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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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03-27 14:09 수정일 : 2018-01-07 11:57

선산김씨(善山金氏) 선궁계(宣弓系)

선산김씨시조 및 선산김씨유래

선산(善山)은 경상북도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신라(新羅) 눌지왕(訥祗王 : 19대 왕, 재위기간 : 417765) 때 일선(一善)으로 부르다가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숭선(崇善)․병정현(竝井縣) 등으로 개칭되었으며, 서기 995(고려 성종 14) 선주(善州)로 고쳤고, 1413(태종 13) 지금의 선산(善山)으로 개칭되었다.

선산 김씨(善山金氏)의 시조(始祖) 김선궁(金宣弓)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30세손이며, 문성왕(文聖王 : 신라 제46대 왕, 재위기간 : 839857)8세손이다.

선산김씨족보(善山金氏族譜)」에 의하면 그의 초휘(初諱)김 선(金 宣)이었는데,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征伐)하려 남행(南行)하던 중 숭선(崇善 : 선산의 옛 지명)에 이르러 모병(募兵)할 때 그가 함께 종군(從軍)할 것을 희망하니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친히 활()을 하사(下賜)하고 선궁(先弓)으로 사명(賜名)하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그는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統一)하는데 공()을 세우고, 개국벽상공신(開國璧上功臣)․영문하시중(領門下侍中)․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올랐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일선(一善)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여 왔으나,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지명(地名)이 선산(善山)으로 개칭됨에 따라 관향(貫鄕)선산(善山)으로 칭()하게 되었다.

그후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영남(嶺南)을 중심으로 한 전국(全國)에서 훌륭한 인물(人物)을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중 두드러진 인물을 살펴보면 시조 선궁(宣弓)의 맏아들 봉술(奉術)이 문하시중(門下侍中 : 문하성의 종1품 으뜸 벼슬)을 지내고, 둘째 봉문(奉文)은 삼사 우윤(三司右尹 : 삼사의 종3품 벼슬)에 올라 크게 명성을 날리고 가문의 중흥을 일으킨 중추적인 기틀을 다졌으며, 봉문(奉文)의 아들 흥림(興林)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그외 고려 때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혁동(赫東 : 대호군 홍림의 아들)과 상장군(上將軍) 임남(任南)․제용(濟用), 태자태사(太子太師) 득충(得忠) 대장군(大將軍) 창서(昌緖)․우(: 삼호군 제용의 증손), 한림학사(翰林學士 :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작성하는 관청의 문필가) 신함(愼緘 : 태자 태사 득충의 손자), 직제학 우류(右鏐), 판밀직부사(判密直府事) 달상(達祥), 판도판서(判圖判書) 남보(南寶), 삼사 우윤(三司右尹) 천부(天富) 등이 뛰어났으며, 감찰(監察) 원로(元老)의 아들 제()와 주()는 충절(忠節)로 유명했다.

()는 평해 군수(平海郡守)로 있다가 고려(高麗)가 망하자 망국의 한을 가슴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동해(東海) 바다로 떠난 후 돌아오지 않았으며, 아우 주()는 우왕(禑王 : 32대 왕, 재위기간 : 13741388)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의 판서(禮儀判書)에 올라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러 고려가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동안 통곡(痛哭) 끝에 조복(朝服)과 신을 벗어 사자에게 보내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발길을 돌려 명()나라에 간 뒤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뒷날 형제의 절의를 기려 선산(善山)의 월암서원(月巖書院)과 고창(高敞)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祭享)하고, 나라에서는 벼슬과 시호(諡號 : 경상과 유현들이 죽은 뒤 그들의 행적을 칭송하여 나라에서 추증하는 이름)를 내렸다.


조선조(造船朝)에 와서도 선산 김씨는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어 학문(學問)과 벼슬로써 명성을 높였다.

우리나라 성리학(性理學)의 거두(巨頭)인 야은(冶隱) 길 재(吉 再)의 학통을 이어받아 강호산인(江湖山人) 숙자(叔滋)는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의 손자(孫子)로 태어나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419(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 : 나라에 크고 작은 경사가 겹쳤을 때 보이던 과거)에 급제하여 우정자(右正字)․교수(敎授)․현감(縣監)․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한 후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밀양(密陽)에 돌아가서 후진교육에 진력했고, 정주학(程朱學 : 송나라 때의 정 호․정 이 및 주 희 등이 주장한 유학)을 발전시켜 조선 초기의 거유(巨儒)로 일컬어졌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그의 슬하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 막내인 점필재(佔畢齋) 종직(宗直)이 그의 학통을 계승하여 효제충신(孝悌忠臣)을 주안으로 하며 실제적 방면에 치중한 학문을 추구하여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고, 성종(成宗)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자기 문인(門人)들을 관직에 많이 등용시켰다.

그는 문하(門下)에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 위(曺 偉)․김일손(金馹孫)․남효온(南孝溫)․유호인(兪好仁) 등 뛰어난 석학(碩學)과 거유(巨儒)를 배출하였고, 서화(書畵)에도 재질이 뛰어났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55군을 증수(增修)했다.

그가 일찍이 세조(世祖)의 왕위찬탈을 항우(項羽)가 초회왕(楚懷王)을 죽인 고사(故事)에 비유하여 풍자한「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은 바 있는데, 그가 죽은 후 1498(연산군 4)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이 사관(史官)으로 있으면서「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이것을 사초(史草 : 조선시대 사관이 시정을 적어둔 사기의 원고, 이것들이 뒤에 왕조실록을 편찬하는 원고가 된다.)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조선조(朝鮮朝) 최초의 사화(士禍)인 무호사와(戊午士禍)가 일어나 그는 부관참시(剖棺斬屍 :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고 관을 부수어 시체를 내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건 극형) 당하고 많은 문집(文集)이 불태워졌으며, 제자들은 모두 학살 또는 유배되는 참화(慘禍)를 입었다.

중종(中宗)이 즉위하자 그 죄가 풀리고 숙종(肅宗) 때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밀양(密陽)의 예림서원(禮林書院)과 선산(善山)의 금오서원(金烏書院)을 비롯하여 전국의 여러 서원에 제향되었다.

조선 중종(中宗) 때 호조(戶曹)를 제외한 5()의 판서(判書)를 역임한 응기(應箕)1513(중종 8)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며, 효원(孝元)은 이퇴계(李退溪)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1565(명종 2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호당(湖堂 : 젊고 재주있는 문신들이 임금의 톡명을 받아 공부하던 곳)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후 선조(宣祖) 때 동인(東人)의 영수(領袖)로 사림파(士林派)의 중심인물이 되어, 명종비(明宗妃) 심씨(沈氏)의 아우로서 권세가 높던 심의겸(沈義謙)과의 개인적인 대립이 사색당파의 효시가 되어 당쟁이 격렬해지자 본의아닌 사태에 크게 뉘우치고 10년 간 한직(閑職)에만 있으면서 자숙했다고 한다.

그의 아우 이원(履元)은 임진왜란 때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있으면서 흉년으로 굶주리던 백성을 구제하는데 힘썼고, 경기도 관찰사로 도정(道政)을 바로 잡기도 했으며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했다.

막내 의원(義元)도 선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 간쟁과 논박을 맏았던 사간원의 정 3품 으뜸 벼슬)에 올랐으며, 서예(書藝)에도 능했다.

효원(孝元)의 손자 세렴(世濂)은 광해군(光海君)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고 호당(湖堂)에 뽑혀 여러 관직을 역임한 후 인조(仁祖) 때 통신부사(通信府使)로 일본(日本)에 다녀왔으며, 1645(인조 23)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내고 대사헌(大司憲) 겸 홍문관 제학(提學)을 거쳐 도승지(都承旨)․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낸 후 만년에는 경서(經書) 연구에 전심하여 시문(詩文)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의 전통을 이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자인 현감(慈仁縣監)과 함평 군수(咸平郡守)를 지낸 천일(千鎰)과 영주 군수(榮州郡守)로 치적(治積 : 정치적으로 남긴 공적)을 샇은 경직(敬直)이 유명했고, ()은 예안 현감(禮安縣監)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70세의 노령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이름을 나렸다.

한편 부사(府使) 종필(宗泌)은 호군(護軍) 진흥(振興), 대사간(大司諫) 원섭(元燮), 형조 참의(刑曹參議) 준상(儁相), 호조 참판(戶曹參判) 덕기(德基), 군수(郡守) 호승(鎬承) 등과 함께 명문의 대()를 이엇으며, 학자(學者) 학규(鶴奎)와 의교(義敎)는 학행(學行)으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도덕(道德)과 학문(學問)을 전통(傳統)으로 한 조선조(朝鮮朝)의 세도가문(勢道家門)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역대인물(歷代人物)-선산김씨조상

김선궁(金宣弓) 시호는 순충(順忠). 남정(南征) 차 선산에 이른 왕건(王建)으로부터 활을 하사받음으로써 이름을 선궁으로 고치고,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워 문하시중(門下侍中)․삼중대광(三重大匡)에 정난보국공신(靖難輔國功臣)이 되었다.

김봉술(金奉術) 고려(高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김봉문(金奉文) 고려(高麗)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역임하였다.

김흥림(金興林) 고려 때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김혁동(金赫東) 고려(高麗) 때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올랐다.

김임남(金任南) 고려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김제용(金濟用) 고려(高麗)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김갑익(金甲益) 고려 때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김유선(金惟善) 고려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김득충(金得忠) 고려 때 (平章事)를 지냈다.

김창서(金昌緖) 고려(高麗) 때 대장군을 지냈다.

김 우(金 祐)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했다.

김양인(金良印) 고려(高麗)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김경응(金慶膺) 고려(高麗) 때 지후(祗候)에 이르렀다.

김 해(金 諧) 고려 때 지후(祗候)를 역임했다.

김우류(金右鏐) 고려(高麗) 때 제교(製敎)에 올랐다.

김원로(金元老)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낭장(郎將)․감찰(監察) 등을 역임했다.

김승경(金承慶) 고려(高麗) 때 안찰사(按察使)를 지냈다.

김원미(金元美) 고려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달상(金達祥) 고려 때 좌대언(佐代言)을 역임했다.

김달경(金達卿)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에 이르렀다.

김남보(金南寶) 고려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랐다.

김천부(金天富) 고려(高麗) 때 삼사 우윤(三司右尹)을 역임했다.

김 완(金 琓) 고려 때 상호군(上護軍)을 역임했다.

김 제(金 濟) ()는 백암산인(白巖山人), 시호(諡號)는 충개(忠介). 평해군수(平海郡守)를 지냈다.

김 주(金 澍) 호는 농엄(籠嚴), 시호는 충정(忠貞). 고려 우왕(禑王)때 문과(文科)에 급제, 1392(공양왕 3) 예의 판서(禮儀判書)로서 하절사(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계수(金秀壽) 고려(高麗) 때 판부사(判府事)를 지냈다.

김군정(金君鼎) ? 1368 (공민왕 17)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달상(達祥)의 아들. 좌대언(左代言)을 지냈다.

김 말(金 末) 1383 (우왕 9) 1464 (세조 9)

자는 간지(幹之), 시호는 문장(文長). 1417(태종 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등을 지냈다.

경서(經書)에 정통했으며, 김 구(金 鉤)․김 반(金 泮)과 함께 경학삼김(經學三金)으로 불리었다.

김윤수(金允壽) 1387 (우왕 13) 1462 (세조 7)

시호는 호양(胡襄). 세종 때 무과(武科)에 급제, 누차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고, 1453(단종 1)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455년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가 노령으로 치사(致仕)하였다.

김문현(金文鉉) 고려(高麗) 때 판관(判官)에이르렀다.

김문구(金文久) 고려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

김사지(金四知) 조선(朝鮮) 때 소감(少監)을 지냈다.

김승만(金升萬) 조선(朝鮮) 때 낭장(郎將)을 역임했다.

김성미(金成美) 조선 때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

김세영(金世英) 조선 때 감정(監正)을 지냈다.

김 감(金 鑑) 조선 때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김은유(金恩有) 조선 때 사재령(司宰令)을 지냈다.

김 의(金 儀) 조선(朝鮮) 때 사재감정(司宰監正)을 역임했다.

김 준(金 俊) 조선 때 소윤(少尹)을 지냈다.

김여덕(金餘德) 조선 때 감찰(監察)에 올랐다.

김은덕(金恩德)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길덕(金吉德) 조선 때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했다.

김경행(金景行)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김가행(金可行)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사청(金士淸) 조선(朝鮮) 때 판부사(判府事)에 올랐다.

김영윤(金永倫) 조선(朝鮮) 때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김완식(金完湜)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김수정(金壽貞)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김 겸(金 兼)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효정(金孝貞) 자는 경부(敬夫), 호는 주촌(注村), 시호는 문정(文靖). 1402(태종 2) 문과(文科)에 급제, 이․호․예조의 판서(判書)를 거쳐 집현전․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등을 역임했으며 성리학(性理學)에 열중하였다.

김효시(金孝始)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 지(金 地) 조선 때 정언(正言)을 역임했다.

김 퇴(金 堆) 조선 때 서운관승(書雲觀丞)을 역임하였다.

김 치(金 峙) 자는 기보(基甫). 길 재(吉 再)의 문인. 우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간(司諫)을 거쳐 김해 부사(金海府事)에 이르러 사직, 학문을 연마하여 문명(文名)을 떨쳤으며, 명유(名儒) 김종직(金宗直)도 그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효행(孝行)을 떨쳤으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김인안(金仁安)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승경(金承敬)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상기(金尙琦) 조선 때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

김소남(金召南)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여회(金如晦)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승손(金承孫)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승경(金承慶) 조선 때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김 옹(金 擁)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 규(金 珪)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시로(金時露) 조선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김유도(金由道) 조선(朝鮮) 때 소감(少監)을 역임했다.

김유성(金由性) 조선 때 시윤(寺尹)을 지냈고, 효행으로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김종리(金從理) 방로(邦老)의 아들, 권 근(權 近)의 문인. 1396(태조 5) 문과(文科)에 급제, 고부(古阜) 등지의 현감(縣監)으로 청백하게 다스렸고, 예문관 직제학(藝文館直提學)에 이르렀다. 권 근이 지은「예기천견록(禮記淺見錄)」․「본경정문(本經正文)」 등의 원고를 정사(正寫)했다.

김백령(金百齡)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숙자(金叔滋) 1389 (창왕 1) 1456 (세조 1)

자는 자배(子培), 호는 강호산인(江湖山人), 시호는 문강(文康), ()의 아들, 종직(宗直)의 아버지. 길 재(吉 再)의 문인. 1419(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거쳐 사재 감 부정(司宰監副正)․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역임했다. 1455 년 세조 즉위 후 벼슬을 그만두었으며, 조선 초기의 거유(巨儒)로서 길 재(吉 再)의 학통(學統)을 이어 받아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이조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안생(金安生)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소윤(少尹)을 역임했다.

김한생(金漢生)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경생(金京生) 조선 때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김신생(金信生) 조선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선경(金善慶)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지경(金之慶) 1419 (세종 1) 1485 (성종 16)

자는 유후(裕後), 호는 송파(松坡), 시호는 경질(景質), ()의 아들. 1438(세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1474(성종 5)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동지 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있다 가 병으로 한직인 호군(護軍)에 전직되었다.

김성경(金性慶) 1438(세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교서관 교감(校書館校勘)․대사헌(大司憲)을 역임, 1474(성종 5)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평안도 관찰사,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쳐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에 이르렀다.

김성경(金性慶)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성경(金成慶)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헌납(獻納)을 역임했다.

김치원(金致元) 조선(朝鮮)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김치형(金致亨) 조선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김치리(金致利)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영보(金永保)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김정신(金鼎臣)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부사(府使)에 이르렀다.

김수온(金粹溫) 조선(朝鮮) 때 첨사(僉使)에 올랐다.

김수양(金粹讓)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복기(金復其)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 종(金 淙)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 란(金 瀾) 조선 때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김국량(金國樑) 조선 때 정언(正言)을 지냈다.

김 교(金 嶠) 1428 (세종 10) 1480 (성종 11)

자는 고경(高卿), 시호는 양양(良襄), 시로(時露)의 아들. 1450(세종 32) 무과(武科), 1457(세조 2) 무과중시(武科重試)에 급제하였으며, 1460년 신숙주(申叔舟)를 따라 모련위(毛憐衛)를 토벌한 공으로 사복시윤(司僕寺尹)이 되었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세운공으로 적 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오림군(烏林君)에 봉해졌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때 선산군(善山君)에 개봉(改封)되었고, 공조 판서를 거쳐 1479(성종 10) 평안도 절도사로 부원수(副院帥)가 되어 명나라의 요청으로 건주위(建州衛) 토벌에 출정, 공을 세웠으며, 평안도 관찰 사가 되었다.

김의남(金義男)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제남(金弟南)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두로(金頭老)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김종보(金宗輔)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종석(金宗碩)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김종유(金宗裕) 조선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김종직(金宗直) 1431 (세종 13) 1492 (성종 23)

자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숙자(叔滋)의 아들. 1459(세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성종 초에 경연관(經筵官)이 되었다. 선산 부사(善山府使) 등을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영남학파(嶺南學派)의 종조(宗祖)가 되었다.

일찌기 지은「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적어 넣은 것이 원인이 되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고, 길 재(吉 再) 및 아버지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 경향은 효제충신(孝悌忠信)을 주안으로 하는 실제적 방면에 치중했다.

총재관(摠裁官)으로서「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55권을 증수(增修)했다.

김세영(金世榮)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장눌(金長訥)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집의(執義)․목사(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김중눌(金仲訥) 조선 때 군수(郡守)에 올랐다.

김계눌(金季訥)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갑눌(金甲訥)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를 영임하였다.

김산눌(金山訥) 조선 대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김지눌(金地訥) 조선(朝鮮) 때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김승조(金承祖) 조선 대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수용(金水龍)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 의(金 倚) 조선(朝鮮) 때 목사(牧使)에 올랐다.

김윤종(金尹終) 조선 때 정랑(正郞)을 역임했다.

김응기(金應箕) 1455 (단종 3) 1519 (중종 14)

자는 백춘(伯春), 호는 병암(屛庵), 시호는 문대(文戴), 지경(之慶)의 아들, 1477(성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1499(연산군 5)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조․예조․ 병조․형조․공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1516년 좌의정을 거쳐 151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를 지냈다.

김 녹(金 錄) 조선(朝鮮) 때 부사(府事)를 지냈다.

김숙향(金叔響)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올랐다.

김득정(金得正)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 보(金 俌) 조선 때 경력(經歷)을 지냈다.

김 신(金 伸) 조선(朝鮮) 때 교수관(敎授官)에 올랐다.

김석규(金石圭) 조선 때 집의(執義)를 지냈다.

김세창(金世昌) 조선(朝鮮) 때 현감(鉉監)을 역임하였다.

김신기(金愼畿) 조선 때 정랑(正郞)에 이르렀다.

김한손(金漢孫) 조선 때 현감(縣監)에 올랐다.

김부필(金富弼)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직강(直講)을 역임했다.

김희정(金希正) 조선(朝鮮) 때 인의(引儀)를 지냈다.

김순정(金順正) 조선(朝鮮) 때 찬의(贊儀)를 역임했다.

김수정(金守正)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한신(金翰臣)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김익신(金翼臣) 조선 때 별제(別提)를 지냈다.

김중경(金仲卿) 조선 때 현감(縣監)를 역임했다.

김백경(金伯卿) 조선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김중천(金重千) 조선 때 감정(監正)에 올랐다.

김수미(金秀微)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수영(金秀嶸)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김 적(金 績)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 연(金 縯) 조선(朝鮮) 때 교수(敎授)를 역임했다.

김 익(金 翊)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 완(金 琓)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에 올랐다.

김 근(金 瑾) 조선 때 사정(司正)을 역임했다.

김숙광(金叔光) 조선 때 참의(參議)에 이르럿다.

김천수(金天授)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국로(金國老) 조선 때 별좌(別座)를 지냈다.

김진조(金振祖)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진종(金振宗)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응교(應敎)․사간(司諫) 등을 역임하였다.

김 준(金 俊)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응시(金應時) 조선(朝鮮) 때 감찰(監察)을 역임했다.

김응건(金應鍵)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김충노(金忠老) 조선(朝鮮) 때 우후(虞候)를 지냈다.

김 정(金 貞)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에 올랐다.

김 순(金 珣) 조선 때 도사(都事)를 지냈다.

김 인(金 磷) 조선 때 대호군(大護軍)(金올랐다.

김 적(金 磧)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집의(執義)․군수(郡守) 등을 역임했다.

김신종(金愼終)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중견(金仲堅)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미견(金未堅)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응상(金應祥) 조선 때 군수(郡守)에 올랐다.

김세순(金世珣) 조선 때 군수(郡守)에 올랐다.

김세유(金世瑜)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에 이르렀다.

김 남(金 南)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김수정(金守正)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수신(金守信) 조선(朝鮮) 때 유수(留守)에 올랐다.

김팽령(金彭齡)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선증(金繕增)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의손(金義孫) 조선 때 현감(縣監)에 올랐다.

김정손(金禎손)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중명(金仲命) 조선(朝鮮) 때 수사(水使)를 지냈다.

김윤종(金胤淙)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김우민(金友閔) 조선 때 도정(都正)에 올랐다.

김응복(金應福) 조선 때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김덕우(金德優)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덕재(金德載) 조선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덕남(金德男) 조선(朝鮮)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윤경(金允瓊)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김세염(金世琰)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억기(金億期) 조선(朝鮮) 때 병사(兵使)를 지냈다.

김 선(金 璇) 조선(朝鮮) 때 도사(都事)에 올랐다.

김난서(金鸞瑞)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몽령(金夢齡) 조선 때 정랑(正郞)을 지냈다.

김계현(金季賢) 조선 때 부정(副正)을 역임했다.

김 윤(金 潤) 조선 때 서윤(庶尹)을 지냈다.

김 정(金 汀) 조선(朝鮮) 때 우후(虞侯)에 이르렀다.

김 한(金 澣) 조선 때 부사(府使)에 올랐다.

김경윤(金慶胤) 조선(朝鮮) 때 교수(敎授)를 지냈다.

김대이(金大頤)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 진(金 瑱) 조선(朝鮮) 때 우후(虞侯)에 이르렀다.

김준옥(金峻玉) 조선 대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극인(金克仁) 조선(朝鮮) 때 전적(典籍)을 역임했다.

김상언(金商彦)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재용(金在鎔) 자는 약광(躍光), 호는 석계(石溪). 임진왜란 때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활약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전공을 세워 사재감 부정(司宰監副正)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학자(學者)로서 경사(經史)에 밝았다.

김여온(金汝溫) 조선(朝鮮) 때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김우령(金祐寧)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김여휘(金麗輝) 조선(朝鮮) 때 부정(副正)에 올랐다.

김 열(金 烈)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에 이르렀다.

김홍우(金弘遇)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홍간(金弘侃)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세청(金世淸) 조선 때 정언(正言)을 역임하였다.

김여추(金汝秋) 조선 때 군수(郡守)에 올랐다.

김 영(金 寧) 1567 (명종 22) 1650 (효종 1)

자는 여지(汝知), 호는 돈봉(遯峰), 숭렬(崇烈)의 아들, 정 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 1612(광해군 4)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듬해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예(司 藝)․예안 현감(禮安縣監) 등을 역임했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에는 70세의 노령으로 의병(義兵)을 규합하여 출정했다.

김 규(金 奎) 조선(朝鮮) 대 목사(牧使)를 역임했다.

김신옥(金信玉) 조선(朝鮮) 때 문과(文科)에 급제,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김 철(金 喆) 조선 때 호군(護軍)에 올랐다.

김경신(金景信)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기직(金基稷)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김기발(金基發)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김기립(金基立)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백손(金伯孫)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에 올랐다.

기성손(金成孫) 조선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성윤(金成胤)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했다.

김 의(金 漪)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 식(金 軾)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김 철(金 鐵) 조선(朝鮮)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올랐다.

김수종(金壽宗) 조선 때 좌윤(左尹)을 지냈다.

김윤옥(金潤屋)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김응남(金應男)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효원(金孝元) 1532 (중종 27) 1590 (선조 23)

자는 인백(仁伯), 호는 성암(省庵), 홍우(弘遇)의 아들. 조 식(曺植)․이 황(李 滉)의 문인. 1565(명종 2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 병조 좌랑(兵曹佐郞) 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즉위 후 새로이 등용되기 시작한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인물로서 기성사림파(旣成士林派)와의 대립이 일어나자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와 그의 집이 동대문(東大門) 밖에 있어다 하여 그 일파를 동인아라 불렀다. 그 후 당쟁이 일어난 데 대해 크게 책임을 느 끼고 시사(時事)에 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고 자숙하였다. 선조의 특명으로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승진, 재직 중 병사하였고,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이원(金履元) 1553 (명종 8) 1614 (광해군 6)

초명은 신원(信元), 자는 수백(守伯), 호는 소암(素庵), 홍우(弘遇)의 아들. 158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1593년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나가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을 구제했고,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형조 참판(刑曹參判)에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 어 명군(明軍)에게 시달리던 도내 행정을 바로 잡았다.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를 다스려 두 번 훈봉(勳封)을 받아 숭양부원군(崇陽府院君)으로 봉해지도, 병조 판서․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김의원(金義元) 1558 (명종 13) ?

자는 의백(宜伯), 호는 곤육재(困六齋), 호우(好遇)의 아들. 1591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삼사(三司)의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정랑(吏曹正郞)․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으며, 서예(書藝)에 능했다.

김준원(金俊元)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시종(金是宗)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현좌(金賢佐)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김구상(金龜祥)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연우(金連禹)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김효원(金孝源)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치경(金致敬)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올랐다.

김극계(金克繼)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중정(金重鼎)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김윤휘(金胤輝)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종서(金宗緖)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이르렀다.

김예신(金禮信) 조선(朝鮮) 때 첨청(僉正)을 지냈다.

김언강(金彦綱) 조선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김계충(金繼忠) 조선 때 첨정(僉正)에 올랐다.

김사원(金四圓)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여석(金汝錫)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은정(金殷鼎)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했다.

김 하(金 河)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몽복(金夢福) 조선(朝鮮) 때 유진장(留鎭將)을 역임했다.

김 일(金 鎰) 조선 대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선영(金善英) 조선 때 편수관(編修官)에 올랐다.

김선백(金善伯) 조선(朝鮮) 때 찰방(察訪)에 이르렀다.

김선주(金善冑) 조선 때 찰방(察訪)을 역임했다.

김천일(金千鎰) 자는 백강(伯剛), 호는 송천(松川). 1533(중종 28) 문과(文科)에 급제, 전적(典籍)․사예(司藝)를 거쳐 자인 현감(慈仁縣監)․함평 군수(咸平郡守) 등을 역임했다.

김극건(金克鍵)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극전(金克銓)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극명(金克銘)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김극흠(金克欽)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김귀수(金龜壽) 조선(朝鮮) 때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 련(金 鍊)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우승지(右承旨)를 역임했다.

김 경(金 鏡)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춘일(金春鎰) 조선 때 지평(持平)에 올랐다.

김인수(金仁秀)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인영(金仁英) 조선(朝鮮) 때 방어사(防禦使)에 이르렀다.

김 용(金 鎔)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김경일(金慶一)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지냈다.

김세렴(金世濂) 1593 (선조 26) 1646 (인조 24)

자는 도원(道源), 호는 동명(東溟), 시호는 문강(文康), 극건(克鍵)의 아들. 1616(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 1617년 정언(正言)이 되었다. 이 때 폐모(廢母)를 주장하는 자를 탄핵하다가 관산(郭山)에 유배되었다가,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 사간(司諫)을 거쳐 병조, 이조의 참의(參議)가 되었다.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있다가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 [근사록(近思錄)], [소학(小學)] 등을 간행하여 도민의 교화(敎化)에 힘썼으며,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호조판서에 승진되었다.

김진흥(金振興) 1621 (광해군 13) ?

자는 흥지(興之), 대이(待而), 호는 송계(松溪). 1564(효종 5) 역과(譯科)에 급제, 전문 학관(篆文學官)이 되고, 뒤에 호군(護軍)에 이르렀으며, 전서가(篆書家)로 이름을 떨쳐 38()에 통달하였다.

[대학장구(大學章句)], [전해심경(篆海心鏡)] 등을 진었는데 송시열(宋時烈) 등이 서문(序文), 발문(跋文)을 지어 간행했다.

김석준(金奭準) 1831 (순조 31) 1915

자는 희보(姬保), 호는 소당(小棠), 묵지도인(墨指道人). 북조풍(北朝風)의 예서(隸書)에 능했으며, 지두서(指頭書)에 뛰어났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세필(金世泌)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계립(金季立) 조선 때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김정삼(金鼎三) 조선 때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김처해(金處海)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에 올랐다.

김장석(金長碩)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시화(金時華) 조선 때 부윤(府尹)을 지냈다.

김광좌(金光佐) 조선 때 부사(府使)를 역임했다.

김윤승(金允升) 조선 때 부사(府使)에 올랐다.

김필상(金弼相) 조선 때 첨정(僉正)에 이르렀다.

김준상(金儁相)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했다.

김여건(金汝鍵)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진자(金進自)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김종오(金棕五) 조선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세탁(金世鐸) 조선 때 감정(監正)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