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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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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6 07:15:30

雲溪公 박 재(朴 榟:22世 武肅公派 ) 선생이 쓰신

조선통신사 일기(回答使日記)를 읽고

                                                                                            박 정 하

일본은 一衣帶水인 玄海灘을 사이에 둔 가깝고도 먼 나라다.

칼(劍)의 나라 일본과 예(禮)의 나라 우리가 불행했던 과거사를 두고 지금도

통화(通和)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 國粹主義者들이 득세하면서 우경화(右傾化)의 길로 들어서서

평화헌법을 개정하고 또다시 군사대국이 되기 위해 속도를 내려 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인접국인 중국은 물론 국제사회도 이를 크게 염려하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 朝鮮通信使를 통한 일본과의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양국의

평화와 안정을 상징한다고 본다. 조선에서는 1392년 개국 초부터 임진왜란

전까지는 열일곱 번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이 시기에는 주로 왜구가

자주 침입하여 살인, 방화, 약탈과 같은 온갖 악행을 저지름으로서 백성들이

고통받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주였다.

임진, 정유재란 이후 1607(선조40년)년부터 1811년(순조11년)까지의 204년

동안에는 열두 번의 통신사를 파견하여 관계강화와 국정탐색, 피로인(被虜人)

귀환, 막부(幕府)의 장군(將軍)의 습직(襲職)축하 같은 임무를 수행했다.

양국사이에 조선통신사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통신사를 통해

양국의 외교적인 문제 해결과 물자와 문화교류를 함으로써 선린우호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통신사는 국빈으로 대접을 받았고, 일행에는 문인과 서화가 등이 동행했으며

일본의 지식인들은 회담을 통해 조선의 선진문화는 물론 역사(歷史), 경사(經史), 풍물(風物), 화풍(畵風) 등을 얻는 것이 그들의 영광이라 여겼다. 따라서 조선통신사의 파견은

우리 민족의 문화우월성을 확인시켜 준 것이라 하겠다.

1609년(광해군 1년) 일본과 맺은 기유약조(己酉約條) 에는 조선과 일본 간에

사신을 보내는 송사조약(送使條約)이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국교의 재개를 위해 일본은 끈기 있게 통교 요청을 해

왔고, 이에 대해 우리 조정에서는 찬 ·반 양론이 대두되었으나 일본 측이 대조선

통교재개(對朝鮮通交再開)를 위해 적극적인 태도로 나오자 조선은 국서(國書)

요구문제, 범능적(犯陵賊:宣陵 ·靖陵을 陵侵한 범죄인)의 압송문제,

피로인(被虜人)의 송환문제 등 대일강화조약의 성립조건을 제시했는데,

일본이 이를 이행했으므로 조약이 체결 되었던 것이다.

 

풍신수길의 지휘아래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조선반도가

처참하게 유린되고 백성들이 참혹한 시련과 고통을 겪게 되는 7년간의 왜란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중국(明)의 지원과 이순신 장군 같은 불멸의 성웅이 있었고, 분기탱천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분연히 창의한 많은 백성들로 인해 간신히 멸망을 면한 조선이었다.

엄청난 전화(戰禍)를 입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음에도 조선은 일본에 대해

관대하였다. 이는 당시 일본에 비해 월등한 조선의 문화수준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은 조선통신사를 맞아드리면서 엄청난 경비를 부담했는데 어떤 때에는

그들 정부의 일 년 예산에 가까운 경비를 지출하여 재정난을 겪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는 통신사 방문을 통해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배우고 받아들이고자 한데에서 나온 것이다.

운계공이 쓰신 1607년 6월 7일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일본의 관백(關白:막부최고의 지도자,일본왕)이 말하기를 먼 길을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접대가 미진하여 미안함을 견딜 수 없으나 지금

화해가 이뤄졌으니 지난날 있었던 일을 근심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통화(通和;화평을 이루기 위한 상호노력)할 일이 있으면 대마도를

통해서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에 회답사(回答使)는 대답하기를 「일본과 우리는 만년을 가도 잊지

못할 원수가 되었는데 노장군(老將軍:德川家康)께서 누차 화해를 청하고

먼저 서계(書契:외교문서)를 보내주시고 전날의 잘못을 고친다고 함으로

우리나라가 특별히 사신을 보내서 장군의 뜻에 회답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1607년 6월 5일에 쓰신 일기를 보면 일본인들의 전쟁놀이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무사(武士)들이 지배해온 경직된 사회에서

일본인들이 호전적으로 변해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명(傳命)의 예(禮)라고 하여 매년 5월 5 일에 귀천을 가리지 않고

천명에서 많게는 만 명 가까이 남자들이 무리를 지어 편을 갈라 전투태세를

갖추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리고 전진(戰陣)에 임한 것처럼 싸울 준비를

한다. 싸움이 시작되면 처음에는 작은 돌을 서로 던지다가 그 다음에는

목검으로 서로 찌르면서 장난치듯 하다가 나중에는 예리한 칼이 등장하면서

사상자까지 나온다.

부자나 형제끼리도 서로 다투게 되기도 하고 칼의 능력을 시험하면서

용맹을 자랑한다. 나라에서는 이를 금지하는 법도 없고 도리어 담력과

용맹이 뛰어 났다면서 칼로 사람을 많이 벤 자를 우대한다.

비록 시정의 무뢰배 같은 천한 자라도 이런 용맹을 보이면 성가가 올라가고

겁을 먹고 패한 자나 싸움에 나가지 않는 자는 비록 권문세가의 귀한

자제라도 버림을 받게 된다고 했다. 일행이 강호(江戶;도꾜)에 머물면서

진을 나누어 들판에서 싸우는 광경을 보았는데 칼을 휘둘러 유혈이 낭자하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전쟁을 즐기며 생명을 가벼이 하니 당해내기 힘든

나라로 보인다. 경도(京都)를 비롯한 일본의 66주가 모두 이모양의

전쟁놀이가 이날에 행해진다고 했다. 이 날에 죽은 자가 35명이나 되었고

칼에 상한자도 수없이 많았다고 했다. 대판(大坂;오사카)에서는 사상자가

무려 400명에 이르렀다고 하더라」통신사라는 말에는 두 나라가 서로 신의를

지키며 교류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통신사가 원활하게 일본을 왕래 할

때에는 우호공존의 시대가 전개되었고 왕래단절은 불행한 역사의 시작점이

되었다고 본다. 지난 20세기 전반기에 한일합방으로 인한 불행한 역사의

상처가 남았으나 이제 21세기에 들어서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확고히

해나가는 것은 양국의 공통과제가 되고 있다.

일본과의 선린우호관계의 유지는 한, 중, 일의 동아시아 평화와 안정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과거 우리 선조들께서는 그들과의 선린우호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지만 일본의 화답이 없을 때가 많았다.

지난날 역사에서 보듯 우리와의 관계에서 그들은 침략행위를 자행하고 온갖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도 반성할 줄 몰랐다.

통신사의 일기에서 보면 당시 그들의 일상생활에서도 호전적인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일본의 역사와 문화, 환경이 오늘 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미래의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도 우리는 반일(反日)이

아닌 극일(克日)의 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국제사회에 문화민족의 대범함을 보이면서 국력을 키우고 국격(國格)을 높여가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

일본 역시 대범한 지도자가 나와서 군위안부 문제, 독도영유권문제,

교과서왜곡문제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하고 문제해결의 실천을 통해 신의를

보여주는, 달라진 모습을 보임으로서 한일관계를 공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1607년 7월 3일의 일기 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보인다.

수길(豊臣秀吉)이 죽은 뒤에 휘원(輝元) 등이 우리나라를 침범한 공을

가강(德川家康)에게 자랑하니 가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예의지국으로서

문교(文敎)를 숭상하고 군사와 전쟁을 일으키지 아니했으며 무력을 사용하지

아니했는데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바다건너 침략을 해서 승리한 것이

어찌 공로라 하는가. 하고 공로의 상을 주지 아니하니 이 때문에 원망이

날마다 깊어져서 경자년에 관원(關原)에 전쟁이 일어났다」

조선통신사일기는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 시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는 미래를 보는 오늘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조선통신사의 역사에서도

우리는 오늘의 일본을 바라보는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201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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