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예천권씨시조(醴泉權氏 始祖), 권섬(權暹),예천권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4:04 수정일 : 2018-03-02 12:2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始祖本貫由來)

예천(醴泉)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서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의 수주현(水酒顯)을 신라(新羅)에서 예천(醴泉)으로 불렀으나 고려(高麗) 때 와서 안동부(安東府)에 예속시켰다. 1172년(명종 2) 태자(太子)의 태(胎)를 이 고을에 묻었다고 하여 기양현(基陽縣)으로 승격되었고, 1204년(신종 7) 에 포주로 하였으나 조선(朝鮮) 태종조(太宗朝)에 왕명(王命)에 의하여 포천으로 고쳤다가 1416년(태종 16) 에 다시 예천(醴泉)이라 하였다.

예천권씨시조(醴泉權氏 始祖) 권섬(權暹)은 호군(護軍) 흔승단(昕昇旦)의 아들로 본성(本姓) 흔씨(昕氏)였으나 고려(高麗) 충목왕 (忠穆王:제29대 왕, 재위기간:1344~1348) 의 이름이 흔(昕)이었으므로〈국휘(國諱)를 범한다〉고 하여 그의 외가성(外家姓)인 권씨(權氏)로 개성(改姓)한 것이다.

시조(始祖) 섬(暹)은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예빈경(禮賓卿)을 역임한 후 전공 판서(典工判書)에 추증되었고, 후손들이 예천지방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며 관향(貫鄕)을 예천(醴泉)으로 삼게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

예천 권씨(醴泉權氏)의 가통(加痛)을 이어온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 섬(暹)의 손자(孫子) 상(詳)과 집(諿)이 목사(牧使)를 지냈고, 집(諿)의 아들 맹손(孟孫)은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거쳐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에 올라 크게 이름을 떨쳤다.

한편 별제(別提) 선(善)의 아들 5형제 중 돌째 오기(五紀)는 연산군(燕山君)때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고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중종조(中宗朝)에 좌통례(左通禮)가 되었다. 세째 오복(五福)은 1486년(성종 17)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교리(校理)로 호당(湖當 : 젊고 재주있는 문신으로 임금의 특명을 받은 사람들이 공부하던 곳)에 뽑혔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門人)이라 하여 극형에 처해졌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연산군고사본말(燕山君故事本末)」에 의하면 그는 문장(文章)이 맑고 건실하며 필법이 굳세고 힘이 있어 당시의 선비들이 칭도(稱道)하였고, 김일손(金馹孫)과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교리(校理)로 있다가 노친(老親)을 봉양하기 위하여 외임(外任)으로 나간지 3년만에 화를 당하였는데, 흉하고 포악하고 망극한 변을 당하여 죽음의 형틀이 앞에 있어도 꿋꿋한 기절을 굽히지 않고 3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참봉(參奉) 오상(五常)의 손자(孫子) 문해(文海)는 퇴계(退溪) 이 황(二 黃)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학

문(學問)에 일가(一家)를 이룬 학자(學者)로서 고래(古來)의 서적(書籍)을 참고하여「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했으며, 그의 아들 별(鼈)은 고금(古今)의 사료(史料)로 이용되고 있는「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편술하여 부자(父子)가 함께 박학(博學)으로 명성을 떨쳤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예천 권씨는 남한에 총 4,5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예천권씨조상인물

권맹손(權孟孫) 1390 (공양왕 1) ~ 1456 (세조 1)

자는 효백(孝伯), 호는 송당(松堂), 시호(諡號)는 제평(齊平), 목사(牧使) 상(詳)의 아들. 1408년(태종 8) 식년문과(式年文科)에,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각각 을과(乙科)로 급제, 검열(檢閱)․공조 판서(工曹判書)․대제학(大提學)․이조 판서(吏曹判書)․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官찰使)등을 역임, 1450년(세종 32) 이조 판서(吏曹判書)로서 의창(義倉) 제도의 모순과 관리 들의 부정을 지적하고 이의 개혁을 상소했다. 그후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지냈다.

권오기(權五紀) 1463 (세조 8) ~ ?

자는 협지(協之) 호는 졸재(拙齋), 별제(別提) 선(善)의 아들, 오복(五福)의 형. 김종직(金宗直)의 문인.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봉교(奉敎)로 춘추관 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직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때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와 1511년(중종 6) 지평(持平), 1526년 경상좌도 군적경차관(慶尙左道軍籍敬差官), 1530년(중종 25) 사도시 부정(司䆃侍副正)을 거쳐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오복(權五福) 1467 (세조 12) ~ 1498 (연산군 4)

자는 향지(嚮之), 호는 수헌(睡軒), 선(善)의 아들. 1486년(성종 1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예문관(藝文館)․홍문관(弘文館)에 등용되었다가 1492년 사가독서(賜暇讀書)했으며,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에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 하여 극형에 처해졌다.

글씨․시문이 모두 뛰어났고 특히 문장․필법이 힘찼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예천(醴泉)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문해(權文海) 1534 (중종 29) ~ 1591 (선조 24)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지(祉)의 아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좌부승지(左副承旨)․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1591년(선조 24) 사간(司諫)이 되었다.

일찍이 이 황(李 滉)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에 일가를 이루었고, 우리나라 고래의 서적을 널리 참고하여 사실(史實)․인문․지리․문학․예술 등을 총망라해서 운자(韻字)에 의해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20권을 저술했다.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권별(權 鼈) 호는 죽소(竹所), 사간(司諫) 문해(文海)의 아들. 성리학을 연구하는 한편 기자조선(箕子朝鮮)이래 고려 말에 이르기까지의 왕실의 사적(事蹟)과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의 인물 열전(列傳)을 집대성하여「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편술했다.

권칠림(權七臨)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역임하였다.

권형(權 衡) 조선에서 집의(執義)를 지냈다.

권오행(權五行) 조선조에 좌랑(佐郞)을 지냈다.

권대덕(權大德) 조선 때 목사(牧使)를 역임하였다.

권덕여(權德與) 조선조(朝鮮朝)에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다.

권계응(權啓應)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권종수(權鍾秀) 조선조(朝鮮朝)에 도사(都事)를 지냈다.

권도(勸 導) 조선에서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권회(權 恢) 조선조에 사간(司諫)을 지냈다.

권극(權 極) 조선(朝鮮) 때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

권강(權 綱)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