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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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1-09 16:38 수정일 : 2017-12-31 14:08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하는 지명(地名)으로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였는데 신라(新羅)에서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서기 757(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 51대 왕, 제위기간 : 887897)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後百濟)를 세워 도읍을 정하기도 하였으나 918(고려 태조 19) 태조(太祖)가 신검(神劒)을 토멸(討滅)하고 군현(郡縣)을 정비할 때 처음으로 광주(光州)라 칭하였다.

성종(成宗) 때 와서 해양현(海陽縣)으로 불리우다가 1259(고종 46) 기주(冀州 : 일명 기양주)로 고쳤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조선(朝鮮) 성종조(成宗朝)에 현()으로 강등되어 광산(光山)이라 칭하다가 연산군(燕山君) 때 다시 주()로 승격하였고, 1895(고종 32) 전국을 23()로 나눌 때 나주부(羅州府) 관할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으며 1935년 광주(光州)가 부()로 승격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문(名門)으로 손꼽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신라왕실(新羅王室)의 후예인 김흥광(金興光)이 장차 국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경주(慶州)를 떠나 광주(光州)의 서일동(西一洞 : 지금의 담양군 평장동)에 은거(隱居)하여 시적(始籍)하게 되었으며, 고려조(高麗朝)에서 정2품직인 평장사(平章事)를 많이 배출하여 마을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 불렀다.

고려초기(高麗初期)부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한 광산 김씨(光山金氏)는 시조의 10세손 체의 아들 위()와 주영(珠永) 형제대()에서 크게 두갈래로 나뉘어져 광세(光世)와 광존(光存)의 양대산맥으로 이어진다.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추증된 광세(光世)의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그의 아들 경량(鏡亮)이 대장군(大將軍)에 올랐고, 손자(孫子) ()의 삼별초(三別抄)의 난 때 순절하였으며, 주정(周鼎)은 충렬왕(忠烈王) 때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를 역임하였다.

()의 손자인 광재(光載 : 문정공 태현의 셋째 아들)는 공민왕(恭愍王) 때 난정이 시작되자 두문불출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무덤가에 여막(廬幕)을 짓고 거상(居喪)하니 왕()이 그의 효성(孝誠)을 가상히 여겨 그가 사는 곳에 <영창방효자리(靈昌坊孝子里)>라는 정표(旌表)를 세우게 했다.

세종조(世宗朝)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지낸 예몽(禮蒙)의 아들 성원(性源)은 세조(世祖) 때「동국여지승람(東國與之勝覽)」을 편찬했고, 손자 구(絿)는 중종(中宗) 때 조광조(趙光祖)의 혁신정치에 동조한 소장파로 김 정(金 淨)․김 식(金 湜)․한 충(韓 忠) 등과 더불어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졌으며 뛰어난 필법과 명문장으로 외교문서를 집필했고 그가 살던 인수방(仁壽坊)의 마을 이름을 붙여 인수체(仁壽體)란 필체가 생겨났다.

당적보(黨籍譜)」에 의하면 김 구(金 絿)는 중국(中國) 사람들이 자기의 글씨를 귀중히 안다는 말을 듣고는 글씨를 쓰지 않아 세상에 남은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중종(中宗) 때의 우의정(右議政) 극성(克成)30여 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경륜과 계책이 비상하여 조정에서 명성을 날렸다.

다시 광존(光存)의 인맥을 살펴보면 그의 현손(玄孫) ()이 대제학(大提學)에 올랐고, ()의 증손(曾孫) 약채(若采)에서부터 조선조(朝鮮朝)의 명맥(名脈)이 이어졌다.

고려말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약채(若采)는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를 지냈고, 그의 아우 약항(若恒)은 공민왕 때 대사성(大司成)으로 사신(使臣)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표문(表文)이 공손치 못하다고 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양자강변에 유배(流配)되었다가 마침내 돌아오지 못하였다. 뒤에 황제의 노여움이 풀려 가족에게 시체를 찾아가라고 하여 늙은 여종이 부인이라고 핑계하고 남경까지 가서 시체를 찾아왔다.

용재총화」에 보면 약항(若恒)의 아들 처()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죽었으므로 충격을 받아 미친병이 들어 소리내어 울고 밤에는 싯귀(時句)를 길게 읊으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비틀거리고 다녔으며, ()는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고 효성(孝誠)이 지극하여 어머니 상()을 당하자 여막(廬幕) 벽에다가 효경(孝經)의 상친장(喪親章)을 써서 붙이고 날마다 바라보며 읽고 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도록 울기를 3년동안 조금도 쉬지 않았으니 그 비참하게 우는 소리에 듣는 사람이 눈물을 지었다고 한다.

관찰사 약채(若采)의 증손(曾孫) 국광(國光)은 성종(成宗) 때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좌리일등공신(左理一等功臣)으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일찌기 익성공(翼成公) 황 희(黃 喜)가 그를 한번 보고 큰 인물로 인정하여 자기 손녀(孫女 : 소윤 황보신의 딸)로서 아내를 삼아 주었고 작게 성취할 사람은 아니다하고 그를 대할 때 반드시 갓을 썼다고 한다.

세조(世祖)가 상정국(詳定局)을 열어 당시의 학문(學問)이 뛰어난 신하를 뽑아 조종(祖宗)의 옛 제도를 참작하고 시대의 사정에 맞게 가려내어「경국대전(經國大典)」을 편찬할 때 그도 뽑히어 뛰어난 업적을 남겨 세조가 국광같은 사람은 참으로 문()과 무()를 겸비한 재사이다하고 <사지제일(事知第一)>이라는 친필을 써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어느 날은 편전에 있으면서 손수 자기 밥을 떠 먹여 주었다고 한다.

국광(國光)의 아우 겸광(謙光)은 성종(成宗)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좌리삼등공신(佐理三等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고, 국광의 아들 극뉴(克忸)는 대사간(大司諫), 극복(克福)은 찬성(贊成)을 역임하였다.

한편 겸광(謙光)의 아들 극핍(克愊)은 연산군 때 바른 말을 하다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산현(高山縣)으로 유배되었고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탄핵을 받아 일생을 귀양지에서 생활했었다.

극뉴(克忸)의 손자(孫子) ()는 명종(明宗) 때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오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증손(曾孫) 계휘(繼輝)는 선조(宣祖) 때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성리학(性理學)과 예학(禮學)에 능통하여 국사가 있을 때마다 자문에 응했다.

계휘의 아우 은휘(殷輝)가 일찌기 초야에 있었을 때의 일이다. 광해군(光海君)이 세자(世子)로서 동궁(東宮)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은휘(殷輝)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論責)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전을 빌린일이 있었다)의 고사(古事)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宋翼弼)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滅門)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先祖)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조선 예학(禮學)의 종주(宗主)로 가문(家門)에 명문(名門)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게 한 사계(沙溪) 장생(長生)1548(명종 3) 대사헌(大司憲) 계휘(繼輝)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에 8문장가로 이름난 송익필(宋翼弼)에게 예학을 배우고 석학(碩學) 이율곡(李栗谷)에게 성리학(性理學)을 전수받아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영수가 되었다.

천성이 겸손하며 어질고 후하여 자연히 도()에 가깝고 학문하는 방법은 한결같이 종자(種子)와 주자(朱子)를 법으로 삼아 세상살이의 화려함을 싫어하였으며 당시의 예()에 관한 질문은 모두 그에게로 왔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맨 먼저 장령(掌令)에 임명하면서 안거(安車 : 늙고 병든 사람이 편아하게 탈 수 있는 수레)와 임금의 친서(親書)를 보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병든 몸으로 여러 훈신들에게 글을 보내기를 <시종(始終) 삼가하여 임금의 덕을 잘 보도하며 묵은 폐단을 개혁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며 공도(公道)를 넓히고 사사로이 가까운 내시, 궁녀 등을 경계하며 염치를 존중하고 검약을 몸소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그의 글이 임금에게까지 알려지고, 임금이 그의 재능과 덕망을 정치에 이용하고 싶어 초조해 했다고 한다.

벼슬은 가의대부(嘉義大夫)로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그쳤으며 83세에 연산(連山)에서 생을 마치며 후손에게 다음 두 가지 유훈(遺訓)을 남겼으니, <첫째 영정(影幀)은 머리칼 하나가 틀려도 제모습이 아니니 쓰지말 것, 둘째 내 자손이 수십대에 이르더라도 의()를 두터이 지낼 것> 이었다.

그가 남긴「경서변의(經書辨疑)8, 의례문해(疑禮問解)8,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1,가례집람(家禮集覽)3,「상례비요 (喪禮備要)1권 등 총21권의 저서(著書)는 한국(韓國)의 예전(禮典)으로 평가된다.

장생(長生)의 예학은 아들 집()에게 이어지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에게 전승되어 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했다.

()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남보다 특이하여 충신효제(忠信孝悌)로서 몸을 세우는 근본을 삼았으며, 이치를 탐구하고 경()을 주장하는 것으로 도학(道學)의 터전을 삼았다.

1646(인조 24) 산적(山賊) 류 탁(柳 濯) 등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 무리들에게 류 탁이 말하기를 김승지(金承旨 : 김 집) 집을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이 말을 듣고 경연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흉악한 무리들도 어진 사람을 두려워 하고 피할 줄은 안다하였다.

그는 아버지(장생)40여 년간 모셨는데 그 부자(父子)의 법도를 지켜 아들이 질문했을 때 아버지는 몸이 앓는 일이 있어도 단정히 앉아서 대답한 것이라든지, 각상(各庠)과 각방(各房)에서 밥을 먹을 때 아버지의 젓가락 놓는 소리를 듣지 않고는 미리 밥상을 물리는 법이 없었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부인 유씨(兪氏)의 성품이 분명하지 못하여 부부의 도리를 갖출 수가 없어 마침내 이율곡(李栗谷)의 서녀(庶女)를 얻어 첩을 삼았는데 어질고 여공(女工)을 잘하였다. () 부인이 죽자 그의 아버지 사계(沙溪)는 아들이 상처하였으니 후처를얻어 아들을 낳아서 선대를 계승할 수 있겠다고 속으로 좋아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각각 운명이 있는 법인데 운명이 좋지 않아서 먼저 사람(유씨)과 짝이 되어 평생동안 욕을 보았는데 이제 비록 다시 장가 든다고 하여도 꼭 먼저사람보다 나을 줄 알겠읍니까?” 하며 대()를 잇지 못하였다.

한편 이조 참판(吏曹參判) (: 사계의 아들, 집의 아우)의 아들 익희(益熙)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화의를 반대했고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로 싸웠으며, 그의 아우 익겸(益兼)은 병자호란 때 어머니 서씨(徐氏)를 데리고 강화(江華)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남문(南門)에 올라가 자폭하여 영의정에 추증되고 광원부원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숙종(肅宗) 때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의 주역인 익훈(益勳 : 반의 아들, 익겸의 아우)은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의 정권을 다시 잡자 강계(江界)로 유배되었으며, 현종(顯宗) 때의 예조 참판(禮曹參判) 익경(益景)은 죽은 인성왕후(仁宣王后)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문제(服喪問題)에 송시열 등과 함께 대공설(大功說)을 주장하다가 양성(陽城)으로 귀양갔다.

인경왕후(仁敬王后 : 숙종의 비)의 아버지인 만기(萬基)와 효자(孝子) 만중(萬重)은 익겸(益兼)의 아들로서 형제가 나란히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명신(名臣)이다.

특히 만중(萬重)은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남을 평생의 한으로 삼고 홀어머니 윤씨(尹氏)의 곁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하며 어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밤낮으로 어머니와 얘기하며 동물 흉내와 어린이 흉내까지 내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남해(南海)의 유배지에서 쓴 한글소설「구운몽(九雲夢)」은 부귀공명이 일장춘몽이란 내용으로 그의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하여 썼다고 한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중종(中宗)의 딸 혜순옹주(惠順瓮主)와 혼인하여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진 인경(仁慶 : 겸광의 증손)과 이 황(李 滉)의 문인(門人)으로 안동(安東) 지방의 학문융성 창도자로 알려진 언기(彦璣)가 유명했고, 전적(典籍) 세우(世愚)의 아들 규는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벼슬이 판윤(判尹)에 이르렀다.

임진왜란의 명장(名將) 덕령(德齡)은 충절(忠節)로 가문(家門)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이다. 그는 1567(명종 22) 광주 석지촌(石厎村)에서 붕섭(鵬燮)의 아들로 태어나 성리학(性理學)의대가(大家)인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成縣監) 이 귀(李 貴)의 천거로 익호장군(翼虎將軍)의 호()를 받고 의병(義兵)을 정돈하여 선전관(宣傳官)이 되어 권 율(權 慄)의 휘하에서 수차에 걸친 전쟁에 공()을 세웠다.

그는 젊어서부터 뛰어난 용맹으로 명성을 떨쳤으며, 일찌기 이 귀(李 貴)가 그를 천거하는 글에 <지혜는 공명(孔明)과 같고 용맹은 관우(關羽)보다 낫다>고 하였다.

1596(선조 29) 이몽학(李夢鶴)이 홍산(鴻山)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이를 토벌하려다가 이미 진압되어 도중에 회군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신경행(辛景行 : 당시 충청도 순찰사 종사관)의 무고로 국문을 받다가 옥사(獄死)했다.

그가 임전했을 때는 항상 철퇴 두 개를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그 무게가 백 근이나 되어 팔도에서 그를 신장(神將)이라 불렀고, 왜군들도 그의 용맹을 무척 두려워 했다고 한다.

난중잡록(亂中雜錄)」에 의하면 왜장 기요마사는 그 명성을 듣고 몰래 화공(畵工)을 보내어 그 얼굴을 그려다가 보고는 <참으로 훌륭한 장군이다>하고 항상 계엄하였고, 뒤에 덕령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술을 마시고 기뻐 날뛰면서 이제 양호(兩湖)는 걱정이 없다고 했다 한다.

한편 만수(萬壽)․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 4형제는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유극량(劉克良)의 군대와 장단(長湍)8서 합세하여 임진강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광운(光運)과 두남(斗南)은 진주(晋州)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을 빛냈고, 선조(宣祖) 때 대북(大北)의 지도자였던 질간(質幹 : 이조 참판을 역임)은 「동몽훈설(童蒙訓說)」을 저술한 진우(震羽), 호남(湖南) 8문장의 한 사람인 공선(公善) 등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그외 선조(宣祖) 때 포도시(葡萄詩) 로 중국(中國)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영남(潁南)과 숙종(肅宗) 때 예서(禮書)에 능했고 「옥산유고(玉山遺稿)」를 남겼던 우형(宇亨 : 공조 판서를 지내고 기로소에 들어감)이 뛰어났으며, 진은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지내고 볼모로 심양에 갔다가 두문불출하고 학문(學問)에만 진력했다.

영조(英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양택(陽澤)은 부제학(副提學)과 대사성(大司成)․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776(영조 52)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상복(相福)은 영의정을 역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에 전임되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금위대장(禁衛大將) 기석(箕錫)과 학문과 덕망이 높아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던 지수(志洙) 등이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이었고, 재풍(在蘴)은 친로파(親露派) 세력에 쥐어 허덕이는 국권(國權)을 회복하는 데 앞장서서 한말 풍운에서 고절(古節) 있는 대인(大人)으로 추앙받았다.

익현(翼鉉)의 아들인 영덕(永德)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한말에 죽음으로써 한일합방을 반대하여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영숙(永肅)과 함께 예의충효(禮義忠孝)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名門) 광산 김씨(光山金氏)를 더욱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전국에 총 926,31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김 길(金 佶) 학문이 탁월하고 덕망이 높았으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민족통일의 대업을 이루는데 크게 공을 세워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다.

김 준(金 峻) ()의 아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김 책(金 策) 시호는 문정(文貞), ()의 아들. 964(광종 15)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실시한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요직(要職)을 거쳐 평장사(平章事)․좌복야(佐僕射)를 지냈다.

김정준(金廷俊) ()의 아들. 1035(정종 1)에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거쳐 1043(정종 9) 7월에 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동년 11월에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김양감(金良鑑) 시호는 문안(文安), 정준(廷俊)의 아들. 1070(문종 24) 서북로 병마사(西北路兵馬使)가 되고 이어 상서좌승지(尙書佐承旨)․참지정사(參知政事)․판상서병마사(判尙書兵馬使)를 거쳐 1082년 좌복야(佐僕射)에 올랐다.

김약온(金若溫) 초명은 의문(議文), 시호는 사정(思靖), 양감(良鑑)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거쳐 1122(인종 즉위)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김의원(金義元) 시호는 충정(忠靖). 양감(良鑑)의 아들로 일찌기 문과(文科)에 올라 조호 부도감판관(調戶部都監判官)을 거쳐 호부 상서(戶部尙書)․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등을 역임했다.

김광중(金光中) 의종(毅宗) 때 간의대부(諫議大夫)․비서감(秘書監)을 지냈다.

김주영(金珠永) 고려 때 금오위 중랑장(金吾衛中郞將)을 지내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증직되었다.

김광세(金光世) ()의 아들.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내고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봉(追封), 조의대부(朝議大夫)․신호위대장군(神號衛大將軍)에 증직(贈職) 되었다.

김 수(金 須) 문과(文科)에 급제, 어사(御史)를 거쳐 영암 부사(靈巖副使)를 지냈으며, 1271(원종 12) 진도(珍島)에서 패한 후 제주(濟州)로 몰려드는 삼별초의 토벌에 참여했다.

김주정(金周鼎) ? 1290 (충렬왕 16)

시호는 문숙(文肅). 음보(蔭補)로 부성위(富城尉)가 되고, 1264(원종 5) 문과(文科)에 장원, 해양부 녹사(海陽府錄事)를 거쳐 정방(政房)에 보직되어 이부 시랑(吏部侍郞) 등을 지내고, 1274(충렬왕 즉위) 대부경(大府卿)․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 1278(충렬왕 4) 도 감사(都監使)가 되어 왕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와서 좌부승지(左副承旨)․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를 지냈다.

김 연(金 璉) 1215 (고종 2) 1291 (충렬왕 17)

시호는 양간(良簡), 대린(大鱗)의 아들. 충렬왕(忠烈王) 초에 경상도 도지휘사(慶尙道都指揮使)가 되었다.

김태현(金台鉉) 1261 (원종 2) 1330 (충숙왕 17)

자는 불기(不器), 시호는 문정(文正), ()의 아들. 1276(충렬왕 2) 16세로 문과(文科)에 급제, 판도총랑(版圖摠郞)․우승지(右承旨)를 지내고, 1306(충렬왕 32)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로 원나라에 다녀온 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충숙왕 때 평리(評理)․ 권정동행성사(權征東行省事)를 거쳐 중찬(中贊)을 역임했다.

김 심(金 深) 시호는 충숙(忠肅), 주정(周鼎)의 아들. 충렬왕 때 뚤루게(볼모)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와 낭장(郎將)이 되었고,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있을 때에 아버지의 직을이어받아 만호(萬戶)가 되었다. 1305(충렬왕 31)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서 충선왕을 모시고 돌아와 참리(參理)가 되었고, 충숙왕 때 수첨의정승(守僉議政丞)․판총부사(判摠部事)․여절보안공신(礪節保安功臣)이 되고 뒤에 협보공신(協輔功臣)의 호를 받았다.

김사원(金士元) 시호는 정경(貞景). ()의 아들로 전서(典書)․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첨의찬성사(參議贊成事) 등을 역임하였다.

김 진(金 稹) 시호는 장영(章榮), 사원(士元)의 아들. 16세에 문과(文科)에 올라 정당 문학(政堂文學)․대제학(大提學)․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다.

김광식(金光軾) 충렬왕(忠烈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총부의랑(摠部議郞)을 지냈다.

김광철(金光轍) ? 1349 (충정왕 1)

호는 둔재(鈍齋), 시호는 문민(文敏), 태현(台鉉)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거쳐 1347(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될 때 그 판사(判事)가 되었다. 뒤에 화평군(化平君)에 봉해졌다.

김광재(金光載) ? 1363 (공민왕 12)

자는 자여(子與), 호는 송당(宋堂), 시호는 문간(文簡), 태현(台鉉)의 아들. 충선왕(忠宣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성균학관(成均學官)․사복시승(司僕侍丞)․도관 정랑(都官正郞)을 지냈고, 1344년 충 목왕이 즉위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지신사(知申事)․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역임했다.

김석견(金石堅) ()의 아들. 충숙왕(忠肅王) 때 밀직부사(密直府使)를 지내고, 충혜왕(忠惠王) 때 화평부원군(化平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339(충숙왕 8) 조 적(曹 頔)의 난 때 임금을 시종한 공으로 1등 공신에 책봉되었다.

김승사(金承嗣) ()의 아들. 충목왕 때 삼사 좌사(三司左使)․병마도 원수(兵馬都元帥)를 지냈다.

김광로(金光輅) 1317(충숙왕 4) 문과(文科)에 급제, 가안부 녹사(嘉安府錄事)를 지냈다.

김승진(金承晋) 공민왕 대 상호군(上護軍)을 지내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승로(金承魯) 공민왕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김윤장(金允藏) 주정(周鼎)의 손자.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판도판서(版圖判書)․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냈다.

김광리(金光利) ()의 아들. 공민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이르러 전리 판서(典理判書)․영삼사사(領三司事) 등을 지냈다.

김영리(金英利) 공민왕 때 통의대부(通議大夫)․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를 지냈다.

김안리(金安利) 공민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김천리(金天利) 안리(安利)의 아우. 공민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밀직부사(密直副使)․상호군(上護軍) 등을 지냈다.

김 정(金 精) 승사(承嗣)의 아들. 고려 충렬왕 때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다.

김 방(金 倣) 승로(承魯)의 아들. 조선조에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김흥조(金興祖) 고려 때 수원(水原)․해주(海州)의 수령(守令)을 지냈으며,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남행(南行)하는 왕을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종공신에 책록되었다.

김종연(金宗衍) ()의 아들. 아버지 김 정(金 精)이 신 돈을 죽이려고 모의하다 발각되어 참변을 당하자 피신했다가 신 돈(辛 旽)이 주살된 뒤 복관이 되어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때 원수(元帥)가 되어 창궐하는 왜구의 침범을 막았다.

김적선(金積善) 고려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중추원사(中樞院事)를 역임했다.

김덕선(金德善) 적선(積善)의 아우. 공민왕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김종선(金從善) 조선 태조(太祖) 때 가선대부(嘉善大夫)․경상 감사(慶尙監司)를 지냈다.

김회조(金懷祖) 자는 경선(景先), 호는 치당(致堂), 광철(光撤)의 아들.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올라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내고 해양군(海陽君)에 책봉되었다.

김 첨(金 瞻) 1354(공민왕 3)1418(태종 18)

초명은 구이(九二), 자는 자구(子具), 호는 연계(連溪), 판도판서(版圖判書) 회조(懷祖)의 아들. 1376(우왕 2)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친어군 호군(親禦軍護軍)․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지냈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봉상시 소경(奉常寺少卿)에 임명되고, 그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예조 전서(禮曹典書)․첨서승추부사(簽書承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김 정(金 鼎) 고려 공민왕 때 전라도 찰방(全羅道察訪)을 지내며 공()을 세워 추성 좌리공신(推誠佐理功臣)이 되고,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김인우(金仁雨) 광리(光利)의 아들.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전리 판서(典理判書)를 지내고, 1361(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공()을 세워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이 되었으며, 장사 감무(長沙監務)를 지냈다.

김갑우(金甲雨) 광리(光利)의 아들. 공민왕 때의 무신(武臣)으로 1369(공민왕 18) 천우위 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계지(金繼志) 호는 송곡(松谷). 태종조(太宗祖)에 태상왕(太上王)에게 충언격군(忠言格君)하여 회천(回天)하게 한 공으로 태종이 도총제(都摠制)를 제수했고, 후에 병조 판서(兵曹判書)․순충보조명량(純忠補祚明亮)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김남우(金南雨) 호는 창주(滄州), 갑우(甲雨)의 아우. 태조 때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올라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다.

김 예(金 預) 천리(天利)의 아들. 태조 때 감찰 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김 재(金 滓) 1408(태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순충명량보리(純忠明亮輔理)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었다.

김한로(金漢老) 1367 (공민왕 16) ?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장인. 1383(우와 9) 문과(文科)에 급제, 예조 판서(禮曹判書)․대사헌(大司憲)․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병조 판서(兵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뒤에 좌의정(左議政)에 추증(追贈)되고 광산군(光山君)에 추봉되었다.

김약채(金若采) 광성군(光城君) ()의 아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웅왕 때 좌사의 대부(左司議大夫)를 지냈고, 조선 건국 후 좌산기상시(左散騎常時)․대사헌․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를 역임했다.

김약항(金若恒) 자는 구경(久卿), 호는 척약재(惕若齋), 대광(大匡) ()의 아들. 1371(공민왕 20) 문과(文科)에 급제, 전교 준부(典校注簿)가 되고, 이어 여러 관직을 거쳐 예의 총랑(禮儀摠郞)에 이르렀으며, 조선이 건국되자 대사성을 역임했다.

김승길(金承吉) 호는 사은(沙隱), 판서(判書) 인우(仁雨)의 아들. 함종 현령(咸從縣令)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절신(節臣)이다.

김약시(金若時) 시호는 충정(忠定), 약항(若恒)의 아우. 1383(우왕 9) 문과에 급제, 진현관 직제학(進賢冠直提學)이 되었고, 고려가 망하자 황주(黃州)에 은거, 벼슬에 나가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킨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조선 순조 때 이조 판서(吏曹判 書)․대제학(大提學)에 추증(追贈) 되었다.

김석재(金碩材) 자는 진덕재(進德齋), 호는 덕재(德齋), ()의 아들. 호조 참판(戶曹參判),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역임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소(金 遡) 자는 원지(原之), 석재(碩材)의 손자. 1401(태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합격, 사성(司成)을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보문관 제학(寶文館提學)을 역임했다.

김 간(金 盰) ()의 아우. 조선 태조 때 공조 판서(工曹判書)․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역임했다.

김문발(金文發) 호는 부용정. 1394(태조 3) 전라 수군절제사(全羅水軍節制使)로서 왜선을 겨파하였고, 이어 경기․전라․충청․경상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김맹권(金孟權) 호는 만취당(晩翠堂), 감찰(監察) 중로(中老)의 아들. 보령(保寧) 출신. 일찌기 진사(進士)가 되고, 문명이 높아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로 뽑혔다.

김구경(金久冏) 1407년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 호군(護軍)을 거쳐 집현전 직학사(集賢殿直學士)를 지냈다.

김숙로(金叔老) 성우(成雨)의 손자. 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자헌대부(資憲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김치공(金致恭) 호는 만달정(晩達亭), ()의 조카. 세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김매경(金邁卿) 조선 때 예조 판서(禮曹判書)․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등을 역임했다.

김 문(金 問) 조선에서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관 검열(禮文館檢閱)을 지냈다.

김 한(金 閑) 약채(若采)의 아들. 조선초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중군도총부 부총대(中軍都摠府副摠制)를 지냈다.

김 열(金 閱) 호는 퇴촌(退村), 약채(若采)의 아들.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냈으며, 학문이 출중하였고 시()에 능했다.

김가고(金價高) ()의 아들. 태종 때 진사가 되었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 청(金 廳) 시호는 희정(僖靖), ()의 아우. 태종(太宗) 때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이르러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판승문원사(判承文院事) 등을 지냈다.

김 호(金 湖) 호는 삼모재(三募齋). 양촌(陽村) 권 근(權 近)의 문인으로 1414(태종 4)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거쳐 외직(外職)으로 함길도 안렴사(咸吉道按廉使)를 지냈다.

김국광(金國光) 1415 (태종 15) 1480 (성종 11)

자는 관경(觀卿), 호는 서석(瑞石), 시호는 정정(丁靖), 감찰(監察) 철산(鐵山)의 아들. 1441(세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등용되고, 감찰(監察)․봉상시 판관(奉常寺判官) 등을 지냈다. 세조 때 좌찬성(左贊成)이 되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졌으며,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에 올라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1등이 되고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일찌기 세조의 명으로 최 항(崔 恒)․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 등과 함께「경국대전(經國大典)」편찬에 참여했다.

김부필(金富弼)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後凋堂), 시호는 문순(文純). 명종 때에 생원(生員)이 되고, 퇴계(退溪) 이 황(李 滉)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했으며,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김겸광(金謙光) 1419 (세종 1) 1490 (성종 21)

자는 위경, 시호는 공안(恭安), 철산(鐵山)의 아들. 1453(단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검열(檢閱)․군기감정(軍器監正)․우부승지(右副承旨) 등을 지내고, 1471(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이 되어 광성군(光城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 贊)을 역임했다.

김자민(金自敏) 안리(安利)의 현손(玄孫). 세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를 거쳐 외직(外職)으로 동래 부사(東來府使)를 지냈다.

김예몽(金禮蒙) ? 1469 (예종 1)

자는 경보(敬甫), 시호는 문경(文敬), 사성(司成) ()의 아들. 1432(세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를 지내고, 이어 집현전 부제학(集賢殿副提學)을 거쳐 1460(세조 6) 인순 부윤(仁順府尹), 이조․공조의 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했다.

김의몽(金義蒙) 1432(세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하고, 1457(세조 3) 중시문과(重試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지냈다.

김덕원(金德源) 예몽(禮蒙)의 아들. 1447(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다.

김석원(金錫元) 호는 매산(梅山), 오행(五行)의 아들. 1469(예종 1) 추장문과(秋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교리(校理)를 지내고, 정국원종훈(靖國原從勳)에 책록되었다.

김자지(金自知) 호는 일계(逸溪), 자용(自庸)의 아우. 감사(監司)를 지냈다.

김자남(金自南) 1414 (태종 14) 1468 (세조 14)

자지(自知)의 아우. 문과(文科)에 급제, 참판(參判)․황해 감사(黃海監司)를 지냈다.

김창신(金昌藎) 1419 (세종 1) ?

문과(文科)에 급제, 호조 참판(戶曹參判)․전라 관찰사(全羅觀察使)를 역임하였다.

김을진(金乙珍)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 한성 우윤(漢城右尹)을 지냈다.

김경광(金景光) 1428 (세종 10) ?

겸광(謙光)의 아우. 1480(성종 1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서관 판교(校書館判校)를 지냈다.

김백겸(金伯謙) 1429(세종 11)1506(중종 1)

자는 자양(子讓), 시호는 양호(讓胡). 1458(세조 4) 내금위(內禁衛)에 보직되었다가 1460년 무과(武科)에 급제, 승의 교위(承義校尉)가 되고, 이후(虞侯)․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광원군(光原君)에 봉해 졌으며, 1478년 황주 목사(黃州牧使)․좌참찬(佐參贊)을 역임했다.

김극뉴(金克忸) 1436 (세종 18) 1498 (연산군 4)

국광(國光)의 아들. 1468(세조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조 참판(禮曹參判)․대사간(大司諫) 등을 지내고, 광원군(光原君)에 봉해졌다.

김여석(金礪石) 1445 (세종 27) 1493 (성종 24)

자는 은경(殷卿), 시호는 충목(忠穆), 부사(府使) ()의 아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64(세조 1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학유(學諭)를 거쳐 검열(檢閱_․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고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에 올랐다. 그후 강원도 관찰사․동지중추 부사․대사헌을 거쳐 형조 판서를 지냈다.

김흥일(金興一) 조선 성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김 거(金 琚) 추정(趨庭)의 손자. 조선 성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를 지냈다.

김성원(金性源) 의몽(義蒙)의 아들. 1466(세조 12) 발영시(拔英試)에 합격, 한림사예(翰林司藝)를 거쳐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김 호(金 浩) ()의 손자(孫子). 1471(성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호당(湖堂)에 뽑히고 충청도 관찰사에 이르렀다.

김극수(金克羞) 1449 (세종 31) 1481 (성종 12)

극뉴(克忸)의 아우.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익위사 세마(翊衛司洗馬)에 제수(除授)되고, 충훈부 경력(忠勳府經歷)을 거쳐 원종공신(原宗功臣)에 책록되었다.

김내문(金乃文) 말문(末文)의 아우. 1501(연산군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응교(應敎)를 거쳐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지냈다.

김 굉(金 硡) 1470 (성종 1) 1526 (중종 21)

자는 견중(堅仲), 평양 서윤(平壤庶尹) 순성(順誠)의 아들. 1504(연산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정언(正言)․장령(掌令) 등을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했다.

김극개(金克愷) 1474 (성종 5) ?

자는 무화(茂和). 음보(蔭補)로 사직서령(社稷誓令)을 지내고, 1519(중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병조 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521(중종 16) 사간(司諫)․사도시 부정(司導寺副正), 1526(중종 21) 개성유수(開城留守)를 거쳐 1528(중종 23) 예조 참판(禮曹參判)․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했다.

김극성(金克成) 1474 (성종 5) 1540 (중종 35)

자는 성지(成之), 호는 청라(靑羅)․우정(憂亭), 시호는 충정(忠貞), 맹권(孟權)의 아들. 1496(연산군 2) 사마시(司馬試)1498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각각 장원, 전적(典籍)이 되고, 이어 수찬(修撰)․헌납(獻納)․사인(舍人)을 지내고,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 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으로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 졌다. 1523(중종 18) 예조 판서, 이어 우참찬(右參贊)․이조 판서․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김철문(金綴文) 1495(연산군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이 되고, 중종 때에 첨중추부사(僉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 면(金 眄)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광천군(光川君)에 봉해졌다.

김숭조(金崇祖) 호는 서청자(西淸子). 1495(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르렀다.

김신동(金神童) 1486 (성종 17) 1546 (명종 1)

자는 성이(聖而), 1519(중종 14) 참봉(參奉)으로 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역임했다.

김경희(金景喜) 1515 (중종 10) 1575 (선조 8)

자는 용회(用晦), 호는 노계(蘆溪), 기서(麒瑞)의 아들. 양팽손(梁彭孫)에게 수학(修學)하고 성균생원(成均生員)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김질충(金質忠) 자는 직부(直夫), ()의 아들. 명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도승지(道承旨)를 역임했다.

김 강(金 綱) 호는 의암(宜庵). 1528(중종 2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내고, 우찬성(右贊成)에 증직(贈職)되었다.

김윤제(金允悌) 자는 공로(恭老), 호는 사촌(沙村). 1531(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를 거쳐 전주 진영(全州鎭營)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김 신(金 紳) 1528(중종 23) 문과(文科)에 급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다.

김 연(金 緣) 1487 (성종 18) 1544 (중종 39)

자는 자적(子迪), 호는 운암(雲巖)․죽연(竹淵). 1510년 생원과 진사를 거쳐 1519(중종 1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字)․정언(正言)․지평(持平) 등을 지내고, 1538(중종 33) 탁영시(擢英試)에 병과(丙科)로 급제,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44 (중종 39) 경주부윤(慶州府尹)을 역임했다.

김 구(金 絿) 1488 (성종 19) 1534 (중종 29)

자는 대유(大柔), 호는 자암(自庵), 시호는 문의(文懿), 현감(縣監) 계문(季文)의 아들. 김굉필(金宏弼)의 문인. 1511년 별시문과(別時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부수찬(副修撰)․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글씨에 뛰어나 조선 초기 4대 서예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김 규(金 虯) 1521 (중종 16) 1565 (명종 20)

자는 몽서(蒙瑞), 호는 탄수(灘叟). 1546(명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이조 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냈다.

김부륜(金富倫) 자는 돈숙(惇叔), 호는 설월당(雪月堂).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부인(金富仁) 1512 (중종 7) 1584 (선조 17)

자는 백영(伯營), 호는 산남(山南), ()의 아들. 이 황(李 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고, 1567(명종 22) 이조 좌랑(吏曹佐郞), 후에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했다.

김헌윤(金憲胤) 호는 사영당(思永堂), 극개(克愷)의 아들. 1525(중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지냈다.

김윤종(金潤宗) 계지(繼志)5대손. 1454(단종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을 지냈다.

김인경(金仁慶) 1514 (중종 9) 1583 (선조 16)

자는 경유(景裕), 참찬(參贊) 겸광(謙光)의 증손. 중종의 딸 혜순옹주(惠順翁主)와 결혼, 1522(중종 17) 광천위(光川尉)에 봉해졌다.

김홍윤(金弘允) 1499 (연산군 5) 1569 (선조 2)

자는 의중(毅仲), 좌찬성(左贊成) 극핍(克愊)의 아들. 1526(중종 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 검토관(檢討官)․양구 현감(楊口縣監)을 거쳐 대사헌․호조 참판(戶曹參判)․경기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김명윤(金明允) 자지(自知)의 아들. 1462(세조 8) 생원이 되었고,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다.

김홍우(金弘宇) 1539 (중종 34) 1598 (선조 31)

자는 백용(伯容), 호는 백곡(白谷).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의 문인. 1593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이조 좌랑(吏曹佐郞)․남원부사(南原府使)를 지냈으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언거(金彦琚) 자는 수진(秀珍), 호는 칠계(漆溪), 집의(執義) ()의 아들. 1531(중종 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벼슬이 교리(校理)에 올랐다.

김언기(金彦璣) 1520(중종 15)1588(선조 21)

자는 중온(仲昷), 호는 유일재(惟一齋). 이 황(李 滉)의 문인. 1567(명종 22) 생원시(生員試)에 합격, 도산(陶山) 근처에 살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김 석(金 錫) 1499 (연산군 5) 1558 (명종 13)

자는 표명(表明), 국광(國光)의 증손. 음보(蔭補)로 참봉(參奉)․한성서윤(漢城庶尹) 등을 지냈다.

김 호(金 鎬) 1505 (연산군 11) ?

자는 숙경(叔京), 국광(國光)의 증손. 음보(蔭補)로 벼슬은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계휘(金繼輝) 1526 (중종 21) 1582 (선조 15)

자는 중회(重晦), 호는 황강(黃岡). 1549(명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부수찬(副修撰)․전적(典籍)․이조 정랑(吏曹正郞) 등을 지냈으며, 1566(명종 21)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乙科)로 급제,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대사헌․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김호인(金好仁) 1450(세종 32) 추장문과(秋場文科)에 정과(丁科)로 급제, 온성부사(穩城府事)를 지냈다.

김은휘(金殷輝) 자는 경회(景晦), 정지운(鄭之雲)의 문인. 음보(蔭補)로 호조 좌랑(戶曹佐郞)이 되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 체찰사(體察使) 정 철(鄭 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가 정 철이 무고를 입자 낙향했다.

김성휘(金成輝) 자는 입부(立夫), 호는 오강(梧岡). 형조 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김만수(金萬壽) 1553 (명종 8) 1607 (선조 40)

자는 덕로(德老), 시호는 장양(莊襄). 천수(千壽)․백수(百壽)․구수(九壽)의 세 아우들과 함께 용맹으로 알려졌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황해도 봉산(鳳山)에서 의병 9백 명을 모아대장(大將)이 되고, 천수(千壽)는 후위장(後衛將), 백수(百壽)․구수(九壽)는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장단(長湍)에서 조방장(助防將) 유극량(劉克良)의 군사와 합류, 임진강에서 적과 싸웠다. 또한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인 아들 광협(光鋏) 과 함께 황해도 일대의 적을 크게 무찔러 의병장의 칭호를 하사(下賜) 받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어 부차(富車)벌의 싸움에서 모두 이겼으며 1593(선조 26) 진도 군수(珍島郡守) 를 지냈다. 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김 개(金 鎧) 1504 (연산군 10) 1569 (선조 2)

자는 방보(邦寶), 호는 독송정(獨松亭). 1540(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1558(명종 13) 대사헌(大司憲)․대사간(大司諫)․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1563(명종 18) 형조 판서(刑曹判書), 1565(명종 20)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지냈다.

김세우(金世愚) 1486 (성종 17) 1522 (중종 17)

자는 불민(不敏). 문과(文科)에 급제, 적성 현감(積城縣監)을 지냈다.

김장생(金長生) 1548 (명종 3) 1631 (인조 9)

자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文元), 대사헌 계휘(繼煇)의 아들. 송익필(宋翼弼)․이 이(李 珥)의 문인. 1578(선조 11)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창릉 참봉(昌陵參奉)․순릉 참봉(順陵參奉) 등을 거쳐 동몽교관(童蒙敎官)․정산 현감(定山 縣監)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장령(掌令)․사업(司業)․상의원정(尙衣院正) 등을 거쳐 이듬해 집의(執義)․공조 참의(工曹參議)․부호군(副護軍)을 지냈고, 1625(인조 3)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付事)가 되었다.

이 이(李 珥)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조선 예학(朝鮮禮學)의 태두가 되었고, 문하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유학자를 배출, 서인(西人)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룩했다.

김 해(金 垓) 1555 (명종 10) 1593 (선조 26)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이 되고, 1588(선조 21)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검열(檢閱) 등을 역임하였다.

김지남(金止男) 1559 (명종 14) 1631 (인조 9)

호는 용계(龍階). 1591(선조 24) 별시문과(別時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 검열(禮文館檢閱)에 기용된 후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다.

김위남(金偉男) 1563 (명종 18) 1618 (광해군 10)

초명은 종남(綜男), 자는 자시(子始), 호는 요산(樂山), 현감(縣監) ()의 아들. 성혼(成渾)의 문인. 1602(선조 3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내외직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김 집(金 集) 1574 (선조 7) 1656 (효종 7)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 장생(長生)의 아들. 18세에 진사(進士)가 되고, 1610(광해군 2) 참봉(參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부여 현감(扶餘縣監)으로 등용, 예조 참판(禮曹參判)․대사 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北伐)을 계획했으며, 후에 대사헌․좌찬성(左贊成)․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그는 아버지의 학문을 계승, 이를 더욱 깊이 연구 하여 예학(禮學)의 체계를 세웠다.

김여성(金汝聲) 남원 부사(南原府使) 홍우(弘宇)의 아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광해폐모(光海廢母)를 적극 반대하고, 정묘난(丁卯亂)에 창의(倡義)하다 학행(學行)으로 지평(持平)을 지냈다.

김덕우(金德宇) 자는 언용(彦容), 호는 양촌(良村), 판서(判書) 인우(仁雨)의 후손. 생원(生員) 경희(景喜)의 아들로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문하에서 수학(修學)하며, 경학(經學)에 전심하였다.

김기수(金麒壽) 자는 인부(仁夫), 호는 만옹(晩翁). 참봉(參奉)을 지냈다.

김 난(金 蘭) 자는 사영(士英), 호는 인파조수. 효행으로서 영희전 참봉(永禧殿參奉)이 되었다.

김성진(金聲振) 자는 원지(遠之), 호는 국재(菊齋). 판서 인우(仁雨)6세손(六世孫).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참봉(參奉) 벼슬을 주었으나 불취(不就) 하였다.

김 영(金 坽) 1577 (선조 10) 1641 (인조 19)

자는 자준(子峻), 호는 계암(溪巖), 시호는 문정(文貞), 부륜(副倫)의 아들. 예안(禮安) 출신으로서 1611(광해군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 이어 1616(광해군 8) 주서(注書)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비관하여 퇴직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도 지평(持平)․보덕(補德)․헌납(獻納)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으며,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되었다.

김덕령(金德齡) 1567 (명종 22) 1596 (선조 29)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 붕섭(鵬燮)의 아들. 광주 출신. 성 혼(成 渾)의 문인.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성 현감(長城縣監) 이 귀(李 貴)의 천거로 조정에서 종군(從軍)의 명령을 받았으며, 1594(선조 27)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된 후 권 율(權 慄)의 휘하에 들어가 일본군의 호남지방 진출을 막기 위해 진해(鎭海)․고성(固城) 지방을 방어했으며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다. 1668(현종 9)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

김성원(金成遠) ? 1597 (선조 30)

호는 누하당(樓霞堂), 찬성(贊成) ()의 손자. 음보(蔭補)로 찰방(察訪)을 지냈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복 현감(同福縣監)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제휴하여 현민들을 보호했다.

김운해(金運海) 자는 형원(亨遠), 호는 벽류정(碧流亭), 경남(景男)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였으나 광해군의 폭정을 당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훈공을 세워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뒤에 충청 조방장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를 역임하였다.

김치원(金致謜) 자는 제화(濟和), 호는 수진당(守眞堂), 광부(光符)의 아들. 훈련첨정(訓練僉正)을 역임했다.

김 온(金 韞) 자는 군왕(君王). 1585(선조 18) 문과(文科)에 합격, 지평(持平)을 지냈다.

김해수(金海壽) 자는 심원(深源), 응천(應天)의 아들.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을 거쳐 아산 현감(牙山縣監)을 지냈다.

김질간(金質幹) 자는 문오(文吾), 호는 쌍오(雙梧), 성균박사(成均博士) 응귀(應龜)의 아들. 1601(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다.

김민선(金敏善) 1542 (중종 37) 1592 (선조 25)

자는 달부(達夫). 1572(선조 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집의(執義)․사간(司諫)을 지내고,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인천 부사(仁川府使)로 재직중 순절(殉節)하였다.

김준성(金俊成) 호는 금계(錦溪), 정언(廷彦)의 손자. 1576(선조 9) 문과(文科)에 급제,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냈다.

김익청(金益淸) 겸광(謙光)의 증손. 1583(선조 1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연천 군수(連川郡守)를 지냈다.

김종제(金宗悌) ()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지냈다.

김대덕(金大德) 1577 (선조 10) 1639 (인조 17)

자는 득지(得之), 호는 소봉(蘇峰)․이안당(易安堂),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 원록(元祿)의 아들, 감찰(監察) 원상에게 입양(入養). 1601(선조 3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된 뒤, 검열(檢閱) 등을 지내고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사간(司諫)․참판(參判)을 역임했다.

김 진(金 搢) 1585(선조 18) ?

자기 기중(記仲), 호는 추담(秋潭)․훈재(訓齋)․영재(詠齋), 부사(府使) 윤국(潤國)의 아들. 1610(광해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청환직(淸宦職)을거쳐 1612(광해군 4) 설서(說書)․검열(檢閱)을 지내고, 이어 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김질충(金質忠) 자는 직부(直夫). 1548(명종 3)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호당(湖堂)에 뽑히고,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김질충(金質忠) 응귀(應龜)의 아들. 1585(선조 18)에 문과(文科)에 급제, 평양 서윤(平壤庶尹)을 지냈다

김태정(金泰廷) 자는 형언(亨彦), 찰방(察訪) 백간(伯幹)의 아들. 퇴계(退溪)의 문인. 1569(선조 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김 인(金 王忍) 1633 (인조 11) 1678 (숙종 4)

자는 중휘(仲輝), 호는 우헌. 1660(현종 1)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장령(掌令)․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등을 지냈다.

김광원(金光遠) 1603(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 판관(判官)을 지냈다.

김윤명(金允明) 1584(선조 17) 무과(武科)에 급제, 서천 군수(舒川郡守)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우형(金宇亨) 1616 (광해군 8) 1694 (숙종 20)

자는 도상(道常), 호는 기오당(寄傲堂), 시호는 정혜(貞惠). 1650(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삼사(三司)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대사간(大司諫)․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역임하고,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러 기로소(耆老所) 에 들어갔다.

김언희(金彦希) 자는 여성(汝聖), ()의 아들. 임진왜란 때 김경수․김홍우 등과 의병청을 설치하여 의병과 의곡을 모취한 후 적과 항전하다 순국했다. 후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었다.

김신민(金信民) 자는 화지(和之). 장령(掌令) 효진의 현손으로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부정이 되었다.

김기명(金基命) 자는 응여(應汝), 호는 의암(義庵). 선조 때 희천 군수․진관병마절제도위를 지냈다.

김 근(金 瑾) 자는 이점(爾玷), 호인(好仁)의 아들. 벼슬이 부사과에 이르렀다.

김 곤(金 輥) 자는 가겸(可兼), 주부 치섬(致銛)의 아들.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다.

김효생(金孝生) 자는 보경(寶卿), 부사공희(公喜)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주부를 역임하였다.

김득효(金得孝) 자는 극렴(克廉), 첨정 연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 주부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을 쫓아 송대립․진무성 등과 함께 전공을 세워 선무원종훈이 되었다.

김 회(金 誨) 자는 시망(時望). 선조 때 무과에 급제, 주부를 했다.

김동달(金東達) 자는 이행(而行), 동준(東準)의 아우. 참봉(參奉)을 지냈다.

김수남(金秀南) 1576 (선조 9) 1636 (인조 14)

자는 여일(汝一), 호는 만치당(萬痴堂).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24(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합격, 형조 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김 반(金 槃) 1580 (선조 13) 1640 (인조 18)

자는 사일(士逸), 호는 허주(虛舟), 장생(長生)의 아들. 1609(광해군 1)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성균관 유생이 되고,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빙고 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1624(인조 2) 이괄의 난 때 왕을 공주에 호종(扈從)한 공으로 성균전적(成均典籍)이 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부제학(副提學) 등 여러 관직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이르렀다.

김정망(金廷望) 호는 삼육재(三六齋), ()의 아들.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영동 현감(永同縣監)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增職)되었다.

김존경(金存敬) 자는 수오(守吾), 호는 죽계(竹溪). 1599(선조 32)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에 급제,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사신으로 연경(燕京)을 두 번 다녀왔다.

김상빈(金尙賓) 자는 대관(大觀). 1627(인조 5) 전주정시문과(全州庭試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풍기 군수(豐基郡守)를 지냈다.

김한일(金漢一) 호는 금정(琴亭). 1616(광해군 8) 무과(武科)에 급제, 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지내고,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어가(御駕)를 남한산성에 호종(扈從)한 공으로 호종원종공신(扈從願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김이성(金履成) 1652 (효종 3) 1696 (숙종 22)

호는 시은(市隱). 참의(參議) 남식(南式)의 아들. 송시열의 문인. 효행이 돈독하여 나라에서 1828(순조 28)에 좌승지(左承旨)에 증직했다.

김이태(金履泰) 경희(景喜)의 현손(玄孫). 1684(숙종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안음 현감(安陰縣監)을 지냈다.

김익희(金益熙) 1610 (광해군 2) 1656 (효종 7)

자는 중문(仲文), 호는 창주(滄州), 시호는 문정(文貞). 1633(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고, 검열(檢閱)을 거쳐 승문원(承文院)에 전임했다. 1636(인조 14) 병자호란 때 척화론자(斥和論者)로서 왕을 따라 남한산성에 가서 독전어사(督戰御史)가 되고, 이듬해 교리(校理)․집의(執義)를 거쳐 효종 때 승지(承旨)․대사성(大司成), 1656(효종 7) 대제학(大提學)․형조 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김익겸(金益兼) 1614 (광해군 6) 1636 (인조 14)

자는 여남(汝南), 시호는 충정(忠正). 1635(인조 13)에 생원(生員)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남한산성이 포위당하자 강화(江華)로 내려가 성을 사수(死守)하다가 함락되기 직전에 김상용을 따라 남문(南門)에 올라가 분신 자결했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 광원부원 군(光源府院君)에 추봉되었다.

김 현(金 俔) 호는 오월당(梧月堂), ()의 손자. 신천 군수(信川郡守)를 지냈다.

김익훈(金益勳) 1619 (광해군 11) 1689 (숙종 15)

자는 무숙(懋叔), 호는 광남(光南), 시호는 충헌(忠獻), 장생(長生)의 손자, 참판(參判) ()의 아들. 음보(蔭補)로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가 되고, 현종 때 사복시 첨정(司僕寺僉正), 수원 부사(水原府使), 1678(숙종 4) 광주 부윤(光州府尹)을 역임했다.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익렴(金益廉) 1622 (광해군 14) ?

자는 원명(遠明), 호는 적곡(赤谷), ()의 아들. 1652(효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1659(효종 10)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청나라에 다녀온 후 헌납(獻納)이 되었다. 1664(현종 5)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으면서 「역대요성록(曆代妖星錄)을 편찬했으며, 뒤에 사간(司諫)을 지냈다.

김익후(金益煦) 자는 중명(仲明). 1645(인조 23) 진사가 되었다.

김익경(金益炅) 1629 (인조 7) 1675 (숙종 1)

자는 계명(季明).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 이듬해 집의(執義)가 되고, 1664(현종 5) 형조 참의(刑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 등을 거쳐 1666(현종 7) 호조 참의(戶曹參議), 다음해에 대사간․원양도 관찰사(原 襄道觀察使), 1672(현종 13) 대사헌을 지냈다.

김여옥(金汝鈺) 1596 (선조 29) 1662 (현종 3)

자는 군수(君粹), 호는 미산(薇山), 우급(友伋)의 아들. 1624(인조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검열(檢閱)을 거쳐 1647년 밀양 부사(密陽府使), 1649(인조 27)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이 되고, 이어 황해도․충청도의 관찰사, 형조 참판(刑曹 參判)․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광주 부윤(廣州府尹) 등을 역임했다.

김재관(金在寬) 자는 사득(士得), 성함(聲咸)의 아들. 종조부(從祖父) 동준(東準)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병자호란 때 종조부(從祖父)를 좇아 대가(大駕)를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의사(義士)로 선발 되어 성을 수비했다.

김화준(金華俊) 1602 (선조 35) 1644 (인조 22)

자는 사원(士元), 호는 당계(棠溪). 1633(인조 1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여러 벼슬을 거쳐 1636(인조 14) 주서(注書)가 되었고 설서(說書)․현감을 지냈다.

김 선(金 璇) 1568 (선조 1) 1642 (인조 20)

자는 이헌(而憲), 호는 시서거사(市西居士)․지서자(之西子), 상호군(上護軍) 부성(富成)의 아들. 33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광해군의 난정을 한탄하여 두문불출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참봉(參奉)․찰방(察訪) 등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초당 한람(草堂閑覽)」을 편찬하였다.

김자건(金自鍵) 1600 (선조 33) 1671 (현종 12)

자는 이계(而啓), 좌찬성(左贊成) 극복(克福)의 후손, 덕린(德麟)의 아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56(효종 7)에 재학(才學)으로 추천 받아 선공감역(繕工監役)이 되고, 빙고 별검(氷庫別檢)에 이르렀다.

김성일(金成一) 자는 응건(應乾), 호는 세한재(歲寒齋), 현령 준민(俊民)의 아들.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한 후 권무과에 급제하여 삭주 부사에 이르렀다.

김만균(金萬均) 1631 (인조 9) ?

자는 정평(正平), 호는 사휴(思休)․취선(醉仙)․이호(梨湖), 이조 판서 익희(益熙)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54(효종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리(校理)․보덕(輔德)․승지(承旨) 등을 역임했다.

김만기(金萬基) 1633 (인조 11) 1687 (숙종 13)

자는 영숙(永淑), 호는 서석(瑞石), 시호는 문충(文忠), 숙종(肅宗)의 장인. 생원(生員) 익겸(益兼)의 아들. 숙부 익희(益熙)에게서 수학 하고,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 되었다. 1652(효종 3)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 文院)에 등용되고, 수찬(修撰)․정언(正言)․교리(校理) 등을 역임했다. 1674년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國舅)로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에 승진,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봉해졌고, 1680(숙종 6) 경신대 출척(庚申大黜陟) 때 훈련대장으로 공을 세워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이 되었다.

김만중(金萬重) 1637 (인조 15) 1692 (숙종 18)

자는 중숙(重叔), 호는 서포(西浦), 시호는 문효(文孝), 생원(生員) 익겸(益兼)의 유복자(遺腹子). 1665(현종 6)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정언(正言)․교리(校理)를 거쳐 1671(현종 12)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되어 경기․삼남(三南)의 진정(賑政)을 조사했다. 이어 동부 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나 1674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어 자의 대비(慈懿大妃) 복상문제로 서인(西人)이 패하자 관직을 삭탈당했다가 다시 등용되어 1679(숙종 5) 예조 참의, 1683(숙종 9) 공조판서, 1685년 홍문관 대제학이 되었다. 1689(숙종 15) 박진규(朴鎭圭)․이윤수(李允修) 등의 탄핵으로 남해(南海)에 유배되어 이곳에서소설「구운몽(九雲夢)」을 집필했으며, 전문을 한글로 쓴 문학이라야 진정한 국문학이라는 문학관을 피력했다.

김만증(金萬增) 1635 (인조 13) 1720 (숙종 46)

자는 경능(景能), 호는 둔촌(遯村), 장생(長生)의 증손, 익희(益熙)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1663(현종 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이듬해 음보(蔭補)로 기용된 뒤, 1683(숙종 9)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냈다.

김만채(金萬埰) 1644 (인조 22) ?

자는 자봉(子封) 익훈(益勳)의 아들. 1680(숙종 6) 주부(主簿)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정언(正言)․지평(持平)을 지내고, 이어 병조 참의(兵曹參議)․대사간․강원도 관찰사․승지(承旨)․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 등을 역임했다.

김만길(金萬吉) 1645 (인조 23) ?

자는 자적(子迪), 익후(益煦)의 아들. 1682(숙종 8) 주부(主簿)로서 춘당대문과(春塘臺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지평(持平)․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을 지낸 뒤 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副提學)․전라도 관찰사․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김일경(金一鏡) 1662 (현종3) 1724 (경종4)

자는 인감(人鑑), 호는 아계(丫溪), 부사(府使) 겸익(兼益)의 손자. 1687(숙종 13) 진사(進士)가 되고, 1702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하여 정언(正言)․감찰(監察) 등을 거쳐, 1706(숙종 32) 세자시강원 문학(世子侍講院文學)․지평(持平)을 역임했다. 이듬해 문과중시(文科 重試)에 장원하여 판결사(判決事)에 특진했고, 소론(小論)으로서 1710(숙종 36)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어 소론 중의 과격파로서 노론 탄압에 앞장을 섰고, 그후 대사헌을 거쳐 형조 판서가 되고, 우참찬(右參贊)에 승진했으나 1725년 영조가 즉위하자 노론의 재집권으로 유배되었다.

김신망(金莘望) 자는 자형(子衡).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예학에 정진하여 가례범의(家例汎疑)를 저술하였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상경(金尙瓊) 자는 화중(華仲), 인호(仁豪)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도총경력으로서 안현에서 적을 공파(空破), 진무원종훈에 기록 되었다.

김인방(金仁邦) 자는 자필(子弼), 참봉(參奉) 득공(得公)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판관(訓練判官)을 지냈다.

김개민(金介民) 자는 홍중(弘仲), 판관(判官) ()의 아들.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연일 현감․수원 부사(水原府事) 등을 지냈다.

김진귀(金鎭龜) 1651 (효종2) 1704 (숙종30)

자는 수보(守甫), 호는 만구와(晩求窩), 시호는 경헌(景獻), 영돈령 부사(領敦寧府事) 만기(萬基)의 아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 1680(숙종 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현종실록(顯宗實錄)」을 수찬(修撰)하였고, 정언(正言)․집의(執義)․좌승지(左承旨)․수원부윤(水原府尹) 등을 거쳐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호조 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낸 뒤 우참찬(右參贊)․좌참찬(左參贊) 등을 역임했다.

김진규(金鎭圭) 1658 (효종9) 1716 (숙종 42)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시호는 문정(文淸),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만기(萬基)의 아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 송시열(宋詩烈)의 문인. 1686(숙종 1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내다가 1689(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거제도(巨濟島)로 귀양갔다가, 1694(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자 지평(持平)으로 기용되었다. 1710(숙종 36) 대제학․공조 판서를 거쳐 1713(숙종 39)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

김진동(金鎭東) 익경(益炅)의 손자. 1721(경종 1) 참봉(參奉)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지냈으며, 경학(經學)과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김진옥(金鎭玉) 자는 백온(伯溫), 호는 유하(柳下)․온재(韞齋), 판서(判書) 익희(益熙)의 손자, 만균(萬均)의 아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음보(蔭補)로 기용된 뒤 1714(숙종 40) 청주 목사(淸州牧使), 1718(숙종 44) 수원 부사(水原府使), 1725(영조 1) 승지(承旨)를 지내 고, 1727(영조 3)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김진상(金鎭商) 1684 (숙종 10) 1755 (영조 31)

자는 여익(汝翼), 호는 퇴어(退漁), 참판(參判) 익훈(益勳)의 손자. 1712(숙종 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설서(說書)․수찬(修撰)․지평(持平)을 지냈다. 1722(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무산(茂山)에 유배되었다가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이조 정랑(吏曹正郞)으로 등용되었고, 이어 1741(영조 17) 대사헌에, 1753(영조 29) 좌참찬(左參贊)에 이르렀다.

김 담(金 土覃) 1678 (숙종 4) ?

자는 사관(士寬), 우화(遇華)의 아들. 1713(숙종 39)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사관(史官)을 지낸 뒤, 1717(숙종 43) 중시문과 (中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했다. 1721(경종 1) 장령으로 신임사화(申壬士禍)에 연루, 파직되었다가 1725(영조 1) 복직 되고 1742(영조 18) 판결사(判決事)에 이르렀다.

김동준(金東俊) 1685 (숙종 11) ?

자는 백겸(伯兼), 호는 적암(適庵), 교리(校理) ()의 손자. 1721(경종 1) 문과(文科)에급제, 영동 현감(永同縣監)이 되어 시폐(時弊)를 제거하여 치적(治積)을 쌓았다. 1728(영조 4) 무신역도(戊申逆度 : 이인우의 난)에 계략으로서 적을 토벌하여 그 공으로 원종일 등훈(原從一等勳)에 책록되었다

김시휘(金時輝) 호는 우옹(愚翁).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황주 목사(黃州牧使)를 지냈다.

김용갑(金龍甲) 여강(汝剛호)5대손. 1754(영조 3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냈다.

김춘경(金春景) 자는 이화(而華), 참봉(參奉) ()의 아들 공주(公州)에서 호가(扈駕)의 공을 세워 진무원종훈(振武原從勳)에 책록되었다.

김춘택(金春澤) 1670 (현종 11) 1717 (숙종 43)

자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시호는 충문(忠文),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손자, 호조 판서(戶曹判書) 진귀(鎭龜)의 아들. 서인(西人)으로서 1689(숙종 1)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그 집안이 화를 입어 그도 여러 번 유배되었으나 갑술옥사(甲戌獄事 : 1694)로 풀려나왔고, 서인이 다시 노론(老論)․소론(少論)으로 갈라자지 노론(老論)에 속하여 1697(숙종 23) 소론(少論)의탄핵으로 한때 유배당했다. 시재(時才)가 뛰어나 명망이 높았으며 종조부(宗祖父) 만중(萬重)이 지은 소설「구운몽(九雲夢)」과「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한문으로 번역했다. 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보택(金普澤) 1672 (현종 13) 1717 (숙종 43)

자는 중시(仲施), 호는 척재(惕齋), 시호는 익헌(翼獻), 숙종(肅宗)의 장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만기(萬基)의 손자, 호조판서(戶曹判書) 진귀(鎭龜)이아들. 1695(숙종 21) 별시문과(別時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문학(文學)․보덕(輔德)등을 거쳐, 1715(숙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