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대구김씨시조(大邱金氏),김달(金達),대구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03-24 21:24 수정일 : 2018-04-06 12:48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대구김씨(大邱金氏)의 시조(始祖) 김달(金達)은 경순왕(敬順王)의 후손 김방경金方慶 : 구안동 김씨의 중흥조)의 넷째 아들인 김론(金惀)의 증손(曾孫)이다.

그는 조선(朝鮮) 때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내고 대구 도화촌(道化村)에 거주(居住)하였으나,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王子)의 난(亂)이 일어나자 함경도(咸鏡道) 길주(吉州)로 유배(流配)되었다.

그때 후손들이 함께 따라가 그곳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면서 전(前) 세거지(世居地)였던 대구(大邱)를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으며, 길주 명천파(吉州明川派)․서포파(西浦派)․광화파(光化派)․황주파(黃州派)․고령삭파(古寧朔派)․종성파(鍾城派) 등 크게 여섯파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대구(大邱)는 영남지방(嶺南地方)의 중앙부에 위치한 곳으로 경상도(慶尙道)의 행정중심지이다.

본래 신라(新羅) 시대에 달구화현(達丘火縣) 또는 달불성(達弗城)으로 불리웠다가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 대구(大邱)로 개칭되었으며, 대구(大邱)가 대구(大邱)로 쓰이게 된 것은 1750년(영조 26) 대구의 유생(儒生) 이양채(李亮采)가 대성(大聖) 공자(孔子)의 휘(諱)가 구(丘)자라 하여 개칭을 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했다가, 정조(正祖) 때부터 점차 대구(大邱)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조선 인조(仁祖 : 제16대 왕, 재위기간 : 1623~1649) 때 무장(武將)으로 이 괄(李 适)의 난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된 태암(泰巖)이 뛰어났다.

그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의주성(義州城)을 수비하다가 적에게 포위당하여 자결하였다. 그후 숙종(肅宗 : 제19대 왕, 재위기간 : 1674~1720)조(朝)에 와서 그의 충의(忠義)를 기리는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지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군수(郡守)를 지낸 득일(得鎰)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영홍(永弘)이 뛰어났고, 병조참판(兵曹參判) 취규(就奎)와 현감(縣監) 응회(應晦)는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오른 연석(連碩), 중추부사(中樞府事) 수택(壽澤), 통정대부(通政大夫) 화룡(化龍), 선략장군(宣略將軍) 진흥(振興), 부호군(副護軍) 의묵(宜黙)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대구김씨(大邱金氏)는 전국에 2,39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대구김씨조상인물

김호견(金浩堅) 조선(朝鮮) 때 교수관(敎授官)을 역임했다.

김철정(金哲汀)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태암(金泰巖) ? ~ 1627 (인조 5)

자는 자반(子盤). 1624년(인조 2) 이 괄(李 适)의 난 때 관군에 가담하여 안현 싸움에 참전,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숙종(肅宗) 때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성원(金聲遠)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김준철(金俊哲) 조선에서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득선(金得繕) 조선 때 첨사(僉使)․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득일(金得鎰)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김흥준(金興浚)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했다.

김흥택(金興澤) 조선 때 사직(司直)을 역임했다.

김흥제(金興濟)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흥오(金興澳)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김만겸(金萬謙)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김영홍(金永弘)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사철(金思喆) 조선 때 현감(縣監)․우후(虞侯)를 역임했다.

김취규(金就奎) 조선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김필선(金必宣) 조선 때 도사(都事)를 역임했다.

김응회(金應晦)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했다.

김상회(金尙晦) 조선(朝鮮)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택회(金宅晦) 조선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김대현(金大鉉)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했다.

김유현(金有鉉) 조선 때 육군참령(陸軍參領)을 역임했다.

김종설(金宗說) 조선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김지영(金志英) 조선 때 오위장(五衛將)을 역임했다.

김상척(金尙倜) 조선 때 무과(武科)에 장원하였다.

김기홍(金起弘) 조선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김대려(金大礪)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김옥기(金玉紀) 조선 때 교회관(敎誨官)을 역임했다.

김대성(金大聖)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했다.

김연석(金連碩)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수택(金壽澤)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