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김포공씨(金浦公氏) 공자(孔子)의 제자(弟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後孫) 공윤보(公尹輔)

작성일 : 2017-11-09 14:27 수정일 : 2017-11-10 14:59

시조 및 본관의 유래

김포(金浦)는 경기도(京畿道) 서쪽 한강(漢江) 하구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일찍이 고구려(高句麗)새대에는 검포현(黔浦縣)이라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 때 김포(金浦)로 개칭(改稱)되었다.

공씨(公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 무왕의 아우 주공 단을 시조로 하는 주나라 때의 열국의 하나)나라의 왕족(王族)에서부터 비롯되는데 공자(孔子)의 제자(弟子)공하수(公夏守)의 후손(後孫) 공윤보(公尹輔)가 당()나라 18학사(學士)의 한 사람으로 서기 755 (신라 경덕왕 14) 안녹산(安祿山 : 당나라의 장군으로 안사의 난을 일으켰던 사람)의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김포(金浦)에 터를 마련한 것이 우리나라 공씨(公氏)의 시초가 된다.

공씨(公氏)의 본관(本貫)김포(金浦)문천(文川)을 비롯하여 창원(昌原)개성(開城)인천(仁川)풍곡(楓谷 : 영동지방)삼계(三溪 : 영광지방)삼가(三嘉) 10()이 있는 것으로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報)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김포 공씨(金浦公氏) 단본(單本)이다.

그러나 상계(上系)를 고증(考證)할 문헌(文獻)이 실전(失傳)되어 소목(昭穆)을 밝힐 수 없고, 모두가 공윤보(公尹輔)의 동원혈족(同源血族)이 확실(確實)하므로 공윤보(公尹輔)가 처음 뿌리를 내린 김포(金浦)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벽동파(碧潼派)문천파(文川派)창원파(昌原派)로 계통(系統)을 이었다.

벽동파(碧潼派) 명례(明禮)1478(성종 9) 계공랑(啓功郞 : 7품의 문관의 품계)으로 왕()에게 직간(直諫)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平安道)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移居) 당하여 그곳에서 살면서 벽동파(碧潼派)의 시원(始源)을 이루었고, 문천파(文川派) 보언(普彦)은 조선(朝鮮) 세조(世祖)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咸鏡道) 문천(文川)으로 유배(流配)되어 그곳에 정착(定着)한 것이 시초가 되며, 또다른 한 계통(系統)인 창원파(昌原派)는 정승(政丞) ()의 후손들이 누대(累代)로 함안(咸安)에 살다가 창원(昌原)에 이거(移居)하면서 일파(一派)를 이루게 되었다.

가문(家門)을 빛낸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로는 조선(朝鮮) 중종(中宗) 때 별시문과(別時文科 : 나라에 경사가 잇을 때나 병년마다 실시하여 문관을 뽑는 과거)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규()가 시문(詩文)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준(昌俊)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일으켜 일본군(日本軍)과 항전하다가 만주의 홍범도(洪範圖) 군대와 합류하여 백두산(白頭山)을 근거지로 활약했다.

그의 아들 진원(震遠)도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대장으로서 항일운동에 앞장섰고 임시정부의 의정의원(議政議員)을 거쳐 광복군 참모(光復軍參謀) 겸 지대장(支隊長)으로 활약했다.

2000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포공씨(公氏)는 남한(南韓)에 총 521가구, 1,71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창원계(昌原系)벽동계(碧潼系)

공순영(公純永) 고려(高麗) 때 낭장(郎將)을 지냈다.

공의(公義) 고려에서 정승(政丞)을 역임하였다.

공손민(公孫敏) 조선에서 판서(判書)를 역임하였다.

공노(公路) 조선 때 판윤(判尹)을 지냈다.

공시정(公是貞)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공우겸(公又廉) 조선(朝鮮)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공자정(公自正) 조선에서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공옥주(公玉柱) 조선조(朝鮮朝)에 건공장군(建功將軍)에 이르렀다.

공규(公珪) 1501 (연산군 7) ?

()는 덕장(德璋), 자유(子由)의 아들. 1521(중종 16) 진사(進士)가 되어 별시문과(別時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학유(學諭)에 초임된 뒤 저작(著作)봉교(奉敎)정언(正言) 등을 거쳐 전적(典籍)에 이르렀으며, 시문(詩文)에 능했다.

공창준(公昌俊) 1877 (고종14) 1937

함남 문천(文川) 출신.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의병(義兵)을 이르켜 일본군과 항전하다가 만주에 망며, 홍범도(洪範圖)의 군대오 합류하여 백두산(白頭山)을 근거로 활약했다.

그후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계몽 사업에 진력(盡力), 1928년 상해(上海)에 건너가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창립위원이 되었다. 1937년 남경(南京)에 있는 당 본부에 당세를 보고하기 위해 출장 도중 병사했다.

공진원(公震遠) 1907 (융의 1) 1943

일명(一名) 운기(雲起), ()는 학은(鶴隱), 창준(昌俊)의 아들. 평북 벽동(碧潼) 출신. 만주에서 중학교를 졸업,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하고 대종교(大倧敎)에 입교, 지교(知敎)가 되었으며, 이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했다.

만주사변 후에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대장이 되어 항일 무장운동에 투신. 1936 년에는 적정을 탐지하기 위해 황학수(黃學秀)와 함께 내몽고(內蒙古)에 파견되었다.

이듬해 돌아와서 임시정부의 군사학 편찬위원(軍事學編纂委員)의정원(議政院) 의원등을 역임 후에 광복군 참모(光復軍參謀) 겸 제 2지대장(支隊長)으로 수원현(遠縣) 장가구(張家口) 등지에서 하약하다가 중경(重慶)에서 병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문천계(文川系)

공춘수(公春壽) 조선 때 계공랑(啓功郞)에 올랐다.

공계성(公繼成) 조선(朝鮮)에서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다.

공종원(公宗元)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이르렀다.

공의평(公義平) 조선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공처인(公處仁) 조선조(朝鮮朝)에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다.

공상윤(公尙允) 조선 때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올랐다.

공상익(公尙益) 조선(朝鮮) 떼 참의(參議)를 지냈다.

공석율(公錫律) 조선에서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이르렀다.

공필한(公弼翰) 조선(朝鮮)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렀다.

공주한(公周翰) 조선 때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올랐다.

공학린(公學麟) 조선(朝鮮)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다.

공상훈(公尙勳) 조선조(朝鮮朝)에서 계공랑(啓功郞)에 올랐다.

공상유(公尙裕) 조선 때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다.

공학노(公學魯) 조선에서 계공랑(啓功郞)에 이르렀다.

공숙경(公淑景) 조선(朝鮮) 때 통정대부(通情大夫)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