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수원김씨시조(水原金氏),김품언(金稟言),수원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7 15:05 수정일 : 2018-02-17 16:59

시 조

수원김씨시조(水原金氏 始祖) 김품언(金稟言)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손자(孫子)로 고려 현종(顯宗 : 제 8대왕, 제위기간 : 1009-1031) 때 거란(契丹)군의 침입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충순적덕 정난공신(忠順積德靖難功臣)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삼중대광 보국(三重大匡輔國)에 올라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선조(先祖)가 봉군(封君)된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문을 일으켰다.


본관의 유래

수원(水原)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고장으로써 고구려 시대에는 매홀(買忽), 통일신라 때에는 수성(水城)으로 불리우다가, 고려 때 인주(仁州), 수주(水州)를 거쳐 서기 1310년(충선왕 2) 수원(水原)으로 개칭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품언(稟言)의 맏아들 자이(子荑)가 태자 소보(太子少保)를 역임했고, 차남 순보(順輔)는 중서령(中書令: 고려 때 서무를 총괄하고 간쟁을 담당하던 중서문하성의 종 1품 으뜸 벼슬)에 올라 명성을 떨쳤으며, 손자 세익(世翊)은 중추원(中樞院)의 정 3품 벼슬인 좌승선(左承宣)을 역임하여 공부시랑(工部侍郞) 인순(仁順)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한편 세익(世翊)의 증손(曾孫) 사경(仕境)은 순(純)과 함께 중앙 요직의 하나인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가문의 전통을 이었으며, 계(桂)의 아들 한진(漢眞)은 충목왕(忠穆王) 때 토적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책록되고, 공민왕(恭愍王) 때 순성보절공신(純誠保節功臣)으로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져서 개성윤(開城尹)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문하부의 정 2 품 관직)로 치사했으나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켜 한산(漢山)의 유의동(柳依洞)으로 은거했다.

조선조에 와서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상려(尙旅 : 한진의 아들)와 판서(判書) 복룡(福龍)이 유명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상일(尙鎰)은 판관(判官)을 지낸 응생(應生), 부총관(副摠管) 이준(以俊), 부호군(副護軍) 신조(愼祖), 덕해(德海)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정(淀)은 1456년(세조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교수(敎授)와 교리(敎理)를 거쳐 인동 부사(仁同府使)를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倡儀)하여 공(功)을 세우고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오른 견룡(見龍 : 대흥의 아들)과 참판(參判) 중채(重彩)․하주(河柱)는 조선중기(朝鮮中期)의 인물(人物)이며, 양언(良彦)은 광해군(光海君軍) 때 아버지가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전사하자 복수군을 모집하여 변방수비에 공(功)을 세우고,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는 척후장(斥候將)으로 안령(鞍嶺)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진무삼등공신(振武三等功臣) 올라 병기의 제조를 맡아보던 관청인 군기시(軍器寺)의 주부(主簿)를 역임한 후,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평안남도 안주(安州)의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여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진흥군(晋興君)에 추붕되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학자(學者) 구명(九鳴)이 어려서부터 당대의 석학(碩學)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문명(文名)을 날렸으나, 벼슬에는 뜻을 두지 않고 고향 의주(義州)로 내려가 학문(學問)에만 진력하였으며, 후진양성에 일생을 바쳐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원김씨(水原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1,06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수원김씨조상인물

김순보(金順輔) 호는 옥보(玉寶), 시호는 문정(文正), 고려(高麗) 때 중서령(中書令)을 역임하였다.

김세익(金世翊) 고려 때 좌승선(左丞宣)을 역임하였다.

김봉기(金鳳麒) 고려에서 동정(同正)을 지냈다.

김사경(金仕境)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김준경(金俊境) 고려 때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김수창(金壽彰) 고려조(高麗朝)에 상서(尙書)에 올랐다.

김 순(金 純)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김문재(金文齋) 고려 때 순찰사(巡察使)를 지냈다.

김일성(金鎰成) 고려(高麗)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한진(金漢眞)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으며, 1345년(충목왕 1) 흥왕사(興王寺)에서 도적을 토벌하는 데 공(功)을 세워 순성보절공신(純城保節功臣)으로 수성군(隨城君)에 봉해졌고, 개성윤(開城尹)을 거쳐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했다.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한산(漢山)의 유의동(柳依洞)으로 돈적(遯蹟)했다.

김상려(金尙旅) 조선조(朝鮮朝)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김지보(金持輔)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여즙(金汝楫) 조선(朝鮮)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김수량(金守良) 자(字)는 사익(士益),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김복룡(金福龍) 조선 때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응수(金應壽) 조선에서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김몽상(金夢祥) 조선 때 상호군(上護軍)을 지냈다.

김상일(金尙鎰) 자는 내원(乃元), 호는 오재(梧齋). 조선 때 동지중추(同知中樞)를 역임하였다.

김응환(金應環) 자는 광윤(光潤).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응생(金應生) 자는 중윤(仲允).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김이준(金以俊) 자는 사현(士賢). 조선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김신조(金愼祚) 자는 신지(信之).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덕해(金德海) 자(字)는 대의(大宜).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두영(金斗泳) 자는 영진(盈辰).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김 정(金 淀) 1456(세조 1)에 문과 급제 후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인동부사(仁同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김계진(金繼珍) 조선조에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김견룡(金見龍) 자는 덕보(德普), 호는 수승(水勝).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우고, 만호(萬戶)․호조 참의(戶曹參議) 등을 역임 하였다.

김진성(金盡誠) 조선에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김상필(金商弼) 조선 때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중채(金重彩) 자는 사견(士見), 호는 운곡(耘谷),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윤광(金潤光) 자(字)는 내성(乃成).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상옥(金尙玉) 자는 화선(和善). 조선에서 도정(都正)을 역임하였다.

김하주(金河柱) 자는 군범(君範).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수환(金秀煥) 자(字)는 관여(子三).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명교(金命敎) 자(字)는 관여(寬汝).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하였다.

김선오(金善五) 자는 성언(聖言). 조선에서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선일(金善一) 자는 원행(元行). 조선조에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기희(金基禧) 자는 화중(華重).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재택(金在澤) 자는 인옥(仁玉).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복해(金福海) 1435(세종 17)에 문가 급제한 후 흥해 군수(興海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상린(金尙麟) 자는 군석(君錫). 1743년(영조 1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효강(金孝江) 1469(예종 1) 강 순(康 純)․남 이(南 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功)으로 익대삼등공신(翊戴三等功臣)에 녹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