탄행(坦行)의 아들. 1764년(영조 40) 충량정시문과(忠良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대사헌, 이․병․호조의 판서, 판의금 부사(判義禁府 事) 등을 역임했다. 1792년(정조 16)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영돈령 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약행(金若行) 자는 자유(子有), 호는 선화자(仙華子). 1767년(영조 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좌부 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김문순(金文淳) 1744 (영조 20) ~ 1811 (순조 11)
자는 재인(在人), 이신(履信)의 아들. 1767년(영조 4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여 정언(正言)․지평(持平)․승지(承旨) 등을 거쳐 1777년(정조 1)에는 대사간에 올랐다. 이조 참의(吏曹參議)․대사헌을 거쳐 1790년에는 이조․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선혜청 제조(宣惠廳提調)․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등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김제행(金悌行) 자는 유인(幼仁), 호는 백낙헌(白樂軒). 1769년(영조 4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벼슬을 거쳐 우승지(右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김이정(金履正) 자는 군방(君方), 호는 벽산거사(碧山居士). 1771년(영조 4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참의(禮曹參議)․승지(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김원행(金元行) 1702 (숙종 28) ~ 1772 (영조 48)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시호는 문경(文敬), 창협(昌協)의 손자. 1719년(숙종 45)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일가가 모두 유배되자 시골에 파묻혀 학문에만 힘썼다. 1761년 공조 참의(工曹參議)․사성(司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했다.
김방행(金方行) 자는 정보(正甫). 1773년(d여조 49)에 병과(丙科)로 급제, 대사성(大司成)․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김이성(金履成) 자는 중우(仲祐), 호는 철재(喆齋). 1773년(영조 4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이안(金履安) 1722 (경종 2) ~ 1791 (정조 15)
자는 원례(元禮), 호는 삼산재(三山齋), 시호는 문헌(文獻), 원행(元行)의 아들. 1762년(d여조 38) 학행으로 천거받아 경연관(經筵官)에 기용되고, 1781년(정조 5) 충주 목사, 1784년 지평(持平)․보덕(輔德)․찬선(贊善) 등을 거쳐 제주(祭酒)가 되었다. 당시 북학파(北學派)의 학자로 홍대용(洪大容)․박제가(朴齊家)와 교유하며 실학(實學)을 연구했다.
김인순(金麟淳) 자는 인서(仁瑞). 음보(蔭補)로 거창 부사(居昌府使) 등을 역임.
김이후(金履厚) 자는 자중(子重). 1774년(영조 50) 전시문과(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김재순(金在淳) 자는 중관(仲寬), 호는 규헌(葵軒). 1774년(영조 5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생원과(生員科)를 장원하고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를 역임했다.
김이익(金履翼) 1743 (영조 19) ~ 1830 (순조 30)
자는 보숙(輔叔), 호는 유와(牖窩), 시호는 간헌(簡獻), 창업(昌業)의 증손, 유행(由行)의 아들. 1785년(영조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1797년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승지(承旨) 등을 지냈으며, 1807년(순조 7) 공조 판서․병조 판서를 거쳐 1811년(순조 11) 대사 헌․형조 판서 등을 역임, 이듬해에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내고, 이 해 대호군(大護軍)으로 치사했다.
김조수(金祖淳) 1765 (영조 41) ~ 1831 (순조 31)
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 시호는 충문(忠文), 이중(履中)의 아들. 1785년(정조 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를 거쳐 1798년(정조 22) 총융사(摠戎使)․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등을 역임했고, 이 해 에 딸이 순조의 비(妃 : 순원왕후)로 봉해지자,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고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유기(金裕己) 자는 계급(季及). 1787년(정조 11) 전시문과(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김학순(金學淳) 자는 이습(而習), 호는 화루(華樓). 문과에 급제하여 제학(提學)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올랐다.
김이교(金履喬) 1764 (영조 40) ~ 1832 (순조 32)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理), 시호는 문정(文貞), 방행(方行) 의 아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북평사(북평사) 등을 거쳐 1800년(정조 24) 겸문학(兼文學)이 되었다. 1806년(순조 6) 동부승지(同副承旨), 이어 이 조 참의(吏曹參議)․강원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그 뒤 대사성(大司成)․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조 판서․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영조․형조․공조․예조의 판서 등을 역임하고, 1831년(순조 31)에는 우의정에 올랐다.
김희순(金羲淳) 1757 (영조 33) ~ 1821 (순조 21)
자는 태초(太初), 호는 산목(山木), 시호는 문간(文簡), 이인(履仁)의 아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1792년(정조 16) 포천 암행어사(抱川暗行御史)가 되고, 1801년(순조 1) 대사헌․광주부 유수(廣州府留守)․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등 을 역임, 1816년(순조 16)에는 형조 판서에 승진, 뒤에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김달순(金達淳) 1760 (영조 36) ~ 1806 (순조 6)
자는 도이(道爾), 호는 일청(一靑), 시호는 익헌(翼憲), 군수(郡守) 이현(履鉉)의 아들. 1789년(정조 1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초계 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으며, 1799년(정조 23) 진하 부사(進賀副 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고 전라도 관찰사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김이재(金履載) 1767 (영조 43) ~ 1847 (헌종 13)
자는 공후(公厚), 호는 강우(江右), 시호는 문간(文簡), 우의정 이교(履喬)의 아들. 1790년(정조 1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지평(持平)을 지내고, 1823년(순조 23)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있으면서「중경지(中京誌)」를 편찬했으며, 1826 년(순조 26) 이조 판서가 되었다. 뒤에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지내고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김이석(金履錫) 자는 성윤(聖胤). 진사(進士)가 되고 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지냈다.
김근순(金近淳) 1772 (영조 48) ~ ?
자는 여인(汝仁), 호는 십청(十靑)․귀연(歸淵), 창흡(昌翕)의 현손(玄孫), 이규(履銈)의 아들. 1794년(정조 1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거쳐 순조 때 대사성(大司成)․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하였으며,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다.
김이양(金履陽) 1755 (영조 31) ~ 1845 (헌종 11)
초명은 이영(履永), 자는 명여(命汝), 헌행(憲行)의 아들.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함경도 관찰사(咸慶道觀察使)를 거쳐 1815년(순조 15)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었다.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거쳐 지중 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봉조하(奉朝賀)에 이르렀다. 죽은 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김매순(金邁淳) 1776 (영조 52) ~ 1840 (헌종 6)
자는 덕수(德叟), 호는 대산(臺山), 시호는 문청(文淸), 창흡(昌翕)의 4대손, 군수(郡守) 범행(範行)의 손자. 1795년(정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참판(禮曹參判)․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고종 때 판서에 추증(追贈).
김복순(金復淳) 자(字)는 양백(陽伯). 조선(朝鮮) 때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
김이기(金履基) 자(字)는 덕여(德汝). 조선 때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지냈다.
김건순(金健淳) 자는 정학(正學), 호는 가귤(嘉橘). 1797년(정조 21) 천주교에 입교(入敎)하여 김상헌(金尙憲)의 종손(宗孫)으로서의 자격이 박탈되었으며, 노론(老論) 출신의 유일한 천주교도(天主敎徒)였다.
김명순(金明淳) 자는 대숙(大叔). 1801년(순조 1) 문과전시(文科殿試)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가순(金可淳) 1801년(순조 1) 증문전시(增文殿試)에 생원과(生員科)로 급제하고, 헌납(獻納)을 지냈다.
김시근(金蓍根) 자은 흥지(興之). 1802년(순조 2)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이수(金履秀) 자는 준환(俊丸), 호는 봉수(鳳叟). 1803년(순조 3)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김양순(金陽淳) 1776 (영조 52) ~ 1840 (헌종 6) 자는 원회(元會), 호는 건옹(健翁), 군수(郡守) 이례(履禮)의 아들. 180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22년 대사성(大司成), 1825년 이조참판(吏曹參判), 1829년 대사헌, 이후 순조 말년까지 대사헌․이조 참판을 여러번 역임했다.
김익순(金益淳) 자(字)는 성겸(聖謙). 조선 때 선천 부사(宣川府使)를 지냈다.
김한순(金漢淳) 자는 문현(文玄), 호는 현암(玄庵). 생원시(生員試)에 장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김교근(金敎根) 자는 맹여(孟汝). 1805년(순조 5)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吏曹)․호조(戶曹)․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고,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이르렀다.
김유근(金逌根) 1785 (정조 9) ~ 1840 (헌종 6)
자는 경선(景先), 호는 황산(黃山), 시호는 문정(文貞),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의 아들. 1810년(순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헌․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예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김지순(金芝淳) 자는 사수(士秀), 호는 삼수당(三秀堂).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하고,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냈다.
김이도(金履度) 자는 계근(季謹), 호는 송원(松園), 시호는 정헌(正獻). 1800년(정조 24) 전시문과(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김난순(金蘭淳) 1781 (정조 5) ~ 1851 (철종 2)
자는 사의(士猗), 호는 벽곡(碧谷), 시호는 효문(孝文), 이유(履裕)의 아들.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검열(檢閱)이 되고, 사간(司諫)․대사헌․판윤(判尹)을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김병구(金炳球) 자는 연옥(燕玉), 호는 취죽(醉竹). 1813년(순조 1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을 지냈다.
김정균(金鼎均) 1782 (정조 6) ~ 1847 (헌종 13)
자는 태수(台叟), 호는 서어(鋤漁), 이조 판서 상용(尙容)의 후손, 병익(炳翼)의 아들. 1813년(순조 13) 진사(進士)가 되고, 1820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지평(持平)․대사간․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1845년 대사헌에 이르렀다.
김응근(金應根) 1793 (정조 17) ~ 1863 (철종 14)
자는 계경(溪卿), 호는 의석(宜石), 시호는 청헌(淸獻), 참판(參判) 명순(明淳)의 아들, 좌의정 홍근(弘根)의 아우. 1816년(순조 1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여러 고을의 수령(守令)을 역임한 후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우근(金羽根) 자는 선여(仙如). 1817년(순조 1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응교(應敎)를 지냈다.
김병조(金炳朝) 1793년(정조 17) ~ 1839 (헌종 5)
자는 회경(晦卿), 판서 교근(敎根)의 아들. 1820년(순조 20) 진사(進士)가 되고, 이해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을 지냈다. 1836년(헌종 2)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기용되었고, 부호군을 거쳐 1839년 함경도 관찰사를 지냈다.
김양근(金穰根) 자는 대년(大年), 호는 송석(松石). 1825년(순조 2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영순(金英淳) 1798 (정조 22) ~ ?
자는 군실(君實), 호는 석릉(石陵), 우의정 이교(履喬)의 아들. 1825년(순조 2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고 대사성․이조 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847년(헌종 13) 형조 판서․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낸 뒤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김석순(金錫淳) 자는 규여(圭汝). 1827년(순조 27)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부수찬(副修撰)을 거쳐 1836년(헌종 2)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대근(金大根) 자는 일원(一源), 1827년(순조 27)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규장각 제학(奎章閣提學)을 거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이르렀다.
김윤근(金胤根) 자는 우약(雨若), 호는 우구(芋區). 1827년(순조 27)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김원근(金元根) 자는 경미(景渼), 호는 취정(醉庭). 1827년(순조 27)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병소(金炳韶) 1828년(순조 2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지냈다.
김수근(金洙根) 1798 (정조 22) ~ 1854 (철종 5)
자는 회부(晦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 시호는 정문(正文), 목사(牧使) 인순(麟淳)의 아들. 1834년(순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제학(提學) 등 내외 요직을 거쳐 1837년(헌종 3) 대사성(大司成), 1852년 이조 판서․선혜청 당상(宣惠廳 堂上), 이듬 해 병조 판서(兵曹判書)․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했다.
김홍근(金弘根) 1788 (정조 12) ~ 1842 (헌종 8)
자는 의경(毅卿), 호는 춘산(春山), 시호는 문익(文翼), 참판(參判) 조순(祖淳)의 아들, 영의정 흥근(興根)의 형. 1829년(헌종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내외직을 거쳐 1838년(헌종 4)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공 조 판서․병조 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다.
김병규(金炳奎) 자는 대규(大奎). 1831년(순조 3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이르렀다.
김재근(金在根) 자는 중집(仲集). 1834년(순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응균(金應均) 자는 시만(時萬), 시호는 효헌(孝憲). 1834년(순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김영근(金英根) 자는 치화(穉華), 호는 청연(淸淵). 1835년(헌종 1)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를 거쳐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이르렀다.
김보근(金輔根) 1803 (순조 3) ~ 1869 (고종 6)
자는 중필(仲弼), 호는 삼송(三松), 시호는 문헌(文獻), 목사(牧使) 지순(芝淳)의 아들. 1837년(헌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철종 때 병조(兵曹)․이조(吏曹)의 판서(判書)․경기도 관찰 사 등을 지냈다.
김병연(金炳淵) 1807 (순조 7) ~ 1863 (철종 14)
방랑시인, 속칭은 김삿갓(金笠),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 전국을 방랑하며 도처에서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의 시(詩)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리운다. 또 수많은 한문시가 구전(口傳)되고 있다.
김익진(金翼鎭) 자는 군필(君弼). 1837년(헌종 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김조근(金祖根) ? ~ 1844 (헌종 10)
자는 백술(伯述), 호는 자오(紫塢), 시호는 효간(孝簡), 우의정 수항(壽恒)의 후손. 헌종의 장인. 딸이 헌종의 비(妃)에 책봉되자 영흥부원군(永興府院君)에 올랐다. 이어 어영대장(御營大將)․호위대장(扈衛大將)․주사대장(舟師大將) 등을 역임하였다.
김좌근(金左根) 1797 (정조 21) ~ 1869 (고종 6)
자는 경은(景隱), 호는 하옥(荷屋), 시호는 충익(忠翼), 영의정 창집(昌集)의 5대손,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의 아들. 1838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42년 이조 판서․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공조 판서, 이듬해 대사헌, 1846년 병조 판서를 역임했다. 1852년 우의정을 지내고, 1864년(고종 1)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서「철종실록(哲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
김세균(金世均) 1812 (순조 12) ~ 1879 (고종 16)
자는 공익(公翼), 호는 만재(晩齋), 시호는 문정(文貞). 1841년(헌종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진사과(進士科)로 급제, 한림제학(翰林提學)을 거쳐 숭록대부․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김문근(金汶根) 1801 (순조 1) ~ 1863 (철종 14)
자는 노부(魯夫), 시호는 충순(忠純), 이순(履淳)의 아들.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었다. 금위대장(禁衛大將)․총융사(摠戎使)․훈련대장(訓鍊大將)․영돈령 부사(領敦寧府事) 등을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신근(金愼根) 자는 여중(汝重). 1843년(헌종 9) 현감(縣監)으로서 식년전시문과(式年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김연근(金淵根) 자는 치묵(稚黙). 조선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
김병운(金炳雲) 자는 경평(景平), 호는 유정(柳汀), 시호는 문정(文靖).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1844년(한종 10) 부사(府使)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김만근(金萬根) 자는 순옥(舜玉), 호는 현서(玄墅).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845년(헌종 11) 부사로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병덕(金炳德) 1825 (순조 25) ~ 1892 (고종 29)
자는 성일(聲一), 호는 약산(約山), 시호는 문헌(文獻), 영의정 흥근(興根)의 아들.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67년(고종 4) 이후 세 번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이어 평안도 관찰사․우의정 등을 역임하였고, 1885년 좌의정, 후에 총리군국 사무(總理軍國事務)가 되어 1891년(고종 28) 치사(致仕)했다.
김병기(金炳冀) 1818 (순조 18) ~ 1875 (고종 12)
자는 성존(聖存), 호는 사영(思穎), 시는 문헌(文獻), 영근의 아들.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듬해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대사성(大司成), 예조․이조의 참판(參判)등을 역임하고 이조․예조․형조․공조의 판서를 두루 지냈다.
김덕근(金德根) 자는 경여(敬汝). 1847년(헌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규장각 직각(奎章閣直閣)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병계(金炳溎) 자는 범일(範一). 1848년(헌종 14) 증광별시문과(增廣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김병국(金炳國) 1825 (순조 25) ~ 1905 (광무 9)
자는 경용(景用), 호는 영어(穎漁), 시호는 충문(忠文), 이조 판서 수근(洙根)의 아들. 1850년(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병조․호조의 판서(判書) 등을 역임하고 1864년(고종 1) 이조 판서가 되었다. 후에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884년 영의정 (領議政)․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를 역임하고, 같은 해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다가 이듬해 치사(致仕)했다.
김병교(金炳喬) 1810 (순조 10) ~ ?
자는 공곡(公哭), 판서 교근(敎根)의 아들. 1852년(철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지평(持平)을 거쳐 1853년 이조참판(吏曹參判), 1856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 형조와 예조의 판서, 1862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김병계(金炳桂) 자는 범초(範初), 호는 소산(小山), 시호는 효문(孝文). 1851년(철종 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을 거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김면근(金勉根) 자는 경돌(敬突). 1852년(철종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냈다.
김병학(金炳學) 1821 (순조 21) ~ 1879 (고종 16)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穎樵), 시호는 문헌(文獻), 이조 판서(吏曹判書) 수근(수근)의 아들. 1853년(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사간(司諫)을 거쳐 대사헌․판서 등을 역임했다. 흥선대원군의 집권으로 안동 김씨 일문들이 거의 제거되었 으나 융통성이 많고 평소 흥성대원군과 가까웠기 때문에 1865년(고종 2)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서 좌의정으로 승진했으며, 실록 총재관(實錄摠裁官)으로「철종실록(哲宗實錄)」을, 찬집소 총재관(纂輯所總裁官)으로「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으며, 영의정을 거쳐 1875년(고종 12) 영돈령부사가 되었다.
김학근(金鶴根) 자는 경고(景皐). 1853년(철종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병지(金炳地) 자는 백령(伯寧), 시호는 효정(孝貞). 1854년(철종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규장각 직제학(奎章閣直提學)․공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김병시(金炳始) 1832 (순조 32) ~ 1898 (광무 2)
자는 성초(聲初), 호는 용암(蓉庵), 시호는 충문(忠文), 응근의 아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1862년(철종 13) 어영대장(御營大將)․무영 통도사(武營都統使) 등의 무관직을 역임했고, 1870년(고종 7)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東學革命) 후 폐정 개혁을 적극 주장하여 교정청(校正聽) 설치를 보게 했고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병필(金炳弼) 1839 (헌종 5) ~ 1870 (고종 7)
자는 경량(景良), 시호는 효정(孝貞), 문근(汶根)의 아들. 1855년(철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교리(校理) 등을 거쳐 1859년(철종 10) 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吏曹參議)등을 역임했으며, 행호군(行護軍)․대호군(大護軍)을 거쳐 예조 판서에 이르렀다.
김경진(金敬鎭) 자는 치일(穉一). 1857년(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이르렀다.
김병집(金炳集) 자는 성오(成五). 1857년(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공조 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병삼(金炳三) 자는 경화(景華).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
김영균(金永均) 자는 경화(景華). 1858년(철종 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
김병익(金炳翊) 1837 (헌종 3) ~ ?
자는 좌경(左卿), 대근(大根)의 아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92년(고종 29)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형조 판서를 지내고, 그 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특진관(特進官)․시종원경(侍從院卿) 등을 역임했다.
김석진(金奭鎭) 1843 (헌종 9) ~ 1910 (융희 4)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 상헌(尙憲)의 후선, 도균(道均)의 아들. 1860년(철종 11)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그 후 호조․형조․병조․이조의 참의(參議)에 이어 형조 판서․광주부 유수(光州府留守) 등을 지냈으며, 비서원경(秘書院卿)․귀족원경(貴族院卿) 등을 역임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복장(複章)이 수여되었다.
김장한(金章漢) 자는 수경(壽敬). 1861년(철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다.
김홍규(金弘圭) 자는 치정(稚正). 1864년(고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명진(金明鎭) 자는 치성(穉誠). 1870년(고종 7)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공조 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김덕규(金德圭) 자는 공윤(公閏). 1871년(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김상규(金商圭) 자는 익경(翼卿). 1874년(고종 11) 증광전시문과(增廣殿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종규(金宗圭) 자는 경주(敬周), 호는 진암(振庵).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석근(金晳根) 자는 대여(大汝). 1880년(고종 17)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김낙진(金洛鎭) 자는 우겸(友謙). 1883년(고종 2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김석규(金錫圭) 1885년(고종 22) 좌세마(左洗馬)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특진관(特進官)을 지냈다.
김병억(金炳億) 자는 경년(敬年). 목사(牧使)를 거쳐 1892년(고종 2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 했다.
김명규(金明圭) 1848(헌종 14) ~ ?
시호는 문정(文貞), 병룡(炳龍)의 아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889년(고종 26) 천진 주재 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 1895년(고종 32) 정 2 품에 올랐다. 그 뒤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학부대신(學部大臣) 등을 역임하였다.
김가진(金嘉鎭) 1846(헌종 12) ~ 1922
호는 동농(東農), 응균(應均)의 아들. 1886년(고종 2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주일본 판사대신(駐日本辦事大臣)으로 수년간 도꾜(동경)에 주재했다. 1910년 한일합방 후 독립운동에 투신, 3․1운동에 참가했다. 그 후 대동단(大同團)에 가담하여 고문에 추대되고, 1920년 상해로 망명,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약하였다.
김옥균(金玉均) 1851 (철종 2) ~ 1894 (고종 31)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고우(古愚), 시호는 충달(忠達), 병태(炳台)의 아들. 1872년(고종 9)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참의 교섭 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에 이어 이조 참의(吏曹參議)․호조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국제 정세와 보조를 맞추기 위하여 수구 파를 제거하고 국가를 개화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우정국 낙성연에서 정변을 일으켰으나, 이 일이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 1894년 상해(上海)로 건너 갔다가 본국 정부의 자객에게 살해당했다. 갑오경장(甲午更張)으로 개화당 내각이 조직된 이듬해 반역죄가 용 서 되었고, 1910년(융희 4)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종한(金宗漢) 1844 (헌종 10) ~ 1932
자는 조경(祖卿), 호는 유하(游霞), 판서 계진(啓鎭)의 아들. 1876년(고종 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대사성(大司成)․이조 참판(吏曹參判)․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내고, 예조 판서․시종원 시가(侍從院侍講) 등을 거쳐 1909년(융희 3) 판돈령사사(判敦 寧司事), 이어 규장각 지후관(奎章閣祗候官) 등을 역임했다.
김복한(金福漢) 1860 (철종 11) ~ ?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 1892년(고종 2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후에 대사성(大司成)․형조 참의(刑曹參議)․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1894년(고종 31) 승지(承旨)에 승진 했으며, 1919년 3월 유림(儒林) 대표로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를 발송했다가 피체,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김학진(金鶴鎭) 1838 (헌종 4) ~ 1917
자는 성천(聖天), 호는 후몽(後夢), 명균(命均)의 아들. 1871년(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이조 참의․대사성을 거쳐 1892년(고종 29) 협판교섭통상사무(協辦交涉通商事務)․병조 판서 등을 역임했다. 1899년(광무 3)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시종원경 (侍從院卿)․홍문관 태학사(太學士) 등을 거쳐 규장각 대제학(奎章閣大提學)을 역임했다.
김좌진(金左鎭) 1889 (고종 26) ~ 1930
호는 백야(白冶), 형규(衡奎)의 아들. 을사조약(乙巳條約 : 1905) 체결 후 상경하여 대한협회(大韓協會)․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등의 간부를 지냈으며, 1917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를 선봉, 1919년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고 이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이듬해 북로 군정서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산리(靑山里) 전투를 총지휘, 독립군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렸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重章)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