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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김씨(蔚山金氏)
울산김씨 조회수:3888 124.53.120.38
2019-06-20 17:22:43

■ 유래

울산김씨의 시조 김덕지(金德摯)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둘째왕자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935년(신라 경순왕 9) 10월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신라의 천년사직을 양위(讓位) 하려 하자 형 태자(太子)처럼 불가함을 극력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처자(妻子)를 버리고 형 태자(太子)와 함께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의 겨울 이름)에 들어갔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와 《울산김씨족보》에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에 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설에는 화엄종(華嚴宗)에 귀의하여 법수(法水)·해인사(海印寺)에 드나들며 망국(亡國)의 한(恨)을 달랬는데 승명이 범공(梵空)이라 한다. 이러한 행적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자세하게 상고할 수 없다.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그의 14세 환(環)이 고려조에 출사하여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정 1품 관계) 광록대부(光祿大夫) 이르고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져, 후손들이 환(環)을 중시조로 하고 학성의 별호인 울산(蔚山)을 본관으로 하였다.

 

예로부터 호남에서는 조선 중종 때의 명유(名儒)인 하서 김인후(金麟厚) 집안을 4대 명족의 하나로 꼽고 있다.

 

■ 본관 역혁

울산(蔚山)은 경상남도 동해안에 위치한 고장으로 본래는 진한(辰韓)의 땅이었으나 삼국시대에는 신라에 속하였다. 신라 효공왕(901) 때 학(鶴)이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왔다하여 신학성(神鶴城)이라 불렀다. 고려 태조(930) 때 흥려부(興麗府)로 승격되었으나, 성종(995) 때 다시 공화현(恭化縣)으로 강등되고 별칭으로 학성(鶴城)이라 불렀다. 고려 현종(1018) 때 울주(蔚州)로 개칭하였다가, 조선 태종 4년(1404)에 울산(蔚山)으로 고쳤다.

 

■ 대표적 인물

- 김인후(麟厚) : 호는 하서(河西). 조선 중종 때 이름난 유학자. 문묘 종사.
- 김기하(器夏) : 호는 각재(覺齋). 조선 숙종 때 후릉참봉을 역임한 문신 . 성리학자. 연호사 배향
- 김병로(炳魯) : 호는 가인(街人). 초대 대법원장
- 김성수(性洙) : 호는 인촌(仁村). 제2대 부통령.
- 김상협(相浹) : 호는 남재(南齋). 국무총리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환(環)의 아들 계흥(季興)이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냈다. 증손 흥려군(興麗君) 온(穩)은 1387년(우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를 지내고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돌아와 이조좌랑이 되었으며,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고 밀양부사를 거쳐 가선대부 여산군(麗山君)에 봉군되었다. 양주목사때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때 처가인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피화를 당하였다.


조선조에 와서 울산 김씨가 자랑하는 인물로는 성리학의 대가인 인후(麟厚)를 들 수 있다. 그는 일찍이 조선 전기의 명신인 김안국(金安國)의 제자로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여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정자에 등용되었다가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한 후 박사·세자시강원 설서를 거쳐 부수찬에 올라 문신으로 처음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부모 봉양의 걸양을 청하여 옥과 현감으로 나갔다. 그 후 1545년(인종 1) 을사사화가 일어나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와 성리학 연구에 정진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 등에도 정통했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한편 임진왜란 때 경수(景壽)는 남문에서 창의하여 의병 모집 크게 활약하여 공조참판·의금부동지사·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고, 신남(信男)도 운봉에서 전공을 세워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천록(天祿)은 용맹과 지략이 출중하여 정유재란때 여주 판관으로 전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광양군 옥곡에 정려가 세워졌으며, 대명(大鳴)은 선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풍기군수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들과 함께 왜적을 토벌하는 공을 세웠다.


그 외  광해군때 문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역임한 종진(宗振), 숙종 때 후릉참봉을 역임한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연호사에 배향된 기하(器夏), 승지를 지낸 우휴(羽休)가 유명하고, 의금부 도사 경휴(敬休), 군수 봉우(鳳祐), 교리 진우(鎭祐), 시독 동수(東洙) 등이 함께 이름을 날렸다.


한말에 와서는 학자 녹휴(祿休), 의병장 익중(翼中), 중추원 의관 대수(大洙), 군수 기중(祺中), 대법원장 병로(炳魯), 대한민국 제 2대 부통령 성수(性洙), 국무총리 상협(相浹) 등이 가문을 빛냈다.

 

■ 인구수
2000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결과에 의하면 울산 김씨는 남한에 총 11,270가구, 36,22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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