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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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1-09 13:54 수정일 : 2018-01-02 13:56

고씨의 연원

. 삼성 (三姓)의 신화(神話)

· · (. . ) 삼성의 신화는 어느 시대에 이르러서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신화가 아니라 오랜 옛날부터 자연적. 인문적 환경 속에서 형성되어 면면히 구전 (口傳)되어 온 것으로 영주지(瀛州誌)를 비롯한 각종 문헌(文獻)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삼성의 신화를 가장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문헌은 제주 도 역사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영주지 (瀛州誌)가 있다. 영주(瀛州)는 탐라() 즉 제주도의 별칭(別稱)으로 이 책은 고려 말엽에 편찬된 것으로 고려사 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 등이 이 책의 내용을 참고하여 인용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영주(瀛州:제주도)에는 태초에 사람 이 없었는데 홀연(忽然)히 세 신인이 한라산(鎭山:漢祭 山) 북쪽 기슭 모홍혈(毛興穴)에서 솟아났다.(溫州太初無人物也忽有三神人從地源出鎭山北麗有穴曰毛興) ()은 고을라(高乙那) ()는 양을라(良乙那) 셋째는 부을라(夫乙那)라 하였다. 그들의 용모는 매우 크고 비범(非凡)한 모습이었다.(長曰高乙那次曰良乙那三 曰夫乙那狀祝基偉器度寬餘絶無人世之態也) 그들은 늘 가죽옷을 입고 고기만 먹으며 바다에서 고기잡이(漁業)와 사냥(狩獵)을 업을 삼고 살았다."(皮衣肉食常以遊撮 爲事不成家業矣)

이는 삼신인(二神人)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는 그들이 탄생하고 난 후 수렵 (狩獵)과 어로(漁撈)로 삶을 이어가고 혈거(穴居)생활을 하였다는 것으로 이는 제주도의 최초 인간의 기거(起居)역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다. 이들 삼신인들은 제주의 최초 토칙인으로 이 섬을 지배하는 부족으로 서로가 협동하여 탐라국을 건설하였으며 이분들은 제주를 본관(本貫)으로하는 고씨(高氏), 양 씨(梁氏)부씨(夫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 모홍혈(毛興穴)

제주도 신화의 유서깊은 유적지인 모홍혈은 삼성혈(三姓穴)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성역으로 보존되어 왔고 이 곳은 고··(..) 삼성의 시조가 태어난 곳이고 생활을 시작한 근거지로서 제주도에 최초로 인간 이 정 착한 문화의 발상지(發祥地)이다.

제주시 남쪽에 위치한 삼성사(三姓祀) 경내에는 유적 지(遺蹟地)인 삼성혈(三姓穴)은 지방문화제 사적 134호 로 지정되어 있고, 삼성전(三聖殿)은 고() · () . () 삼성 (三姓)의 시조이신 고() · () · () 심신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성역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 혼인지 (婚炳址)

삼성신화에 나타난 삼신인(三神人)과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온평리에서 삼공주(三公主)를 맞이해 해안 근처에 있는 못(貯水池)에서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나이 차례로 부부가 되는 혼례식을 올렸다는 혼인지는 제주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들은 원시 제주도의 씨족 형성과정과 배경을 설명할 수 있는 최초의 사건으로 이들이 모두 외부세계 에서 들어온 외래(外來) ()이라는데 주목해야 할 점이다. 또한 삼공주는 5곡의 종자(種子) 와 송아지(幼牛) 와 망아지(幼馬) 등 가축(家畜)을 가져와 삼성인의 섀로 운 삶을 영위하게 하였으니 이는 수렵(狩獵)과 혈거(穴居)의 원시생활(原始生活)을 한 삼신인(三神人)에게 축산(畜産)과 농경(農耕)의 문화를 가져와 새로운 생활로 전환하게 했다는 의미를 닮고 있다. 또한 제주도에는 상고시대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는 석기, 토기, 골각기 등의 생활도구와 지석 입석 및 패총 등의 생활 유적지 등 을 찾을 수 있다.

. 삼사석(三射石)

제주시 삼양동에는 삼사석(三射石)이라는 제주지방문 화재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된 유적지가 있는데 이 유적지 에 관한 000기록에 의하면 삼신인이 삼공주를 배필로 정하고 성업을 시 작한지 900년 후에 한라산에 올라 누가 활을 잘 쏘는가를 겨눈 결과 고을나의 화살은 돌을 꿰뚫었고 양을나의 화살은 화살 위쪽에 붙은 깃털만 돌에 스쳤고 부을나의 화살은 사적 (射的)에 미치지 못했다. 이 결과에 따라 고을나는 제1도 양을나는 제2() 부을나는 제 3도를 나누어 살게되었다고 한다. 1도는 지금의 일도리로 제주시이고 제2도는 산방리로 지금의 대정(大 靜)이고 제3도는 토산리(兎山里)로 지금의 정의(旌義)이다.

. 영주지(瀛州) 역문(譯文)

영주지 서문(序文)630자로 되어 있다. 이 책의 원 본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지만, 동문선(東 文選)과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수록되어 있 고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주지 (瀛州) 서문(序文)

영주(瀛州 :耽羅, 濟州)에는 태초에 사람과 육축(六畜)과 오곡(五穀)이 없었는데 삼신인이 한라산 북록(北 麗) 모홍(毛興)이라는 지혈(地穴)에서 홀연히 솟아 나왔 으니 그곳이 유적이다.

우두머리는 고을나요 다음이 양을나요 그 다음이 부을나 이다.

상모(常魏)가 비범 (非凡)하고 도량(度量)이 활달(豁達)하여 세상의 나쁜 행태(應世)에 더럽힘(俗累)이 없었다. 그들은 짐승의 가죽으로 의복을 만들고 고기를 먹으며 항상 수렵(狩猫)으로써 일을 삼으니,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는 일(家業)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가 멀리 바라보니 자니(紫泥)로 봉()한 목함(木函) 동해로부터 내려와 해안에 머물거늘 삼인이 내려와 목함을 열어보니 그 안에 알()모양을 한 둥근 옥함이 있었으며 관대 (冠帶)를 하고 붉은 옷 (紫衣)를 입은 사람이 나와 옥함을 열은 즉 푸른 옷(靑 衣)을 입은 처녀(處女) 3인이 있어 모두 나이가 15에서 16세로 외모와 태도(姿色)가 뛰어나고(出衆) 품성과 자질(棄質)이 단아(端雅)하였는데 좌석을 정제하고 같이 앉았고 또 우마(牛馬)와 오곡(五穀)의 종자를 가지고 금 당(金塘)의 언덕에 내 놓으니 삼신인(三神人)이 자축(自 祝)하여 말하기를 이것은 반듯이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준 것이다하였다.

사자가 재배(再拜)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 사람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 3여인을 낳아 나이가 장성하나 배필(配匹)을 구하지 못 해 주야로 한탄(恨歌)한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저번 에 자소각(紫睿閣)에 올라 서해를 바라보니 자기(紫氣) 가 하늘에 연하고 서색(瑞色)이 영롱한 가운데 명산이 있었는데 삼신인이 강림하여 장차 나라를 세우고자 하나 배필이 없으므로 이에 신()에게 명하여 3여를 모시고 오게 하였으니 부부(夫婦)의 예식을 갖추고 큰 국업을 성취하소서 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올라 가 간 곳이 없었다.

삼신인을 제물(祭物)을 정결(貞潔)하게 갖추고 하늘에 고()하고 나이 순서(年次)데로 나누어 혼례(分娶)를 치르고 물이 맑고 토지가 제일 비옥한 곳을 선택하여 화을 쏘아 거지(居地)를 정하였으니 고을나의 저기를 제1(濟州), 양을나의 거지를 제2(大靜)부을나의 거지를 제3(桂義)라 하였다. 이 때부터 비로소 산업을 이룩하여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드디어 촌락을 이루었다.

그 후 900년이 지나 인심이 고씨에게로 돌아왔음으로 고씨를 추대(推戴)하여 임금을 삼고 나라 이름을 탁라(毛羅)라 하였다. 고을나의 15세손(世孫) (), (), () 삼형제가 배를 저어 타고 바다를 건너탐진(耽津)에 다다르니 이 때가 신라의 전성시대였다. 이 때 혜성이 남방에 출현하거늘 태사(太師)가 아뢰기를 이국 (異國) 사람이 내조(來朝)할 징후입니다." 하더니 곧 탐라()왕이 내조함에 신라왕이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부덕한 나로서 귀객을 얻었으니 또한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하였다.

이에 후()로써 성주(星主)를 삼고 청()은 임금의 무릅 가까이. 친아들과 같이 사랑하며 왕자(王子) 동궁(東 宮)이라 이름하였으며. ()는 도내(徒內)를 삼았고, 탐라(1ft)를 남화국(南化國)이라 칭하였으며 각기 의관 (衣冠)과 보개 (寶蓋)를 하사(下賜)하고 친히 남녁을 전송 하니 차기 (車騎)와 치중(輜重)이 백리(百里)를 연달았다.

그 후로부터 신라를 지성으로 섬겨 대대로 그 봉작을 받고 번신(藩臣)의 의례(儀禮)를 지켜왔는데 후()12대손(代孫) ()에 이르러 백제(百濟)를 섬기다가 담이 죽은 후에 여러 세대(世代)를 조공하지 않았다.

백제 동성왕 경신년(庚申年)에 탐라가 조공하지 않아 노여움을 사서 군사 4천기를 거느리고 남방을 친정(親征) 하여 무진주(武珍州: 光州)에 이르니 탐라왕 소()가 이를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사죄함에 이에 철병(撮兵)하였다.

고려 태조 21년 무술(戊戌: 서기 938)에 탐라국왕 고자견(高自堅)이 태자(太子) 말로(末老)를 보내어 내조 하니 이에 성주(星主) 왕자(王子)의 작위 (爵位)를 하사 (下賜)하였고, 이로부터 세대마다 일차식 조근(朝親)하였으며 왕국에 벼슬한 자는 없으나 유()에 이르러 비로소 벼슬을 시작하게 되었다.

탐라()의 개국(開國)

. 시조(始祖) 고을나왕(高乙那王)

고을나는 3성신화에 나오는 고 · · (. . ) 3 신인 중 제1어른으로서 기원전 2337년 갑자(甲子)년에 탁라국(毛羅國)을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이 고을나왕은 제주고씨(濟州高氏)의 시조(始祖)이다. 중국의 연호(年號)로는 당뇨(唐堯) 21년에 해당되며 이는 단군의 개국 무진(戊辰 : BC2333)보다 4년이 앞선다. 이 년대는 상고시대의 기원이 씨족사회로부터 시작한 것과 같은 무렵을 뜻하므로 매우 오랜 년대로 추정하고 있다.

탐라국왕세기 (羅國王世紀) 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 때 나라의 창건시조 고을나왕은 군장(君長:임금)으로 서 나이는 1천여세를 살았다. 이를 중국 상고시대의 제왕기와 비교해보면 삼황오제 가운데 천황과 지황은 각각 18천세이고 인황씨는 456백세라 하였다,

그 이래로 유소(有果), 수인(燧人), 복희(伏羲), 신농(神農), 헌원(軒轅)씨에 이르러 비로소 천체() 기상을 보아 갑자역상(甲子歷象)을 만들어 인월(寅 月 )로써 해의 첫달로 삼고 윤달을 차례로 해를 채우니 이런 옛일로 보아 고씨 900년은 15갑자 당나라 요() 임금의 갑진(甲辰)과 단군(檀君)의 무진(戊辰)과 다 같은 시대에 해당된다.

. 탐라국(羅國) 왕세계 (王世系)

고을나왕(商乙那王) (BC2337-BC2206) - 건 왕(建王) (BC2206-BC1767) - 삼계왕(三繼王) (BCl767-BC1123) ­ 일망왕(日望王) (BC1123-BC935) - 도제왕(島濟王)(BC935-BC771) - 연경왕(彦卿王) (BC771-BC619) - 보명왕(寶明王) (BC619-BC520) - 신천왕(辛天王) (BC520-BC426) - 환 왕(歡 王) (BC426-BC315) - 식 왕(湜 王) (BC315-BC247) - 욱 왕( ) (BC247-BC207) - 황 왕() (BC207-BC157) - 위 왕( ) (BC157-BC105) - 영 왕(營 王) (BC105-BC58) - 후 왕(厚 王) (BC58-BC7) - 두명왕(斗命王) (BC7-AD43) - 선주왕(善主王)­ (AD43-AD93) - 지남왕(知南王) (AD93-AD144) - 성 방왕(聖邦王) (AD144-AD195) - 문성왕(文星王) (AD195-AD243) - 익 왕(翼 王) (AD243-AD293) ­ 지효왕(之孝王) (AD293-AD343) - 숙 왕(淑 王) (AD343-AD393) - 현방왕(賢方王) (AD393-AD423) ­ 기 왕(磯 王) (AD423-AD453) - 담 왕( ) (AD453-AD483) - 지운왕(指雲王) (AD483-AD508)­ 서 왕(瑞 王) (AD508-AD533) - 다명왕(多鳴王) (AD533-AD558) - 담 왕(談 王) (AD558-AD583) ­ 체창왕(體參王) (AD583-AD608) - 성진왕(聲振王) (AD608-AD633) - 홍 왕(鴻 王) (AD633-AD658)­ 처량왕(處良王) (AD658-AD683) - 원 왕(遠 王) (AD683-AD708) - 표륜왕(表裔王) (AD708-AD733) ­ 형 왕() (AD733-AD758) - 치도왕(致道王)

(AD758-AD783) - 욱 왕(島 王) (AD783-AD808) - 천원왕(天元王) (AD808-AD833) - 호공왕(好恭王) (AD833-AD858) - 소 왕(昭 王) (AD858-AD883) ­ 경직왕(敬直王) (AD883-AD908) - 민 왕(岷 王) (AD908-AD933) - 자건왕( 自堅王) (AD933-AD938) -

미로태자(末老太子) (AD938)

탐라성주(耽羅星主) 시대(時代)

. 중시조 고말로(高末老)의 입조와 성주시대

탐라성주시대란 고려초 태조 21년 서기 938년 탐라국 왕 고자견(高自堅)의 태자 고말로(高末老)가 고려에 입조하여 성주작(星主爵)을 받은 후 대대로 직계후손이 성주로써 나라를 다스리다가 조선조 태종 2년 서기 1402년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에 이르러 성주의 상속제 도가 폐지될 때까지 16464년간을 말한다.

이 시대는 탐라가 고려에 예속되었으나 탐라국왕시대의 전통과 세습(世襲)제도를 계속(繼續) 유지할 수 있었으며 탐라 성주는 군주와 같이 자치적이고 독립적인 권한을 가지고 탐라를 다스렸다. 성주(星主)라 함은 탐라국 왕의 별칭으로서 그 직위는 대대로 세습되었으며 이는 신라의 고례(古例)를 따른 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고대 중세시대에 우리나라나 중국 등지에 서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복속(服屬)시켜 하나의 번속국(藩屬國)으로서 주종관계를 맺고 그 수장(首長)을 즉 국왕을 도주(島主) 혹은 성주(星王)라 칭하고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하는 비슷한 제도이다.

고려 태조는 탐라국 태자 고말로(高末老)에게 성주 · 왕자(星主 · 王子)의 작위를 제수(除授)함으로써 탐라 때(耽羅)는 시조 고을나왕으로부터 고자견(高自堅)왕에 이르기까지 453275년간 오랜 왕국시대를 끝내고 왕을 성주(星主)라 칭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성주시대가 시작 되었다. 고려는 탐라와의 교빙(交勝)을 존중히 여겨 대 대로 성주의 직계 후손에게 성주 작위를 세습(世襲)하게 하는 한편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통치권을 부여하고 무산계(武散階)를 주고 그 아들도 왕자 · 태자라 칭하는 등 특별히 우대 (優待)하였다.

. 조선조의 도주관(都州官)제도

조선 태종조에 이르러 지방제도를 개혁하기 위하여 국 가의 기반이 확립되었으니 탐라도 이러한 시책에 호응하여 모든 제도를 정비하였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의 제주목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태종 2(서기 1402) 제주성주 고봉례 (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가 입조하여 성주 · 왕자 칭호를 참월 (僧越)하다 하여 이를 개칭하여주기를 청 ()함에 성주 (星主)를 좌도지관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고쳐 비로소 성주제도가 없어졌다.

도주관시대란 성주(星主)와 왕자(王子) 칭호가 좌우도주 관으로 개칭되면서 명목상 제주 진무를 분치하던 시대를 말하며 이에 따라 성주청(星主廳)은 도주관부(都州官府) 로 개칭하게 되었다. 따라서 성주(星主) 고봉례(高鳳禮) 는 좌도주관으로 제주민의 권익증진을 위해 공헌하였으며 그 후 고봉례의 장자 고상온(高尙溫)에게 그 직이 세습되었다. 이 시대는 조선조의 강력한 행정의 뒷받침 아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에서 평온과 안정을 회복하였다. 이로서 고려의 성주시대는 938년 성주(星主) 고말로 (高末老)로부터 1402년 성주 고봉례(高鳳禮)에 이르기 까지 16464년간 탐라의 성주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성주(星主) 왕자(王子) 작위 (爵位) 대신 좌 · 우도주관 (. 右郡州官)의 직위는 형식적인 직위일 뿐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의 실권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독자적인 자치권을 탐라왕국시 대는 성주시대와 함께 종언(終焉)을 고하게 되었다.

제주고씨(濟州高氏)의 발전 상황

. 본관및 분파현황

제주고씨 시조 고을나가 제주도 삼성혈에서 용출하여 탐라국(毛羅國: 恥羅國)을 세운 이래 그 자손이 면면이 왕위를 이어왔다. 고려 태조 21(서기 938)에 이르러 45세 고자건왕(高自堅王)은 태조 고말로를 고려에 입조시켜 성주(星主)와 왕자의 작위를 받았다. 이 때부터 그 후손들은 차차 대륙으로 진출하여 고씨 문중이 크게 발전하였다.

중시조 고말로(高末老)의 아들 고유(高維)고강(高綱), 고소(高紹) 3형제가 고려 초 과거에 급제하여 고유는 정 종조에 우복사(右僕射)고강은 문종조에 병부상서(兵部 尙書) , 고소는 도총독(都總督)을 역임하여 사관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려조에서만 9명의 상서와 12명의 한림(翰林) 등 현신(賢臣)을 배출하여 탐라고씨의 육지 진출이 눈부시었다. 그 중에서도 고강의 손 고공익 (高恭益)이 상당군(上黨君)으로 봉군(封君)되어 본관을 청주로 삼았고. 고소(高紹)의 손() 고령신(高令臣)은 양경(良敬)이라는 시호(論號)를 받아 후손들이 개성(開城)에 세거 (世居)하면서 개성을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고려 원종조 고말로의 5세손 성주(星主) 고적(高適)의 장자 고여림(高如霖)은 제주에서 세거하고 차자(次子) 고세재(高世在)는 중앙정부에 출사하여 고세재의 현손 고백연 고중연. 고계연 3형제가 있어 고백연의 자 고경(高慶)은 시호가 문충이고. 손 고용현(高用賢)은 시호가 문영으로 문총공파의 파조이며 관향을 제주로 쓰고 있다. 고중연은 일명 고복림(高福林)으로 장홍백파(長興伯派)이고 장홍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계연 화전군(花田君)파 파조 이며 관향은 횡성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1971년부터 제주 로 개관하기로 하였다.

문영공(文英公) 고용현(高用賢)의 손자(孫子) 고천성 (高天祥) 고천우(高天祐)는 고려가 망하자 두문72현으로 개성 두문동에 은거하고 출사(出仕)하지 아니하였는데 그 후손들도 개성을 본관으로 사용하고 있어 양경공 (良敬公) 고령신(高令臣)의 후손과 함께 개성을 본관으 로 사용해 혼돈하고 있다.

상당군파에서 도 충북 음성 지방에 거주하는 헌납공(獻納公) 고덕수(高德秀)의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 으나 함경도 지방에 거주하는 양산공(陽山公) 고철(高哲) 의 후손들은 정조 10년 서기1786년부터 제주로 개관했다. 제주고씨 분파 상황을 종합해보면

1. 고인단(高仁旦)을 파조로 하는 성주공파(星主公派)

2. 고신걸(高臣傑)을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3. 고득종(高得宗)을 파조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4. 고 경 (高 慶)을 파조로 하는 문총공파(文忠公派)

5. 고중연을 파조로 하는 장홍백파(長興伯派)

6. 고인비 (高仁Jlt)를 파조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7. 고 택 (高 澤)을 파조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8. 고공익 (高恭益)을 파조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9. 고영신(高 令臣)을 파조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모두 9개 파로 분파(分派)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