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곡부공씨시조(曲阜孔氏),공소(孔紹),공자(孔子),곡부공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4:14 수정일 : 2018-03-02 15:30

곡부공씨시조 및 본관의 유래

곡부(曲阜)는 중국(中國) 산동성(山東省) 제령도(濟寧道)에 위치한 고을이름으로 일찍이 주() 나라 무왕(武王)의 아우 주공(周公) ()이 봉해진 나라였다.

공씨(孔氏)의 시조(始祖) 공자(孔子 : 본명은 구, 자는 중니)는 중국(中國) ()나라 추읍(陬邑 : 곡부현)에서 태어나 세계 4(四聖)의 한 사람으로 존앙되어 왔으며, 일찍이 인()을 이상(理想)의 도덕(道德)이라 하여 효제(孝悌)와 충서(忠恕)를 이상(理想)의 근저(根柢)로 삼고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며 치국(治國)의 도()를 설()하였고, 육경(六經)을 산술(刪述)하여 유교(儒敎)의 시원(始源)을 이루었다. 그의 언행(言行)을 적은「논어(論語)」가 전한다.


공자(孔子)51세손(世孫)인 공 완(孔 浣)의 아들 형제 중 장자(長子) 사회(思晦)는 중국(中國)에서 세거(世居)하였고, 차자(次子)()가 원() 나라 순제(順帝 : 15대 황제, 재위기간 : 13331367) 때 한림학사(翰林學士)1351(공민왕 즉위)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고 고려(高麗)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의 정2품 벼슬)회원군(檜原君)에 봉해지고 관향(貫鄕)창원(昌原)으로 사적(賜籍)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공씨(孔氏)의 문호(門戶)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처음에 사적(賜籍)받은 창원(昌原)을 본관(本貫)으로 삼았으나 1794(정조 18) 공자(孔子)의 고향(故鄕)인 곡부(曲阜)로 개관(改貫)하게 되었다.


공씨(孔氏)의 본관(本貫)곡부(曲阜)를 비롯하여 파평(坡平)수원(水原)부평(富平)남양(南陽) 45()까지 있는 것으로 전()해지나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곡부 공씨(曲阜孔氏) 단본(單本)이다.

곡부 공씨는 소()의 아들 녀()가 고려조(高麗祖)에서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거쳐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한성윤(漢城尹)과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 경연과 장시를 맡아보던 관청의 종2품 벼슬)을 지냈으며 글씨에 능했고 당시의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의 전횡(專橫)을 논척했으며, 조선이 개국한 후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명나라 사신으로 수차 다녀왔다.


차손 은은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포은 정몽주(鄭夢周)와 목은 이색 양문에서 수학하여 성리학을 강론하고 불교의 폐단이 심하자 척불소를 여러 차례 올리다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다가 조선이 개국하자 두문동에 들어가 절의를 지켰으며, 승국명류표방록에 구일지수로 일컫는다.

또한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 나아가지 아니하고, 순천으로 유배되어 적소에서 서거 하였다.

한편 부()의 손자(孫子) 성길(成吉)은 한성 판윤(漢城判尹), 봉명(鳳鳴)은 목사(牧使)를 지냈고, 평장사(章事) 은의 손자(孫子)인 전()도 참판(參判)을 역임한 사문(斯文), 대사성(大司成 : 성균관의 정 3 품 으뜸 벼슬)에 오른 기()와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특히 1507(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한 서린(瑞麟)곡부 공씨(曲阜孔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그는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고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친교를 맺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로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하다가 관직이 삭탈당하기도 했으나, 정권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후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와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종 2 품 벼슬)을 역임하였다.


그외 1794(정조 18)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낸 윤항(胤恒)과 성균관 대제학(成均館大提學)을 역임한 성학(聖學)이 유명했으며, 한말(韓末)에 와서는 항일지사(抗日志士) ()가 일제에 항거하여 구국 대열(求國隊列)에 앞장섰고, 1947년에 문단에 등장한 중인(仲仁)은 신낭만주의(新浪漫主義)를 표방하여 전통적인 서정(抒情)을 현대감각으로 포착하는 시()를 썼으며 종군작가단(從軍作家團)의 일원으로 애국심을 고취하는 많은 작품을 남겨 가문(家門)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부공씨(孔氏)는 전국에 총 89,33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곡부공씨조상인물

공소(孔紹) 초명은 소(), 공자(孔子)52 세손, ()의 아들. 원나라 순제(順帝) 때 한림 학사(翰林學士)가 되고, 공민왕 초 왕비 노국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를 시종하여 고려에 들어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가 되어 창원백(昌原伯)으로 봉해지고, 4대 왕 광종의 이름을 피하여 이름을 소()로 고쳤다. 한국 공씨(孔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공녀(孔帤) ()는 석이(錫爾). 고려조(高麗朝)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를 거쳐 지응양군(知應揚軍) 천우대장(千牛大將)을 지냈다.

공부(孔俯) ? 1416 (태종 16)

자는 백공(伯恭), 호는 어촌(漁村), 창원백(昌原伯) ()의 손자. 어려서부터 정몽주(鄭夢周)․이 색(李 穡) 등과 사귀었으며, 1376(우왕 2) 문과(文科)에 급제, 전의 부령(典儀副令)․예조 총랑(禮曹摠郞)을 거쳐 집현전 태학사(集賢殿太學士)가 되었다.

조선이 개국된 뒤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별감 제조(別監提調) 1413(태종 13)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 등을 지냈으며,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객사했다. 초서(草書)․예서(隸書)에 능했다.

공은(孔 㒚) : 자(字)는 백량(伯良), 호(號)는 고산(孤山)

1380년(홍무 13년)에 생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고려(高麗)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불교(佛敎)의 폐단을 막기 위하여 여러 차례 척불소(fF佛疏)를 올렸다가 미움을 받아 예안(禮安)의 금도(依今島)로 유배(流配)를 당하였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 (節義)를 지키고. 조선(朝鮮)에 이르러 태종(太宗)의 여러 차례 부름을 받고도, 나아가지 아니하여 순천(順天)에 유배(流配)되어 그곳에서 향년(享年) 56세로 서거하니, 그때 기러기떼가 모여들러 삼일을 날으면서 울다가 바닷가에 빠져 죽으니 세상 사람들이 삼일읍 비락포(三日邑 飛落浦)라 이르며, 현재의 지명(地名)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공성길(孔成吉) 조선(朝鮮) 때 한성 판윤(漢城判尹)을 역임하였다.

공전(孔畋) 조선(朝鮮)에서 사성(司成)을 지냈다.

공사문(孔斯文) 조선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공기(孔頎) ()는 은간(斦澗). 조선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공화(孔和) ()는 중집(中執). 조선조(朝鮮朝)에 제학(提學)을 지냈다.

공종주(孔宗周) ()는 한여(漢汝), ()는 어재(漁齋). 1414(태종 14)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지냈고, 1428(세종 10)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이어 호조 참판(戶曹參判)이 되었다.

공종주(孔從周) ()는 인서(仁瑞). 조선 때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공인주(孔仁周) ()는 순덕(順德). 1465(세조 10) 감찰(監察)을 지내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이르렀다.

공규(孔珪) ()는 학당(學堂). 1458(세조 3) 문광에 급제하고,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와 예문(藝文)․홍문관(弘文館)의 제학(提學)을 지냈다.

공제로(孔悌老) 춘추관(春秋館)․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을 거쳐 가서대부 에 올랐으며 영의정 겸 경연(領議政兼經筵)에 추증되었다.

공경량(孔京良) ()는 기중(基仲), ()는 송계(松溪). 조선조(朝鮮朝)에 감찰(監察)을 지냈다.

공계손(孔季孫)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공의달(孔義達) 조선에서 현령(縣令)을 역임하였다.

공익(孔翼) ()는 여필(汝弼), ()는 오헌(梧軒). 선조(宣祖) 때 통훈대부(通訓大夫)․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호종원훈공신(扈從原勳功臣)이 되었다.

공서린(孔瑞麟) 1483 (성종 14) 1541 (중종 36)

()는 희성(希聖)․응성(應聖), ()는 휴암(休巖), 시호(諡號)는 문헌(文獻), 의달(義達)의 아들. 일찍이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배우면서 조광조(趙光祖)와 친교가 있었다. 1507(중종 2) 식년문과(式年文科) 갑과(甲科)로 급제, 1519년 승지(承旨)로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후 시사(時事)에 대해 격하여 재상을 공격하고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 누차 관직을 삭탈당했다.

정권을 장악하여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후 1538(중종 33) 경기도 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이듬해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공상린(孔詳麟) ()는 응성(應星). 1528(중종 23) 별시문과(別時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이 되었다.

공세린(孔世麟) 조선(朝鮮) 때 사인(舍人)을 지냈다.

공동현(孔東賢) ()는 가희(可希). ()는 세암(洗庵), 시호(諡號)는 문효(文孝). 조선에서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공언령(孔彦齡) ()는 치홍(致弘). 조선(朝鮮) 때 내금위장(內禁衛將)을 지냈다.

공문징(孔文徵) 조선 때 감찰(監察)을 역임하였다.

공윤항(孔胤恒) 1769 (영조 45) ?

()는 성지(星之), 초자(初字)는 사홍(士弘), 대사헌(大司憲) 서린(瑞麟)의 후손. 경기도 용인(傭仁) 출신. 가세가 빈곤했으나 학업을 연마하여 왕의 명으로 성균관에 들어갔고, 1792(정조 16) 초계문신친시(抄啓文臣親試)에 장원, 1794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796년 정언(正言)이 되고, 뒤에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공계현(孔繼賢) ()는 인부(仁夫), ()는 송정(松汀).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공철(孔鐵) ()는 성여(聲汝). 조선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공윤붕(孔胤鵬) ()는 자의(子誼). 조선에서 도정(都正)을 지냈다.

공헌동(孔獻東) 1847(헌종 1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정언(正言)이 되었다.

공유동(孔有東) ()는 시여(始汝). 1857(철종 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정언(正言)이 되었다.

공성학(孔聖學) ()는 윤열(允悅). 1863(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