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부평김씨시조(富平金氏),김을진(金乙軫),김환(金丸),부평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7 09:45 수정일 : 2018-04-14 16:00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부평김씨(富平金氏)는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의 18세손 김을진(金乙軫)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선계(先系)가 실전(失傳)되어 중간계대(中間系代)를 밝히지 못하고 조선(朝鮮) 중종(中宗 : 제11대왕, 재위기간 : 1506~1544)때 통훈대부(通訓大夫)․어모장군(禦侮將軍)․충좌위 부호군(忠佐衛副護軍)에 오른 김 환(金 丸)을 일세조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부평김씨세보(富平金氏世譜)에 의하면 일세조(一世祖) 환(丸)의 아들 5형제중 셋째 세삼(世參)과 넷째 세진(世軫)의 후대(後代)에서 관동파(關東派)와 호서파(浩西派)로 갈리었으며, 막내 세규(世奎)의 후대에서는 화순파(和順派)와 영광파(靈光派)로 분파되었다.

부평(富平)은 경기도(京畿道)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진한(辰韓)에 속했으며, 고구려(高句麗) 때에는 주부토군(主夫吐郡)이라부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때 와서 장제군(長堤郡)이 되었다

그후 고려(高麗) 때 수주(樹州)․안남(安南)․계양(桂陽)․길주(吉主) 등으로 고쳐 불렀으며, 서기 1310년(충선왕 2)에 지금의 부평(富平)이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부평 김씨(富平金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인 학자(學者) 세규(世奎)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하고 고금의 예절에 박통(博通)하여 명성을 떨쳤으며, 1582 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당대에 이름난 학자(學者) 정경세(鄭經世)․김선원(金仙源) 등과 교유하며 교수직(敎授職)을 맡아 사도(士道)와 효제(孝悌)를 크게 일으켰다.

한편 그의 손자(孫子) 극수(克粹)는 인조(仁祖) 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선무랑(宣務郞)고 율봉 찰방(栗峯察訪)을 역임했고, 경립(慶立)의 아들 택(澤)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 : 간쟁․논박을 맡았던 사간원의 정3품 으뜸벼슬)과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다.

그외 이태(履兌)의 아들 여정(廲精)은 통정대부(通正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상호(尙瑚)의 아들 응추(應秋)는 승문원 좌승지(承文院左承旨)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어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평김씨는 전국에 5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 (歷代人物)-부평김씨조상인물

김세규(金世奎) 1538 (중종 33) ~ 1619 (광해군11)

자(字)는 경소(景昭), 호(號 )는 우송(友松). 일세조(一世祖) 환(丸)의 막내아을. 곤재(困齋) 정개청(鄭介淸)으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우고 1582년(선조 15)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정경세(鄭經世)․김선원(金仙源) 등과 도의(道義)를 나누었으며, 임진왜란때 향교(鄕校)가 소실(燒失)되자 그가 주선하여 복원했다. 뒤에 교수(敎授)로 천거되어 사도(士道)와 효제(孝悌)를 강학하였고「 태극․음양․심성․이기지오(太極․陰陽․心性․理氣之奧)」를 저술했다. 고창군 용계리(高敞郡龍溪里) 화양사(和陽祠)에 제향하되었다.

김극수(金克粹) 자(字)는 문백(文伯).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 하여 선무랑(宣務郞)과 율봉도 찰방(栗峯道察訪)을 지냈다.

김택(金 澤) 1610 (광해군 2) ~ 1679 (숙종 5)

초명(初名)은 천수(天粹), 자(字)는 백윤(伯潤), 경립(慶立)의 아들.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의 문인(門人). 인조(仁祖)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저작(著作)․사복시정(司僕寺正)등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을 지내고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유화(金有華) 1679 (숙종 5) ~ 1746 (영조 22)

자(字)는 중서(仲瑞). 호(號)는 일신재(日新齋), 성오(省五)의 아들.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병절교위(秉節校尉)․용양위 사과(龍驤衛司果)에 올랐다.

김여정(金廲精) 1711 (숙종 37) ~ ?

자(字)는 치명(致明), 이태(履兌)의 아들. 조선(朝鮮)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고 만년(晩年)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김명탁(金命鐸) 1716 (숙종 42) ~ 1788 (정조 12)

초명(初名)은 몽창(夢昌), 자(字)는 사협(士協), 호(號)는 해옹(海翁), 유후(有垕)의 아들, 백부(伯父), 유화(有華)에게 입양. 효성(孝誠)이 지극했으며 통사랑(通仕郞)과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지냈다.

김상호(金尙瑚) 1744 (영조 20) ~ 1814 (순조 14)

자(字)는 성엽(聖燁), 도사(都事) 명탁(命鐸)의 아들. 조선(朝鮮) 떄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좌통례(左通禮)에 추증되었다.

김응추(金應秋) 1776 (영조 52) ~ 1851 (철종 2)

자(字)는 내복(乃復), 호(號)는 양산(陽山), 상호(尙瑚)의 아들.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의 문인(門人).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문원 좌승지(承文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