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무주김씨시조,김성(金晟)

작성일 : 2017-03-27 09:03 수정일 : 2018-04-06 12:33

무주김씨의 연원

무주김씨는 광산김씨(光山金氏)와 같은 연원(淵源)으로서 김성(金晟)은 신라대보공 김알지의 43세손으로 고려 공민왕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태종조의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에 올라 무주백(茂朱佰)을 제수(除授) 받았다.

이로 연유(緣由)되어 관향(貫鄕)이 무주(茂朱)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조선조 초기에 관작(官爵)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물

2세 생려(生麗)는 태종조의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사재령(司宰令) 검교평리(檢校評理) 가선대부(嘉善大夫)겸 의금부(義禁府) 판결사(判決事)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3세 규(葵)는 세종조의 문과에 급제하여 행통정대부(行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또한 4세손 득려(得麗)는 이조참의(吏曹參議) 선약장군(宣略將軍)을 역임하고 큰아들 선지(善之)는 문종조의 집현전(集賢殿) 교리(郊理)로서 선왕의 탁고지명(託顧之命)을 받은 18학사와 종사하였고 둘째아들 한지(漢之)는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로서 3부자 다같이 1456년 6월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등극(簒奪登極)하자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하다가 거사(擧事:雲劒事件)의 실패로 인하여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처형되었으며 권속(眷屬)들은 적몰(籍沒)과 연좌(連坐)로 율문(律文)에 의하여 처리되었으며 선산(善山)에 있는 전지(田地)는 몰수(沒收)되었다.

이때 18세의 나이로 왕부문(王府門) 어사정전(御思政殿) 문밖 월랑(月廊)에서 연좌(連坐) 대죄(待罪)하던 중 가까스로 도망 나온 선지(善之)의 작은아들 해은(海隱:號)이 몸종과 함께 안면도(安眠島)에 피신하여 은거(隱居)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자세히 기록한 해은공자서전(海隱公自敍傳: 海隱記實)이 후세에 전해져 충절의 기록으로 보존되고 있다. (본 사건에 대한 사료는 이조실록 중 세조실록에 수록되어 있음)

그 후 정조 15년(1790년)에 뒤늦게나마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순절(殉節)한 충의절사(忠義節士)의 원혼(冤魂)을 모시고 영월(寧越)의 창절사(彰節祠) 배식단(配食壇)과 계룡산 동학사(東鶴寺) 숭모전(崇慕殿)에 위패(位牌)를 모시고 춘추로 제향(祭享)을 모시고 있어 후세에 크게 귀감이 되고 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무주김씨는 전국에 2,4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