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국씨,담양국씨,담양국씨시조,국주(周公)

작성일 : 2017-11-09 11:35 수정일 : 2018-02-18 22:37

시조 및 본관의 유래

담양 국씨는 원래 중국으로부터 고려 인종(1128)조에 귀화한 姓氏로서 고려시대에는 명문 화족으로 5세조 호()자 어른께서는 좌정승에 이르는 어른으로부터 고려가 망하는 시기까지 成允:忠淸 안렴사, :兵部尙書 播:刑部尙書, :戶部尙書겸판의금 등 현달한인물들이 많았으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후 이씨조선 건국에 不服杜門洞隱居 殉節하시니 이분이 9세조 자 할아버지이시며 이후 朝鮮朝에서의 어려운 삶이 시작 되었다.

전라남도 담양에 3형제가 은거 장자인 무()자 어른은 장자로써 복애공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을 양육하며 농사로 생활하며 충절과 의리를 숭상하는 가풍으로 후손을 養育하고, 둘째 성()자 어른은 하였고, 셋째인 황 자 어른께서는 객지(완산 고산)에 나아가 후손들로 하여금 李朝에 출사 벼슬하고 집안을 현실적으로 일으키니 그 후손들이 더욱 번성(남자만 7,800여명)하게 되었으며, 고향에서 복애공 자 할아버지의 유훈을 지켜온 큰집은 (남자만 1,600여명)으로 상대적으로 손이 귀한 편으로 크게 보면 두줄기로 이어져 살아왔다. 옛날엔 본관지인 담양과 고산이 집성촌이었으나 근자에는 수도권의 인구가 60%정도나 되며 문중의 구심체는 潭陽鞠氏 大宗會가 서울 종로구 신교동에 사무실을 갖고 있으며 종원 19,000여명으로 爲先, 崇祖 顯揚事業宗親會報發刊活潑門中 活動을 하고 있다.

■ 鞠氏元祖創氏祖

씨의 元祖는 중국 黃帝 軒轅(황제 헌원)이요. 중흥조는 황제의 玄孫后稷이며 창씨조는 후직의 孫子로 출생시 손바닥에 鞠字문양을 띄고 나온 (일명:鞠陶)이며 주나라 무왕 姬發이 후직을 시조로 모심으로서 鞠氏는 중국의 명문 華族後孫이며 皇孫이다.

중국의 역사서 史記, 史略, 문헌에 의하면 황제헌원의 손자가 頊 高陽씨이며 그의 손자가 后稷 이고, 후직의 손자가 이며 주무왕은 后稷 15대손으로 后稷나라 시조로 모시고 있다. 史記本紀 王系表에 근거 기록이 있다.

后稷의 손자인 (일명:鞠陶)은 태어날때 손바닥에 鞠字의 무늬를 띄고 태어나서 鞠氏시조로 받들기 시작했다고 중국문헌 百家姓 姓氏起源에서 기록하고 있으며 이분이 주나라 따라서 왕계표상 주무왕 희발의 13대조가 되신분이 (일명:국도)이며 이분이 씨의 創氏 祖가 된다. 중국에 많이 사는 씨가 바로 鞠氏에서 派姓되었음을 아래 문헌에서 볼수있다

이는 담양국씨 족보 수보위원회에서는 북경대학과 대만대학 등을 통하여 百家姓 姓氏起源, 中國百家姓氏解說辭典, 元和姓纂(唐代), 通志(宋代)등 많은 關聯 文獻發掘 확인한 바 있다.

■ 鞠씨의 始祖 列先祖

潭陽鞠氏 시조인 諱 周公(국주)中國 宋나라 휘종 원년 서기1101년에 태어났으며 금국이 서기 1127년에 송나라에 침범하여 欽宗을 납치하여가는 靖亂이 일어나자 공경대부직에 있던 周公은 난을 피하여 부인 靈山辛氏와 부제 辛昭와 진기, 홍철, 남경, 변구만 등과 함께 高麗亡命 歸化 하니 이때가 1128년 고려 인종 6년 무렵이었다.

이때 仁宗께서는 周公에게 감정관을 제수 하시고 고려에 대하여 君臣관계로 신복할 것을 강요하는 金國 황제에게 사신으로 보내니 周公께서 두 나라 사이에는 화친이 좋고 군신간을 강요함은 서로 국가에 전란으로 이어진다고 역설하고 중원의 皇孫으로서, 선린 우호관계를 다짐하고 귀국하니 인조께서 매우 기뻐하시며 주공을 즉시 秋城君에 봉하시고 潭陽本貫으로 정하여주시니 이때부터 潭陽 鞠氏本貫이 생기게 되었다.

2諱知遠은 문하시랑 3暎敦은 문하찬성사 4成允은 충청 안렴사 5는 좌정승 6세  은 정당문학 7은 대제학 8은 병부상서 는 형부상서 9세 는 호부상서 겸 판의금으로 시조부터 9세조까지 명문 華閥로 살아 왔다. 그후 고려가 멸망하고 이씨조선이 건국하매 충신 국유의 아들 , , 세분이 본관 담양으로 내려와 살던 중 정종 2년에 고려 유신의 자제를 전원 관직에 등용 하라는 녹용 전교가 내려 왔으나, 長子 珷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  , 두 분은 同榜聯壁 등과 하여 은 예조참의 은 헌납에 올랐다.

■ 高麗 忠臣 伏崖公忠節

高麗忠臣 戶部尙書 諱號 伏涯 公의 부친은 병부상서공 휘 이요 조부는 大提學 담이요 조모는 좌정승 여흥 민씨 종유의 따님이시다. 담양국씨 시조 諱 周公9세손이다. 숙부는 형부상서 휘 는 옥천 부원군의 차자로 典農寺 부정을 지낸 조유 (옥천은 금일의 순창)라 그 출신 성분이 화려한 호족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은 기골이 장대하고 비범하여 하늘을 찌를듯한 기개와 산을 뽑을 만한 기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도량이 넓어서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다섯 살 때부터 향리의 서당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한번 배운 책 너뎃권을 단번에 막힘 없이 암송했다고 하니 가히 神童이라 일찍이 당시의 거유, 익재 이재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익혔는데 익재 선생은 말하기를 이 아이는 그릇이 크고 넓으니 장차 크게 될 것이며 굳세고 곧으니 난리를 당해도 변치 않을 것이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공은 성장후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유명한 三隱牧隱 이색, 圃隱 정몽주, 野隱 전록생(담양인)선생, 등과 교우 하시었다. 은 관계에서 조정의 여러 부서를 섭렵하시면서 국가의 살림살이를 맡아 보셨으며 그 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고 오직 백성이 편안하게 잘 사는 데만 혼신의 노력을 다 하셨다.

1369(공민왕 18) 탐라에서 일어난 병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都統使 최영 장군과 같이 副統使로 출정하여 무난히 난을 평정하였고, 동년 곡주에서 발생한 병란에 출정하여 진압시킨 공로로 공민왕으로부터 호부상서 겸 판의금 벼슬을 除授 받았다.

공민왕은 왕비인 노국공주가 출산 중 薨去 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국사에 소홀히 하고 僧侶辛旽王師로 맞이하여 날이 갈수록 전국적으로 사찰과 승려수가 늘어나고 사찰들의 田畓과 사찰 이 늘어나면서 免稅 田畓이 확대되어 가고 승려에게는 軍役(병역) 免除등 신돈의 폐해가 늘어가자 국가적 폐단을 보다 못한 伏崖公은 공민왕께 上訴文을 올렸으니 내용은 조정에서 불교를 너무 과보호하지 말 것과 특정인의 국정 농단을 중단시킬 것을 上訴하였고, 다시2斥佛 上訴를 올리니 이 上訴로 인하여 복애공은 절해고도에서 귀양을 산적도 있었다. 이로써 그의 剛直함과 忠節을 고려가 널리 알고 있었다.

李太祖朝鮮 건국이후 훌륭한 인재를 발굴할때 麗朝에서의 賢人중에 특별히 학덕과 충절이 높은 복애공을 누차 서신을 보내고 禮曹判書로 출사토록 사람을 보내고 권유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太祖直接 복애공의 私邸를 방문하여 간절히 入朝를 간청하였음에도 응하지 않고 오히려 伏崖公은 이태조의 부름에 불사이군의 뜻을 분명하게 밝히며 무송도시로 응대하며 두문동에 드셨는데 그 내용이 바로

地是松都 我愛松 自嘲自笑 大夫封

誰洗     淚 黃花滿目 正憧憧

이를 옮겨 보면

이 땅은 송도라서 나는 솔을 좋아하노라 이제 대부 벼슬인들 가소롭기만 하구나 뉘라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주리요

눈앞에 가득한 국화꽃을 보아도 마음 둘 곳 없어라

이때 두문동에 은거한 72현중 복애공의 벼슬이 4번째요 燒身 殉節하신 忠臣은 모두 복애공을 포함하여 모두 16분 뿐이셨다.

훗날 조선의 선비들은 이 같은 복애공의 충의정신을 시로 지어 읇었으니

忘生一世介子恨 殺身千秋王 

又贊日忠炳日月 義重山岳其昭昭

한평생 자신을 잊고 살았으니 개자추의 한스러움이요

목숨 바쳐 천추에 이름 남으니 왕촉의 원통일세

그 충성은 일월같이 빛나고 그 의로움은 산악과 같이 분명 하구나

그 후 太宗朝에 이르러 朝鮮 조정에서는 충성심을 慰撫하였다. 이따금 진무 제사를 지내고 송도에 포충비를 세웠는데 그 중 숙종 3년에 왕명에 따라 송도 유수 서유방이 세운 부조현 두문동기 비에서 매년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공의 忠義精神은 세월이 갈수록 식자층에서 높이 평가되어 이조 숙종때 경기도 진사 민백규의 상소로 두문동 표절사에 배향되셨고 현종때 전라도 유생 나서동이 상소하여 담양군 수북면 구산사에 배향 되었으나 1846년 월산면 증암사로 이안되었으며 대원군때 서원 철폐로 헐리게 되어 장성 경현사로 이안되었고 1937년 고산 반곡사에도 배향 받으셨으며 1992년에는 승학 대종회 회장 주관으로 학동 선영에 복애공의 신도비를 세웠으며 최근에는 高麗 崇義會 주관 고려통일대전 충신각에도 공의 숙부 刑部尙書公 諱 播 와 같이 배향 하고 있다.

역대인물(歷代人物)

始祖- 鞠周 : 入國祖, 秋城君 대금국외교성공 훈일등공신

2- 知遠 : 문하시랑

3- 暎敦 : 찬성사 고려대장경 성판 감독관

4- 成允 : 충청 안렴사(충렬왕시)

5- : 좌정승(금자광록대부 평장사)

6-   : 정당문학

7- : 대제학

8- : 병부상서, 동생은 로 형제간에 상서를 지냄

8- : 형부상서 (의 동생) 이조에 불사 (대동기문)

9-  : 호부상서 겸 판의금 탐라와 곡주의 병란 진압, 이태조의 건국 시 예조판서 제의에 불복하고 두문동에 드시여 소신순절 하심

10-: 담양 입향조. 이조 정종때 고려 유신자제의 녹용전교때에 부친(,복애공)의 유지를 받들어 이조에 불사하고, 仲季 二弟는 관에 진출시킴

10- : 예조참의

10-   : 헌납

14- 經禮 : 문과급제 대사간

居敬 : 여양현감

廷賓 : 여산부사

允成 : 임진란 의병장, 담양서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에 진출, 곽재우 장군과 함께 창녕화왕산성 방어

繼鄭 : 진무원종공신

志善 : 수원부사

聖大 : 증통훈대부 군자감정

命禧 : 증통정대부 공조참의

允源 :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守成 :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 진사

: 문과급제 적성현감 사헌부감찰

孝采 : 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

埰雄 : 만석군으로 독립군 자금책 문동길에게 군자금 제공

東完 : 항일애국지사로 호남일대에서 여러번 전투 끝에 일본군 수십명 사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