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청주경씨시조(淸州慶氏),경진(慶珍),청주경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3:25 수정일 : 2018-02-18 19:43

청주경씨의 연원(淸州慶氏의 淵源)

청주경씨는 중국 중원 하내(河內)에 연원(淵源)을 두었던 중국 춘추시대 제(齊)나라 공족인 강태사(姜太士)의 후예라고 전한다. 경(慶)씨가 우리나라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040여 년 전인 고려 광종(光宗) 11년(서기 960년) 중국에서 노국공주(魯國公主) 의 배신(陪臣)으로 건너온 팔학사(八學士)중 한사람인 경경(慶鏡)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경경은 호를 암곡(巖谷) 또는 초수(樵叟)라 하였고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부 문하시중 평장사(太傅 門下侍中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공(公)의 인품이 맑고 절조를 지키며 따뜻하고 어질다하여 정의 (貞懿)라 하였다.

그러나 경(慶)씨는 그로부터 약 200여 년간 사실(史實)과 연대(年代)가 역사에 빠져 있어 상고(詳考)할 수가 없으며 고려 명종(明宗)조에 청주에 근거하고 벼슬이 정의광정대부(正議匡正大夫) 중서시랑 평장사(中書侍郞 平章事)를 지낸 진(珍)을 시조(始祖)로 하고 있다. 경진 (慶珍)의 아들은 대장군 경대승(慶大升)이다. 경대승은 26세의 청년장군으로 고려의종(毅宗)조에 반역(反逆)을 한 무신들이 조정을 장악한 후 정사를 농단(農壇)하고 횡포가 극에 달하고 있을 때(정중부의 난 또는 무신의 난) 정중부 일파를 제거함으로서 실권을 한손에 잡았으면서도 전 재산을 군부에 헌납하고 벼슬도 사양하면서 튼튼한 왕실(王室)과 백성이 편히 살수 있는 밝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쓰다가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사 하였다.

이에 따라 경대승에게 어린 자녀가 있었으나 무신들의 화(禍)를 피하여 깊이 은거(隱居)한 까닭에 30여 년간 세계(世系)가 분명치 못하므로 고려 고종(高宗)조에 정의대부(正議大夫) 호부상서 평장사(戶部尙書 平章事)를 지낸 경번(慶蕃)을 1세조로 하여 계대(繼代)하고 있다.

경(慶)씨가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로 하게 된 것은 시조를 비롯하여 누대(累代)에 걸처 살아온 발상지가 청주이며 4세 경복홍(慶復興)이 공민왕(恭愍王)조에 신돈 (辛旽)에 의하여 조정이 어지러울 때 이를 바로잡으려고 애쓰는 등 좌시중(左寺中)을 거처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면서 바른 정사를 펴기에 애씀으로써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의 작호(爵號)를 받음에 따라 그 후손들이 본 관을 청주로 하게 되었다.

그 외에도 5세 경의(慶儀)가 조선 초에 청백리(淸白吏)로 청백록(淸白錄)에 녹선(錄選)되는 등 대(代)를 이어 바른 길을 걸었으며 그 후손들 또한 한결같이 정의(正義)의 편에 서서 살아온 명문혈족(名門血族)이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청주경씨는 전국에 12,4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역대인물-청주경씨조상인물

고려시대 인물(高麗時代 人物)

경진(慶 珍) : 명종때의 무신으로 청주경씨의 시조이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있을 때 서경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군장으로 출전하였으며 난이 평정된 후 정토공신(征討功臣)이 되어 지문하성사(知 門下省事)에 올랐고 후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냈다.

경대승(慶大升): 15세에 음보로 교위가 되고 누천하여 명종조에 대장군에 이르렀다. 의종24년 정중부. 이의방등이 무신난을 이르켜 정권을 장악하고 정사를 농단(農壇)하면서 왕권을 위협하자 모든 문신과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이때 대장군 경대승은 성품이 강직하고 왕실과 백성의 안위만을 생각하고 있던터라 의분을 참지 못하여 정중부부자와 사 위 송유인 등을 처서 제거한 후 왕권을 보호하고 국정질서를 바로 세우며 백성이 편히 살도록 하는데 진력하였다. 또한 모든 재산을 군부에 헌납하고 승선벼슬도 사양하면서 무인들의 국정 참여를 엄격히 통제하자 무인들의 위협이 거세므로 도방(都房)을 설치하고 신변을 보호하였으나 30세의 젊은 나이에 병을 얻어 사망하니 밝은 세상을 기대 하던 장안의 백성들이 크게 슬퍼하였다.

경번(慶 蕃): 청주경씨의 1세조이다.

고종때에 문과에 등과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 호부 상서(戶部尙書)에 올랐으며 후에 중서성(中書省)의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다.

경유(慶 緩): 충렬왕때에 문과에 등과하여 정의대부(正議大夫)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오르고 응선부(牌善府) 좌첨사(左鎔事)를 거처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를 지냈다.

경사만: 충숙왕때에 문과에 등과하여 사헌집의(司憲執義)를 거처 밀직사(密直司), 좌부대언(左副代言), 우대언(右代言)겸 종부령(宗簿令)에 올랐다. 층숙 왕비 명덕태후(明德太后)의 질녀와 혼인하여 왕실을 자유롭게 출입하였으며 왕·이 원나라에 억류당해 있을 때 왕의 환국을 탄원하는 서송사건(書訟事件)을 주동하여 정치적 모함으로 한때 순군옥(巡軍獄)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왕을 위하는 그의 충성심에 조야(朝野)가 감탄하여 곧 풀려났다.

경복홍(慶復興): 초명은 천홍(千興)이며 호가 청의당(淸義堂)이고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충숙왕때 음(陰)으로 사헌감찰(司憲監察)에 올랐으며 56년간 벼슬길에 있으면서 문하시중(門下寺中)에 이르렀고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에 봉군되었다. 기철(奇轍)일당의 반역모의 사건이 있을 때 이를 소탕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었고 2차 홍건적(紅市賊)침입 때는 왕(王)을 복주(福州)까지 모시어 난이 평정된 후, 호종(墨從)의 공로로 진충동덕 협보공신(盡忠同德t祐補功臣)이 되었으며 원(元)나라가 덕홍군을 앞세우고 침입해오자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 元帥)가 되어 전군을 지휘, 난을 진압하고 개선하여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제수 되었다. 공민왕 말기 신돈(辛純)이 궁중에 들어와 정사를 어지럽히자 이를 바로 잡으려다 오히려 경상도 홍주(興州)로 유배되었다가 신돈이 유배지에서 처형되자 유배에서 풀려나 좌시중이 되고 다시 문하시중이 되었다. 공민왕이 시해 되었을 때는 명덕태후와 함께 종실(宗室)중에서 후사를 이으려고 주장하다가 신우(辛禑)가 왕에 오르자 다시 청주로 유배 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안의 (安義), 덕천서원(德泉書院)에 배향되었다.

경보(慶 補): 시호는 양정(良靖)이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군되었다. 우왕14년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의 우군(右軍)에 속하여 북벌(北伐)에 출전하였다가 위화도 회군(回軍)에 참가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조선 개국 후에 의정부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태종 때에 숭정대부(崇政大夫), 검교우정승(檢校右政丞)에 올랐다.

경의(慶 儀): 시호는 순절(順節)이다. 우왕14년 북벌 출병 때에는 좌군(左軍)의 조민수(曺敏修), 도통사휘하에 계림원수(鷄林元帥)로 참전하였으며 위화도 회군에 동참하여 공신이 되었고 후에 서북면병마도절제사(西北面兵馬都節制使)겸 평양윤(平壤尹)을 지냈는데 성품이 곧고 청렴(淸廉)하여 정사에 공정하였으며 늘 검소한 생활을 하였기로 “추수한월(秋水寒月), 옥호청빙(玉壺淸氷)”이라고 새긴 송덕비가 대동강변에 세워졌다고 전한다. 조선개국 후에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수절(守節)하였으며 개국 초 전국에서 팔현(八賢)의 청백리(淸白吏)를 선발할 때 으뜸으로 녹선(錄選)되었고 안의 덕 천서원에 부친정렬공과 함께 배향되었다.

경진(慶 燦): 정의대부(正議大夫), 예의판서(禮議判書)

조선시대 인물(朝鮮時代 人物)

경습(慶 習): 조선개국초에 개국원종 보의장군(開國 原從保儀將軍), 용양순위사(龍駿巡衛司) 대장군(大將軍)겸 사헌부 중승(中丞)을 역임하고 후에 좌찬성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에 증직되었다.

경지(慶 智):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翰院)에 들어가 수학하고 진현관 제학(提學). 집현전 직제학. 경연참찬(經廷參贊). 춘추관사서. 관상감제조(提調). 대호군. 의금평시관(義禁平市官)을 지냈으며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라 검 교 (檢校), 호조판서 (戶曹判書)에 이르렀다.

경여(慶 餘): 세종때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역임한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 事)에 증직되었다.

경유선(慶由善) : 세종 때 문과에 올라 훈련원 판사(判事)를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돈녕부부정(敦寧府副正)을 지냈다.

경유근(慶由謹) : 강릉부사 절충장군(折衝將軍) 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를 지내고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겸 경연참찬에 증직되었다.

경유형(慶由亨) : 세종 때 사재감(司宰監) 주부를 지내고 오위(五衛)의 사직(司直)으로 전임되었다가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승차하고 삭녕(朔寧)군수를 지 냈다.

경유순(慶由淳): 통정대부(通政大夫) 청주목사(淸州牧使)를 지냈다.

경유돈(慶由惇) : 통훈대부(通訓大夫) 보성군수(寶城郡守)를 지냈다.

경유공(慶由恭): 성종3년 통정대부에 올라 안주목사(安州牧使)를 지내고 경상남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동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그 후 가선대부(嘉 善大夫)에 승임되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으나 예종1년 남이의 옥사(南伯의 獄事)에 연루되어 가산이 모두 적몰되고 관노(官奴)가 되는 형(刑)을 받았으며 성종1년에 방면되어 벼슬길에 올랐다.

경수(慶 條): 통훈대부(通訓大夫) 청안현감(淸安縣監)을 지냈다.

경준(慶 俊) : 호는 서봉(西峰)이다. 세조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정자(正字)를 시작으로 시강원사서(司書) 춘추관 수찬관(修撰官) 사헌부지평(持平) 공조좌 랑(工曹佐郞). 이조좌랑(吏曺佐郞)을 지내고 강원감사, 충청감사를 거처 이조참의 좌승지를 지냈으며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차하여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역임하였다.

경상(慶 祥): 자는 자겸(子謙)이고 호는 월송(月松)이다. 예종 성종 때의 문신으로 통진 현감. 임파(臨坡)현감. 진위(振威)현감. 문의(文義)현감. 덕천(德川)군수를 지냈으며 가는 곳마다 선정(善政)을 베풀어 사후에 왕이 공의 치적을 가상히 여겨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에 증직 하였다.

경조(慶 祚) : 중종조에 현감(縣監)을 지내고 통훈대부에 승임되어 의빈부(儀賓府) 도사(都事)에 보임되었다. 그 후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교하(交河)로 낙향하여 산수를 벗하여 수학하며 여생올 보냈다.

경면(慶 綿) : 자는 치원(致遠)이다.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내금위 군관(軍官)과 현감을 거처 용천(龍川) 군수를 지냈으며 후에 통훈대부에 승임 진산(珍山)군수 겸 전주진관병마동침절제사(全州鎭管兵馬同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사후에 그의 충성심을 가상히 여겨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에 증직되었다.

경임(慶 組) : 자는 태소(太素)이다. 성종 때 사헌부 집의(執義)를 지내고 사재감 부정(司宰監 副正)을 거처 통정대부 진주목사(晋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진주목사 재임시에는 영남(嶺南)지방의 고을 수령들과 금란계 (金蘭契)를 조직하여 진주 촉석루에 모여 글을 쓰고 읽는 등 직위의 높낮음 없이 친화(親和)하고 유대(統帶) 하였으며 이러한 기록들이 지금까지도 촉석루 내벽에 현판으로 게시되어 전해오고 있다.

경숙(慶 俶) : 자는 자후(子厚)이다. 중종조에 사간원 정언(正言), 예조좌랑을 지내고 다시 홍문관 수찬(修撰), 이조정랑을 지낸 후 통훈대부 사헌부장령(掌令)으로 승직되었다. 이천부사로 나갔다가 중종 13년 승정원 우부승지에 올랐으나 병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경세창(慶 昌): 자는 무중(戊中)이다. 성종2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사간원 헌납(獻納). 훈문관 교리(校理)를 지내고 황해도 관찰사로 승임, 강원도 관찰사를 거처 사간원 대사간(大司陳),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한성부 좌윤(左尹)을 지내고 가선대부에 올랐으며 동지 중추원사를 지낸 후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경세인(慶世仁) : 자는 심중(心中)이고 호가 경재(敬齋) 또는 농은(農隱)이며 중종때 성리학자(性理學者)다 중 종 14년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고 홍문관저작(著 作). 박사(博士)에 올랐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화를 입었으며 고향인 파주 두문리(斗文里)에 은거하여 여생을 보냈다.

경연(慶 延) : 자는 대유(大有)이며 세조때 출천(出天)의 효자였다. 성종 9년 사재감(司宰監) 주부(主簿)를 삼았을 때 왕이 친히 내전으로 불러 들여 효행(孝行)을 칭찬하였다. 이산(尼山)현감, 춘천(春川)부사를 지냈으며 극진한 효행으로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겸 진현관제학, 지경연사, 춘추관사, 관상감사, 의금 부사에 증직 되었다. 청원군 남일면 효촌리에 그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施間)가 있으며 이로하여 그곳 동명(洞 名)을 효촌(孝村)으로 하게 되었다.

경정(慶 禎): 세조때 무인으로 선전관(宣傳官)을 지내고 이시애(李施愛)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웠으며 성종5년 통정대부에 승임되어 대구 도호부사에 제수되었고 다시 창원, 순천부사를 지낸 후 가선대부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경수문(慶秀文): 중종 때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처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경수량(慶秀良): 중종 26년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 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正字)에 제수되고 여러 직을 거처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내고 종묘서령(宗廟署令)에 승직되었다. 후에 통정대부에 오르고 단양(丹陽) 군수를 역임하였다.

경수공(慶秀恭) : 자는 경중(謙中)이다. 중종 20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 하였으며 중종 26년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박사(博士)를 거처 사헌부지평, 홍문관 수찬을 지내고 교리(校理)로 승차하였으며 진산(珍山)군수 재임 중 급환으로 사망 하였다.

경윤(慶 胤): 자는 자주(子冑)이다. 중종 때 문인으로 여러 직을 거처 통정대부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지냈다.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고 갈고 닦아 문사(文詞)에 뛰어났으며 그 이름이 사림(士林)에 널리 알려졌다.

경우(慶 雩) : 자는 치선(致善)이다. 중종 25년 식년 의과에 급제한 후 누천하여 판관(判官), 儉正(첨정)을 거처 통정대부 내의원정(內醫院正)을 역임하였다. 이어 서 왕실의료에 기여한 공으로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되었다.

경혼(慶 淨) : 자는 언회(彦晦)이다. 중종 때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중종 28년에 별시 문과에 등과하여 예문관 검열(檢聞), 홍문관 저작(著作), 수찬(修撰) 을 거처 사간원 헌납(獻納)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후에 예조참의 공조참의를 지내고 승정원의 左, 右, 副承旨를 거처 가선대부에 승임 되었으며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

경잠(慶 淸) : 자는 언량(彦亮)이다. 중종조 음보로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내고 맹산(孟山) 부여(扶餘)현감을 거처 통훈대부에 승임되었으며 다시 평택현감 겸 홍주진관병마절제도위(洪:HJ鎭管兵馬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경징(慶 徵) : 자는 언숙(彦淑)이고 중직대부(中直大夫) 봉화(奉化) 현감을 지냈다.

경시강(慶時康): 자는 평중(平仲)이다. 용양위 부호군(副護軍)를 지냈으며 향년 88세의 장수를 하였고 가선 대부 동지 중추부사에 증직되었다.

경대유(慶大有) : 자는 형백(亨伯)이다. 명종4년 식년 문과 을과(乙科)로 등과 하여 홍문관 정자(正字), 저작(著作), 수찬(修撰)을 지냈다. 후에 평양부 서윤(庶尹), 백천(百川), 군수를 거처 개성부 경력(經歷)에 제수 되었다. 다시 사간원 사간(司陳)을 지낸 뒤 통정대부에 올라 종부시정(宗簿寺正)과 춘추관 편수관을 겸임하였다.

경대익(慶大益): 자는 수백(受白)이다. 중종조에 용양위부호군(龍駿衛副護軍)을 지내고 통정대부에 올라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후 춘천으로 낙향하였다.

경시성(慶時成): 자는 성중(成仲)이다. 선조 16년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였으며 한림원 저작(著作),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처 홍문관 교리(校理)를 역임하고 의직으로 나가 풍천(豊川)군수를 지낸 후 사간원 헌납(獻納) 을 역임하였다.

경시굉(慶時宏): 가선대부(嘉善大夫) 용양위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자현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사(知經廷春秋館事) 오위도총부 (五衛都總府) 도총관(都德管)에 증직되었다.

경득(慶 得) : 자는 덕부(德夫)이다. 임진왜란 당시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장군 휘하로 백의종군하며 결사항전하다가 신립장군과 함께 전사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호조 참판(戶曹參判)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증직 하였다.

경섬(慶 退): 자는 퇴보(退甫)이고 호는 칠송(七松) 또는 석촌(石村)이다. 선조(宣祖)때의 문신으로 사간원 정언(正言), 사헌부 지평(持平), 장령(掌令)을 지내고 외직인 남원부사 홍성부사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후에 다시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 교리(校理)에 올라 재임 중 일본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건너가 화친을 맺고 임진(壬辰)란때 잡혀갔던 조선인 포로 1.418명을 데리고 귀국하였다. 다시 황해도 감사, 승정원 좌승지를 지내고 충청도와 경기도의 관찰사(觀察使)를 거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임되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올랐다. 그 후 다시 판결사(判決事)를 거처 이조참판(吏曺參判)에 배명되었으나 급환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경지(慶 遲) : 자는 용보(容甫)이다. 광해군때 선공감역(緖工監役)에 제수 되었다가 이어 부솔(副率)을 거처 전의(全義)현감을 지 냈으며 사헌부 감찰, 장례원 사의 (司議)를 거처 다시 천안(天安), 안산(安山) 군수를 지냈고 후에 통정대부 첨지 중추원사를 역임하였다.

경종지(慶宗智): 봉호(封號)가 당성군(浪城君)이다. 선조 때 무과에 올라 오위 (五衛)의 여러 직을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는 의주(義州)까지 몽진하였는데 그때 조정의 부름을 받고 극심한 우기 (雨期)에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왕을 무사히 호종(麗從)하여 난이 끝난 후 호성공신(墨聖功臣)에 책록되고 봉정대부(奉正 大夫)에 승임되어 임실(任實) 현감을 지냈다.

경순수(慶舜壽): 자는 승로(蠅老)이다. 선조 때 벼슬에 올라 여러직을 거처 인조 15년 임금의 특지(特旨)로 춘천(春川)부사에 제수 되었다가 이듬해 풍천(豊川)부사로 전임되었고 여러 번 승진하여 가선대부 동지의금부사를 지냈다.

경신후(慶信後): 인조 때 문관으로 여러 직을 거처 문화(文化)현령에 제수되어 재임 중 인조 5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봉산군수 신계현령 등과 함께 3.000여 병마를 거느리고 혈전을 벌리다가 중과부적으로 장렬하게 순국하였다.

경취(慶 冣) : 자는 낙선(樂善)이고 호는 신강(新江)이다. 사헌부의 감찰(監察), 장령(掌令),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거처 한성부윤(漢城府尹), 개성 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고 경기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승정원의 도승지(都承旨)겸 경연참찬(經廷參贊)을 지냈다. 후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임되어 예조참판 (禮曺參判)을 역임하였다.

근대 인물(近代 人物)

경광국(慶光國): 자는 성관(聖觀)이고 호는 우산휴퇴(愚山休退) 또는 석옹(石翁)이다. 조선말의 문신으로 여러 관직을 거처 고종조(1882년)에 음(陰)으로 북부도사(北 部都事)가 되고 후에 통정대부에 올라 희천(熙川), 영해(寧海) 부사를 지냈다. 고종 25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과 더불어 갑신(甲申) 정변을 이르켰으나 청(淸)나라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청나라의 거두(巨頭)인 원세개, 이홍장 등과 교유 하면서 동서각국 정세를 살펴보고 7년만에 귀국 하였으며 말년에는 향리인 괴산 연풍(延豊)에 일가정(一可亭)을 짓고 산수를 벗하여 선비들과 시 (詩)를 즐겼다.

경석조(慶錫祚): 자는 건양(建陽)이고 호는 혜춘(惠春)이다. 1910년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중국에 망명하였으며 북만주에서 둔전병(屯田兵)을 양성. 실력으로 국 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광복회(光f夏會)를 조직하여 활동 중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 운동에도 손병희 선생과 연락하면서 충북각지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수차 례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에는 건국운동(建國運動)에 참여하여 반민족 특별위원회 충청북도 위원장에 선임되어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자를 엄히 다스렸다.

경권중(慶權重) : 자는 난서(蘭西)다. 한학을 수학하고 학행(學行)으로 통사랑(通仕郞)에 올라 순강원(順康園), 참봉(參奉)을 지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어 국파군망(國破君亡)의 참혹한 지경올 당하여 100여명의 청장년을 모아 의병(義兵)을 이르켜 충북지역과 금산등지에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마침내 부대는 400여명으로 증강되어 전남의 구례, 곡성과 경남북 지역에서 수십차례 왜병을 기습 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교전중 부상올 당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은거(隱 居)하였다. 1919년 3.1운동에는 괴산소수(沼壽)에서 궐기하여 군중의 선두에서 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피체, 청주교도소에 복역중 고문의 여독으로 사경(死境)에 이르자 가출옥하여 귀가도중 사망하였다.

경현수(慶賢秀) : 자는 희백(希白)이고 호는 오암(悟庵)이다. 한말의 거유(巨儒)인 중암 김평묵(金平默) 선생의 제자가 되어 당대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1895년을 미(乙未)의병을 이르켜 일제에 항거하고 1922년에는 일본제국의회에 독립청원서를 내는 등 일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5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많은 전 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마침내 중과부적으로 패전하여 중상을 입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수년간 은신하며 요양하였다. 후에 각 방면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조달하고 가산(家産)마저 의병들의 군자금으로 희사하였으며 고종황제의 부름을 받고 군원교섭특사(軍援交涉特使)로 중국에 밀파되어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