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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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27 15:19 수정일 : 2018-01-29 09:28

순천김씨시조 및 순천김씨유래(본관)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 시대에는 함평(함平)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서기 996(고려 성종 15)에 승주(昇州)로 불렀다가 1310(충선왕 2) 순천(順天)으로 개칭하였다.

신라 왕실(新羅王室)의 후예(後裔)순천김씨(順天金氏)는 경문왕(景文王 : 신라 제48대 왕, 재위기간 : 861875)의 아들로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의 손자(孫子) 김총(金摠)이 시조(始祖)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가 신라에서 인가 별감(引駕別監)을 지내고 평양(平陽 : 순천의 옛 지명)()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순천(順天)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낸 윤인(允仁)의 손자 유정(惟精)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역임하고, 충순보조익위공신(忠純輔祚翊衛功臣)으로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승주(承霔)는 초명(初名)이 을보(乙寶)였으며, 1380(우왕 6)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고, 창왕(昌王) 때 풍주(豊州)의 수령(守令)으로 나가 왜구(倭寇) 격퇴에 공()을 세워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정종(定宗) 때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에 올랐다.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평양부윤(平壤府尹) 등을 지냈으며, 태종(太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러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지고, 승주(承霔)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


특히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명신(名臣) 종서(宗瑞)를 들 수 있다.

그는 1390(공양왕 2) 지평(持平) 태영(台泳)의 손자(孫子)로 출생하여 16세 문과(文科)에 급제,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지낸 후 1433(세종 15)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野人)들의 변경침입을 격퇴했고, 육진(六鎭:동북방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에 설치한 여섯 진)을 설치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며 함길도 병마절제사를 겸직, 야인의 정세를 탐지하여 그 비변책(備邊策)을 건의했고,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지낸 후 1446(세종 28)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당시 권 제(權 踶) 등이 수교(讎校)한「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하여 개찬(改撰)하게 되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그 총책을 맡아 1451(문종 1) 간행했으며,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직한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라「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을 감수했다.

특히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며 어린 단종(端宗)의 보필을 부탁하자 좌의정(左議政)으로서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정 분(鄭 笨)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여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1453(단종 1) 왕위(王位)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에 의해 두 아들 승규(承珪)․승벽(承璧), 손자(孫子) 만동(萬同)․조동(祖同) 등과 함께 격살되고 그의 아우 종한(宗漢)도 화()를 입었으며, 승규(承珪)의 막내 아들만이 어머니를 업고 도망감으로써 간신히 일가(一家)의 절손(絶孫)됨을 면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에 뛰어난 지략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함경도 8(八鎭)의 지세(地勢)와 공수(攻守) 방법을 적은「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호기가(豪氣歌)를 포함하여 시조(時調) 두 수가 전한다.

이러한 충절(忠節)의 전통(傳統)을 이어 가문을 더욱 중흥시킨 인물인 여물(汝岉)은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낭관(郎官)과 충주 도사(忠州都事)를 거쳐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나갔다가 서인(西人)인 정 철(鄭 澈)의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신 입(申 砬) 장군과 함께 충주(忠州) 방어에 나가 충주 달천(撻川)을 등지고 배수진(背水陣)을 쳤으나 북상하는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彈琴臺)에서 신 입(申 砬)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한편 여물(汝岉)의 아들 유()는 당대에 이름난 학자(學者) 송익필(宋翼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우고, 1596(선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벼슬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 벼슬)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1636(인조 14)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영국일등공신(寧國一等功臣)으로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수차에 걸쳐 영의정(寧議政)을 역임하며 정치적인 공적을 쌓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나 명성을 날렸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인조(仁祖)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흥국(興國)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경징(慶徵)이 유명했으며, 진표(震標)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하고 청풍 군수(淸風郡守)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여 부사(府使) 광우(光宇), 감찰(監察) 성흠(聖欽)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김씨는 전국에 총 62,916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순천김씨조상인물

김윤인(金允仁) 고려(高麗) 때 중현대부(中顯大夫)로 전객서령(典客署令)에 올랐다.

김 형(金 泂) 고려 때 광정대부(匡靖大夫)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상호군(上護軍) 등을 역임하였다.

김유정(金惟精)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냈다.

김을재(金乙財) 조선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호조 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김승주(金承霔) 1347 (충목왕 3) 1424 (세종 6)

()는 월담(月潭), 시호(諡號)는 양경(襄景). 1380(우왕 6) 흥위위 별장(興威衛別將)에 초임되어 군기시 소윤(軍器寺少尹)을 거쳐 창왕(昌王) 때 풍주(豊州)의 수령으로 나가 왜구(倭寇)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다. 조선(朝鮮)이 개국되자 전중경(殿中卿)에 오르고 첨절제사(僉節制使)․형조 전서(刑曹典書)․찰리사(察理使)를 역임한 후 1400(정종 2)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녹산군(鹿山君)에 봉해졌으며 태종(太宗) 때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에 이르러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북면병마절제사 겸 영흥 부윤(永興府尹)․도순문찰리사를 역임하였다. 그 후 평양 부윤(平壤府尹)을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가 되어 평양군(平陽君)에 개봉되었고 뒤에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었다.

김유온(金有溫) 조선 때 예조 참의(禮曹參議)를 지냈다.

김 형(金 泂) 고려(高麗)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김유정(金惟精) 조선(朝鮮) 시대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을재(金乙財) 조선(朝鮮) 때 전서(典書)를 역임하였다.

김승주(金承霔) 조선 때 검교좌상(檢校左相)을 지냈다.

김유온(金有溫)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유량(金有良) 조선조(朝鮮朝)에 총제(摠制)를 지냈다.

김유공(金有恭)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김유검(金有儉) 조선 시대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김유양(金有讓) 조선 때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석손(金碩孫)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역임했다.

김중손(金仲孫) 조선 때 사예(司藝)를 지냈다.

김원석(金元石) 조선(朝鮮)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김형석(金亨石) 조선조에 익찬(翊贊)을 지냈다.

김안길(金安吉)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극기(金克己)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서기(金恕己) 조선조(朝鮮朝)에 사용(司勇)을 역임하였다.

김구석(金球石)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김율기(金律己)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김사창(金嗣昌)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사흥(金嗣興)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사성(金嗣成)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사원(金嗣源)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종한(金宗漢) 조선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종서(金宗瑞) 1390 (공양왕 1) 1453 (단종 1)

자는 국경(國卿), 호는 절재(節齋), 시호는 충익(忠翼), 도총제(都摠制) ()의 아들. 1405(태종 5) 문과(文科)에 급제,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지평(持平)․집의(執義)․우부대언(右副代言) 등을 거쳐, 1433(세종 15)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가 되어 야 인(野人)들의 변경침입을 격퇴했고, 6()을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했으며 1440(세종 22) 예조와 형조의 판서(判書)를 지낸 후 1446(세종 28)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다.

1451(문종 1)「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하여 개찬(改撰)하게 되자 지춘추관사(智春秋館事)로 그 총책임을 맡아 간행했으며, 1452(문종 2)「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을 감수하여 간행했다.

이듬해 단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문종의 유명(遺命)으로 단종을 보필(輔弼)하였는데 왕위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 : 세조)에 의해 두 아들과 함께 격살(擊殺), 계유정난(癸酉靖亂)의 제 1차 희생자가 되었다. 1746(영조 22) 복관(復官)되었다.

김 상(金 湘)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약내(金若匂) 조선 때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김약형(金若衡) 조선(朝鮮) 때 사직(司直)을 지냈다.

김약평(金若枰)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옥(金 玉)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세익(金世益)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세량(金世良) 조선조(朝鮮朝)에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윤탁(金允濯)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수렴(金粹濂) 조선 시대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희열(金希說) 자는 상경(商卿), 호는 가정(柯亭), 약평(若枰)의 아들. 1519(중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대사간(大司諫)․호조참판(戶曹參判)․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등을 거쳐 1542(중종 37)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김효우(金孝友)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승규(金承珪)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 기(金 璣)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수광(金琇光)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순고(金舜皐)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예손(金禮遜)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김지손(金智遜) 조선 시대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충국(金忠國)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희국(金熙國)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 홍(金 弘)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 익(金 翊) 조선 때 봉사(奉事)를 지냈다.

김득추(金得秋) 조선 때 직장(直長)을 역임했다.

김우추(金遇秋) 조선(朝鮮) 때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김 강(金 剛) 조선 때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 진(金 振)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 확(金 鑊)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김 근(金 瑾)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여물(金汝岉) 1548 (명종 3) 1592 (선조 25)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자(披裘子)․외암(畏菴), 시호는 장의(壯毅), 찰방(察訪) ()의 아들, 영의정 유()의 아버지. 1577(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충주 도사(忠州都事)․의주 목사(義州牧事)를 지냈으며,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의 특명으로 신 입(申 砬)과 함께 충주(忠州) 방어에 나섰다가 적군을 막지 못하자 신 입과 함께 물에 투신 자결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김 협(金 協) 자는 길보(吉甫) 호는 충효당(忠孝堂), 감찰(監察) 자원(自願)의 아들, 류성룡(柳成龍)의 문인.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체부(體府)에 뽑혀 종군하여 화전(火箭)을 연구, 병기로 사용케 했다. 의학(醫學)에 정통하여 선조(宣祖)의 시의(侍醫)로 있었으며, 만년에 혜민서 주부(惠民署主簿)를 지냈다.

김 린(金 璘)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난손(金鸞孫) 조선 때 별제(別提)를 지냈다.

김흥국(金興國) 1557 (명종 12) 1623 (인조 1)

자는 경인, 호는 수북정(水北亭), 난손(鸞孫)의 아들. 1589(선조 2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정언(正言)․북평사(北評事)를 거쳐 서장관(書將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고, 한산(韓山)․양주(楊州) 등의 수령을 역임했다.

광해군, 반정(反正) 참여를 종용받았으나 거절하고 낙향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유현(遺賢)으로 천거되어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김광엽(金光燁) 1561 (명종 16) 1610 (광해군 2)

자는 이회(而晦), 호는 죽일(竹日), 좌의정 승주(承霔)6대손, ()의 아들. 1590(선조 2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과)로 급제, 예문관(藝文館)에 등용된 후 승정원(承政院)의 주서(注書)를 지냈다.

김성갑(金誠甲)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윤안(金允安)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 유(金 瑬) 1571 (선조 4) 1648 (인조 26)

자는 관옥(冠玉), 호는 북저(北渚), 시호는 문충(文忠), 목사 여물(汝岉)의 아들. 송익필(宋翼弼)의 문인. 1596(선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 검열(檢閱)․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지내고, 1614(광해군 6)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623년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한 후 능양군(綾陽君:인조)을 왕으로 추대하여 정사일등 공신(靖社一等功臣)으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판서 겸 대제학이 되었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부체찰사(副體察使)로 인조를 강화(江華)에 호종했으며 환도한 뒤에 좌의정이 되었다가 16369인조 14) 영의정에 승진, 이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했다.

1644(인조 22) 심기원(沈器遠)의 모역(謨逆)을 신속히 평정한 공으로 영국일등공신(寧國一等功臣)으로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이 되었다.

김경징(金慶徵) 1589 (선조 22) 1637 (인조 15)

자는 선응(善應),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 ()의 아들. 1623(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정사이등공신(靖社二等功臣)이 되고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졌다. 같은 해 개시문과(改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도승지(都承旨)․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 등을 거쳐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는 강도 검찰사(江都檢察使)를 지냈다.

김진표(金震標) 1614 (광해군 6) 1671 (현종 12)

자는 건중(建中), 호는 오애(浯涯), 경징(慶徵)의 아들. 1653(효종 4)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공조 참의(工曹參議)․무송 현감(茂松縣監) 등을 거쳐 1671(현종 12) 돈령부 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김광우(金光宇)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하세(金夏世) 조선 때 시정(寺正)을 역임하였다.

김성흠(金聖欽)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성용(金聖鎔)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수담(金壽聃)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 집(金 土集) 조선에서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김중혁(金重赫) 조선(朝鮮) 때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