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의 유래

성씨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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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7-11-09 14:37 수정일 : 2017-12-31 13:11 작성자 : 관리자

진주(晋州)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남서쪽에 위치한 영남(嶺南)의 고도(古道)로서 백제(百濟)때에는 거열성(居烈城)으로 불리우다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 30대 임금, 재위기간 : 661681) 때 신라 영토가 되어 거열주(居烈州)라고 하였다.

그후 서기 757(신라 경덕왕 16) 95소경제(九州五小京制: 통일신라 때 전국의 행정구역을 9주와 5소경으로 구획할 것을 말함) 의 실시로 강주(康州)로 고쳤다가 혜공왕(惠恭王: 신라 제36대 임금, 재위기간: 765780) 때 청주(淸州)로 개칭했으며 고려초에 강주로 환원하였다.

서기 995(고려 성종 14) 에 전국(全國)10()로 개편되면서 진주(晋州)로 되었으며,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한때 진양(晋陽)으로 불리우기도 하였다.

진주 강씨(晋州姜氏)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의 무장(武將)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며 수(:중국의 통일왕조, 581618)난 문제(文帝:초대 황제, 재위기간:541618)가 남조(南朝) 최후의 왕조인 진()을 멸망시키고 중원(中原) 통일한 후 국경에 상접한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섰다가 실패하자, 양제(陽帝:문제의 둘째 아들 2대 황제, 재위기간: 604618)는 부황(父皇)의 유한(有限)을 풀기위해 침략의 야욕으로 사신(使臣)을 통하여 ()나라에 지성(至誠)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 고구려 왕이 친조(親朝)의 예을 하지 않으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치겠다는 내용을 담은 국서(國書)를 보내왔다.

이때 왕이 신하를 모아놓고 회답을 논의 하였는데,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강이식(姜以式) 장군이 이 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써 답해야 합니다.” 하고 무력대결을 주장하자 왕은 이를 쾌히 승낙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그는 서기 612(고구려 영양왕 23)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결심하고 113만 대군을 이끌고 재침해 올 때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출정하여 요동성(遼東城:중국 동북지방에 있는 옛 고구려의 요충지)과 살수(薩水:평안북도에서 황해롤 흐르는 청천강의 옛 이름) 등지에서 수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러 지략과 용맹을 떨쳤다.

그후 그의 6세손인 택인(擇仁)이 서기 839(신라 문성왕 원년) 과거에 급제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밀직부사(密直副使) 등을 지낸 후 진안후(晋安厚)에 봉해졌고, 그의 아들 진은 헌강왕 때 과거에 장원하여 태중대부(太中大夫)와 판내의령(判內議令)을 역임한 후 진양후(晋陽厚)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장군 강이식(姜以式)시조(始祖)로 삼고 본관(本貫)을 진주(晋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박사공파(博士公派:파조 계용)소감공파(少監公派:파조 위용)관서공파(關西公派:파조 시중 원용의 손자 원로)은열공파(殷烈公派:파저 민첨)인헌공파(仁憲公派:파조 해동의 명장 강감찬) 등 크게 다섯 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박사공파(博士公派)의 파조(派祖)인 계용(啓庸)이 고려(高麗) 때 국자박사(國子博士)가 되어 1274년 통신사(通信士)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다녀왔고, 나라에 공()을 세워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감찰어사(監察御使:감찰사의 종6품 벼슬) 사첨(師瞻)의 현손(玄孫) ()는 공민왕(恭愍王) 때 성균시(成均試)에 올라 찬성사(贊成事)를 역임했다.

한편 박사공파에서 가장 두드러진 인물인 회백(淮伯)과 회중(淮仲) 형제는 찬성사 시()의 아들로서 맏아들 회백이 고려말에 대사헌(大司憲 : 사헌부의 정2품 으뜹 벼슬)을 역임한 후 조선(朝鮮)이 개국하자 동북면 도순문사를 역임했다.

그는 특히 문장(文章)에 능했고 성리학(性理學)에 밝았으며, 저서(著書)통정집(通亭集)을 남겼다.

서기 1382(우왕 8) 문과(文科)에 급제한 회중(淮仲)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거쳐 조선이 개국한 후 태조(太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다.

회백(淮伯)은 슬하에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그중 네째 석덕(碩德)이 세종(世宗) 때의 영의정(領議政) 심 온(沈 溫:세종의 장인)의 사위가 되었고 벼슬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지돈령부사(知敦寧府事)를 지냈으며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났다.

한편 1441(세종 23) 25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희안(希顔)은 돈령부 주부(敦寧府主簿)와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등을 지내고 1455(단종 3)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58(세조 3)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특히 그는 시()()()에 모두 능하여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世宗)이 지은 훈민정음(訓民正音)28()에 대한 해석을 달았고 금인(金印) 소신지보(昭信之寶)와 세조(世祖) 때 을해자(乙亥字)의 글씨를 썼다.

그의 동생 희맹은 1447(세종 29)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직제학을 거쳐 15463(세조 8) 진헌 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성종(成宗) 때는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가 되어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세조실록(世祖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거쳐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이 당대에 으뜸이라 하여 성종(成宗)이 서거정(徐居正)을 시켜 그의 유고(遺稿)를 편찬토록 하였다.

그의 아들 6형제 중 맏아들 귀손(龜孫)은 음보(蔭補)로 군기시 주부(軍器侍主簿)가 되어 성종(成宗) 대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고 사재감정(司宰監正)좌통례(左通禮) 등을 거쳐 1485(성종 16)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갔다가 도승지(都承旨)를 역임한 후 1497(연산군 3)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대사헌(大司憲)으로 있으면서 김일손(金馹孫)등을 가볍게 벌하도록 주장하였고, 1500(연산군 6) 진원군(晋原君)으로 봉해졌다.

그후 좌찬성(左贊成)을 거쳐 1506(중종 1) 56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명종(明宗)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사상(四尙)은 사인(舍人)을 지낸 온()의 아들 5형제 중 맏아들로 도승지(都承旨)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으며 선조(宣祖) 때는 실록청동지관사(實錄廳同知館事)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 참여했다. 우참찬(右參贊)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다.

1577(선조 10) 별시문과에 급제한 신()은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정한 공()으로 평난3등공신(平難三等功臣)에 오르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왜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워 난이 끝나자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병조(兵曹)와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내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소감공파(少監公派)에서는 파조(派祖) 위용(渭庸)의 아들로 검교(檢校)를 지낸 문로(文老)와 군기시사(軍器侍事) ()이 유명했으며, 상장군(上將軍) 희령(希齡)과 좌의정(左議政) 사덕(思德)이 뛰어났다.

그외 감찰(監察)을 역임한 중인(重仁)()() 등과 충순위(忠順衛) 육동(淯東), 교위(校尉)를 지낸 휴()가 이름을 날렸다.

관서공파(關西公派)는 시중공(侍中公) 원용(遠庸)의 손자(孫子) 원로(元老)를 파조(派祖)로 하고 8세손 국흥(國興)이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으며,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된 행()의 아들 문회(文會)는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하여 동생인 문우(文遇:장령을 역임)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문회(文會)의 손자 언홍(彦弘)은 좌통례(左通禮), 별제(別提) 언굉(彦宏)의 아들 필문(弼文)은 통덕랑(通德郞)을 역임하여 현감(縣監) 공운(公雲), 좌승지(左承旨) (), 감찰(監察) 응황(應璜), 수찬(修撰) 호 민(好敏)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은열공파(殷烈公派)의 파조(派祖)민첨(民瞻)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무훈을 세운 명장(名將)으로 1018(고려 현종 9) 거란()10만 대군이 침입해오자 강감찬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대파하고 개경(開京)의 싸움에서도 크게 이김으로써해동(海東)의 명장(名將)으로 일컬어졌다.

위에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으로 책록되었으며, 지중추사(知中樞事)병부 상서(兵部尙書)를 지낸 후 태자태부(太子太父)에 추증되었다.

은열공파 중에서도 특히 조선조(朝鮮朝)에 명성을 떨친 후손으로는 백년(栢年:문정공)과 현(), 세황(世晃)3(三代)를 들 수 있다.

1627(인조 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백년(栢年)은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강 빈(姜 嬪:소현세자빈 강씨)의 억울함을 상소했다가 한때 사직되기도 했으나, 1646(인조 24)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장원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랐다.

이듬해 전국 향교(鄕校) 재흥(再興)을 상소하였고 대사간(大司諫:사간원의 정 3품 으뜸 벼슬)에 올라 다시 강 빈의 신원(伸寃:원통한 일을 풀어 버림)을 상소했다가 청풍군수(淸風郡守)로 좌천되었다.

현종(顯宗)이 즉위한 후 예조 참판(禮曹參判)으로서 동지 부사(冬至副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숙종 때 좌참찬(左參贊:의정부의 정2품 문관 벼슬)을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1690(숙종 16)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아들 현(:이조 참의를 거쳐 좌참찬대제학한성판윤 등을 역임) 손자 세황(世晃)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1772(영종 48) 61세로 늦게 벼슬에 등용된 세황(世晃)1776(영종 52) 한성부 판관(漢城府判官)으로 기로과(耆老科)에 장원 급제하였으며, 67세 때는 병조 참지(兵曹參知)로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하여 세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서화(書畵)에 뛰어난 그가 1784(정종 8) 천추부사(千秋副使)로 북경(北京)에 갔을 때 그의 서화를 구하려는 청인들이 많았다 하며,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왕헌지(王獻之)미 불(米 芾) 등의 서체(書體)를 본받아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비롯한 모든 체가 신묘한 경지 이르렀고, 산수(山水)사군자(四君子) 등에 뛰어나난죽도(蘭竹圖)」․「산수도(山水圖)」․「송죽모란도(松竹牡丹圖)등을 남겼다.

한편 철종(哲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노()는 세황(世晃)의 증손(曾孫)으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집권하자 위유사(慰諭使:지방에 천재나 지변이 있을 때 어명으로 백성을 위로하기 위하여 보내던 임시 벼슬)에 중용(重用)되어 병인양요(丙寅洋擾: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과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로 피폐해진 강화도(江華島)를 다녀왔으며,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거쳐 1872(고종 9)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대원군 탄핵상소를 올린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반대하다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되었다가 1874(고종 11) 다시 등용되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했다.

인헌공파(仁憲公派)는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오른 궁진(弓珍)의 아들 감찬(甘贊)이 당대에 이름난 명장(名將)으로 유명했다.

983(고려 성종 2)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한 그는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중추원사(中樞院事)이부 상서(吏部尙書)내사시랑 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 등을 지낸 후 1018(현종 9) 거란의 소배압(蕭排押)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할 떼 71세의 고령으로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고 쫓겨가는 적을 구주(龜州)에서 소탕하여 개선(凱旋)할 때 영파역(迎波驛 : 의홍역)까지 마중나온 왕의 영접을 받았다.

그 공으로 검교태위(檢校太尉)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오르고 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 식읍3백호(食邑三百戶)를 하사(下賜)받았으며,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模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1616(광해군 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석기(碩期)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되었으나 문란한 정국과 이이첨(李爾瞻)의 폐모론(廢母論: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이자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하고 서궁에 유폐한 일)을 개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인조 반정(仁祖反正) 후에 댜시 등용되어 예문관 박사(藝文館博士)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1640(인조 18) 61세로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한편 1593(선조 26)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항()은 우계 성 혼(成 渾)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하여 성리학(性理學)의 원조(元祖)가 되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남원(南原)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광정(李光庭)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군량 보급에 진력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고향인 영광(靈光)으로 돌아가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왜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日本)에 끌려가 일본의 학자(學者)들에게 유학(儒學)을 가르쳐 주는 한편 그 곳의 지리(地理)와 군사시설을 비롯한 군사정보를 고국에 전했다.

 

1662(현종 3)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석빈(碩賓)은 숙종(肅宗) 때 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고 진선군(晋善君)에 봉해졌으며, 1714(숙종 40) 절일제(節日製:성균관 유생들에게 보이던 시험)에 장원한 박()은 이듬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수찬(修撰)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까지 올랐으나 노론(老論)의 집권으로 벼슬을 내놓고 향리로 돌아갔다.

그외 영조(英祖)탕평책(蕩平策:영조가 당쟁을 없애기 위해 쓴 정책)을 반대했던 필신(必愼)은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著書)모헌집(慕軒集)을 남겼고 시인(詩人)으로 유명한 위()한성순보(漢城旬報)를 간행하고 김택영(金澤榮)황 현(黃 玹)과 함께 한말의 3대 시인(詩人)으로 불리웠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姜氏)는 남한에 총 968,10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득본(得貫) 유래(由來)

1662~1685 사이에 간행된 강문(姜門)의 박사공(啓庸)가 최초(最初)의 족보(族譜)인 남한보(南漢譜)에 의금부도사 석로(碩老)가 쓴 글 중에서 진주(晋州) 땅에 큰 강물이 두 줄기로 갈리어 하나는 은렬공(殷烈公), 나머지 하나가 박사공(博士公)의 후예가 되었다고 했다.

1747(정묘년) 계향청(桂香廳)에서 발간한 세덕지(世德誌) 발문(跋文)1937년 간행된 박사공파 갑산보(甲山譜. 경남 합천 갑산에서 간행) 발문에 통일신라 헌강왕(憲康王) 때 정순공(貞順公) ()이 진양후(晋陽侯)로 피봉(被封)되어 이로부터 관향(貫鄕)을 진주(晋州)로 하게 되었으며, 진산(晋山), 진양(晋陽), 청주(淸州), 청성(菁城)은 다같은 이름이다.

 

시조유래(始祖由來)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에서 무장(武將)을 지낸 이식(以式)이다.

서기 597(고구려 26대 영양왕 8) ()나라 문제(文帝)가 침략의 야욕으로 사신(使臣)을 통해 ()나라에 지성(至誠)과 충절을 소홀히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왕이 군신(群臣)을 모아 놓고 회답할 것을 논의할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있던 그가 이같이 무례한 글은 붓으로 답할 것이 아니라 칼로서 답해야 합니다.(以劒可報)”하고 주장(主張)하자 왕은 이를 쾌히 받아들여 출정을 명했다.

그는 정병(精兵) 5만 명을 인솔하고 임유관(臨楡關)의 대전(大戰)에서 수()나라 군사 30만 명을 대파(大破)하여 크게 무공(武功)을 떨쳤으며, 그후 수()나라 양제(陽帝 : 문제의 둘째 아들, 수나라 2대왕, 재위기간 604~618)가 백만 대군으로 재침해 올때 다시 출정하여 요동성(遼東城 : 중국 동북 지방에 있는 옛 고구려의 요충지) 살수(薩水 : 청천강의 옛 이름, 평북에서 황해로 흐르는 강) 등지에서 수군(隋軍)을 격파하여 명성을 날렸다.

 

·(·) 전쟁의 원인(1)

세력과 세력이 만나면 서로 충돌되는 것은 공리(公理)요 정리(定理). 고대 동아세아에 있어서 비록 많은 종족이 대립(對立)하였으나, 다 무무미개(貿無未開)한 유목(遊牧)의 만족(蠻族)들이라, 혹 일시(一時) 정치상의 세력을 가진다 할지라도 문화가 없으므로,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그 붕괴(崩壞)하는 날에는 다시 계속(繼續)할 터 까지 없어질 뿐이거니와, 토착(土着)의 민족으로 장원(長遠)한 역사와 상당히 발달한 문화를 가진 자는 지나(支那)와 조선이니, 지나와 조선은 고대 동아세아의 양대 세력으로 만나면 서로 충돌이 많았다. 만일 충돌이 없는 때라도, 반드시 피차(彼此) 내부의 분열과 불안이 있어 그 내부의 통일에 바쁜 시기였다.

상고(上古)는 말할 것도 없고, 고구려 건국이래 조선은 아직 봉건(封建)상태에 있어, 열국(列國)이 서로 침벌(侵伐)하므로 다른나라를 침범(외정:外征)할 힘이 없었고, 지나는 한()이 통일하여 외정할 힘이 넉넉하였으므로, ()의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가장 잦았고, ·(·) 왕위쟁탈의 난()이 중첩(重疊)되어, 마침내 발기(發岐)가 요동(僚東)으로서 공손도(公孫度)에게 항()하여 고구려대왕때에는 고구려가 조선을 통일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국력이 매우 강성하여 조선 안에서 거의 대등(對等)될 세력이 없으므로, 한을 쳐 요동(遼東)을 점령하는 동시에, 직예(直隷), 산서(山西) 등지도 그 침략의 범위가 되었고, 말기에는 가 가장 인민(人民)이 많이 모여살고 기름진 토지를 잃어 약국(弱國)이 되었으므로, 그 약국의 지위(地位)를 면()하려 하여 조조(曹操) 자손의 위()나 모용씨(募容氏)의 연() - 곧 지나 북방나라를 향하여 도전(挑戰)하는 동안에, 백제와 신라가 남방(南方)에서 궐기(蹶起)하여 고구려와 대등한 세력을 가졌었고, 고국양(古國壤), 소수림(小獸林), 광개삼대왕(廣開三大王)이 일어나 요동을 쳤고, 또 서북(西北)으로 거란(契丹)을 정복(征服)하고 열하(熱河) 등지를 점령하며, 장수왕(長壽王)70년간 민력(民力)을 휴양(休養)하여, 인구가 번성하고 국력이 팽창하여 지나와 견줄만 하였다. 그러나 남방서국대(南方四國對)고구려 공수동맹(攻守同盟)이 생겨 후면(後面)의 견제를 받았으므로, 장수왕 이후로 드디어 북진주의를 버리고 남방통일에 전력하였다

 

 

 

·(·) 전쟁의 원인(2)

만일 이때 지나대륙이 통일되었다면 고구려에 대한 침략이 빈번하였겠지만, 지나도 남북으로 분립(分立)하여 산해관이동(山海關以東)을 엿볼 사이가 없었으므로, 위초발(魏招跋)씨의 백제 침입과 주자문(周字文)씨의 고구려 침입과 같은 일시적 침입은 있었으나, 피차 흥망(興亡)을 다투는 계속적인 혈전(血戰)은 없었다.

그러나 기원 590년 경에 이르러, 주자문씨의 제위를 빼앗은 수문제 양견(楊堅)이 진(: 지나 강남 6조중 한나라)을 병합(倂合)하고, 전 지나를 통일하여 강대한 제국이 되었고, 지나 이외의 나라들을 없인여겨 북방의 돌궐(突闕)이나 남방의 토속혼(吐谷渾)은 다 쇠약하여 지나에 대하여 신하의 예(신례 : 臣禮)를 취하였고 오직 동방(東方)의 고구려란 제국이 가장 강성하여 지나에 대항하니, 어찌 피() 편오자존(騙傲自尊)한 지나 제왕이 참았겠는가<()의 황가(皇家)와장상(將相)들이 거의 해비종(解卑種)이나 지나에 동화(同和)한지 기구(己久)>. 이것이 수병(隋兵) 입관(入冠)의 제 1의 원인이었다.

백제와 신라는 수십년 서로 풀지 못할 만한 원수(구수 : 仇讐) 관계였으나, 돌연히 옹서(翁壻)의 나라가 되어 서로 친선을 맺고 양국이 다 고구려를 미워하여, 양국이 매양 사자(使者)를 수나라에 보내어 고구려를 칠것을 청()하였고, 또 가끔 고구려 국력의 허실(虛實)을 일으키어 수나라 군신(君臣)의 야심을 조장하였나니, 이것이 수병입관 제 2의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