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금릉김씨시조(金陵金氏),김무득(金無得),금릉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7:33 수정일 : 2018-04-08 14:23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금릉김씨(金陵金氏)는 가락국(駕洛國) 구형왕(仇衡王 : 구례왕이라고도 함. 가락국의 마지막 왕, 재위기간 : 521~532)의 셋째 아들 김무득(金無得)을 시조(始祖)로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 대가야(大伽倻)가 신라(新羅)의 장수(將守)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게 정복되어 신라와 병합되고, 진흥왕(振興王 : 신라 제 24대 왕, 재위기간 : 540~576)이 가락국(駕洛國)에 금관소경(金官小京)을 설치하여 시조(始祖)인 무득(武得)에게 시랑(侍郞) 겸 총관(摠管)을 제수하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했으므로, 그의 아들 창현(昌玄)이 본관(本貫)을 금릉(金陵)으로 삼았다고 한다.

금릉(金陵)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중서부(中西部)에 위치한 고장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의 감문소국(甘文小國)이었다. 그후 서기 660년 (신라 무열왕 7)에 와서 감문군(甘文郡)으로 불리웠고, 757년(경덕왕 16) 개령군(開寧郡)으로 개칭되었다가 1914년 조선 총독부령에 의하여 금천군(金泉郡)으로 바귀었으며, 1949년 금릉읍이 시(市)로 승격됨에 따라 지금의 금릉(金陵)으로 고쳐졌다.

그러나 그후의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어 후손들은 고려(高麗)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 1214~1260)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서경유수(西京留守) 등을 지내고 나라에 공(功)을 세워 태자 태사(太子太師)에 오르고 금릉군(金陵君)에 봉해진 김중구(金仲龜)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대표적인 인물

고려조(高麗朝)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지낸 위(褘 : 금릉군 중구의 아들)와 낭장(郎將) 의(儀)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태자 태보(太子太保) 석보(錫保)의 아들 효탁(孝鐸)은 태자 첨사(太子詹事 : 동궁에 속한 정 3품 벼슬)에 올라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한 관(琯 : 석보의 손자)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참의(參議)를 지낸 택(澤)의 아들 광귀(光貴)가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규(規)는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이름난 학자(學者)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으나 벼슬을 버리고 향리닌 금릉군(金陵郡) 어모면(禦侮面) 덕마동(德馬洞)에 돌아갔다가 옥천(沃川) 청신(靑山)의 청량산(淸凉山)으로 이거(移居)하여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일생을 바쳤다. 그리고 규(規)의 아들 각(珏)은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功)을 세워 정국원종이등공신(靖國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고 덕산 현감(德山縣監)을 지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현감(縣監) 맹지(孟智)와 이조 참판(吏曹參判) 철성(哲成) 부자(父子)가 뛰어났고, 원석(元錫)은 빈곤한 가세(家勢)에도 부모(父母) 봉양이 지극하여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학자(學者)로 유명한 장(樟 ; 교위 홍선의 아들)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門人)으로 학문이 뛰어나 「훈몽서지행방편(訓蒙書知行方編)」을 저술하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상원(相元)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인 구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금릉김씨(金陵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5,565 가구, 18,15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금릉김씨조상인물

김원생(金元生)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김중구(金仲龜) 일명(一名) 중구(重龜). 고려 고종조(高宗朝)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수사공(守司空)․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서경유수(西京留守) 등을 역임하면서 충절과 청검(淸儉)으로 명성이 높았고, 태자태사(太子太師)에 올라 금릉군(金陵君)에 봉해졌다.

김 위(金 褘) 고려(高麗) 때 보문각 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했다.

김 의(金 儀) 고려에서 낭장(郎將)을 지냈다.

김대년(金大年)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역임하였다.

김석보(金錫保) 고려조(高麗朝)에 태자 태보(太子太保)를 역임하였다.

김효탁(金孝鐸) 일명(一名) 효석(孝析). 고려 때 태자 첨사(太子瞻事)를 지냈다.

김 관(金 琯) 고려에서 좌복야(佐僕射)를 역임했다.

김 택(金 澤) 고려말(高麗末)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내면서 이성계(李成桂)의 개국을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올랐다.

김광귀(金光貴) 조선(朝鮮) 때 양주 목사(楊州牧使)를 지냈다.

김 규(金 規) 성리학(性理學)에 정통한 학자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다가 향리인 금릉군(金陵郡) 덕마동(德馬洞)으로 퇴거했다.

김 각(金 珏) 1506년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원종이등송신(靖國原從二等功臣)이 되고 덕산 현감(德山縣監)을 지냈다.

김자형(金自亨) 조선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김자옥(金自玉)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맹지(金孟智)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 이(金 爾)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 약(金 若)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김 새(金 璽) 조선조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김철성(金哲成) 조선(朝鮮) 때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김정추(金井甃) 조선 대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김정렬(金井冽) 조선조에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거쳐 첨지중추부사(僉智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성손(金盛孫) 조선에서 참봉(參奉)을 지냈다.

김흥선(金興善) 조선(朝鮮) 때 현신 교위(顯信校尉)에 이르렀다.

김흥경(金興慶) 자(字)는 화보(和俌). 조선 때 봉사(奉事)를 지냈다.

김원개(金元凱) 조선에서 직장(直長)을 지냈다.

김몽기(金夢起) 조선조(朝鮮朝)에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김의숙(金義淑) 조선 때 병마 우후(兵馬虞候)를 역임했다.

김행건(金行健) 조선(朝鮮)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김 장(金 樟) 자(字)는 대이(大而), 호(護)는 몽재(蒙齋),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文人)으로 학문이 뛰어나「훈몽서지행방편(訓蒙書知行方編) 등을 저술했다.

김상진(金相進) 자(字)는 사달(士達), 호(護)는 탁계(濯溪), 송명흠(宋明欽)․김원향(金元行)의 문하에서 수업하여 학문이 뛰어났다. 학행으로 조경묘(肇慶廟) 참봉(參奉)에 제수되고, 선공감 봉사(繕工監奉事) 등을 역임했으며, 문집(文集) 5권이 전하고 있다.

김덕징(金德澄) 조선 때 승지(承旨) 겸 경연참찬(經筵參贊)을 지냈다.

김상원(金相元)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참판(戶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유습(金惟習)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