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김녕김씨시조(金寧金氏).김시흥(金時興)김녕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7:52 수정일 : 2018-02-23 15:22

김녕김씨의 연원(金寧金氏의 淵源)

김녕(金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文化)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다가 서기 532년 신라(新羅)법흥왕 (法興王)19년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그후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으나 경덕왕(景德王)이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고려초기(高麗初期)인 940년 태조(太祖)23년에 는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 금주(金州),등으로 불리웠으며, 1270년원종(元宗)11년 방어사(防禦使) 김 원(金咺)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분성(盆城)등으로 호칭하다 고려 1310년 충선왕 (忠宣王)2년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김녕김씨시조(金寧金氏 始祖)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7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平定)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明宗)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고려말에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어 김해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首露王)계통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후김(後金)으로 칭 하다가 1884년(고종21년)김녕 후손들이 탄원(歎願)하여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어 왕명(王命) 으로 관향(貫鄕)을 김녕(金寧)으로 확정(確定)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고려말기부터 충절(忠節)로 가통(加統)을 이은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시조(始祖) 시흥(時興)의 증손(曾孫) 중원(重源)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지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恭讓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광저(光儲) (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절의(節義)를 지켰는데, 태종(太宗)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광저(光儲)의 아들 순(順)도 고려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호(號)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忠北) 옥천(沃川) 백지리(白池里)에 정자(亭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정신(挺申)의 아들 질(秩)은 태조(太祖)가 등극전에 정의(情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응(不應)하고 아산(牙山) 도고산(道高山)에 은거(隱居)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렇게 충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김녕 김씨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관(觀 ; 시조의 8세손)의 아들 문기(文起)가 더욱 빛냈다.

그는 1399년(정종1년) 2월 16일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백지리(白池里)에서 출생하여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1년) 6월 8일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居昌)과 양지 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현석(玄錫)도 아버지인 문기(文起)를 따라 순절하였고, 문기의 손자 충주(忠柱)와 증손 경남(景南) 현손(玄孫) 약전(約前) 등이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閭)이 세워졌다.

한편 준(遵 : 시조의 10세손)은 천문(天文)․지리(地理)와 실학(實學)에 능통한 인물로 단종(端宗)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全南) 고흥(高興)으로 내려가 학문(學問)에만 전념했다.

호국(護國)의 인물을 살펴보면 이진왜란(壬辰倭亂)때 판서(判書) 복룡(福龍)의 아들 부호군(副護軍)으로 출전(出戰)한 응수(應壽), 파진군(破陣軍)응부(應富),응령(應令) 3형제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한 응수(應壽)의 장남(長男) 계현(繼賢)등 가족이 합심(合心)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워 많은 가족들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라 공신(功臣家門)으로 빚을 냈으며, 담양 부사(潭陽府使) 언공(彦恭)은 권 율(權 慄)의 영천(永川)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梁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또한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팔공산(八公山)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유부(有富)와 그의 아들 기남(起南)․난생(蘭生) 형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하고 준걸(俊傑),( 선조 때의 공신), 득성(得誠)․영길(永吉),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父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진행(鎭行)은 효행(孝行)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忠)과 효(孝)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名門) 김녕 김씨(金寧金氏)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녕김씨(金寧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577,7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김녕김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김향(金 珦) 시호(諡號)는 원청, 득관조(得貫祖) 시흥(時興)의 장남.인종(仁宗)4년 이자겸(李資謙)의난을 평정.

하여 위사공신(衛社功臣)병부상서(兵部尙書),검교태위수사공문하시랑동중서시랑평장사(檢校太尉守司空門下侍郞同中書侍郞平章事)에 오름

김순(金 珣) 득관조(得貫祖) 시흥(時興)의 차남.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내고 찬성사(贊成事)에 추증되었다.

김극세(金克稅) 원종(元宗) 때 상서(尙書)․공부시랑(工部侍郞)․대광첨의찬성사(大匡僉議贊成事)를 역임했다.

김극원(金克元) 추밀원좌승선(樞密院左丞宣)정의대부판정농사사(正義大夫判農司事)를 지냈다.

김극주(金克柱) 문과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중대광판도첨의사(重大判都僉議司)에 이르렀다.

김중원(金重源) 호는 미곡(楣谷). 경상도 안염사(慶尙道桉廉使)․형부상서(刑部尙書)을 지냈다.

김명로(金命路)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거쳐 정순대부 (正順大夫)전법사전서(典法司典書)를 지냈다.

김중보(金重輔)시호(諡號) 문간(文簡).삼중대광령첨의사사(三重大匡領僉議司事)정승성정승(政承省政丞) 역임

김귀갑(金貴甲) 문과에 급제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 밀직자사(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김현(金 峴)중정대부직문하(中正大夫直門下)를 지냈다.

김문제(金文齊)도순찰사감사(都巡察使監司)에 올랐다.

김문희(金文熙)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올랐다.

김문백(金文伯)의조시랑(儀曹侍郞)전농시경(典農侍卿)을 역임했다.

김문엽(金文燁) 봉상대부(奉常大夫)․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김정병(金挺丙) 자는 남규(南奎), 호는 회은(晦隱), 시호는 정간(貞簡).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으며, 공민왕(恭愍王)때 병부상서(兵部尙書)로 홍건적(紅巾賊)친입때 공을세워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김정신(金挺申) 정순대부(正順大夫)전공사판서(典工事判書)를 역임하고,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김광저(金光儲) 자는 화중(華中), 호는 농암(聾岩).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다.

김윤달(金潤達) 호는 호정(浩亭).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강원도 도관찰출척사(江原道都觀察黜陟使)등을 역임하였다.

김질(金 秩) 자(字)는 국상(國祥), 조산대부(朝散大夫) 소부감 소감(小府監小監)을 지냈으며, 이태조가(李太祖) 개국원종훈(開國原從勳)에 기록하고 예조판서에 임명 하였으나 불응하고 도산리(道山里)에 낙향하고 두임금을 성길 수 없다 하여 호를 송암(松庵)이라 자호 하엿다

김순(金 順)자는 창여(昌汝),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으며,고려가 망하자 벼슬에서 물러나 퇴휴당(退休堂)이라 자호 하였다.

김천익(金天益):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상원사추밀원좌승지(上元師樞密院左承旨)상장군(上將軍)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하고, 개령군(開寧君)에 봉해졌다

김인찬(金仁贊):자 의지(義之) 호 충민(忠愍)공양왕(恭讓王)4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 하였으며 서기1392년 배극겸(裵克廉)등과 함께 개성 수창궁에서 이성께(李成桂)를 조선왕(朝鮮王) 으로 취재(推載)하여 개국(開國) 좌명(開國佐命) 1등공신 익화군(益和君)에 봉군(封君)되었다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김관(金觀) 호 수헌(睡軒)태종(太宗)때 호분시위사좌령사직 (虎賁侍衛司左領司直)역임 증 호조판서(戶曹判書)

김석련(金碩鍊) 자(字)는 백여(百汝), 호는 옥호(玉湖). 이조 정랑(吏曹正郞)․이조참의(吏曹參議)를 역임했다.

김익생(金益生) 자는 정부(靜夫), 호는 성재(省齋). 경주부윤 겸 근농병마절제사(慶州府尹兼勤農兵馬節制使) 에이르렀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지(金 智)군자감정(軍資監正)․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역임 하였다.

김존일(金存一)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 하였고, 순충적덕병의 보조공신(純忠積德秉義補祚功臣)에 책록되었다.

김길상(金吉祥) 자(字)는 천뢰(天賚), 호는 만은(晩隱).통훈대부 (通訓大夫)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냈다.

김현(金 鉉) 자는 덕재(德哉) 호(號)는 인재(忍齋).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를 지냈다.

김문기(金文起)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伯村), 시호는 충의(忠毅). 1426년(세종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를 거쳐 이조 판서에 이르렀다. 1456년(세조1년) 단종 복위의 모임에 가담, 탄로되어 고문에 굴복하지 않다가 이 개(李 塏) 등과 함께 세조(世祖)에게 순절(殉節)되었다. 영조(英祖)때 10세손 정구(鼎九)의 송원(訟寃)으로 복관(復官)되었으며 서울 노량진 사육신묘역 성역화.계획에따라 동 묘역에 안치 되어있다

김효온(金孝溫) 자는 백원(伯源). 조선 시대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김효신(金孝信)진사과(進士科)에 장원(壯元)합격 하였으며,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호조참판을 거처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준(金 遵)자는 응원(應遠), 호는 만지당(晩池堂), 돈령부사(敦寧府事)에 올랐다.

김형(金 硎) 자(字)는 기삼(奇三).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지냈다.

김현석(金玄錫) 자는 태초(太初), 호는 여병재(如甁齋), 사육신(死六臣)인 부친 백촌(白村)을 따라 단종사화(端宗士禍) 때 순절했다. 거창(居昌)에는 선정비(善政碑), 영월(寧越)에는 청덕비(淸德碑)가 건립(建立)되어 있다.

김희년(金禧年) 호는 완계(浣溪). 문과복시(文科覆試)에 급제, 명필가로서 선조(宣祖)때 옥천 군수(沃川郡守)․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였다.

중(仲): 이조좌랑(吏曹佐郞)역임

위(偉): 통훈대부(通訓大夫)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지냄

수량(守良) 자 사익(士益)이조정랑(吏曹正郞)역임

유광(有光) 자 공휘(公輝)가선대부(嘉善大夫)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냄 설

남(南) 자 설언 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龍驤徫副護軍)

김담(金 譚) 자(字)는 대중(大中), 호는 탁계(卓溪). 선조(宣祖) 때 사람으로 학행(學行)으로 문명(文名)을 떨쳤고, 절충장군용양위 좌부장(折衝將軍龍驤衛左部將)에 증직(贈職) 되었다.

김구룡(金九龍) 자는 회운(會雲), 호는 봉계(鳳溪). 조선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준영(金俊榮) 자(字)는 태진(泰晋), 호는 동악(東岳), 시호는 충정(忠貞). 임진왜란때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으로 분성군(盆城君)에 봉해졌다.

김복수(金福壽):선조(宣祖)때 현감(縣監)역임

김복장(金福長):가선대부(嘉善大夫)중추부사(中樞府事)

김복용(金福龍):자는 운오(雲五)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임난(壬亂)의 공(功)으로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 공조판서(工曹判書)분능군(盆陵君)에 봉군(封君) 되었다

김응수(金應壽) 자는 남로(南老). 임진왜란 때 부호군(副護軍)으로 참전(參戰)하여 삼형제 외 가족들과 같이 창의 (倡義)하여 많은 공(功)을 세워 호성공신(扈聖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분성군(盆城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 (追贈)되었다.

김응부(金應富)임난의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름

김응명(金應命):임란때 파진군(破陣軍)으로 참전(參戰)하였으며 형제들과 같이 창의(倡義) 하여 많은 전공을세워 호성 2등원종공신(扈聖二等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준남(金俊男):김응명(金應命)의 장남으로 임란때 가족들과 같이 창의(倡義)하여 많은 공을 세워 호성 2등원종공신 (扈聖二等原慫功臣)에 책록(策祿)되었다

김윤신(金允信):김응부(金應富)의 장남으로 백숙부(伯叔父) 분성군(盆城君)김응수(金應壽)를 위시하여 가족들과 함께 창의(倡義)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워 호성 2등원종공신(扈聖二等原從功臣)에 책록(策祿)되었다

김언공(金彦恭) 자는 효칙(孝則), 호는 묵재(黙齋). 순천 부사 겸 우위장(右衛將)으로서 임진왜란 때 고금도(古今島), 벽파정(碧波亭)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고 당상관(堂上官)에 이르렀다.

김경의(金敬義) 자(字)는 정묵(正黙), 호는 매헌(梅軒), 시호는 충간(忠簡).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김유부(金有富) 호는 어초와(漁樵窩).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업고 팔공산(八公山)․밀양(密陽)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 2등원종공신(宣武二等原從功臣)이 되고 사후(死後)에 좌승지(左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에 증직(贈職)되었다.

김몽상(金夢祥)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무과에 급제하여 아버지 김응수(金應壽) 와 같이 창의(倡義)하여 많은 전공을 세워 호성2등원종공신(扈聖二等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며,광해군(光海君) 조 에는 오위잔(五衛將)을 역임하였고 병자호란이 이러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인조(仁祖)를 보위(保衛)하고 청군(淸軍)과 대전(對戰)하여 전과를 올렸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을 역임하고, 분흥군(盆興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김몽손(金夢遜)일명 기손(旣遜) 자는 득길(得吉)인조(仁祖)조에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겸 병조참판(兵曹參判)에오름

김윤성(金潤成) 임란(壬亂)의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策祿) 되었다

김적상(金績祥)현감(縣監)을 지냄

김서상(金瑞祥)사복시 (司僕寺) 판관(判官)을 역임

김의문(金義文)자 찬숙(粲淑)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역임 하였다

김계현(金繼賢):자 중집(重集) 분흥군(盆興君)김몽상(金夢祥)의 장남으로 임난(壬亂)에 공적 으로 호성 2등원종공신(扈聖二等原從功臣)에 오르고 현종(顯宗)때 진도군수(珍島郡守)를 거처 통정대부(通政大夫) 당상관 오름

김승현(金承賢):자 동로(東老) 분흥군(盆興君)김몽상(金夢祥)의 차남으로 임난(壬亂)의 공(功)으로 호성 2등원종공신 에 올랐으며 통정대부 연일현감(延日縣監)역임

김윤현(金胤賢)자는 영보(永甫) 호 모체당(慕體堂) 목사(牧使)를 지냈으며 호조참의(戶曹參議)역임

김신현(金信賢)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

김서현(金序賢)일명 서장(序丈)통정대부(洞政大夫) 선전관(宣傳官)역임

김우현(金佑賢)통정대부(通政大夫) 진위현감(振威縣監)

김효달(金孝達)자 천지(天知)증 통훈대부 상례원사평(常禮院司評)역임

김효순(金孝純)자 치지(致知) 가선대부(嘉善大夫)에오름

김 흔(金 欣) 호는 금은(錦隱), 시호는 충숙(忠肅).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냄.

김경세(金景世) 자는 현보(賢甫), 시호는 충경(忠敬) 병자호란 때 공주(公州)․등지에서 공을 세우고 광주(廣州) 전투에서 전사했다. 순조(純祖)왕이 정여(旌閭)와 상산군(常山君)에 봉군(封君)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菅)에 추증(追贈)되었다.

김효건(金孝建)자 성지 통훈대부 상례원사평(常禮院司評)

김효동(金孝同)자 천수(天受)증 가선대부(嘉善大夫)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역임

김만안(金萬安)자 여임(汝任) 충의위(忠義衛)역임

김득례(金得禮)자 예숙(禮淑) 평찬군수(平昌郡守)역임

김수한(金守漢)자 한민(漢敏) 군자감정(軍資監正)역임

김석희(金碩熙)증 통훈대부(通訓大夫)예조참의(禮曹參議)

김시건(金時建)조양무원종공신(朝楊武原從功臣) 수직(壽職)가선대부(嘉善大夫)에오름

김달명(金達命)통훈대부(通訓大夫) 충위부사용(忠衛副司勇) 간성군수(干城郡守)역임

김경현(金景鉉):증 가선대부(嘉善大夫)공조참의(工曹參議)

김종길(金宗吉)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역임

김점연(金占連):자 한향(漢鄕)호 류암(柳菴)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副事)에 오름

김연상(金連尙)자 경숙(景淑)증 통정대부(通政大夫)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副事)역임

김기인(金琪仁)자 세서(世瑞) 증 자헌대부(資憲大夫)호조판서(戶曹判書)에 오름

김성회(金成會)자 호일(浩一)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오름

김부구(金符龜)자 낙서(洛書)행 선전관(行 宣傳官)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승정원좌부승지(承政院左副丞旨)역임

김순억(金順億)자 경백(敬伯) 증 통훈대부(通訓大夫)군자감정(軍資監正)에 오름

김순업(金順業)자 경삼(敬三)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어모장군(禦侮將軍) 행 훈련원판관(行 訓練院判官)을 지냄

김보남(金輔楠)자 여필(汝弼)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오름

김명상(金命詳)자 태형(泰亨) 가선대부(嘉善大夫)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역임

김명천(金命天)자 여경(汝卿) 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龍驤衛副護軍)증 가선대부(嘉善大夫)한성부좌윤(漢城府佐尹)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菅)역임

김도명(金道明)자 대원(大源)증 가선대부(嘉善大夫)형조참판(刑曹參判)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菅)

김세좌(金世佐)자는 충경(忠京).영조(英祖)때 형조판서(刑曹判書)역임 하고 분계군(盆溪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숭정대부에(崇政大夫)에 올랐다 서기1977년 정조 원년(正祖元年) 분성군 응수파(應壽派) 정유보(丁酉譜) 발간함

김광협(金光鋏) 자(字)는 자단(子端), 호는 의재(毅齋),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역임하였다.

김기명(金沂明) 자는 성오(聲五), 호는 화게(華溪). 훈련원 도감(訓練院都監)․절제사(節制使)를 지냈다.

김성인(金聖仁) 자(字)는 호연(浩然), 호는 덕암(德巖).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이르렀다.

김용식(金溶軾)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냈다.

김병용(金炳鏞):자 경낙(慶洛) 호 구남(龜南) 고종조(高宗朝)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역임

김도현(金道鉉) 자(字)는 명옥(明玉), 호(號)는 벽산(碧山). 한말(韓末)의 의병장(義兵장將)으로 영해 대진(寧海大津)에서 순절(殉節)했다.

김한종(金漢鍾) 호는 일우(一宇). 항일광복회원(抗日光復會員)으로서 독립자금(獨立資金) 모집중 체포(逮捕)되어 대구(大邱) 감옥에서 순절(殉節)했다.

김근배(金根培) 자(字)는 광원(光元), 호는 매하(梅下). 1867년(고종4년)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문명(文名)을 떨쳤으며,1910년 한일 합방이 되자 통분하여 자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