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수안계씨시조(遂安桂氏),계석손(桂碩遜),수안계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3:45 수정일 : 2018-03-08 11:34

시조 및 본관의 유래

「수안계씨계축보(遂安桂氏癸丑譜)」에 의하면 우리나라 계씨(季氏)의 연원(淵源)을 중국(中國) 천수(天水 : 감숙성 남쪽 위하 유역에 있는 지명) 출신인 계석손(桂碩遜)에 두고 있다. 그는 명(明)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고려말(高麗末)에 동래(東來)하여 나라에 공(功)을 세워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석손(碩遜)을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선천장파(宣川長派)․군현파(群賢派)․태산파(台山派) 등 22파로 분파(分派)되었고, 평안도(平安道) 선천(宣川)과 황해도(黃海道) 곡산(谷山)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관서지방(關西地方)의 명문(名門)으로 기틀을 다져왔다.

수안(遂安)은 황해도(黃海道)에 위치한 지명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시대(高句麗時代)에 장색현(獐塞縣)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때 와서 유암군(楢巖郡)의 영현(領縣)이 되었고, 고려초(高麗初)에 수안현(遂安縣)이 되었다가 고려(高麗) 현종(顯宗 : 제8대 왕, 재위기간 : 1009~1031) 때 곡주(谷州 : 곡산)에 속하였으며, 서기 1310년(충선왕 2) 수주(遂州)로 승격되었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 다시 수안(遂安)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씨족사 개요

특히 수안 계씨(遂安桂氏)는 시조(始祖) 시랑공(侍郞公)의 아들 원우(元祐)․원조(元祚)․원제(元製)․원겹(元裌) 4형제 대(代)에서 크게 번성하여, 맏아들 원우(元祐)가 합문지후(閤門祗候 : 조회의 의례를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를 지냈고, 그의 아들 문식(文植)은 우대언(右代言)을 역임하며 왕명(王命)으로 궁중의 출납을 맡았다.

한편 원조(元祚)의 셋째 아들 양춘(陽春)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첨사(僉使)를 지낸 후 강화(江華)로 들어가 강화파(江華派)의 파조(派組)가 되었으며, 원제(元製)의 후손에서는 강동파(江東派)를 비롯한 영유(永柔)․증산(甑山)․용강(龍岡) 등 7파(派)로 분파(分派)되었다.

그러나 원겹(元裌)의 후손들은 평양지방(平壤地方)에 산거(散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었으나 보첩수단(譜牒收單) 과정에서 선계(先界)를 실전(失傳)하여 12세(世)를 알 수 없다.


대표적인 인물

가문(家門)을 대표(代表)하는 인물(人物)로는 정원 도호부사(定遠都護府使)를 지낸 빈(斌)과 조방장(組防將) 반(斑)의 형제가 유명했으며, 준(遵)은 문과(文科)에 올라 삼화 현령(三和縣令)을 지내면서 청렴(淸廉)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한편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김응하(金應河) 장군(將軍)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많은 적을 죽이고 장렬하게

전사한 여강(汝江)은 인경(仁慶)의 셋째 아들로 팔도(八道)에 이름을 날릴만큼 힘이 세어 북관장사(北關壯士)로 불리웠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천상(天祥)․익상(益祥) 두 아들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금도(金島)에 토성(土城)을 쌓고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지문(之文)과 적에게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굽히지 않아 영조(英祖) 때 정문(旌門)이 내려진 천상(天祥)은 충렬(忠烈)로써 가문을 빛냈다.

조선중기(朝鮮中期)의 학자(學者)로 유명한 태형(泰衡)은 노천(魯川)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후세 교육에 진력하여 선천군 대산(宣川郡臺山)의 목동서원(睦洞書院)에 주자(朱子)․율곡(栗谷)과 함께 동향(同享)되고 있으며, 1768년(영조44) 문과(文科)에 급제한 덕신(德新)은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여 찰방(察訪)을 지낸 덕해(德海)와 함께 계씨가문(桂氏家門)을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안계씨는 전국에 총 6,0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수안계씨조상인물

계원우(桂元祐) 고려(高麗) 때 합문지후(閤門祗候)를 역임하였다.

계문식(桂文植) 고려 때 우대언(右代言)을 지냈다.

계양춘(桂陽春) 고려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계빈(桂斌) 고려조(高麗朝)에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계반(桂斑) 고려 때 우후장군(虞候將軍)을 지냈다.

계준(桂遵) 조선(朝鮮)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계조(桂操) 호(號)는 원야(圓野).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부(桂扶)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흥문(桂興文) 조선(朝鮮)에서 사정(司正)을 지냈다.

계번영(桂蕃榮)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역임하였다.

계원영(桂元榮) 조선조에 찰방(察訪)을 지냈다.

계지성(桂枝盛) 조선(朝鮮)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하였다.

계여강(桂如杠) 조선에서 천총(千摠)을 지냈다.

계성명(桂性明) 조선조(朝鮮朝)에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계한명(桂漢明) 자(字)는 명보(明甫).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를 지냈다.

계정영(桂廷英)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계천기(桂天機) 자(字)는 군실(君實). 조선 때 총관(摠管)을 지냈다.

계천추(桂天樞) 자(字)는 성형(性衡). 조선조에 진사(進士)였다.

계형원(桂馨遠) 자(字)는 군실(君實). 조선 때 총관(摠管)을 지냈다.

계훈(桂勳) 조선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계인광(桂仁光) 조선에서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계덕기(桂德基) 조선(朝鮮)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계문지(桂文之) 자(字)는 희지(希之). 임진왜란 때 왜적에 항거하다 순절하였다.

계원노(桂元老) 자(字)는 의수(儀叟). 조선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계수명(桂秀明) 조선조에 부사(府使)를 지냈다.

계수방(桂秀芳) 조선(朝鮮) 때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냈다.

계자추(桂自秋) 조선(朝鮮)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자하(桂自夏)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응성(桂應成)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계서척(桂徐倜)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계사일(桂思逸) 조선조(朝鮮朝)에 좌영장(左營將)을 지냈다.

계천상(桂天祥) 자(字)는 건숙(健叔). 호(號)는 현계(賢溪). 조선(朝鮮) 때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계유명(桂惟明) 자(字)는 극윤(克允). 호는 유당(柳塘). 조선에서 별제(別提)를 지냈다.

계유징(桂惟澄)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계수만(桂壽萬) 조선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만엽(桂萬葉) 조선(朝鮮)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계봉거(桂鳳擧) 자(字)는 문보(文甫). 조선조의 학자(學者)로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계봉핵(桂鳳翮) 조선(朝鮮)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계용정(桂龍禎) 자(字)는 몽득(夢得), 호(號)는 송담(松潭). 조선 때 학자(學者)로 후진교육(後進敎育)에 힘썼다.

계종로(桂宗老)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숭로(桂崇老) 조선(朝鮮) 때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지냈다.

계태형(桂泰衡) 자(字)는 숙권(叔權). 조선(朝鮮) 때의 학자(學者)로 평북(平北) 선천군(宣川郡) 대산면(臺山面) 목동서원(睦洞書院)에 주자(朱子) 이율곡(李栗谷)과 동향(同享)되고 있다.

계지교(桂之晈) 조선조에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지냈다.

계지호(桂之皓)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

계민화(桂旻華) 조선(朝鮮)에서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계덕하(桂德夏)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계덕흥(桂德興) 자(字)는 순기(順起).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계덕호(桂德灝)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덕화(桂德和) 자(字)는 순칙(順則).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인성(桂寅成) 조선에서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국주(桂國柱) 자(字)는 군실(君實). 조선 때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계수원(桂秀元) 자(字)는 선장(善長). 조선(朝鮮) 때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계동석(桂東碩) 자(字)는 대재(大哉). 조선조에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동원(桂東元) 자(字)는 인백(仁伯).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덕신(桂德新) 자(字)는 여회(汝晦). 1768년(영조 44)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다.

계인기(桂仁基) 자(字)는 인보(隣保). 조선 때 주부(主簿)를 지냈다.

계덕해(桂德海) 1708 (숙종 34) ~ 1775 (영조 51)

자(字)는 원섭(元涉), 호(號)는 봉곡(鳳谷), 난서(鸞栖)의 아들. 평북 선천(宣川) 출신. 진사(進士)가 된 후 1743년(영조 19)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아 예빈시 참봉(禮賓시參奉)이 되고, 직장(直長)을 거쳐 1774년 평안도 별시문과(平安道別試 文科)에 장원, 전적(典籍)․예조 좌랑(禮曹佐郞)을 거쳐 1775년 유곡도 찰방(幽谷道察訪)에 이어 청단도 찰방(靑丹道察紡)으로 재직중에 죽었다.

계덕수(桂德洙) 자(字)는 사로(師魯).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계덕순(桂德淳) 자(字)는 경주(景周). 조선(朝鮮) 때 진사(進士)였다.

계응화(桂應華)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항대(桂恒大) 자(字)는 성여(聖汝).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계월형(桂月亨)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계문형(桂文亨) 조선(朝鮮)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동형(桂東亨)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계태형(桂台亨) 조선조(朝鮮朝)에 통덕랑(通德郞)에 올랐다.

계사문(桂思文)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계수옥(桂壽玉)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계욱(桂勗) 자(字)는 약송(若松). 조선에서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냈다.

계형명(桂馨明) 자(字)는 중재(重哉).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계홍(桂鴻) 조선조(朝鮮朝)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계남대(桂南大) 조선(朝鮮) 때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계시항(桂時恒) 자(字)는 여환(汝環). 조선 때 진사(進士)였다.

계영달(桂榮達) 자(字)는 공오(公五). 조선조(朝鮮朝)에 중추부사(中樞府使)를 지냈다.

계윤(桂倫) 조선 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계철(桂喆) 자(字)는 중길(重吉). 조선 때 만호(萬戶)를 지냈다.

계도형(桂道馨) 조선조(朝鮮朝)에 금부도사(禁府都事)를 역임하였다.

계효태(桂孝泰) 자(字)는 행로(行魯).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계홍항(桂鴻恒) 자(字)는 자익(自翼). 조선(朝鮮) 때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계응숙(桂應淑) 자(字)는 무경(武卿).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계득수(桂得秀) 조선조(朝鮮朝)에 좌윤(左尹)을 역임하였다.

계찬언(桂贊彦) 자(字)는 군항(軍港), 호(號)는 송곡(松谷).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여러 주(州)․군(郡)의 수령(守令)을 지내면서 선정(善政)을 하였고,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이르렀다.

계득신(桂得新) 조선 때 통의랑(通義郞)에 올랐다.

계화(桂和) 1884 (고종 21) ~ 1928

본명(本名)은 활(活), 호(號)는 백연(白). 평북 선천(宣川) 출신. 일찍이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서 일(徐 一) 등과 교인을 중심으로 중광단(重光團)을 조직, 독립운동을 했다. 1918년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조직에 참여, 경리부장(經理部長)이 되어 군자금(軍資金) 모집과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운영에 진력했다.

1920년에는 청산리(靑山里) 전투에 참가, 그후 북만주일대와 시베리아 등지를 왕래하며 항일투쟁에 헌신했고, 종교활동에도 힘을 써 참교(參敎)․지교(知敎)․상교(尙敎)를 거쳐 정교(正敎)에 승진, 대형(大兄)의 호를 받았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계용묵(桂鎔黙) 1904 (광무 8) ~ 1961

평북 선천(宣川) 출신. 1922년 단편「상환(相換)」을「조선문단(朝鮮文壇)」지에 발표함으로써 문단에 등장,「최서방(崔書房)」․「인두주지(人頭蛛蜘)」등 현실적이고 경향적(傾向的)인 작품을 발표했으나, 이후 약 10여년간 작푸활동을 중단하고 침묵을 지켰다.

1935년「조선문단」에 인간의 애욕과 물욕을 그린 대표작「백치(白痴)아다다」를 발표하면서부터 순수문학을 지향하는 일관된 작품 경향을 유지했고, 해방 후의「별을 헨다」․「바람은 그냥 불고」․「금단(禁斷)」․「이불」등 콩트 풍의 짧은 단편에서는 압축된 정교미(精巧味)를 보여 주고 있다. 죽을 때까지「현대문학(現代文學)」지의 추천 작품 선고(選稿)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