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수원백씨,수원백씨시조,송계공,백우경,수원백씨유래,수원백씨조상인물

작성일 : 2017-11-09 17:29 수정일 : 2018-01-02 11:42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수원(水原)은 경기도(京畿道)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구려(高句麗) 때 미홀군(買忽郡),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는 수성군(水城郡)이라 불렀으며, 고려(高麗) 때 인주(仁州)수주(水州)를 거쳐 1301(충선왕 2) 수원부(水原府)로 개칭되었다. 그후 여러 변천을 거쳐 1895(고종 32) 한때 인천부(仁川府) 관할의 수원군(水原郡)으로 되었다가 1949년 수원군을 분할하여 수윈시(水原市)로 승격시키고 수원군은 화성군(華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백씨(白氏)는 고대 황제 헌원(軒轅)의 후예(後裔)로 중국 풍익(馮翊)에서 계출(系出)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백씨의 연원(淵源)백씨대동보(白氏大同譜)에 황제의 16세손 백을병(白乙丙 : 진나라 때 대부를 지냄)의 후손 백우경(白宇經)이 소주(蘇州)에서 출생하여 당()나라 때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이르렀으나 간신(奸臣)들의 모함을 받자 780(신라 선덕왕 원년) 신라에 건너와 자옥산(紫玉山 : 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밑에 정착한 것이 시초가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후 우경(宇經)이 그 곳에다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짓고 학문보급에 진력하였고, 만세암을 찾아온 선덕왕(宣德王)은 정혜사(淨惠寺)로 개명(改名)하고 영월당의 현판에 어필(御筆)<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함께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그러나 상계(上系)가 불분명하며 경덕왕(景德王 : 신라 제 54대 왕, 재위기간 : 917924)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상장군(上將軍)에 증직된 창직(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기일세(起一世)하며, 창직의 증손 휘()가 고려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9세손 천장(天藏: 임평부원군 원정의 아들)은 원() 나라에서 이부 상서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충선왕(忠宣王) 때 수성백(隨城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수원(水原)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백씨(白氏)의 본관(本貫)은 수원(水原)을 비롯하여 180여 본이 문헌(文獻)에 전해지나 모두가 수원 백씨의 동원분파(同源分派)임이 분명하여,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발간 당시 각 파의 대표들이 회합(會合)하여 관향(貫鄕)을 수원(水原)으로 단일화(單一化) 하기로 합의를 했다고 한다.

역사상 학문과 도덕(道德)의 가문(家門)으로 지위를 굳혀온 백씨는 중시조 창직(昌稷)의 후대로 내려오면서 선정공파(禪亭公派)인주공파(仁州公派)오산군파(鰲山君派) 29개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으며, 창직의 증손 휘(: 광평시랑 길의 손자)의 아들 3형제가 모두 현달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육조(六朝)에 걸쳐 주요관직을 지내며 나라의 모든 문장(文章)을 지어낸 맏아들 간미(簡美)는 만년에 영해(寧海)로 낙향(落鄕)한 후 수차에 걸친 문종(文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그의 아우 행미(行美)는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역임했고, 막내 가미(可美)는 판삼사(判三司)를 거쳐 태자 사부(太子師傅)에 올랐다.

한편 대장군(大將軍) 간미(簡美)의 아들 5형제 중 세째 무신(武臣 : 선무장군)의 아들 후재(厚載)가 소용장군(昭勇將軍)으로 도통사(都統使)를 지내고, 그의 아들 유정(有貞)은 판도판서(版圖判書), 손자 대민(大旻)은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역임하는 등 대()를 이어 벼슬을 지내 한때 후손들이 가림 백씨(嘉林白氏)로 칭관(稱貫)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조에서 가문을 반석(盤石) 위에 올려놓은 인물은 문간공(文簡公) 문절(文節)의 아들 이정(頤正)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거봉(巨峯)인 안 향(安 珦)의 고제(高弟)였던 그는 충렬왕(忠烈王) 즉위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1298(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10년간 체류하면서 주자학을 깊이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 정주성리학(程朱性理學)의 꽃을 피웠으며,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으로 하여금 그의 학맥(學脈)을 잇게 하여 조선 유학(儒學)의 기틀을 마련했다.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대제학(大提學)에 올랐던 장(: 문하시중 경신의 7세손)은 공민왕(恭愍王) 때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처자를 거느리고 원주 치악산(原州雉岳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으며, 태종(太宗)이 이조 판서와 대제학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문간공(文簡公) 양신(良臣)의 현손 문보(文寶 : 중랑장 견의 아들)는 강경한 배불론자(排佛論者)로 유명했으며,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과 사부(師傅)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고 문집(文集)으로담암일집(淡庵逸集)을 남겼다.

조선 중기 중종(中宗)과 선조대(宣祖代)에 걸쳐 명신(名臣)으로 이름났던 인걸(仁傑)은 돐도 지나기 전에 왕자 사부(王子師傅)였던 아버지 익견(益堅)을 잃고 연산군의 수탈에 의해 집마저 강제 철거당해 편모가 셋방에서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뛰어나 어머니가 자는 것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이에 어머니는 늘 불을 켜놓고 자는체 함으로써 그를 먼저 자게 하였다고 한다.

그는 1537(중종 32)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남평 현감(南平縣監)을 거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지내며 왕실외척(王室外戚)의 세도가(勢道家)인 심의겸(沈義謙 : 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의 세도에 줄곧 저항적이었으며, 대윤(大尹)과 소윤(小尹) 등 격렬한 당쟁 속에서도 휩쓸리지 않았던 기개높은 인품으로 풍파 많은 일생을 살았다.

그는 허 자(許 磁 : 명종 때 이조 판서에 오름)와 이웃에 살면서 정의가 매우 두터웠다. 워낙 가난하게 살았기로 허 자가 별다른 음식이 있으면 꼭 나누어 주었다. 소윤(小尹)의 혁명인 을사사화(乙巳士禍: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윤 임 일파를 몰아내어 사림에 큰 화를 입힌 사건)의 전야(前夜)에 허 자가 인걸을 초청하여 저녁상을 차려놓고 거사에 가담할 것을 권고하자 끝내 거절하니 허 자가 말하길 내일이면 자네가 죽을 것이라하였다. 이 말에도 인걸은 태연하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허 자가 인걸의 손을 잡으며 내일은, 자네는 군자(君子)가 되고 나는 소인(小人)이 되는 날이로다하며 친구의 위대한 인격을 자신에 대비시켰다.

특히 그는 1567(선조 원년)에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이 집집마다 축수를 하며 노래 부르기를, <흰 눈의 흰 빛은 임 과 같이 희도다(白雪之白興君同白) 마음속으로 사랑하노니 어찌 걸이 아닐소냐(心平愛 胡不爲)>하였고, 그가 떠난 뒤에는 관가의 현판에 이 글을 새겨 두었다고 한다.

일찌기 인걸과 함께 학문을 토론했던 율곡(栗谷) 이 이(李 珥)나이가 80세인데도 학문연구에 애쓰며 토론하기를 좋아하고 다른 얘기를 하지 않는 이는 오직 이 분뿐이다라고 하였으며, 1578(선조 11)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군비강화를 주장했으며, 선조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83세로 일생을 마치니 송강(松江) 정 철(鄭 澈)이 만사(挽詞)를 짓기를

외로운 충성은 일대에 둘도 없는 선비요(孤忠一代無雙士)

헌납으로 밤중이라도 혼자서 말씀을 올리던 사람이었다(獻納三更獨啓人)

산악의 정기로 이 노인이 태어났으니(山岳降精生此老)

하늘에 돌아가서도 응당 빛나는 별이 되리로다(歸天應復作星辰)

인걸의 형 인호(仁豪)도 성품이 순후하고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고 한다. 인호의 아들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모함을 받아 화를 당한 유양(惟讓)이며, 인걸의 아들 유함(惟咸)은 선조 때 신년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정랑에 올랐으나 격렬한 당쟁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용인(龍仁)에 내려와 야인생활을 하며 시폐(時幣)가 있을 때마다 상소(上疏)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임진왜란을 당하자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직제학에 임명되어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던 수장(壽長)의 현순 민수(民秀)는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였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義兵)을 모아 장수(長水) 지역에서 적을 대파시켰으며, 정유재란 때도 문위세와 합세하여 용담(龍潭) 등지에서 적을 크게 무찌른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한편 세인(世仁)의 아들 광홍(光弘)이 명종조에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를 사직하고 돌아올 때 우리 말로 쓴 가사(歌辭) <관서별곡(關西別曲)>으로 유명하며, 그의 아우 광훈(光勳)은 시서(詩書)에 현달하여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고곡(菰谷) 이 달(李 達) 과 함께 <삼당(三唐)>으로 일컬어졌다.

그외 북청 판관(北靑判官)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순절한 광언(光彦)과 초선장사(抄選壯士)로 심양(瀋陽)에 가서 포로로 잡혀있던 수천명의 동포를 구출한 광조(光祖)가 뛰어났으며, 광훈의 아들 진남(振南)은 시부(詩賦)와 글씨로 명성을 떨쳐,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義州)의 남성장(南城將)이 되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비장군(飛將軍)>이라 불리웠던 원의(元義)와 함께 명문(名門)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했던 낙관(樂寬),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義擧)를 결의했던 홍인(弘寅),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과 원수부 군무국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을 지낸 성기(性基) 등이 유명했으며, 남규(南圭)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노백린(盧伯麟)안중근(安重根) 23명의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하였고, 낙귀(洛龜)는 광양(光陽)과 하동(河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순천(順天)을 점령했다.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소대장으로 활약했던 운각(雲閣)31운동 때 고향인 정주(定州)에서 만세시위를 선창하며 민중을 지휘했고, 일규(一圭)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창립하고 국민보(國民報)주필이 되어 언론을 통한 한국의 권익 보호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그외 종렬(鍾烈)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소대장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조직했던 삼규(三圭)는 항일투쟁에 몸바쳤던 영촌(永村)일진(日鎭)남준(南俊)광운(狂雲)남채(南埰)관수(寬洙)인해(仁海) 등과 함께 의절(儀節)의 가맥(家脈)을 이어 명문(名門)의 수원 백씨(水原白氏)를 더욱 빛나게 하였다.

2015년 경제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원백씨(白氏)는 남한(南韓)에 총 354,42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

 

백길(白 吉) ()는 태초(太初). 고려 태조(太祖) 때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역임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되었다.

백 탁(白 卓) ()는 성지(聖之). 고려 때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였다.

백사유(白思柔) ()는 퇴은(退隱), 시호(諡號)는 문정(文正). 973(광종 24)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으로 합격하고, 991(성종 10) 한림학사(翰林學士)시관(試官)을 역임하였으며 간의대부(諫議 大夫)에 올랐다.

백사홍(白思弘) 고려조(高麗朝)에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백사청(白思淸) 고려 때 녹사(錄事)성내좌순검사(城內左巡檢使)를 지냈다.

백 휘(白 揮) ()는 경열(慶悅), ()는 포주(浦洲), 시호(諡號)는 청헌(淸獻). 16세에 장원급제하여 내봉감(內奉監)을 지내고 목종(穆宗) 때 대사마 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다. 문종(文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백광우(白光宇) 고려 때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을 지냈다.

백광신(白光臣) 고려조(高麗朝)에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한림학사(翰林學士)지제고(知制誥)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수태위(守太慰)로 치사한 최 당(崔 讜)과 그 아우 수태부(守太傅) () 및 태복경(太僕卿)으로 치사한 장자목(張自牧) 등과 기로회(耆老會)를 만들어 유유자적했다. 희종(熙宗) 초에 최충헌(崔忠獻)이 문사들을 모아 시부(詩賦)와 화운(和韻)으로 회합을 열었을 때 불려가 그 등차 (等次)를 매겼다.

백간미(白簡美) ()는 신보(愼甫), ()는 월곡(月谷), 시호(諡號)는 정민(貞愍). 고려 때 판병부사(判兵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 겸대장군(大將軍) 6조에 걸쳐 벼슬을 지내고 영해(寧海)로 낙향하였다. 문종(文宗)이 수차에 걸쳐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백형미(白行美) 고려 때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다.

백가미(白可美) 고려(高麗) 때 태자 사부(太子師傅)를 지냈다.

백여주(白汝舟) 고려 때 추밀원 좌승선(樞密院左承宣)지제고(知制誥)를 역임하였다.

백분화(白賁華) ()는 남양(南陽). 고려 신종(神宗) 18세로 성시문과(省試文科)에 급제하여 예부 원외랑(禮部員外郞)경산 부사(京山副使)를 역임하였다.

백유신(白裕臣) 시호(諡號)는 충절(忠節).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백양신(白良臣) ()는 국빈(國賓), ()는 칠송(七松).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백무신(白武臣) ()는 무경(武卿), ()는 양곡(陽谷). 고려(高麗)때 선무장군(宣武將軍)에 이르렀다.

백가신(白可臣) 1096(숙종 1) 정조사(正朝使)로 요()나라에 다녀왔고, 1100(숙종 5)에 송()나라 철종(哲宗)이 죽자 조위사(弔慰使)로 갔다가 귀국할 때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을 갖고 돌아왔다.태자 태부(太子太傅)평장사(平章事) 등을 지내고, 남포(藍浦)로 낙향(落鄕), 이어 홍주(洪州)로 이거했다.

백경신(白景臣) ()는 운서(雲瑞).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시중(門下侍中)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백경선(白景瑄) 고려에서 좌복야(佐僕)를 역임하였다.

백익신(白翊臣) 고려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백영신(白瑛臣) 고려(高麗) 때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백진양(白眞陽) 시호(諡號)는 문충(文忠). 고려 때 광록대부(光祿大夫)로 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고 임원부원군(林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진생(白眞生)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백후재(白厚載) 고려 때 소용장군(昭勇將軍)에 이르렀다.

백진선(白眞善) 고려(高麗) 때 감찰대부(監察大夫)를 지냈다.

백진인(白眞仁) 고려조(高麗朝)에 형부 시랑(刑部侍郞)을 지냈다.

백진주(白眞周) 고려 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겸 태자 태부(太子太傅), 서북면 병마제군(西北面兵馬諸軍) 등을 거쳐 풍해도 순문사(豊海道巡問使)를 지내고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역임했다.

백진식(白眞植) 고려 의종(毅宗) 때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고 임성부원군(林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수원(白壽元) 고려조(高麗朝)에 공부 시랑(工部侍郞)을 역임하였다.

백재흥(白再興) 고려 때 전중소감(殿中少監)을 지냈다.

백문절(白文節) ()는 빈연(彬然), ()는 담암(淡巖), 시호(諡號)는 문간(文簡). 1235(고종 22)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241(고종 2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이부 시랑(吏部侍郞)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에 이르고 사의대부(司議大夫)에 올랐다.

백원태(白元泰) ()는 묵암(黙菴),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고려 때 이부시랑(吏部侍郞)국자감 좨주(國子監祭酒)세자 사부(世子師傅)를 거쳐 수파부원군(水坡府院君)에 봉해졌고, 충숙왕(忠肅王)을 보좌하여, 진절보좌2등공신(盡節輔佐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백원항(白元恒) 시호(諡號)는 문의(文毅). 1279(충렬왕 5) 문과(文科)에 급제,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충숙왕(忠肅王)을 따라 원()나라에 다녀왔다.

백웅정(白雄貞) 고려 때 부사(府使)를 지냈다.

백유정(白有貞) 고려(高麗) 때 판도판서(販圖判書)를 지냈다.

백임지(白任至) 시호(諡號)는 충정(忠靖). 고려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지내고, 남포군(藍浦君)에 봉()해졌다.

백한룡(白漢龍) 고려 때 전법 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였고, 1367(공민왕 16)에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백원식(白元軾) 1199(신종 2)1200년 예빈경(禮賓卿)으로서 하정사(賀正使)로 금()나라에 다녀왔으며, 태자 소보(太子少保)문하시중(門下侍中)병부상서(兵部尙書)등을 역임했다.

백원정(白元貞) ()는 자직(子直), ()는 성암(星岩), 시호(諡號)는 충의(忠毅). 고종(高宗)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에 오르고,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 겸 서경 유수(西京留守) 등을 지냈으며, 임평부원군(林平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사필(白思弼) 고려 때 병마 판관(兵馬判官)을 지냈다.

백 문(白 汶) 고려(高麗) 때 별장(別將)을 역임하였다.

백이정(白頤正) ()는 약헌(若軒), ()는 이재(彛齋), 대사성(大司成) 문절(文節)의 아들. 1275(충렬왕 1) 문과(文科)에 급제, 1298(충렬왕 24) 충선왕(忠宣王)을 따라 연경(燕京)에 가서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고 돌아와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을 전파시키는 데큰 공을 세웠다. 충선왕 때 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가 되었고, 뒤에 상당군(上黨君)에 봉해졌다.

백효주(白孝珠) 고려 때 대장군(大將軍)을 지냈다.

백홍정(白弘正) 자는 대용(大容), 호는 쌍계(雙溪). 고려 때 첨사(僉使)를 지냈다.

백인정(白仁貞) 고려조(高麗朝)에 첨사(僉使)를 지냈다.

백천징(白天徵) 시호(諡號)는 문장(文莊). 고려 때 병부 원외랑(兵部員外郞)으로 원()나라에 유학하여 국자감 진사(國子監進士)라 되고 제과(制科)에 합격하여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가 되었다. 당시서융(西戎)이 중국 하남지방(河南地方)을 침범함에 원나라 왕()에게 출전을 청원,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적 30만을 무찔러 평정하였다. 그 전공(戰功)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태자태부(太子太傅)로 제수(除授)되어 수주백(水州伯)에 봉해지고 식읍 32천호를하사받았다. 이어 귀국하여 충혜왕(忠惠王) 때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정당문학(政堂文學)태부(太傅)를 역임하고, 수원부원군(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천뢰(白天賚) ()는 학탄(鶴灘).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백천봉(白天鳳)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백 견(白 堅) 고려조(高麗朝)에 부사(府使)를 역임하였다.

백대민(白大旻) 고려조(高麗朝)에 문하성사(門下省事)를 지냈다.

백문거(白文擧) 고려 때 첨의참리(僉議參里)를 역임하였다.

백미견(白彌堅) ()는 개부(介夫). 1350(충정왕 2) 좌헌납(左獻納)으로 전녹생(田祿生)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에 합격하고, ()나라 제과(制科)에 합격(合格)했다. ()동문선(東文選)에 전한다.

백천장(白天藏) ()는 묵와(黙窩), 시호(諡號)는 문익(文翼). 과거(科擧)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벼슬을 하다가 귀국해서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

백지장(白地藏) ()는 방숙(方叔), ()는 동림(東林). 고려조(高麗朝)에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백 인(白 麟) 고려에서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백득주(白得珠) 고려(高麗) 때 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백세렴(白世廉) ()는 지화(之和).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백 의(白 誼) ()는 의지(義之), ()는 방은(邦隱). 고려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백 임(白 琳) 고려조(高麗朝)에 세자 사부(世子師傅)를 역임하였다.

백 관(白 琯) 고려 때 좌승상(左承相)을 지냈다.

백존유(白存儒) 고려(高麗)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백 완(白 玩) 고려조(高麗朝)에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백문보(白文寶) ()는 화부(和父), ()는 담암(澹菴),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춘추검열 (春秋檢閱)을 거쳐 우상시(右常侍)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때 전리판서(田里判書)밀직제학(密直提學) 등을 역임하고 뒤에 사부(師傅)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러 직산군(稷山君)에 봉해졌다.

백 연(白 璉) ()는 회지(晦之). 고려 때 함주 부사(咸州府使)를 지냈다.

백 전(白 琠)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다.

백 산(白 珊) ()는 유고(惟固). 고려조에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였다.

백 황(白 璜) 고려 때 문하성사(門下成事)를 역임하였다.

백 거(白 琚) 고려조(高麗朝)에 부위(副尉)를 지냈다.

백 인(白 璘) ()는 중옥(重玉). 고려 때 태복시사(太僕寺事)를 지냈다.

백 민(白 珉) 고려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백후근(白厚瑾) 고려 때 판사(判事)를 지냈다.

백사원(白思遠) 고려(高麗) 때 판사(判事)를 역임하였다.

백충세(白忠世) 고려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백 명(白 明) 고려조(高麗朝)에 목사(牧使)를 지냈다.

백함정(白咸正) 고려 때 사인(舍人)을 지냈다.

백함명(白咸明) 고려조(高麗朝)에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백 권(白 綣) ()는 후보(厚甫). 고려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백봉남(白鳳南) 고려(高麗)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백홍남(白鴻南)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하였다.

백좌명(白佐明) 고려조(高麗朝)에 시랑(侍郞)을 역임하였다.

백인훈(白仁勛) 고려 때 좌정승(左政丞)을 역임하였다.

백인관(白仁寬) ()는 사달(士達), ()는 선정(禪亭). 1358(공민왕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부 전서(吏部典書)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지낸 후 정헌대부(正憲大夫)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 대구(大邱) 화암서원(華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백인익(白仁益) 고려조(高麗朝)에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백인수(白仁壽) 고려 때 목사(牧使)를 지냈다.

백정인(白涏仁) 고려(高麗) 때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백인경(白仁景) 고려 때 부사(副使)를 지냈다.

백인성(白仁成) 시호(諡號)는 정간(貞簡). 고려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백임세(白任世) 고려 때 좌부사(左部事)를 지냈다.

백 중(白 仲) 고려(高麗) 때 중랑장(中郞將)을 역임하였다.

백 관(白 琯) 고려에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냈다.

백 위(白 偉) ()는 미백(美伯). 조선 때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백 섬(白 暹)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역임하였다.

백 장(白 莊) ()는 명윤(明允), ()는 는 정신재(靜愼齋). 진사(進士)로 원()나라 과거(科擧)에 급제, 공민왕(恭愍王) 때 이부 전서(吏部典書)대제학(大提學) 등을 역임했다. 고려(高麗)가 어지러워지자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으로 은거(隱居)했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고 태조(太祖)가 불렀으나 거절, 해미(海美)에 유배(流配)되었다. 태종(太宗) 때 이조 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장수(長水)로 유배되었다. 후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백 수(白 粹) 고려 때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토벌(討伐)한 공()으로 금릉부원군(金陵府院君)에 봉해졌다.

백 연(白 綠) ()는 희원(希元). 고려 때 사옹원 봉사(司甕院奉事)를 지냈다.

백정화(白正和) 고려 때 무과(武科)에 올라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명천 부사(明川府使)를 역임하였다.

백계영(白桂英) ()는 운암(雲菴). 1366(공민왕 15) 과거에 급제, 역적 박경순(朴景純)의 무리를 무찌른 공으로 오산군(鰲山君)에 봉해졌다.

백 유(白 維) ()는 낙금정(樂琴亭). 고산 현감(高山縣監) 등을 거쳐 1361(공민왕 11) 봉훈랑(奉訓郞)에 오르고 장단 부사(長湍府使)를 역임했다.

백여옥(白如玉) ()는 경재(敬齋). 조선 때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역임하였다.

백명옥(白明玉) 조선에서 집현전 대제학(集賢殿大提學)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다.

백천익(白天翊) 조선조(朝鮮朝)에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냈다.

백문거(白文擧) 조선 때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였다.

백문강(白文剛) ()는 대용(大用). 조선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백대선(白大璿) ()는 군옥(君玉). 조선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백 공(白 贛) ()는 여우(汝愚). 조선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백 진(白 珍) 조선 때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백운비(白雲飛) ()는 경사(景思). 조선 때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역임하였다.

백사수(白思粹) 1454(단종 2)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에 장단 부사 (長短府使)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 등을 지내고, 1455(단종 3) 좌익 원종 2등공신(佐翼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백춘학(白春鶴)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백사흠(白思欽) 조선(朝鮮) 때 창평 현령(昌平縣令)을 역임하였다.

백후침(白後) 조선조(朝鮮朝)에 해남 현령(海南縣令)을 지냈다.

백사무(白思懋) 조선 때 종성 현감(種城縣監)을 역임하였다.

백귀선(白貴璇) 조선 때 부성부원군(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백정수(白精粹) 자는 소화(素和). 조선(朝鮮) 때 부사(府事)를 지냈다.

백익근(白益瑾) ()는 여용(汝用). 조선에서 참의(參議)를 지냈다.

백익견(白益堅) ()는 성화(成化). 조선조(朝鮮朝)에 세자 사부(世子師傅)를 역임하였다.

백명항(白命恒) 조선 때 도승지(都承旨)를 지냈다.

백인성(白仁盛) ()는 치서(致瑞),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조선 때 방어사(防禦使)를 지냈다.

백인호(白仁豪) 자는 여일(汝逸), 호는 국재(菊齋).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이르고, 성품이 순후하여 지조가 굳었으며, 국화를 좋아하고 탈속적 취미가 있었다. 임진왜란 때는 난을 피하여 나주(羅州)에가 있었고, 그후 춘천(春川)에 은거하였는데 그의시문집(詩文集)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인걸(白仁傑) 1497 (연산군 3) 1579 (선조 12)

()는 사위(士偉), ()는 휴암(休庵), 시호(諡號)는 충숙(忠肅), 개시(改諡)는 문경(文敬), 왕자 사부(王子師傅) 익견(益堅)의 아들, 인호(仁豪)의 아우. 조광조(趙光祖)의 문인. 1519(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스승과 동지를 모두 잃고 금강산에 입산, 그후 돌아와 153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成均 館)에 오래 머무르다가 검열(檢閱)예조 좌랑(禮曹佐郞)남평 현감(南平縣監)호조 정랑(戶曹正郞)지평(持平)헌납(獻納)을 역임했다. 1545(명종 1)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윤원형(尹元衡) 등 소윤 (小尹)의 미움을 사서 파면되고, 1547년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에 다시 연루되어 안변(安邊)에 유배되었다. 1551년 풀려나와 오랫동안 고향에 은거하다가 윤원형이 죽자 복직, 1567(명종 22) 71세의 나이로 교리(校理)가 되었다.

선조(宣祖) 때 직제학(直提學)이조 참판(吏曹參判)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을 거쳐, 공조 참판(工曹參判)으로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동지의금부사( 同知義禁府事)를 겸임, 다시 대사헌이 되어권신(權臣)들을 논핵하다가 사임했다.

1578(선조 11)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듬해 동서 분당(東西分黨)의 폐단을 논하고 군비 강화를 강조했다. 선조 때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학문에 뛰어났다. 남평(南平)의봉산서원(蓬山書院), 파주(坡州)의 파산서원(坡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백인무(白仁武) 조선조에 임원부원군(林原府院君)에 봉해졌다.

백흥종(白興宗) 조선(朝鮮) 때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백유충(白惟忠)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백유항(白惟恒) ()는 중상(仲常).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백유양(白惟讓) 1530 (중종 25) 1589 (선조 22)

()는 중겸(仲謙), 부사(府使) 인호(仁豪)의 아들. 1572(선조 5) 친시문과(親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1581년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이어 강원도 어사(江原道御史)집의(執義)전한(典翰)을 지내고 1588년 대사성(大司成)이조 참의(吏曹參議), 1589년 병조 참지(兵曹參知)부제학(副提學)을 역임했다.

이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이 일어나 아들 수민(壽民)이 정여립의 형 여흥(汝興)의 딸을 아내로 맞았던 탓으로 연좌하여 사형당했다.

백유함(白惟咸) 1546 (명종 1) 1618 (광해군 10)

()는 중열(仲悅), 대사헌(大司憲) 인걸(仁傑)의 아들. 1570(선조 3) 진사(進士)가 되고, 1576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승문원(承文院)에 등용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에 승진, 이때 이 이(李 珥)가 죽고 조정에 당쟁이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용안(龍安)에 내려가 제자들을 가르쳤다.

1589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에 서울로 돌아와 헌납(獻納)이 되고, 이어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거쳐 검상(檢詳)사인(舍人)을 지냈다.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로 정 철(鄭 澈) 등 서인(西人)이 물러날 때 경흥(慶興)으로 유배,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풀려나와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扈從),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가 명나라 군사의 군량(軍糧) 조달의 임무를 맡았다.

1594년 동부승지(同副承旨)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호군(護軍)으로 명사(明使) 정응태(丁應泰)를 접반(接伴), 일본과의 강화(講和)를 의논하다가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고 부안(扶安)에 유배(流配), 이어 고향 용인(龍仁)에 방환(放還)되었다가 1617(광해군 9) 신원(伸寃)되어 개성(開城)에서 죽었다.

백 강(白 崗) ()는 유현(惟顯). 조선 때 현령(縣令)을 지냈다.

백맹하(白孟夏) 조선(朝鮮) 때 현감(縣監)을 지냈다.

백맹동(白孟冬) ()는 자홍(子洪). 조선(朝鮮) 때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백유정(白惟貞) ()는 대여(大汝), ()는 청헌(淸軒). 조선에서 주부(主簿)를 지냈다.

백충언(白忠彦) ()는 언지(彦之), ()는 상의당(尙義堂). 조선조(朝鮮朝)에 좌랑장(佐郞將)을 지냈다.

백동일(白東逸) ()는 효칙(孝則). 조선(朝鮮) 때 참봉(參奉)을 역임하였다.

백인경(白仁鏡) ()는 이정(而貞). 조선 때 참봉(參奉)을 지냈다.

백수장(白壽長) ()는 팽조(彭祖). 1498(연산군 4) 과거(科擧)에 급제,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에 책록되고, 공조 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으며, 정해군(貞海君)에 봉()해졌다.

백민수(白民秀) ()는 기원(起元), ()는 술고당(述古堂).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은 학자(學者)였다. 16세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문위세(文緯世)와 함께 의병거사(義兵擧事)를 합의하고 수백(數百)의 장정(壯丁)을 이끌고 좌의장(左義將) 최경회(崔慶會) ()과 합세하여 장수(長水) 지역에서 크게 승리(勝利)하였고, 금산(錦山)으로 달려가 권 율(權 慄) 장군을 도와 이치(梨峙)에서 대첩(大捷)을 거두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도 문위세(文緯世)와 합세하여 전북 용담(龍潭) 등지에서 많은 왜적을 죽이고, 전공(戰功)을 세웠다. 선무훈(宣武勳)에 책록되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장흥(長興)의 기양사(岐陽祠)와 금산(錦山)의 금곡사(金谷祠)에 제향되었다.

백상영(白尙瑛) ()는 윤미(潤美), ()는 영천(寧川). 조선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백홍민(白洪民) 자는 영옥(英玉). 조선(朝鮮) 때 군수(郡守)를 지냈다.

백효민(白孝民) 자는 경술(景述). 조선에서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다.

백응상(白應祥) ()는 성서(聖瑞), ()는 여재(旅齋). 조선조(朝鮮朝)에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을 지냈다.

백득립(白得岦) ()는 백화(伯華), ()는 귀헌(龜軒). 조선에서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백수원(白壽元) 자는 기수(嗜叟). 조선(朝鮮) 때 교관(校官)을 지냈다.

백계원(白繼元) ()는 군대(君大). 조선 때 교관(校官)을 역임하였다.

백수산(白守山) ()는 망여(望汝). 조선조(朝鮮朝)에 만호(萬戶)를 지냈다.

백몽표(白夢彪) ()는 성서(聖瑞). 조선 때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에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동래 판관(東萊判官)을 지내고,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에 재직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었다.

백한상(白漢相) ()는 국서(國瑞). 조선(朝鮮)에서 부사(府使)를 지냈다.

백광홍(白光弘) 1522 (중종 17) 1556 (명종 11)

()는 대우(大祐), ()는 기봉(妓峰), 세인(世仁)의 아들. 1552(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에 능했다. 평안도 평사(平安道評事)를 사직하고 돌아올 때 우리 말로 쓴 가사(歌辭)관서별곡(關西別曲)은 널리 애송되었다.

백홍근(白弘斤) ()는 경욱(敬旭). 조선(朝鮮) 때 수문장(守門將)을지냈다.

백광훈(白光勳) 1537 (중종 32) 1582 (선조 15)

()는 창경(彰卿), ()는 옥봉(玉峰), 세인(世仁)의 아들. 박 순(朴 淳)의 문인. 어려서 시재(詩才)가 있어 13세 때 상경(上京)하여 양응남(梁應南)노수신(盧守愼) 등에게 사사(師事) 했다. 1564(명종 19) 진사(進士)가 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산수(山水)를 즐기며, 시서(詩書)에 열중했다.

1572(선조 5) 명나라 사신이 오자 노수신을 따라 백의(白衣)로써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사신을 감탄케 했다. 1577년 처음으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으로 관직에 나서고, 이어 정릉(靖陵)예빈시(禮賓寺)소격서(昭格署)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당시의 최경창(崔慶昌)이 달(李 達)과 함께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성당(盛唐)의 시풍(詩風)에 들어갔다 하여, 삼당(三唐)으로 불렸다. 명필(名筆)로도 알려졌는데 특히 영화체(永和體)에 빼어났다.

1590년 강진(康津)의 서봉서원(瑞峰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백광언(白光彦) ? 1592 (선조 25)

()는 풍암(楓巖),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태인(泰仁) 출신.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589(선조 22) 북청 판관(北靑判官)을지내고 1592년 모친상(母親喪)을 당해 집에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州)에 달려가 군대를 해산하려는 이 광(李 洸)의 마음을 돌이켜 그와 함께 전주(全州)에 가서 군대를 재정비하고 용인(龍仁)전투에서 조방장(助防將)으로 선봉이 되어 분전하다가 전사했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 모충사(慕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백광조(白光祖) 첨절제사(僉節制使) 광종(光宗)의 종제(從弟). 17세에 무과(武科)에 급제, 1627(인주 5)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의주 용골성(義州龍骨城)에서 적을 무찔러 수문장(守門將)이 되고, 1630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도 공을 세워 훈련주부(訓練主簿)가 되었다.

1639년 초선장사(抄選壯士)로 사신을 따라 심양(瀋陽)에 가서 사재를 털어 포로로 잡혀간 수천 명의 동포를 구해서 귀국케 하고 만호(萬戶)를 거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지냈다.

백 형(白 珩) ()는 중온(仲溫). 조선 때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올랐다.

백응희(白應希) ()는 광삼(光三), ()는 우산(又山). 1586(선조19)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수문장(守門將)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싸움터에서 죽었다.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백견룡(白見龍) 1556 (명종 11) 1622 (광해군 14)

()는 문서(文瑞), ()는 성헌(惺軒), 정당문학(政堂文學) 문보(文寶)의 후손. 이 황(李 滉)의 문인. 조 목(趙 穆)김성일(金誠一)류성룡(柳成龍) 등과 학문 교유(交遊)가 있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영해(寧海)에서 의병(義兵)을 일으켜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 들어가 화왕산성(花王山城)을 방위, 난이 끝난 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심하였다.

백진남(白振南) 1564 (명종 19) 1618 (광해군 10)

()는 선명(善鳴), ()는 송호(松湖), 광훈(光勳)의 아들. 15세때 사학(四學) 과시(課試)에 시부(詩賦)로써 뛰어나 이 이(李 珥)도 이를 보고 칭찬할 정도였다. 1590(선조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진중(陣中)으로 피란했다.

명나라 장군 계금피(季金皮)승덕(承德) 등이 그의 시를 보고 크게 찬탄했다. 1606(선조 39)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왔을 때에 관반(館伴) 류 근(柳 根)의 천거를 받아 백의(白衣)로써 사신을 영접했다. 문장과 필법(筆法)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주지번은 그의 필적을 보고는 절찬하며 소중히 간직했고, 한편 주지번의 필적을 선사받기도 하는 등 서로 교의가 두터웠다.

백거간(白居簡) ()는 대경(大敬). 조선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백거의(白居毅) 조선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하였다.

백광종(白光宗) 거간(居簡)의 아들.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의주 용골성(義州龍骨城)에 들어가 참모가 되어 의병(義兵) 5천을모집, 극력 방위하여 많은 적을 살상한 공으로 그곳 수령(守令)이 되었다. 1630년 가도(椵島)의 유흥치(劉興治)1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의주에 내습하자 이를 무찌른 후 유흥치를 살해했다.

그후 조총(鳥銃)궁시(弓矢)창검(槍劍) 등을 제조하여 변방 경비에 대비한 공으로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승진, 이어 김 유(金 瑬)의 천거로 아이진 첨절제사(阿耳鎭僉節制使)가 되었다. 순조(純祖)때 의주(義州)의 용현사(龍峴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백홍제(白弘悌) 1572 (선조 5) 1646 (인조 24)

()는 여순(汝順). 우윤(右尹) 천민(天民)의 손자. ()를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는 협기(俠氣)와 강용(强勇)으로 알려졌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적을 피해 노모(老母)와 함께 산중에 들어갔다가 적에게 포로가 되어 적선(敵船) 속에 끌려갔으나 적의 칼을 빼앗아 배 안의 왜적을 모두 죽이고 포로로 잡혀 있는 70여 명과 함께 귀국, 이 공으로 군자감 봉사(軍資監奉事)가 되었다.

백수회(白受繪) 1574 (선조 7) 1642(인조 20)

()는 는 여빈(汝彬), ()는 송담(松潭). 임진왜란 때 포로로 9년간 일본에 억류되었다가 귀국 후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여러번 상소하여 맹렬히 비판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 1623) 후 예빈시 참봉(禮賓寺參奉)자여도 찰방(自如道察訪)을 지냈다. 호조 참의(戶曹參議)에 추증(追贈), 양산(梁山)의 송담서원(松潭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백대형(白大珩) 1575 (선조 8) 1623 (인조 1)

()는 이헌(而獻), 수종(守宗)의 아들. 1591(선조 24) 진사시 (進士試)에 합격, 이듬해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이 되고 1599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북평사(北評事)형조 좌랑 (刑曹佐郞)감찰(監察)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 등을 지냈다.

광해군 때 희천 군수(熙川郡守)형조 정랑(刑曹正郞)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동부승지(同副承旨)형조 참의(刑曹參議)를 거쳐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백시구(白時耈) 1649 (인조 27) 1722 (경종 2)

()는 덕로(德老), 시호(諡號)는 충장(忠莊), 원진(元振)의 아들. 1680(숙종 6) 무과(武科)에 급제, 1684년 선전관(宣傳官)으로 북로(北路)의 봉수(烽燧)를 조사하여 허술한 곳을 수축(修築)케 하고, 초계 군수(草溪郡守)를 거쳐 1708년 황해도 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 1717(숙종 43)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고 뒤에 평안도병마절도사에 이르렀다.

1721(경종 1)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少論) 일파가 김창집(金昌集)등 노론 4대신을 무고, 심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키자 여기에 연루, 살해되었다. 1741(영조 17) 관작이 복구되고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백원의(白元義) ? 1627 (인조 5)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627(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옥강 만호(玉江萬戶)로 의주(義州)의 남성장(南城將)이 되어 포대(砲隊) 3백여 명으로 수많은 적을 살상하여 적으로부터 비장군(飛將軍)이라는 별명을 받았으나, 화살이 떨어져 백병전으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훈련원정(訓練院正)에 추증(追贈), 의주(義州)의 귀암사(龜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백인근(白仁斤) ()는 희조(希祖). 조선 때 수문장(守門將)을 지냈다.

백세준(白世俊) ()는 군식(君式). 조선조(朝鮮朝)에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백봉욱(白鳳郁) 조선 때 통덕랑(通德郞)에 이르렀다.

백봉조(白鳳朝) ()는 봉주(鳳周). 조선 때 부총관(副摠管)을 지냈다.

백봉명(白鳳鳴) ()는 성서(聖瑞). 조선(朝鮮) 때 부호군(副護軍)을 역임하였다.

백봉기(白鳳紀) ()는 공상(公常). 조선에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백수변(白受釆) 자는 호경(浩卿). 조선(朝鮮)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백동준(白東俊) ()는 자홍(子弘). 조선 때 부사(府事)를 지냈다.

백동원(白東薳) ()는 자중(子重). 조선조(朝鮮朝)에 참판(參判)을 역임하였다.

백광찬(白光璨) ()는 회숙(晦叔). 조선에서 별장(別將)을 지냈다.

백문진(白文晋) ()는 화국(華國), ()는 양우재(養愚齋). 조선(朝鮮) 때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백후채(白後采) ()는 덕현(德顯), ()는 연거처사(淵居處士). 조선 때 학자(學者)로 향민(鄕民)의 칭송을 받았다.

백오변(白五釆) ()는 용거(龍擧). 조선 때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를 역임하였다.

백호인(白灝寅) ()는 윤집(潤集), ()는 난정(蘭汀). 조선조(朝鮮朝)에 좌승지(左承旨)를 지냈다.

백경한(白慶漢) ? 1812 (순조 12)

()는 자점(子漸), ()는 부호(鳧湖), 시호(諡號)는 충강(忠剛), 선양(善養)의 아들. 1811(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자 동생 경해(慶楷) 및 현인복(玄仁福) 등과 의병을 모집하여 난군과 싸웠다.

이듬해 1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지어 의병을 모집하다가 반란군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백경해(白慶楷) 1765 (영조 41) 1842 (헌종 8)

()는 성익(聖翊), ()는 수와(守窩), 선양(善養)의 아들. 1786(정조 1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서 1811(순조 11)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이해 홍경래(洪景來)가 곽산(郭山)을 근거로 난을 일으키자 형 경한(慶翰)과 의병을 모집, 반란군에 대항하여 공을 세워 태천 현감(泰川縣監)이 되고, 그후 장령(掌令)장련 현감(長連縣監)종부시정(宗簿寺正)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부총관(副摠管)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했다.

백시원(白時源) 1776 (영조 52) ?

()는 이화(而華), ()는 노포(老圃). 이직보(李直輔)의 문인. 1811(순조 11) 홍경래(洪景來)의 난 때 격문(檄文)을 돌리고 의병을일으켜 공을 세웠다. 난이 평정된 후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81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 뒤에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정주(定州)의 삼현사(三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백영수(白榮洙) 1811 (순조 11) ?

()는 경소(景韶), ()는 운초(雲樵), 도승지(都承旨) 인영(仁英)의 후손. 헌종(憲宗) 때 무과(武科)에 급제, 뒤에 둥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으며, 80이 넘도록 장수했다.

백은배(白殷培) 1820 (순조 20) ?

()는 계성(季成), ()는 임당(), 민환(敏煥)의 아들. 화원(畵員)으로서 벼슬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인물산수(山水)영모(翎毛)를 잘 그렸다.

백낙관(白樂寬) 1846 (헌종 12) 1883 (고종 20)

()는 경교(景敎), ()는 추강(秋江),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수(弘洙)의 아들. 1882(고종 19) 일본세력 침투에 반대, 척왜(斥倭)의 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남산(南山)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면서 성토(聲討)하다가 투옥되었다. 이때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생하여 난군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군란이 실패하자 다시 체포되어 제주도에 귀양갔다.

백홍인(白弘寅) ()는 자행(子行), ()는 세심당(洗心堂).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의거(義擧)할것을 결의,포고(布告) 8도 사민서(士民書)를 남도(南道) 제읍(諸邑)에 배포(配布)하고 제주도(濟州道)로 가다 발각되어 장흥헌(長興憲)에 수감(收監)되었다.

백성기(白性基) ()는 효천(孝天), ()는 소송(小松). 한말(韓末)에 선전관(宣傳官)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안주 부사(安州府使)철산부사(鐵山府使)선천 부사(宣川府使)를 역임하고, 함경남도(咸鏡南道)충청북도(忠淸北道)평안북도관찰사(平安北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그후 여러 관직을 거쳐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원수부 군무국총장(元帥府軍務局總長)교육부 참모장(敎育部參謀長) 등을 지냈다.

백남규(白南圭) ()는 성삼(成三). 대한제국 군관학교(大韓帝國軍官學校) 1기 졸업생(卒業生)으로 대구(大邱)진남포(鎭南浦)통영(統營)경성대대(京城大隊)에 복무(服務)하여 육군부위(陸軍副尉)로승진했다.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대, 군관학교교장(軍官學校校長) 노백린(盧伯麟)안중근(安重根) 23명이 규합하여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였다. 후에 밀고(密告)를 받아 체포되었으나 곧 탈옥(脫獄)하여 러시아로 3년 동안 망명(亡命)했다.

백성흠(白性欽) 1843 (헌종 9) 1919

제주 판관(濟州判官) 기호(基虎)의 아들. 전남 장흥(長興) 출신. 일찌기 무과(武科)에 급제, 벼슬이 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으나 1910(융희 4) 한일합방이 되자 향리에 은신, 1919년 고종(高宗)이 죽자통곡하다가 죽었다.

백낙귀(白洛龜) ? 1907 (융희 1)

일명 낙구(樂九), ()는 운정(雲亭). 전남 광양(光陽) 출신. 1905(광무 9)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광양(光陽)하동(河東)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 사령장(司令狀)이 되어 한때 순천(順天)을 점령하기까지 했으나 마침내 체포되어 강진 고금도(康津古今島)에 유배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사로 석방, 정읍(井邑) 류병우(柳秉禹)의집에 머물면서 재기를 기하여 의병을 모집하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순국했다.

백낙연(白樂淵) 1871(고종 8) 철산 부사(鐵山府使)로 재직중 미국 상인(商人) 프레스턴 등이 제너럴 셔어맨호를 타고 대동강(大同江)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가 만행을 부리자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와 논의 끝에 셔어맨호를 불태웠다. 1881(고종 18) 영선사(領選使) 김윤식(金允植)의 관변(官辨)이 되어 군기 제조(軍器製造)를 연구할 유학생들을 이끌고 청나라에 다녀왔다.

백운한(白雲翰) ? 1919

평북 의주(義州) 출신. 31운동 후 남만주에 들어가 독립단(獨立團)에 가담하고 이명서(李明瑞)김근하(金根河)함 일(咸 一) 등과 국내에 들어와 홍 주(洪 疇)의 협력으로 독립단 국내지부를 설치하고 평양을 중심으로 군자금을 모집했다. 그후 만주로 돌아가다가 관전현 상루구(寬甸縣上漏溝)에서 체포되어 본국에 송환, 평양 감옥에서 사형당했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單章)이 수여되었다.

백홍준(白鴻俊) 1848 (헌종 14) 1894 (고종 31)

()는 북산(北山). 의주(義州) 출신. 일찌기 개화사상(開化思想)에 눈떠, 1874(고종 11) 친구들과 함께 만주(滿洲) 우장(牛莊)에 가서 영국 스코틀랜드 자유일치교회의 선교사 메킨타이어와 로스 두 목사(牧使)에게서 서구과학을 배우는 한편 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1876년 이응찬(李應贊)이성하(李成夏)김진기(金鎭基) 등과 함께 메킨타이어 목사에게 한국인 최초로 세례(洗禮)를 받고 신교(新 敎) 신자가 되었으며, 친구들과 함께 신약성경(新約聖經)의 한글 번역사업에 착수하여 1887년에 신약 전권을 예수교 성교전서라는 이름으로 간행했다.

1884년부터 고향 의주에 내왕하며 전도(傳道)를 시작, 1888(고종25) 서상륜(徐相崙)최명오(崔明悟)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에 의해 최초로 신교 전도사가 되어 평안도 지방 일대에 교회 설립의 기반을 만들었으며 1889년 언더우드를 동반하여 만주에서 입국, 교인 33명을 선정하여 압록강(鴨綠江)에서 세례를 받게 했다.

1892년 만주에서 사서(邪書)를 간행했다는 죄로 피체, 옥사(獄死)하여 한국 신교사상 첫 순교자가 되었고, 뒤에 사위 김관근(金灌根)이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평안도 지방 일대에 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백선행(白善行) 1862 (철종 13) 1935

평양(平壤) 출신. 16세에 과부가 된 후, 근검절약(勤儉節約)으로 재산을 모아 1908(융희 2)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大同郡古平面松山里)에 백선교(白善橋)를 놓았고, 1922년 평양에 공회당(公會堂)을 설립했으며 1923년 광성(光成) 소학교에 350석의 토지를 희사, 이듬해에는 창덕(彰德) 소학교에 3백석 토지를 기부했다.

미국 선교사 모펫(馬布三悅)이 설립한 학교에도 부동산을 기증, 재단법인을 만들게 하고 평양 숭현(崇賢)학교에 26천 평의 토지를 희사했다. 1925년에는 전재산을 기울여 가난한 사람과 사회단체에 분배, 총독부에서 주는 표창을 거절하고 일평생 수절했다. 사회장(社會葬)을 지냈다.

백용성(白龍城) 1865 (고종 2) 1940

법명은 진종(震鍾), 속명은 상규(相奎), 용성은 법호(法號), 남현(南賢)의 아들. 전북 장수(長水) 출신. 16세 때 해인사(海印寺)에 입산, 수도를 한 후 전국의 사찰을 주유(周遊)하면서 심신을 연마했다. 31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16개월간 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