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고령김씨시조(高靈金氏),김남득(金南得),고령김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6:19 수정일 : 2018-02-22 13:1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일찍이 고려(高麗)시대에서부터 뿌리를 내린 고령 김씨(高靈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11세손 의성군(義城君) 김 석(金 錫)의 장손(長孫)으로 고려에서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한 김 의(金 宜)의 맏아들 김남득(金南得)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본명(本名)이 기지(麒芝)로 서기 1340년(고려 충혜왕 복위 1) 진사(進士)가 되어 감찰 집의(監察執義 : 사헌부에 소속된 정3품 벼슬)를 지내고, 공민왕(恭愍王) 때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를 거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그후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가서 예부상서(禮部尙書)를 명(命)받고 환국하자, 왕(王)이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하고〈득어영남지의(得於嶺南之意)〉라고 사명(賜名)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름을 김남득(金南得)으로 하였고,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고령(高靈)으로 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고려 공양왕(恭讓王) 때 간관(諫官)을 지낸 무(畝 : 시조 남득의 아들)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고령(高靈)은 경상북도 남서단에 위치한 옛 대가야국(大伽倻國)의 중심지로서 16대 520년 간을 계승해오다가 서기 562년(신라 진흥왕 23)에 신라(新羅)에 병합되었다.

그후 서기 757년(경덕왕 16) 고양(高陽)으로 불리우다가 1018년(고려 현종 9)에 영천현(靈川縣)이 되었으며,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고양(高陽)의 고(高)자와 영천(靈川)의 영(靈)자를 따서 고령(高靈)으로 칭하게 되었다.

맏아들 사행(士行)은 조선 세종(世宗) 때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역임하고 선정(善政)을 베풀어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으며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랐고, 차남 사문(士文)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사충(士忠)은 승지(承旨)를, 막내 사신(士信)은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한편 세종(世宗) 때 학행(學行)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천거된 자숙(自肅)은 사행(士行)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이며, 그의 장남 형생(荊生)은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역임하여,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오른 차남 장생(莊生) 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서기 1510년(중종 5)에 무과(武科)에 급제한 수(銖)는 고성 군수(固城郡守)․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

(順天府使) 등을 역임한 후 정3품 당상관직인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올랐으며, 아우 구(鉤)는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하동(河東)․순천(順天)․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명종(明宗) 때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왜구를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한 양촌(陽村)은 1559년(명종 1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수차에 걸친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하다가 전사하여 뒤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그리고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문절공(文節公) 면(沔)은 이 황(李 滉)의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후진을 양성했으며, 뒤에 효렴(孝廉)으로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였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居昌)․고령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규합,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격퇴시켜 그 공(功)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었다.

그외 인물로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천장(千章), 현감(縣監) 충립(忠立), 동지중추부사 춘명(春明), 감찰(監察) 응수(應洙) 등이 유명했고, 현종(顯宗) 때 토산 현감(兎山縣監)을 지낸 초중(楚重)은 어영별장(御營別將) 자(梓), 칠곡 군수(漆谷郡守) 한주(翰周)와 함께 무신(武臣)으로 가문을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고령김씨(高靈金氏)는 남한에 15,611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고령김씨조상인물

김남득(金南得) 고령 김씨(高靈金氏)의 시조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김 무(金 畝) 자(字)는 하경(夏景).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김사행(金士行) 1420년(세종 2) 문과에 급제하고, 여산(礪山)․홍산(鴻山) 등지의 부사(府使)를 거쳐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여산부사(礪山府使)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었기에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졌다.

김사문(金士文) 1423년(세종 5) 진사가 되고,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이르렀다.

김사충(金士忠) 조선(朝鮮) 때 승지(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사신(金士信) 자(字)는 성오(聖五). 1429년(세종 11) 진사가 되고, 합천 군수(陜川郡守)를 지냈다.

김자숙(金子肅) 1432년(세종 14) 진사(進士)가 되고, 학행(學行)으로 추천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이르렀다.

김자성(金子省) 조선에서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김백형(金伯亨) 1429년(세종 11) 진사가 되고, 부호군(副護軍) 등을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김백리(金伯利) 조선 때 승지(承旨)를 지냈다.

김 교(金 교)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영구(金盈九) 자는 경우(慶禹).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형생(金荊生) 자(字)는 공우(貢禹). 1485년(성종 16) 문과에 급제하고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장생(金莊生) 자(字)는 가진(可珍). 1477년(성종 8) 무과에 급제하고, 하양 군수(河陽郡守)를 거쳐 여러 고을을 다스린 뒤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김양생(金楊生) 조선 때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김 새(金 새) 조선(朝鮮)에서 부제조(副提調)를 지냈다.

김수견(金壽堅) 조선 때 진위장군(振威將軍)에 이르렀다.

김 균(金 鈞) 자는 준경(準卿). 1506년(중종 1) 무과에 급제하고, 평산 만호(平山萬戶) 등을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다.

김 수(金 銖) 자(字)는 우경(禹卿). 1510년(중종 5) 무과에 급제하고, 고성 군수(固城郡守)를 거쳐 진주 목사(晋州牧使)․순천 부사(順天府使) 등을 역임하고 절충장군(折衝將軍)․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 렀다.

김 임(金 銋) 자(字)는 평경(平卿).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했다.

김 구(金 鉤) 자(字)는 직경(直卿). 1510년(중종 5) 문과에 장원하고, 하동(河東)․창성(昌城)․순천(順天) ․수원(水原) 등지의 부사(府使)와 부산진 첨절제사(釜山鎭僉節制使) 등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김 탁(金 鐸) 자(字)는 진류(振柳), 호(號)는 죽촌(竹村).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김언로(金彦老)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언국(金彦國) 1519년(중종 4)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에 이르렀다.

김언호(金彦豪)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언순(金彦純)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한좌(金漢佐) 조선(朝鮮) 때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김응규(金應奎) 조선에서 주부(主簿)․진사(進士)를 역임하였다.

김준문(金俊文) 조선 때 우후(虞侯)를 역임하였다.

김욱문(金旭文)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수문(金秀文) ? ~ 1568 (선조 1)

자는 성장(成章), 진사(進士) 임(銋)의 아들. 중종 때 무과(武科)에 급제, 야인(野人)들이 종성(鍾城)에 침입하여 사람을 납치해 가자 영달 만호(永達萬戶)로서 역전(力戰)하여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왔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에 제주 목사(濟州牧使)로서 왜구(倭寇)를 대파, 그 전공으로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특진, 1559년(명종 4) 평안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여러번 호인(胡人)의 침략을 격퇴한 끝에 전사했다.

김 빈(金 贇) 조선에서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두문(金斗文) 자(字)는 한장(漢章). 1570년(선조 3)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에 이르렀다.

김호의(金好義) 조선 때 판결사(判決事)를 역임하였다.

김호례(金好禮) 조선에서 우부장(右部將)을 지냈다.

김 섭(金 涉)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김 하(金 河)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김 숙(金 淑) 자(字)는 자청(子淸). 1594년(선조 27)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군기시첨정(軍器寺僉正)․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 등을 지냈다.

김 결(金 潔) 자(字)는 자정(子淨). 1603년(선조 36)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경상좌도 수군 우후(慶尙左道水軍虞侯)․길주 영장(吉州營將) 등을 거쳐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에 이르렀다.

김호인(金好仁) 조선(朝鮮)에서 부사직(副司直)을 지냈다.

김직백(金直百) 조선 때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김직배(金直倍)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김 급(金 汲)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 반(金 潘)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 연(金 演) 자(字)는 형원(泂原), 호(號)는 송호(松湖).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거(義擧)한 공(功)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제수 받았다.

김 양(金 瀁)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제수받았다.

김 즙(金 濈)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 함(金 涵)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 식(金 湜) 조선에서 만호(萬戶)를 지냈다.

김 현(金 灦) 자(字)는 달보(達甫). 1567년(명종 22)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하고, 선조(宣祖) 때 절충장군(折衝將軍)․부호군(副護軍)등을 지냈다.

김직손(金直孫) 자(字)는 군보(君輔).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에 많은 공을 세워, 충훈부도사(忠勳府都事)에 오르고, 1568년(선조 1) 야인(野人)을 토벌한 공으로 병조참의(兵曹參議)에 특진되었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세문(金世文) 조선 명종(明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부사(府使)에 이르렀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김 면(金 沔) 1541 (중종 36) ~ 1593 (선조 26)

자(字)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庵), 경원 부사(慶源府使) 세문(世文)의 아들. 정 구(鄭 逑)와 가까이 지내며 이 황(李 滉) 문하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후에 효렴(孝廉)으로 천어되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종도(趙宗道)․곽 준(郭 䞭)․문 위(文 偉) 등과 거창(居昌)․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 금산(金山)․개령(開寧) 간에 주둔한 적병 10만과 우지(牛旨)에서 대치, 공격해오는 적의 선봉을 진주 목사(晋州牧使) 김시민(金時敏)과 함께 지례(知禮)에서 요격하여 격퇴,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전하여 그 공으로 합천 군수(陜川郡守)가 되고 의병대장의 호 를 받았다.

병조판서에 추증(追贈), 1607년 이조판서에 가증(加贈)되었다.

김 자(金 滋) 조선에서 현령(縣令)․좌승지(左承旨) 등을 역임하였다.

김 회(金 澮) 자(字)는 지하(志河), 호(號)는 송재(松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창의(倡義)했고,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다시 의거(義擧)했다가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전사했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김응삼(金應三)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영령(金永齡)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천장(金千章)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양개(金良凱)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김시립(金時立) 조선조(朝鮮朝)에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양립(金楊立)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홍원(金弘遠) 호(號)는 풍암(堸庵).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공(功)을 세워 호군(護軍)을 제수받았다.

김홍윤(金弘潤)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홍한(金弘漢) 자(字)는 여남(汝南), 호(號)는 의재(義齋).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무계전(茂溪戰)에서 전사했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홍서(金弘瑞) 조선 때 좌랑(佐郞)을 지냈다.

김의립(金毅立)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김영립(金永立) 조선조(朝鮮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랐다.

김 걸(金 傑) 조선 때 서윤(庶尹)을 역임하였다.

김충립(金忠立)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달선(金達先)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태연(金泰然)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기원(金起源) 조선 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되었다.

김국각(金國恪)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우성(金宇成) 조선 때 절제사(節制使)로서 보사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에 올랐다.

김춘명(金春明)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복휘(金復輝)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경휘(金景輝)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이휘(金以輝) 조선 때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김종휘(金宗輝) 조선조(朝鮮朝)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김상휘(金尙輝) 조선 때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김덕휘(金德輝)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김윤휘(金胤輝)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선견(金善堅) 조선(朝鮮)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응수(金應洙)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정황(金鼎黃)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인휘(金仁輝) 조선에서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김낙구(金洛龜) 조선조(朝鮮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수징(金壽徵)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종민(金宗敏)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초중(金楚重) 자(字)는 중경(重卿), 호(號)는 구암(龜岩). 1672년(현종 3)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금교찰방(金郊察訪)․토산 현감(兎山縣監) 등을 거쳐 전적(典籍)에 올랐다.

김중남(金重南)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중태(金重泰)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용일(金龍一) 조선 때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김상중(金尙中) 조선에서 좌윤(左尹)을 지냈다.

김화일(金華鎰) 조선조(朝鮮朝)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화옥(金華鈺)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에 이르렀다.

김기일(金起一) 조선 때 참의(參議)를 역임하였다.

김효준(金孝俊)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자중(金自重)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중석(金重碩) 조선 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김태중(金兌重)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명우(金命禹) 조선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김홍우(金洪禹)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한우(金漢禹) 조선(朝鮮)에서 찰방(察訪)을 지냈다.

김서형(金瑞亨)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천한(金天漢) 조선에서 첨정(僉正)을 지냈다.

김윤성(金潤成) 조선 때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김진고(金振高) 조선 때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성중(金成重) 조선에서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김세영(金世泳)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 기(金 埼) 조선(朝鮮)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 방(金 坊) 조선 때 제학(提學)을 역임하였다.

김 용(金 墉) 조선 때 좌랑(佐郞)을 역임하였다.

김 곤(金 坤)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 격(金 格)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 자(金 梓) 자(字)는 문경(文卿). 1742년(영조 18) 무과에 급제하고, 의금부(義禁府)․도총부(都摠府)의 도사(都事), 초계(草溪)․하동(河東)의 군수(郡守), 경상좌도 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어영별장(御營別將)에 이르렀다.

김만성(金萬成)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상후(金尙垕) 조선(朝鮮)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영현(金榮鉉) 조선에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영창(金榮昌)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명우(金命遇) 조선 때 참찬(參贊)을 역임하였다.

김도주(金道周) 조선 때 부총관(副摠管)을 역임하였다.

김호주(金鎬周) 조선조(朝鮮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 하였다.

김한주(金翰周) 자(字)는 성사(聖師). 1782년(정조 6) 무과에 급제하고, 장흥(長興)․보성(寶城) 등지의 군수(郡守)를 거쳐 칠곡 부사(漆谷府使)에 이르렀다.

김양주(金良周)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수주(金守周)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운대(金運大)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지냈다.

김운채(金運彩) 조선(朝鮮) 때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역임하였다.

김선운(金善運)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선직(金善直) 조선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김시기(金時圻)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진항(金鎭恒) 조선 때 참의(參議)를 지냈다.

김선유(金善裕) 조선 때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역임하였다.

김선학(金善鶴) 조선조(朝鮮朝)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김선문(金善文) 조선 때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다.

김동재(金東在) 조선(朝鮮)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동유(金東有) 조선(朝鮮) 때 참판(參判)을 지냈다.

김학현(金學顯) 조선 때 우부 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였다.

김선태(金善兌) 조선 때 참찬(參贊)을 역임하였다.

김선지(金善智) 조선(朝鮮)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재호(金在浩) 조선 때 감찰(監察)을 지냈다.

김추호(金秋浩) 조선조(朝鮮朝)에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김만호(金晩浩) 조선에서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상호(金尙浩) 조선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김택수(金澤洙) 조선(朝鮮)에서 참판(參判)을 지냈다.

김지수(金之洙)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김억수(金億洙) 조선 때 비서감승(秘書監丞)을 역임하였다.

김동학(金東鶴) 조선에서 참판(參判)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