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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씨총연합회 조회수:359 49.164.114.230
2017-03-21 19:03:08

너무 많은 분들이 계셔서 필요하면 파일로 보내드릴께요

김알지(金閼智) 서기(西紀)65~?

봉위(封位): 대보공(大輔公)

서기전(西紀前) 57년3월 일 육부촌장(六部村長)인 이알평(李謁平),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손구례마(孫俱禮馬), 정지백호(鄭智伯虎), 배지타(裵祗陀), 설호진(薛虎珍), 등이 모여 13세 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추대(推戴)하고 서라벌(徐羅伐).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백선장(白善長), 고령시(高靈是), 조공흠(趙公欽), 이두창(李頭昌), 임의신(任儀信), 지충강(池忠江), 김관령(金寬齡), 조익관(趙益寬), 양지백(梁之伯), 조대정(趙大正), 추자평(秋子平), 정선엽(丁善燁), 임동방(林彤芳), 강이태(康二太), 정지석(鄭之碩), 홍식(洪息), 양선진(梁善秦), 신초시(申初是), 한영구(韓寧龜), 이형익(李衡翊), 등이 차례로 와서 신라건국(新羅建國)을 도운바 있다.

김알지공(金閼智公)은 서기65년(석탈해왕(昔脫解王9년) 금성서편(金城西便) 시림(始林)에서 강임(降臨)하셨으며 탈해왕(脫解王)이 양육(養育)하였다.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姓)을 김(金)이라 하였고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始祖) 대보공김알지(大輔公金閼智)이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이름하였고 시림(始林)도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추존(追尊) 세조대왕(世祖大王)이라 하였다. 알지(閼智)의 아들은 세한(勢漢)이며 그 뒤의 계보(系譜)는 아도(阿道), 수류(首留), 욱보(郁甫), 구도(仇道)로 이어지며 구도(仇道)의 아들은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王位)에 오른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이다. 이는 알지(閼智)의 7세손(世孫)이며 신라(新羅)의 13대왕(代王)이시다. 왕비(王妃)는 석강조(昔康造)의 딸로 마정부인(摩貞夫人)이다.

미추왕(味鄒王) 在位 261~283

김씨(金氏)로서는 초대왕(初代王)이고 신라(新羅) 13대(代)이다. 부(父)는 구도(仇道)이고 모(母)는 박갈문왕(朴葛文王) 이칠(伊柒)의 딸이다. 왕비(王妃)는 석조분왕(昔助賁王)의 딸 광명부인(光明夫人)이며 석첨해왕(昔沾解王)이 아들이 없어 인덕(仁德)이 높은 미추(味鄒)가 후계(後繼)로 이은 것이다. 在位(261~283)중 두차례의 백제(百濟)의 침공(侵攻)을 물리치고 백성(百姓)들이 농사(農事)를 잘 짓도록 하였다.

내물왕(奈勿王) 재위(在位)(356~402)

김씨계(金氏系) 2대 왕으로 신라(新羅) 17대왕이다. 부(父)는 각간(角干) 말구(末仇)이고 구도갈문왕(仇道葛文王)의 손(孫)이며 모(母)는 휴례부인(休禮夫人)이고 비(妃)는 미추왕녀(味鄒王女) 예희부인(禮希夫人)이다. 부(父) 말구(末仇)는 미추(味鄒)의 아우로 석흘해왕(昔訖解王)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자 뒤를 이었다. 재위 47년간(年間) 동(東)에서는 왜(倭)가 북(北)에서는 고구려(高句麗), 말갈등(靺鞨等)이 침공(侵攻)하였으나 잘 물리치고 국정(國政)을 바로 잡았다. 왕(王)의 현명(賢明)한 판단(判斷)으로 백제(百濟)를 굴복(屈服)케 했는데 백제(百濟)의 독산성주(禿山城主)는 300명을 이끌고 투항(投降)했다.

김무알(金武謁)

신라(新羅) 눌지왕(訥祗王)때 고구려(高句麗)에 볼모로 간 복호(卜好)의 보좌관(輔佐官). 신라는 412년,실성왕(實聖王11) 고구려(高句麗)의 요청(要請)을 받아들여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복호를 볼모로 보냈는데 눌지왕(訥祗王)이 왕위(王位)에 오르자 복호의 환국(還國)을 간곡(懇曲)히 바랐다. 418년,(눌지왕2년) 복호는 박제상(朴堤上)과 환국(還國) 했는데 당시 보좌역(補佐役)이 김무알(金武謁)이다.

지증왕(智證王) 在位(500~513)

신라(新羅) 22대이고 김씨계(金氏系) 7대 왕이다. 휘(諱)는 지대로(智大路)이고 내물왕(奈勿王)의 증손(曾孫)이며 갈문왕(葛文王) 습보(習寶)의 아들이다. 그의 모(母)는 오생부인(烏生夫人)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딸이며 비(妃)는 이찬(伊湌) 박등흔(朴登欣)의 딸 연제부인(延帝夫人)이다. 재위 15년간 굵직한 치적(治積)이 있었는데, 순장(殉葬)을 금(禁) 하였고 군주(郡主)에게 명(命)하여 소로 밭을 갈도록 하였다. 재위 4년에 국호(國號)를 신라(新羅)로, 지금까지의 왕의 칭호(稱號)인 마립간(麻立干)에서 왕으로 호칭(呼稱)하였으며 처음으로 시법(諡法)을 시행(施行)하였다.

법흥왕(法興王) 재위(514~539)

휘(諱)는 김원종(金原宗) 출가후(出家後) 법명(法名)은 법공(法空) 지증왕자(智證王子) 모(母)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비(妃)는 보도부인박씨(保刀夫人朴氏)이다. 517년 병부(兵部)를 설치(設置)했으며 520년 처음으로 율령(律令)을 공포(公布)하여 백관(百官)의 공복(公服)을 정(定)하는 등 국가(國家) 체제확립(體制確立)에 힘을 기울였고 내사사인(內史舍人) 이차돈(異次頓:朴訖解王曾孫)과 함께 불교(佛敎)를 국교(國敎)로 하고자 하나 반대(反對)가 있어 순교(殉敎)하였으므로 예언(豫言)대로 이적(異蹟)을 보고 신하(臣下)들이 마음을 굽혀 527년 불교(佛敎)를 공인(公認)하게 되었다. 자신도 왕위(王位)를 버리고 스님이 되어 흥륜사(興輪寺)에 머물렀가. 왕비(王妃)도 스님이 되어 묘법(妙法)이라 이름하고 영흥사(永興寺)에 머물렀다.

진흥왕(眞興王) 재위(540~575)

신라(新羅) 제24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9대 왕이다. 휘(諱)는 삼맥종(彡麥宗), 법흥왕(法興王)이 아우인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이다. 모는 법흥왕의 딸이다. 비(妃)는 박씨(朴氏)로 사도부인(思道夫人)으로 7세(歲)에 왕위(王位)에 오르고 왕태후(王太后) (법흥왕비(法興王妃)가 섭정(攝政)하였다. 545년 대아찬(大阿湌) 거칠부(居柒夫) 등을 명하여 국사(國史)를 꾸미게 하였다. 왕11년 백제(百濟)와 고구려(高句麗)가 교전(交戰)이 심한 틈을 타서 두 성(城)을 쳐서 지키게 하고 백제의 침공(侵攻)을 맞아 대승(大勝)을 거두었다. 555년(왕16) 북한산(北漢山)에 순행(巡行) 강역(彊域)을 확정(確定) 하였다. 576년(왕37) 화랑제(花郞制)를 실시 국위(國威) 향상(向上)에 기틀을 잡았다.

김무력(金武力)

신라(新羅) 진흥왕(眞興王)때의 장군(將軍)으로 김유신(金庾信)의 할아버지이고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아들이다. 532년 가야(伽倻)가 신라에 합병(合倂)되자 부왕(父王)과 왕모(王母) 및 큰형 노종(奴宗), 둘째형 무덕(武德)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投降)했다. 그는 진흥왕(眞興王)이 고구려(高句麗) 영역(領域)인 한강유역(漢江流域) 및 백제(百濟)의 점령지(占領地)를 탈환(奪還)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한 신주(新州)를 설치(設置)할 때 공(功)이 커 아찬(阿湌)의 벼슬로 이곳의 군주(軍主)가 되었다. 그후 백제(百濟)의 성왕(聖王)이 관산성(管山城:沃川)을 공격(攻擊)했을 때 주병(州兵)을 이끌고 교전(交戰)하여 성왕(聖王)을 전사(戰死)케 하고 백제의 좌평(佐平) 4명과 사졸(士卒) 2만9천6백명을 전몰(戰歿)시키는 공(功)을 세워 그 뒤 관등(官等)이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아들 서현(舒玄)은 진평왕(眞平王)때 대량주(大梁州) 도독(都督)을 지냈으며 손녀인 문희(文姬)는 태종무열왕비(太宗武烈王妃)가 되었으며 손자 김유신(金庾信)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과 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삼국통일(三國統一)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김원광(金圓光) 555,(眞興王16)~681,(神文王1)

내물왕(奈勿王) 7세손(世孫) 신라(新羅) 중기(中期)의 중국(中國) 구법승(求法僧) 579년(眞平王1) 25세에 출가(出家)하여 30세에 경주안강(慶州安康)의 삼기(三岐)에 들어가 수도(修道)하였다. 당나라에 가서〈열반경(涅槃經)〉을 비롯하여 여러 경전(經典)을 배우고 600년,(眞平王22) 귀국(歸國)하였다. 이후 [여래장경(如來藏經)사기], [대방등여래장경소]등을 지어 불교(佛敎)의 여러 새로운 지식(知識)을 신라에 도입(導入)했다. 청도 가실사에 있을 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와 교훈(敎訓)을 청하므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주었다.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新羅) 화랑도(花郞徒)의 중심이념(中心理念)이 되었다.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유신(交友有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

김사다함(金斯多含)

진흥왕(眞興王)때의 화랑(花郞)으로 급찬(級湌) 구리지:의충(仇梨知:義忠)의 아들이다. 진골출신(眞骨出身)으로 풍채(風采)가 청수(淸秀)하고 사기(士氣)가 방정(方正)하여 화랑(花郞)으로 추대(推戴)되어 1000여명의 화랑(花郞)을 거느렸다. 대가야(大伽倻)를 정벌(征伐)할 때 16세의 나이로 기병(騎兵) 5천을 거느리고 싸워 전공(戰功)을 세웠다. 그 공(功)으로 받은 300명의 노예(奴隸)를 자유민(自由民)으로 놓아주고 전지(田地)를 받았으나 사양(辭讓)하고 불모지(不毛地)를 받았다. 어렸을 때의 친구(親舊) 무관랑(武官郞)의 병사 소식(消息)을 듣고 17세로 졸(卒)했다.

김대문(金大問)

삼국사기(三國史記:金富軾著)를 편찬(編纂)할 때 귀중(貴重)한 자료(資料)가 되었다는 김대문(金大問)의 화랑세기(花郞世紀) 원본(原本)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1989년 발견(發見)된 발췌화랑세기(拔萃花郞世紀), 28세 풍월주 오기공조(吳起公條)에 보면 아버지는 예원공(禮元公), 어머니는 우약공주(雨若公主)로 내물왕(奈勿王)의 10세손(世孫)이다. 화랑세기(花郞世紀)는 풍월주(風月主) 1세(540년)부터 마지막(681) 32세 풍월주신공(風月主信功)까지 기록(紀錄)하고 있다. 704년(聖德王4) 한산주(漢山州) 도독(都督)을 지낸 기록(記錄)이 있다.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6)

신라(新羅) 27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12대왕이다. 휘(諱)는 덕만(德曼)이고 진평왕(眞平王)의 장녀(長女)이다. 모(母)는 마야부인(摩耶夫人) 김씨(金氏)이다. 덕만(德曼)은 너그럽고 총명(聰明)하였으며 부왕(父王)이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어 나라사람이 덕만(德曼)을 세워 성조황고(聖祖皇姑)라 호(號)를 올렸다.

내치(內治) 외교(外交)에 힘썼으며 왕의 자제(子弟)를 당(唐)에 보내어 국학(國學)을 공부(工夫)하도록 했다. 외교(外交)와 국방(國防)에 주력(主力)하여 놀라운 치적(治績)을 올렸다. 왕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은 비담(毗曇)이 배신(背信)하여 반란을 일으켜 병든때 충격을 주어 서거(逝去)하였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654~660)

신라(新羅) 29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14대 왕이다. 휘(諱)는 춘추(春秋) 진지왕(眞智王)의 아들인 이찬(伊湌) 용춘(龍春)의 아들이다. 모(母)는 진평왕(眞平王)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비(妃)는 각간(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인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왕의 용자(容姿)가 준수(俊秀)하였으니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섬기며 벼슬은 이찬에 이르렀다. 군신(君臣)들의 추대(推戴)에 의해 654년 왕위(王位)에 올랐다.

656년 말갈(靺鞨),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의 침공을 받아 위태했으나 당(唐)의 원군(援軍)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일단 후퇴(後退)했다. 이찬(伊湌) 김유신(金庾信)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으며,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당군(唐軍)과 법민태자(法敏太子), 김유신장군(金庾信將軍)의 5만 군사(軍士)로 백제 계백장군(階伯將軍)이 이끄는 군사(軍士)를 무너뜨리자 백제군(百濟軍)이 항복(降伏)했다. 백제는 부흥(復興)을 꿈꾸는 무리들이 신라를 괴롭혔으나 백제는 완전(完全)히 괴멸(壞滅)되었다

문무왕(文武王) 재위(在位)(661~680)

신라(新羅) 30대 왕이며 김씨계(金氏系) 15대 왕이다. 휘(諱)는 법민(法敏),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의 장자(長子), 모(母)는 김씨(金氏)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계녀(季女)이며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다. 비(妃)는 자의왕후(慈儀王后)로 파진찬(波珍湌) 선품(善品)의 딸이다. 법민은 외모(外貌)가 출중(出衆)하고 총명(聰明)하며 지략(智略)이 많은이로 진덕왕(眞德王)때 당나라에 갔다가 당 고종(高宗)으로부터 대부경(大府卿)의 벼슬을 받았다. 665년(왕5)에 백제(百濟) 부흥군(復興軍)을 완전(完全)히 섬멸(殲滅)하고 당과 연합(聯合)하여 고구려(高句麗)를 평정(平定)했다. 당은 점령지(占領地)를 완전(完全)히 지배(支配)하려 하였으나 강력(强力)하게 밀어붙여 당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平壤)를 요동(遼東)으로 옮겼다. 676년,(왕16)에 통일성업(統一聖業)을 완수(完遂)했다.

경덕왕(景德王) 재위(742~764)

신라(新羅) 35대이고 김씨계(金氏系) 20대 왕이다. 휘(諱)는 헌영(憲英)이고 효성왕(孝成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효성왕(孝成王)이 아들이 없으므로 태자(太子)로 삼았던 헌영(憲英)이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였다. 비(妃)는 이찬(伊湌) 순정(順貞)의 딸이다. 왕은 즉위(卽位) 초부터 왕권(王權) 강화(强化)를 위해 관제(官制)를 정비(整備)하고 과감(果敢)히 개혁(改革)을 시도(試圖) 했다. 전문(專門) 학자(學者)와 관료(官僚)를 육성(育成)하는 등 유교정치(儒敎政治) 구현(具顯)에 토대(土臺)를 마련했다. 이 정책(政策)에 반기(反旗)를 든 상대등(上大等) 김은인(金恩仁)은 천재지변(天災地變)의 빈번(頻繁)함을 빌미로 극렬반대(極烈反對)했다. 757년(왕16) 지방행정조직(地方行政組織)인 구주오소경(九州五小京)과 중앙관제(中央官制)를 중국식(中國式) 한자(漢字)로 개정(改正)하는 등 제도개혁(制度改革)을 단행(斷行)했다.

원성왕(元聖王) 재위(785~798)

신라(新羅) 38대이고 김씨계(金氏系) 23대 왕이다. 휘(諱)는 경신(敬信)이고 내물왕(奈勿王)의 12세손(世孫)으로 아버지 효양(孝讓), 어머니는 박씨계오부인(朴氏繼烏夫人)이다. 비(妃)는 각간(角干) 김신술(金神述)의 딸이다. 왕위(王位)에 오를 때 일화(逸話)가 전한다 재위(在位) 14년간(年間) 계속(繼續)되는 흉년(凶年)과 어느 해는 매뚜기떼의 창궐(猖獗)에 이어 도적(盜賊)떼가 극성(極盛)을 부리자 왕은 당황했다. 이런 와중(渦中)에 왕 7년에는 시중(侍中)을 지낸 이찬(伊湌) 제공(悌恭)이 역모(逆謀)를 꾀했으나 주역(主役)을 잡아 처형(處刑)으로 끝낼수 있었다.

끊임없는 천재(天災)와 어려운 국정(國政)에도 과거제(科擧制)의 시초(始初)라 할 수 있는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정하여 많은 인재(人材)를 양성(養成)하여 등용(登用)할 수 있었다.

김균정(金均貞)

원성왕(元聖王)의 손자(孫子)이며 신무왕(神武王)의 아버지다. 흥덕왕(興德王)의 후사(後嗣)가 없자 왕위계승(王位繼承)싸움에 밀려 살해(殺害)되었고 아들 우징(祐徵)이 왕위(王位:神武王)에 오르자 성덕대왕(聖德大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신무왕(神武王) 재위 839(7個月)

신라(新羅) 45대 왕으로 김씨(金氏) 30대 왕이다. 휘(諱)는 우징(祐徵), 원성왕(元聖王)의 손(孫)인 상대등(上大等) 김균정(金均貞)의 아들이다. 희강왕(僖康王)의 종제(從弟)였으며 예징(禮徵)등이 궁궐(宮闕)을 점유(占有)하자 예를 갖춰 왕을 맞아 즉위(卽位)케 하였다. 재위839년 윤정월(閏正月)에 즉위(卽位)하고 7월에 훙(薨)하자 왕이 종기(腫氣)로 사망(死亡)했다고 전하고 있지만 이미 즉위(卽位) 이전(以前)에 득병(得病)이 있었다고 하였다. 당시(當時)의 사신(史臣)들이 왕위쟁탈(王位爭奪)의 사실(事實)을 기록(記錄)하여 후세(後世)에 알리는 것도 춘추(春秋)의 뜻이라고 했다.

문성왕(文聖王) 在位(839~856)

신라(新羅) 46대이고 김씨계(金氏系) 31대 왕이다. 휘(諱)는 경응(慶膺)으로 신무왕(神武王)의 태자(太子), 모(母)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즉위(卽位)부터 관심(關心)을 갖은 것은 청해진(淸海鎭)의 일로서 조서(詔書)와 함께 장보고(張保皐)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명했다. 그런데 즉위전(卽位前)에 장보고(張保皐)의 딸을 왕비(王妃)로 맞을 약속(約束)을 했으나 제신(諸臣)들이 들어주지 않자 장래(將來) 불안(不安)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방(豫防)하고자 재위8년(846)째 되는 해에 염장(閻長)을 보내어 죽였다. 그밖에 재위중(在位中) 모반(謀叛)하는 사건(事件)이 수차 있었고 천재(天災)가 있는 등 나라가 평안(平安)하지 못하였으며 대중국,왜(對中國,倭)와의 교류(交流)도 미약(微弱)해졌다. 왕19년에 병환(病患)으로 편하지 못하자 유조(遺詔)를 밝힌 후 7일만에 훙(薨)하였다.

 

인경(仁慶)

문성왕(文聖王)의 증손(曾孫) 민공(敏恭)의 둘째 아들.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조부(祖父)이시다. 형인 실홍(實虹)의 벼슬은 각간(角干)으로 추존(追尊) 의전왕(懿典王)이며, 화랑좌삼부(花郞左三部)의 좌화랑(左花郞)이었다. 인경(仁慶)은 이찬(伊湌)으로 신덕왕(神德王)때 각간(角干)을 지냈으며 추존(追尊) 의흥왕(懿興王)이다. 배위(配位)는 석씨(昔氏)이다

효종(孝宗)

서발한(舒發翰) 인경(仁慶)의 아들로 어릴때의 이름은 화달(化達)이다.

진골좌대화랑(眞骨左大花郞)으로 도성금성(都城金城)에서 천여명을 거느렸다. 국운(國運)이 쇠퇴(衰退)함을 안타까워하며 후백제견훤(後百濟甄萱)이 신라(新羅)의 서부(西部) 각 진지(陣地)를 압박(壓迫)하자 방어군(防禦軍)으로 나가 큰 전과(戰果)를 올리기도 하였다.

902년 효공왕(孝恭王)이 대아찬(大阿湌) 효종(孝宗)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며 916년 견훤(甄萱)이 대야성(합천)을 추허조(鄒許祖) 장군(將軍)을 앞세워 공격(攻擊)하자 당시(當時) 대야성주(大耶城主) 효종장군(孝宗將軍)은 이를 물리쳐 기세(氣勢)를 올리기도 했다. 아들 부(傅)가 왕이 되자 신흥대왕(新興大王)으로 추존(追尊)되었다.

경순대왕(敬順大王) (882~978) 재위(927~935)

신라(新羅) 56대 왕이고 김씨계(金氏系) 38대 왕이다. 휘(諱)는 부(傅)이고 문성왕(文聖王)의 6세손(世孫)이다.

이찬(伊湌) 효종(孝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헌강왕비(憲康王妃) 계아태후(桂我太后), 비(妃)는 박파사왕(朴婆娑王)의 25세 광우녀(光佑女) 죽방부인(竹房夫人)이다. 후비(后妃)는 왕건비(王建妃) 신명순성왕후유씨녀(神明順成王后劉氏女) 낙낭공주(樂浪公主), 별빈(別嬪) 순흥안씨(順興安氏), 제3비(妃)는 왕건(王建) 25비(妃) 성무부인평주박씨녀(成茂夫人平州朴氏女). 대왕(大王)은 882년 헌강왕(憲康王) 8년에 강생(降生)하고 첫 혼인(婚姻)은 18세 때인 899년, 내해왕 21세손 송희부인 석씨와 혼인(婚姻)하고 생 5남이 있음이 최근(最近) 자료(資料)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아버지인 효종(孝宗)은 지덕(智德)을 겸비(兼備)한 장군(將軍)으로서 출정(出征)하여 백제(百濟)의 공격(攻擊)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927년 금성(金城)이 견훤(甄萱)의 기습(奇襲)에 의하여 함락(陷落)되고 경애왕(景哀王)이 시해(弑害)된 후 대왕(大王)이 계위(繼位)하였다. 931년 2월23일 왕건(王建)이 50여 기병(騎兵)을 왕도기내(王都畿內)에 이르러 장군(將軍) 선필(宣弼)을 보내 안부를 물으니 당제상국유렴(堂弟相國裕廉)등이 성(城) 밖에 나가 맞아들였으며 93일간 머무른 후 5월26일 송도(松都)로 귀환(歸還)했다. 왕건(王建)이 왕도(王都) 금성(金城)에 머무는 동안 경순대왕(敬順大王)과의 사이에는 신라(新羅)의 장래문제(將來問題)에 대하여 제신(諸臣)과 협의(協議)한 후 양국(讓國)에 대한 협의(協議)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왕건(王建)이 상국(相國) 김유렴(金裕廉)등 일행(一行)이 동반북행(同伴北行) 양국(讓國)에 대한 구체적(具體的) 절차(節次)를 마련한 것 같다.

935년 경순대왕(敬順大王)은 나라를 고려(高麗)에 넘길 것을 군신(羣臣)들에게 말하자 신하(臣下)들의 의견(意見)이 일치(一致)하지 않자 대왕(大王)은 나라의 형세(形勢)가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는데 차마 죄없는 백성(百姓)을 참혹(慘酷)한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없다하고 시랑김봉휴(侍郞金封休)로 하여금 왕건(王建)에게 보내 양국(讓國)할 뜻을 전하였다.

손국후(遜國後)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송도귀부(松都歸附)의 뜻을 받아들여 11월3일 백료사서(百僚士庶)들이 왕경(王京)을 출발(出發) 12일 송도(松都)에 도착(到着)했으며 왕건(王建)과 재신(宰臣)들의 공대(恭待)를 받았고 유화궁(柳花宮)에 예우(禮遇)를 극진(極盡)히 하였다.

태자(太子) 일(鎰)과 분(奮) 그리고 맹장군(孟將軍)등 기만(幾萬)의 무리는 충청(忠淸), 강원도(江原道)로 발길을 옮기고 신라(新羅) 부흥운동(復興運動)의 거점(據點)인 설악산(雪嶽山)으로 향했다.

이때 태자(太子)와 동행(同行)한 죽방부인박씨(竹房夫人朴氏)와 덕주공주(德周公主)는 도중(途中) 월악산 미륵사에 일시 머물렀다.

왕자(王子) 전(佺), 곤(琨), 은 자경사(自經死)했으며 왕자(王子) 굉(鍠)은 김천 법수사를 거쳐 해인사(海印寺)에 은거(隱居)하였다. 왕자(王子) 명종(鳴鐘), 손(孫) 선웅(善雄), 순웅(順雄)은 송도(松都)로 동반(同伴)하였다.

11月22日에는 왕건(王建)의 장녀(長女) 낙낭(樂浪)과 혼인(婚姻)하였으며, 또 왕건(王建)이 신라(新羅) 왕실(王室)에 청혼(請婚)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종백부(從伯父) 억렴(億廉)의 딸 덕용(德容)과 혼인하였으며 이분이 바로 왕건(王建)의 제오비(第五妃) 신성왕후(新聖王后) 김씨(金氏)이다.

왕도금성(王都金城)을 경주(慶州)로 개칭(改稱)하였으며 신란궁(神鸞宮)을 경순왕(敬順王)에게 주고 식읍(食邑) 8000호를 주고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을 삼아 부호장(副戶長)이하 관직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그 후 제천(堤川) 백운이궁(白雲離宮) 고자암(高自庵)을 비롯하여 원주(原州) 용화사별궁(龍華寺別宮), 용문사해당전(龍門寺海棠殿), 연풍(延豊)의 의황산양산전(義皇山陽山殿), 보령(保寧) 숭암산(崇巖山) 성주사이궁(聖住寺離宮)등에서

말년을 보냈으며 978년4월4일 유화궁(柳花宮)에서 향년(享年) 97세로 훙거(薨去)하셨다.

김일(金鎰) 912(神德王1)~ ?

휘(諱)는 일(鎰) 자(字)는 겸용(謙用)으로 경순대왕비(敬順大王妃) 죽방부인박씨(竹房夫人朴氏)의 장남(長男)으로 월성(月城)에서 태어났으며 경순대왕(敬順大王)이 즉위(卽位)한 그해 가을에 태자(太子)에 책봉(冊封)되었다. 929년 상국(上國) 김유렴녀(金裕廉女) 영란(英蘭)과 혼인(婚姻)하였으며, 930년(年) 장남(長男) 선웅(善雄)과 932년 차남 순웅(次男順雄)이 출생(出生)하였다.

935년10월 경순대왕(敬順大王)은 양국(讓國)에 관한 군신회의(羣臣會議)를 열어 논의(論議)하였으나 군신(羣臣)의 의논(議論)은 혹은 가(可)하다 하고 혹은 불가(不可)하다고 하였다.

태자(太子)가 말하기를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듯이 천명(天命)이 있으니 마땅히 충신의사(忠臣義士)와 더불어 민심(民心)을 수합하여 스스로 굳게 함이 다한 후에 말것이니 어찌 천년 사직(社稷)을 하루아침에 쉽사리 남에게 내어 주겠습니까?” 하였다.

대왕(大王)은 외롭고 위태함이 이와같아 형세(形勢)는 능히 온전히 할 수 없으니 백성(百姓)을 차마 내가 참혹(慘酷)하게 할 수 없다. 하고 대왕은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하였다.

태자(太子)는 통곡(痛哭)하면서 대왕(大王)과 이별(離別)하고 죽방모후(竹房母后)를 모시고 누이동생 덕주공주 그리고 충신열사와 맹장군(孟將軍)등 일만여인은 왕경(王京)을 떠나 영천(永川)의 금강산성(金剛山城)과 모자산(母子山)에서 유숙(留宿)하다가 군위(軍威)의 적라산(赤羅山)을 지나 상주(尙州) 천봉산(天鳳山)을 거쳐 문경(聞慶)의 조령(鳥嶺)을 넘어 괴산(槐山) 연풍(延豊)의 계립령마골참(雞立嶺摩骨站)에서 류진(留陣)하고 충주(忠州) 월악산(月岳山)에 입산(入山)하여 덕주산성(德周山城)을 쌓고 덕주사(德周寺)와 미륵탑(彌勒塔)을 쌓고 구국(救國)기도(祈禱)를 올리고 덕주공주(德周公主)는 이곳에 세천(世阡)되었다. 태자일행(太子一行)은 충주(忠州) 국망산(國望山)을 넘어 원주(原州)의 치악봉(雉岳峰)을 거쳐 양평(楊平)의 미지산(彌智山)인 용문사(龍門寺) 경내(境內)에 와서 은행목(銀杏木)을 심고, 홍천(洪川)의 지왕동(至王洞)에서 일행(一行)과 수비대(守備隊)가 잠정(暫定) 주둔(駐屯)하다가 인제(麟蹄)의 한계령(寒溪嶺)에서 한계성(寒溪城)을 쌓고 궁전(宮殿)과 군창(軍倉)과 옥녀탕(玉女湯)과 천제단(天祭壇)을 지었으며, 금부리(金富里)와 갑둔리(甲屯里)에는 왕족(王族)과 유족들이 웅거(雄據)하여 제2의 신라(新羅)를 재건(再建)할 목적(目的)으로 옥대곡(玉垈谷)에 체제(體制)의 질서유지(秩序維持)를 위하여 옥사(獄舍)를 설치(設置)하고, 강병곡(降兵谷)에 추종자(追從者)들의 통치부(統治府)를 마련하고, 성황당(城隍堂)에 방목(防木)을 식재(植栽)하고, 만가곡(挽歌谷)에는 맹창골에서 맹창장군(孟昶將軍)의 군훈련장(軍訓鍊場)이 있고, 태자(太子)가 가져온 옥새(玉璽)를 옥새암(玉璽岩)속에 소장(所藏)하고, 천지곡(天志谷)에 천제단(天祭壇)을 설치(設置)하여 구국(救國)의 기도(祈禱)를 올리고, 태자(太子)가 웅거(雄據)하는 풍남대(風喃垈)를 건축(建築)하고, 단지곡(斷趾谷)에는 단죄소(斷罪所)를 설치(設置)하고, 수령동(首軨洞)에 수거고(手車庫)를 설치(設置) 품(稟)바위에는 비상시(非常時)를 대비(對備)하여 군량(軍糧)을 비축(備蓄)하고 양구(楊口) 노고성(老姑城)의 고적봉군사전략기지(鼓笛峰軍士戰略基地)를 형성(形成)하였으며, 군량리(軍糧里)에는 군량미(軍糧米)를 비축(備蓄)하는 창고(倉庫)를 설치(設置)하였다. 금화(金化)는 신라(新羅) 부흥운동(復興運動)의 중요거점(重要據點)이었으며 안전(安全)한 이곳에서 머므르시던 태자(太子)의 어머니 박씨왕비(朴氏王妃)가 훙서(薨逝)하자 삼신산(三神山) 삼갑사(三甲寺) 인근(隣近)에 세천(世阡)되니 너무도 비통(悲痛)하여 개경(開京)을 향하여 망배(望拜)한 후 이제 다시는 돌아보지 않으리라 하고 돌아와 세천(世阡)하시니 신라재건(新羅再建)이 미급(未及)되 인제유민(麟蹄遺民)들이 금부리(金富里)등 3곳에 전각단간(殿閣單間)을 지어 영혼(靈魂)을 추모(追慕)하고, 단오절(端午節)과 중양절(重陽節)에 천년간(千年間)을 행사(行祀)하였으며, 그 애절(哀切)한 사연(事緣)을 전하고 있다.

 

김굉(金鍠) 914(神德王3)~ ? (梵空公)

자(字)는 진용(珍用) 법명(法名)은 범공(梵空) 시호(諡號)는 의영(懿英)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차남(次男)이다. 아버지 경순대왕(敬順大王)이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태자(太子) 김일(金鎰)과 극력반대(極力反對)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통곡(痛哭)하며 부인(夫人):옥저하씨(沃沮河氏) 원호(元澔)의 딸)과 두 아들을 버리고 김천(金泉) 법수사(法水寺)에서 삭발(削髮)하고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가 생을 마쳤다. 평장사(平章事)에 제수(除授)하고 묘는 개풍군영남면용흥리(開豊郡嶺南面龍興里)에 있다. 장남(長男) 운발(雲發)은 나주군(羅州君)에 책봉(冊封)되어 후에 나주김씨(羅州金氏)로 분적(分籍)했다.

김종(金鐘) 916(神德王5)~ ? (永芬公)

시호(諡號)는 영분(永芬). 자(字)는 명종(鳴鐘), 군호(君號)는 경주군(慶州君)이다. 경순대왕비(敬順大王妃) 죽방박씨(竹房朴氏)의 3남으로 부왕(父王)이 손국(遜國)할 때 일(鎰), 굉(鍠) 양형(兩兄)이 개골산(皆骨山), 해인사(海印寺)로 각각(各各) 떠나자 부왕(父王)을 따라 개경(開京)으로 백료(百僚) 사서(士庶)와 함께 갔다. 고려초기(高麗初期) 어지러운 세파(世波)에 부왕(父王)의 뜻을 잘 헤아려 효성(孝誠)을 다함으로 음덕(蔭德)을 힘입어 번족(蕃族)함과 시대(時代)에 따라 나라와 민족(民族)에 공헌(貢獻)한 많은 인걸(人傑)이 배출(排出)되었다. 배위(配位)는 박씨(朴氏)이며 묘는 경주(慶州) 형제산북동방동임좌(兄弟山北東方洞壬坐)이다.

김감(金鑑) 937(高麗太祖20)~1028(顯宗20) (大安君)

字는 은열(殷說)이고, 벼슬은 시중시랑보국평장사(侍中侍郞輔國平章事), 군호(君號)는 대안군(大安君)이다. 왕건태조후비(王建太祖後妃) 신명순성태후유씨녀(神明順成太后劉氏女) 낙낭공주(樂浪公主)와 경순왕(敬順王)과 혼인(婚姻) 경순대왕(敬順大王)의 4째아들이다. 배위(配位)는 경주최씨(慶州崔氏)이며, 父는 태자태사한림원령언위(太子太師翰林院令彦撝)이다. 묘는 개성부북십리종암하(開城府北十里鍾岩下) 오룡산남록임좌(五龍山南麓壬坐)이다

김순웅(金順雄) 932(高麗太祖12)~ ? (大將軍公)

태자김일(太子金鎰)의 2남으로 배위(配位)는 강능김씨(江陵金氏) 대상선환(大相宣喚)의 딸이다. 경순대왕(敬順大王)이 고려(高麗)에 귀부(歸附)할 때 형(兄) 선웅(善雄)과함께 송도(松都)에 와서 귀족(貴族)들의 양육(養育)을 받았다.

일찍이 응양군낭장(膺楊軍郎將)을 시작(始作)으로 거란등 북방(北方)의 여러 부족(部族)들이 침략(侵略)이 잦은 변경방어(邊境防禦)에 함께 하였으며 안서홀성주(安西忽城主:現 海州)를 역임(歷任), 각지(各地)의 축성(築城)을 선도하였고 황해도병마절도사(黃海道兵馬節度使)가 되어 고려(高麗) 4대 광종(光宗)의 북방방위(北方防衛)에 큰 몫을 하여 왕권신장(王權伸長)과 제도정비(制度整備)를 할 수 있었다. 장군(將軍)은 육위문대장군(六衛門大將軍)으로 승진(昇進)하였다.

공(公)의 아들 인위(因渭), 손(孫) 원정(元鼎)은 고려초(高麗初)의 명신(名臣)이다. 졸년(卒年)은 알수없다.

김숙승(金叔承) ? ~1011(顯宗2)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둘째아들. 글안의 성종(聖宗)이 침입(侵入)했다가 돌아갈 때에 귀주별장(龜州別將)으로 그들의 퇴로(退路)를 막아 1만여(萬餘)의 군사(軍士)를 목베었다. 현종(顯宗) 10년에 공신(功臣)에 녹권(錄券)되고 뒤에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의 호(號)를 받고 장군(將軍)으로 추증(追贈) 되었다. 안동김씨(安東金氏)의 분관조(分貫祖)이다.

김위영(金魏英) (貞簡公)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시며 대보공(大輔公)의 32세 경순대왕(敬順大王)의 5세손(世孫)이고 김부식(金富軾)의 증조(曾祖)이시다.

경순대왕(敬順大王)이 935년 신라(新羅)를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할 때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주었으며 대왕(大王)이 경주(慶州)의 사심관(事審官)이 되어 부호장(副戶長) 이하(以下)를 다스리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實際)로 부호장(副戶長) 이하(以下)를 지명(指名)한 기록(記錄)은 없고 김위영(金魏英)은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보면 경주주장(慶州州長)으로 봉직(奉職)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사심관제도(事審官制度)는 1283년(忠烈王9)에 폐지(廢止)되었다.

김원충(金元冲)

경순왕의육세손, 경주주장(慶州州長) 위영(魏英)의 아들 정종(靖宗)과 문종(文宗)의 장인, 1036년(정종2) 상서우승(尙書右丞)으로 진봉사(進奉使), 고주(告奏)사(使)가 되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옹진에서 파선(破船)되어 돌아왔고, 이듬해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연호(年號)의 반포(頒布)를 요청(要請) 했다. 1040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있을 때 딸이 靖宗의 비(妃:容節德妃)가 되었다. 1047년(文宗1)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정종묘정에 배향되었다.

김인위(金因渭) 955(光宗6)~1024(顯宗15)

대장군(大將軍) 김순웅(金順雄)의 아들로 고려(高麗) 전기(前期)의 문신(文臣)이며 벼슬은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딸이 현종(顯宗)의 원순숙비(元順淑妃)로 책봉(冊封)되자 상서좌복야참지정사주국경조현개국남(尙書左僕射參知政事柱國京兆懸開國男)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받고 치사(致仕)했다.

김근(金覲)

경순대왕(敬順大王)의 7세손 김부식(金富軾)의 아버지 고려(高麗) 중기(中期)의 문신(文臣)으로 인종(仁宗)때의 학자(學者).이다.

1080년(文宗34) 유홍(柳洪), 박인량(朴寅亮)과 더불어 송(宋)나라에 사신(使臣)으로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박인량(朴寅亮)과 그의 시문(詩文)에 감탄(感歎)하여 소화집(小華集)이라는 문집(文集)을 만들었다. 1086년(宣宗3)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성균시(成均試)를 관장(管掌)하고 국제주좌간의대부(國際酒左諫議大夫)에 올랐다. 아들 넷이 모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였으며 사한(司翰)으로 문명(文名)을 빛냈다.

김심언(金審言)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셋째아들 렴(濂)의 셋째 아들 고려 성종(成宗)때 등과(登科)하였으며 우보궐겸기거주(右補闕兼起居主)가 되고 1010년(顯宗1) 예부상서(禮部尙書)를 거쳐 1015년(顯宗6)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에 오른 뒤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아갔다. 오성군(筽城君), 영광군(靈光君)에 봉(封)해졌다. 성종(成宗)께 시정지침(施政指針) 자료(資料)를 냈고 7대간의 왕조실록(王朝實錄)을 낸 문한(文翰)이다.

정중부, 이의방등 무신(武臣)등에 의해 멸문(滅門)의 화(禍)를 당해 세거지(世居地) 평장동(平章洞)에서 모두 흩어졌다. 982년 조부(祖父) 대안군(大安君)과 함께 봉은사(奉恩寺)에서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처음으로 제(祭)를 올렸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영광김씨(靈光金氏)로 분적(分籍) 하였다.

김인관(金仁琯) 1057(文宗16)~1148(睿宗2) (太師公)

시호(諡號)는 문순(文純)․官은 태사(太師)이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6세손으로 양검(良儉)의 아들이다. 순종비선희왕후(順宗妃宣禧王后)와 남매지간(男妹之間)이다. 1110년(睿宗5)에 과거(科擧)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고 연괴(連魁)하였는데 이는 모든 과목(科目)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였다.

공(公)은 박학(博學)한 대석학(大碩學)으로 왕(王)으로부터 금화모정(金花帽鞓)과 말 1필을 하사(下賜)받고 농지(農地) 20결(結)도 받았다. 1115년(睿宗10) 요(遼)나라의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는 등 외교(外交)에도 발군(拔群)의 역할(役割)을 하였다.

벼슬은 낭중위위시경조산대부(郎中衛尉寺卿朝散大夫)

태자태사검교태사(太子太師檢校太師) 위위시경(衛尉寺卿:吏曹判書)를 역임(歷任)하였으니 백관(百官)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천서씨(利川徐氏)이며 욱(勗)의 딸이다.

김부식(金富軾) 1075(文宗29)~1151(毅宗5)

경순대왕(敬順大王)의 8세손(世孫), 근(覲)의 아들, 자(字)는 입지(立志), 호(號)는 뇌천(雷川), 부필(富弼), 부일(富佾)의 아우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해주(海州))의 사록(司祿)․참군사(參軍事)가 되고, 직한림(直翰林), 우간의(右諫議)를 거쳐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다. 1122년(仁宗元年) 이자겸(李資謙)의 례(禮)에 벗어난 행위(行爲)를 시정(是正)케 하고 예종실록(睿宗實錄)을 수찬(修撰)하였다. 예종(睿宗)12년에 묘청(妙淸)의 서경천도설(西京遷都說)을 중지(中止)케 하고 묘청(妙淸)이 서경(西京)에서 반란(叛亂)을 하자 진압군(鎭壓軍)의 원수로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난(亂)을 일으키자 평정(平定)하고 수충정난공신(輸忠靖難功臣)의 칭호(稱號)를 받았다.

또 1145년(仁宗23)에 삼국사기(三國史記) 50권(卷)을 편찬(編纂)하였다. 그는 의종(毅宗) 즉위년(卽位年)에 낙랑개국후(樂浪開國侯)에 봉해지고 인종실록(仁宗實錄)을 주재(主宰)하였다.

중서령(中書令)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문열(文烈) 인종묘정(仁宗廟廷)에 배향(配享)되었다. 김문열공문집(金文烈公文集)이 있다.

김인경(金仁鏡) 1168(毅宗22)~1235(高宗22)

초휘(初諱)는 양경(良鏡)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며 파조(派祖) 영분공(永芬公)의 10세손, 아버지는 합문지후(閤門祗侯)를 지낸 김영고(金永固)이다, 명종(明宗)때 문과차석(文科次席)에 급제(及第)하고 예부낭중(禮部郎中)을 거쳐 추밀원우승선(樞密院右丞宣)이 되었고 1227년(高宗14) 수찬관(修撰官)으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수찬(修撰)하였다. 직사관(直史官)을 거쳐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으며 고종초(高宗初) 조충(趙冲)이 강동성(江東城)의 거란을 토벌(討伐)할 때 판관(判官)으로 출전(出戰)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 해 동진의 군사(軍士)가 쳐들어오자 지중군병마사(知中軍兵馬使)가 되어 의주(宜州)에서 싸워 패전(敗戰)하여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좌천(左遷)되었다. 그후 형부상서한림학사(刑部尙書翰林學士)에 오르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인재(人材)를 취하였다. 1232년(高宗19) 강화천도(江華遷都) 이듬해 왕경유수병마사(王京留守兵馬使)가 되고 정당문학이부상서감수국사(政堂文學吏部尙書監修國史)를 지내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이르렀다. 문무(文武)를 겸하였으며 시문(詩文)에 능하고 예서(隸書)에도 뛰어났다.

김시흥(金時興)

시호(諡號)는․문열(文烈)이며,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아들 대안군은열(大安君殷說)의 9세손(世孫)이다. 고려인종(高麗仁宗)때 문과(文科)에 올라 한림(翰林)울 거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를 지냈고 벼슬은 광록대부평장사(光祿大夫平章事)에 이르렀다.

북방방어(北方防禦)를 튼튼히 한 공로(功勞)로 주국상낙군개국남식읍천호(柱國上洛君開國男食邑千戶)를 하사(下賜)받았다.

금령군(金寧君)에 봉(封)해지고 금녕(金寧)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금녕(金寧)은 김해(金海)의 고호(古號)로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始祖)로하는 김해김씨(金海金氏)와 대보공(大輔公) 알지(閼智)를 시조(始祖)로 하는 금녕김씨(金寧金氏)로 양분(兩分)되었다. 금녕김씨(金寧金氏)의 본관(本貫)도 고려말(高麗末)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바뀌면서 금녕김씨(金寧金氏)도 김해(金海)로 부르게 되어 한때는 김해김씨(金海金氏)를 선김(先金), 금녕김씨(金寧金氏) 후김(後金)으로 구별(區別)하기도 했다. 조선(朝鮮)에 들어와서 충의공(忠毅公)김문기(金文起)의 이름이 나면서 김문기(金文起)의 후손(後孫)들을 자칭(自稱)하고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힌다 하여 헌종(憲宗)12년(1846) 격쟁(擊錚)하여 헌종(憲宗)으로부터 후김해김씨(後金海金氏)의 후손(後孫)은 모두다 경주김씨(慶州金氏)로 복관(復貫)하라는 윤허(允許)를 받고 관향(貫鄕)을 경주김씨(慶州金氏)로 하였다. 백촌공(白村公) 정통시비(正統是非)가 있었으나 확정판결(確定判決)을 못 받았다.

왕조실록(王朝實錄)과 안동권씨족보(安東權氏族譜), 영산신씨족보(靈山辛氏族譜)에서 백촌공(白村公)의 정통(正統)은 경주김씨(慶州金氏)로 이미 명기(明記)되어 있어 경주김씨(慶州金氏) 백촌공파(白村公派)가 정통(正統)이라 하였다.

김요(金瑤) (文宣公)

자(字)는 병옥(秉玉), 시호(諡號)는 문선(文宣)이며,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손(孫) 궤(軌)의 2男, 1292년(忠烈王18) 등과(登科)했으며 상서병부낭중(尙書兵部郎中)이 되었고 그해 몽고(蒙古)의 강압(强壓)으로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한 후 낭장(郎將)으로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에 파견(派遣)되어 몽고(蒙古)의 약탈(掠奪), 도적(盜賊)들의 민가습격(民家襲擊)등으로 피폐(疲弊)한 주민(住民)의 민심(民心)을 위무진정(慰撫鎭靜)한 공(功)으로 벼슬이 삼중대광상장군계림부원군(三重大匡上將軍雞林府院君)에 올랐다. 문무(文武)를 겸한 명신(名臣)으로 시(詩)에 능(能)하였다.

김승무(金承茂) (翰林侍御史公)

초명(初名)은 영(營), 정숙공(貞肅公) 김인경(金仁鏡)의 손자(孫子) 궤(軌)의 3남이며 용모(容貌)가 단아(端雅)하고 재식(才識)이 있었으며 일찍 등과(登科)하여 벼슬은 한림원사한(翰林院史翰)이 되었고 권신(權臣) 김준(金俊)의 총애(寵愛)를 받아 시어사(侍御史)가 되었다, 이때 뇌물(賂物)을 받은 승선(承宣) 허공(許珙)을 탄핵(彈劾)하다가 미움을 사기도 했고,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역임(歷任)했다.

김군수(金君綏)

호(號)는 설당(雪堂)이며, 김부식(金富軾)의 손자(孫子), 문신(文臣) 김돈중(金敦中)의 아들, 일찍이 문학(文學)에 재능(才能)을 보여 1194년,(明宗24) 문과(文科)에 장원급제(壯元及第),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고종(高宗) 초에 시랑(侍郞)으로 각도(各道)의 찰방사(察訪使)가 되어 민정(民情)을 시찰(視察)했다. 고종(高宗)5년 거란병이 침입(侵入)하자 조충(趙冲)의 후임(後任)으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청백(淸白)과 애민(愛民)으로 이름이 높았다. 병마사(兵馬使) 김취려(金就礪)의 미움과 녹사(錄事) 노인수(盧仁綏)의 참소를 받아 한남(漢南:현 수원)으로 귀양갔다. 그 후손을 수소문(搜所聞)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시문(詩文)에 능(能)하여 보조국사비명(普照國師碑銘)을 찬(撰)하고 대(竹) 그림을 잘 그렸다.

김남기(金南基) 1201(神宗4)~1275(忠烈王1)

(禮儀判書公)

자(字)는 정숙(定叔) 호(號)는 포옹(浦翁) 예의판서(禮儀判書)이며, 태자김일(太子金鎰)의 10세손이다.

공(公)이 등과(登科)한 즈음 1231년부터 몽고(蒙古)의 살례탑(撒禮㙮)이 대군(大軍)을 이끌고 고려(高麗)를 침공(侵攻)하기 시작(始作)하는 때였다. 예부낭중(禮部郎中)에 임(臨)하면서 몽고군(蒙古軍)이 닥치는 곳마다 무고(無辜)한 백성(百姓)의 도륙(屠戮)과 약탈(掠奪)을 자행(恣行)하자 지식인(知識人)의 동요(動搖)를 막는데 큰 역할(役割)을 하였으며 봉익대부예의판서(奉翊大夫禮儀判書)에 오르면서 민생위무(民生慰撫)와 안정(安定), 국난극복(國難克服)에 학자(學者)들과 힘을 기울였다. 벼슬을 더하여 진현관대제학지춘추관사겸성균대사성지제고(進賢舘大提學知春秋館事兼成均大司成知制誥)에 이르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월성박씨(月城朴氏)이며 제학(提學) 건(健)의 따님이다.

김견명(金見明) 1206(희종2)~1289(충열왕15)

승(僧) 일연(一然) 호(號)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김언필(金彦弼)의 아들로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著者). 경북경산(慶北慶山)에서 출생(出生), 1214년,(高宗1)년 9세때 해양(海陽):광주(光州),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學問)을 닦다가 1219년(高宗6) 대웅(大雄)스님의 계(戒)를 받고 승려(僧侶)가 되었다. 1227년(高宗14) 승과(僧科)에 급제(及第)하였으며 1237년(高宗24)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高宗33) 선사(禪師),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되었으며 1261년(元宗2) 왕(王)의 부름을 받고 상경(上京), 선월사(禪月寺)의 주지(住持)가 되고 목우화상(牧牛和尙)의 법통(法統)을 계승(繼承)했다. 1268년 임금의 뜻을 받들어 운해사(雲海寺)에서 큰스님 200명을 모아 대장경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열고 그 맹주(盟主)가 되었다. 1277년 운문사(雲門寺) 주지(住持)가 됐는데, 이때부터 본격적(本格的)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 집필(執筆)에 착수(着手)했다. 1283년 국존(國尊):국사(國師)으로 추대(推戴)되어 원경충조(圓經冲照)의 호(號)를 받고, 이해에 노모(老母)의 봉양(奉養)을 위해 고향(故鄕)에 돌아왔다. 이듬해 조정(朝廷)으로부터 토지(土地) 100경(頃:3만평)을 받아 군위(軍威)에 인각사(麟角寺)를 중건(重建)했고 궁궐(宮闕)에 들어가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무신난(武臣亂)이 일어나 최씨(崔氏) 정권이 안정되는 때에 나서 몽고침입(蒙古侵入)의 질곡의 시대에 살다가 그 압제(壓制)를 받던 시기(時期)에 살다가 갔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나라의 신화(神話)와 민간설화(民間說話)를 수집(蒐集)하고 특히 희귀(稀貴)한 향가(鄕歌), 불교관계(佛敎關係)를 수록(收錄)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우리 고대사(古代史) 연구(硏究)의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김방(金昉) (隋城伯)

태자(太子) 김일(金鎰)의 11세손, 김남미(金南美)의 4남, 몽고(蒙古)가 고려(高麗)를 복속(服屬) 시키자 일본정벌(日本征伐)을 요구(要求), 그 준비(準備)에 몰두(沒頭)하고 삼별초군(三別抄軍)의 저항(抵抗)으로 고려(高麗)가 무척 어려운 때 백성(百姓)을 돌볼 수 없는 시기(時期)에 부임(赴任)한 곳의 민심(民心)을 바로잡아 민생(民生)을 안정(安定)시키고 기강(紀綱)을 바로잡아 잘 다스려 삼중대광(三重大匡:鄕職一品) 수성백(隋城伯)에 봉(封)해졌다. 배위(配位)는 예산박씨(禮山朴氏)이며 시중 원익(侍中 元翊)의 따님이다. 묘(墓)는 영변군입원면명당리옥수동후록(寧邊郡立元面明堂里玉水洞後麓)

김흔(金琿) 1239(高宗26)~1311(忠宣王3) (忠宣公)

시호(諡號)는 충선(忠宣)이며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後 문간공경손(文簡公 慶孫)의 3남 충열왕(忠烈王)때의 공신(功臣) 1255년(高宗42) 18세에 석능직(碩陵直)이 되어 내시(內侍)에 적(籍)을 두었다가 감찰사(監察使)를 거쳐 순경왕후(順敬王后)의 종제(從弟)로서 총애(寵愛)를 받아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친하던 김문비(金文庇)가 죽자 여자관계(女子關係)로 탄핵(彈劾)을 받고 귀양갔다가 풀려 우승지(右丞旨), 부지밀직사첨의참리(副知密直司僉議叅理),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 중찬(中贊) 등을 지냈다. 왕이 원(元)나라에 들어갔을 때 왕을 대신(代身)하여 행성(行省)을 잘 처리했다.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이 되고 삼사사(三司事)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에 봉(封)해졌다.

김남보(金南寶) (兵曹判書公)

자(字)는 치노(致老)이며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손(孫). 병부시랑 정윤(兵部侍郞 正潤)의 장남(長男), 등과(登科)한 시기(時期)는 원(元)나라가 행성(行省)을 설치(設置)하고 고려(高麗)에 대하여 극도(極度)의 간섭(干涉)을 하던 때였다. 1335년에는 전의부령 이곡(典儀副令李穀)이 동녀징발(童女徵發)을 금지(禁止)하는데 대한 동조(同調)를 하기도 했다.

1340년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서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때도 도왔다. 하는 일마다 순조(順調)로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제수(除授)되었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 묘(墓)는 경기도남양주시진건면건천리고현자좌합폄(京畿道南楊州市眞乾面乾川里羔峴子坐合窆)

김인찬(金仁贊) 1336(忠肅王5)~1392(李太祖1)

(益和君)

자(字)는 의지(義之), 호(號)는 의암(毅庵), 시호(諡號)는 충민(忠愍) 익화군(益和君), 시조(始祖) 대보공(大輔公)의 45세손 대안군 은열(大安君 殷說)의 17세손으로 공민왕(恭愍王)때 진사(進士)가 되었고 우왕(禑王)때는 북청천호장(北靑千戶長)으로 있으면서 백금(白金) 50냥으로 굶주리는 백성(百姓)을 도왔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소문(所聞)을 듣고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도원결의(桃園結義)를 맺었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시(威化島回軍時)에 함께 하였다. 1390년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중추원사(中樞院使)가 되었으며 개국후(開國後)에는 태조(太祖) 친위병(親衛兵)을 지휘(指揮)했다. 1392년에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익화군(益和君)에 책봉(冊封)되었다.

김균(金稛) 1341년(忠惠王2)~1398년(太祖7) (雞林君)

경순대왕(敬順大王)의 15세손, 공역승(供驛丞) 남미(南美)의 현손(玄孫), 예빈경(禮賓卿) 수(粹)의 증손(曾孫), 예의판서(禮儀判書) 기연(起淵)의 손자(孫子), 지문하부사공(知門下府使公) 지윤(智允)의 장남(長男), 1360년 성균시(成均試)에 등과(登科) 1370년 삼사판관(三司判官), 1380년 밀직좌승선(密直左丞宣), 1392년 중추원부사(中樞院府使), 그해 7월11일 12공신회맹문(功臣會盟文)을 썼으며 이성계(李成桂)가 왕위(王位)에 오르면서 조선익대개국공신(朝鮮翊戴開國功臣)에 책록(策錄)되고 1395년 계림군(雞林君)에 봉(封)해졌다

1398년8월에는 추충협찬정난개국정사공신(推忠協贊靖難開國靖社功臣)이되었고 제숙공(齊肅公)의 시호(諡號)를 추증(追贈)받으시고 1666년 9대손 시진(始振)에 의해 계림부원군(雞林府院君)으로 특상추봉(特上追封)되셨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이며 현(鉉)의 따님이나 일찍 돌아가시고, 정경부인무송윤씨(貞敬夫人茂松尹氏)는 식(湜)의 따님이다.

김헌(金禾憲) (松岡公)

자는 경한(敬漢), 호는 송강(松岡)이며, 경순대왕(敬順大王)의 15세손이고 지문하부사공(知門下府事公) 지윤(智允)의 2남, 고려말(高麗末) 왜구(倭寇)가 서남해안(西南海岸)을 약탈(掠奪)하는 때에 등과(登科)하여 이부낭중(吏部郎中)을 거쳐 시랑(侍郞)이 되었으며 어려운 시기(時期)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歷任)하였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함흥(咸興)에 머므르자 관직(官職)을 사양(辭讓)하고 영흥(永興)에 자리를 잡아 번족(蕃族)하였다. 배위(配位)는 남양홍씨(南陽洪氏) 준(浚)의 따님이다.

김서(金禾黍) (貞肅公)

자(字)는 경윤(敬倫), 시호(諡號)는 정숙(貞肅)이며, 경순대왕(敬順大王)의 15세손으로 좌승선(左丞宣) 지선(智宣)의 장남이다.

용모(容貌)가 장대(壯大)하고 총명(聰明)하여 일찍이 공민왕(恭愍王)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낭중(郎中)으로 입사(入仕)한 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侵入)등으로 도탄(塗炭)에 빠져있는 민생(民生)의 구휼(救恤)에 힘썼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昇進)하면서 더욱 선행(善行)을 베풀었다. 배위(配位)는 전주이씨(全州李氏)이며 인백(仁伯)의 따님이다.

김을권(金乙卷) 1344(忠惠王5)~ ? (兵曹判書公)

자(字)는 치보(穉寶), 호(號)는 춘정(春汀)이며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5세손이고 감역(監役) 천응(天應)의 장남(長男)이다. 비교적(比較的) 어린 나이에 등과(登科)한 후 병조정랑(兵曹正郞)으로 1376년 왜구(倭寇)가 공주(公州)를 공략(攻略)할 때 종군(從軍)하기도 하였으며 그때 서해안(西海岸)의 백성(百姓)들이 두려움속에 살고 있음을 보고 여러 대처(對處) 방안(方案)을 제시(提示)하기도 하였고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임(臨)하면서 민가들의 어려움을 돕다가 관직을 그만두고 양주건천(楊州乾川)에 살았다. 배위(配位)는 오천정씨(烏川鄭氏)이며 기원(琪元)의 따님이다.

김온(金穩) (忠文公)

자(字)는 경중(敬重), 시호(諡號)는 충문(忠文)이며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역임(歷任)하셨다. 지문하부사공(知門下府使公) 지윤(智允)의 3남으로 등과(登科)후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 있으며 고려(高麗)가 운명(運命)을 다하여 가고 기강(紀綱)이 해이(解弛)해짐을 한탄(恨歎)하고 관직(官職)을 사직(辭職), 처자(妻子)를 버리고 입산후(入山後) 밖에 나오지 않고 고려(高麗)에 충성(忠誠)을 종신(終身)토록 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충성심(忠誠心)을 칭찬(稱讚)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증직(贈職)하였다

김능(金稜) (縣令公)

자(字)는 성문(誠文), 경순대왕(敬順大王)의 15세손으로 공민왕(恭愍王)때 음보(蔭補)로 입사(入仕)하여 낭중(郎中), 시랑(侍郞)을 역임(歷任)했고 1391년 고성현령(固城縣令)으로 부임(赴任)했다가 조선국(朝鮮國)이 건국(建國)되자 곧 사임(辭任)하고 개풍(開豊:豊德)으로 귀향(歸鄕)했다. 배위(配位)는 파평윤씨(坡平尹氏) 경노(敬老)의 따님이며, 묘소(墓所)는 一云 안동(安東)이시다.

김을적(金乙適) 1346(忠穆王2)~1430(世宗12)(府使公)

자(字)는 치당(穉堂),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5세손, 감역(監役) 천응(天應)의 2남으로 등과후(登科後) 찰방(察訪)을 시작(始作)으로 순문사가 되면서 왜구(倭寇)의 약탈(掠奪)이 심한 동해안(東海岸)을 순행(巡行)하며 격려(激勵)하였다. 1382년3월에는 왜구(倭寇)가 평해(平海), 삼척(三陟), 울진(蔚珍), 우계(羽溪),등의 해안(海岸)을 덥치고 6월에는 경산(慶山), 대구(大邱)등 내륙(內陸)에 침투(浸透)하였을 때 울주부사(蔚州府使)가 되었고 잘 방어(防禦)했다. 이후(以後) 여러 관직(官職)을 했으나 알 수 없고 이후(以後) 고향(故鄕) 양주(楊州)에 가지 않고 영일군(迎日郡) 신광에 살게 되었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여산송씨(礪山宋氏) 근수(根守)의 따님이다

김을진(金乙軫) 1348(忠穆王4) ~ ? (掌令公)

자(字)는 치재(穉載), 호(號)는 설당(雪堂),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5세손, 감역(監役) 천응(天應)의 3남이며 문과(文科)에 등과후(登科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시작(始作)으로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叅議)를 역임(歷任)하고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을 다하자 형들을 따라 영천(永川)으로 낙향(落鄕)하였다. 배위(配位)는 성산이씨(星山李氏) 병근(炳謹)의 따님이며 묘(墓)는 실전(失傳)하였고 영천화산면화촌(永川花山面花村)에 설단(設壇)하였다.

김자정(金子汀) 1349(忠定王1) ~ ? (典書公)

초휘(初諱)는 진룡(晉龍), 대안군(大安君) 은열(殷說)의 14세손 통례문부사지제고(通禮門副使知制誥) 오(珸)의 장남(長男) 1370년 이후(以後) 왜구(倭寇)가 서남해(西南海)에 침범(侵犯)이 잦을 때이다. 왜구(倭寇)가 지나간 뒷처리에 몰두(沒頭)했다. 벼슬은 공조전서(工曹典書)로 민부(民部)의 일을 하면서 조선세종(朝鮮世宗)때 통정대부예조참의지제교(通政大夫禮曹叅議知製敎)에 증직(贈職) 되었다. 묘는 청송안인리(靑松安仁里)이며 1980년 청원군남일면지북리(淸原郡南一面池北里)에 설단(設壇)하였다.

김을범(金乙範) 1350(忠定王2) ~ ? (叅議公)

자(字)는 치홍(穉洪),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5세손(世孫), 감역(監役) 천응(天應)의 4남, 1408년 생원시(生員試)에 등과 형조별제(刑曹別提)를 시작으로 형조(刑曹), 예조(禮曹), 이조(吏曹)등 삼조(三曹)의 참의(叅議)를 역임(歷任)했고 고려말(高麗末) 양주(楊州)를 떠나 기계(杞溪)로 이주(移住)했다. 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경산전씨(慶山全氏)이며 정랑(正郞) 동오(東五)의 따님이다.

김자수(金自粹) 1351(忠烈王3)~1413(太宗13)(桑村公)

자(字)는 순중(純中), 호(號)는 상촌(桑村)이다. 통례문부사지제고(通禮門副使知制誥) 오(珸)의 二子이다.

1374년(恭愍王23)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교부령(典敎副令)을 시작(始作)으로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를 거쳐 천변(天變)이 잦자 민심(民心)이 흉흉하여 연복사탑중수(演福寺塔重修)의 중지(中止)를 상소(上訴)하기도 했다. 그 뒤 판전교시사(判典敎寺事)를 거쳐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 都觀察使)를 역임(歷任)후 형조판서(刑曹判書)를 제수(除授) 받았다. 고려말(高麗末) 충효대절(忠孝大節)을 겸비(兼備)한 충신(忠臣)이다. 고려(高麗)가 망(亡)하자 안동(安東)에 은거(隱居)하였는데 태종(太宗)이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임명(任命)했으나 절명사(絶命詞)를 지어놓고 자결(自決)하였다. 배위(配位)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수(隨)의 따님이다.

김을초(金乙軺) 1352(恭愍王1)~ ? (持平公)

자(字)는 치성(穉星), 문선공(文宣公) 김요(金瑤)의 5세손, 감역(監役) 김천응(金天應)의 5남,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한 후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장기간(長期間) 지냈으므로 능숙(能熟)하게 처리(處理)하였으며, 벼슬이 통훈대부(通訓大夫) 지평(持平)에 이르렀다. 고려말(高麗末)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이 다하자 형(兄) 되는 부사공(府使公) 을적(乙適)을 따라 낙향, 경주동해안(慶州東海岸) 가까운 곳으로 한때 은거(隱居) 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죽산박씨(竹山朴氏) 정언(正言) 조(稠)의 따님이다.

김충유(金冲裕) 1353(恭愍王2)~ ? (杜溪公)

자(字)는 선경(善卿), 호(號)는 두계(杜溪),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鐘)의 15세손 판도정랑(版圖正郞) 서인(瑞仁)의 장남(長男), 공민왕(恭愍王)때 봉익대부이의판서평장사(奉翊大夫吏議判書平章事)를 지냈다. 1361년 홍건적(紅巾賊)이 개경(開京)에 침입(侵入)하므로 왕이 피난(避難)길에 이천(利川)에 당도(當到) 했을 때 개경(開京)이 점령(占領)되었음을 듣고 정세운(鄭世雲)을 총병관(摠兵官)으로 삼고 토벌(討伐)케 하였다. 김득배(金得培), 이방실(李芳實)이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했는데 어지러운 개경(開京)을 재건(再建)하고 수습(收拾)하는데 공(功)을 세웠다. 고려(高麗)가 운명(運命)을 다하자 아우 충한(冲漢)과 임선미(林先味)와 더불어 만수산(萬壽山)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 그 후 두류산(頭流山:智異山) 서쪽에 피적(被謫)하였는데 목가(木家)를 짓고 살았는데 이로 인(因)하여 두곡(杜谷)의 이름이 여기서 연유(緣由)한다.

김장유(金將有) (版圖判書公)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12세손 고려말(高麗末)에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렀는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忠誠心)을 버릴수 없어 충청도(忠淸道) 보은(報恩)에 은거(隱居)하였다. 배위(配位)는 이경(李瓊)의 따님이며 후배위(後配位)는 삼산이씨(三山李氏) 송고(松固)의 따님이며 모두 6남6녀이고 장남(長男)은 인신(仁臣)이라 기록(記錄)하고 있다.

김을화(金乙和) 1354(恭愍王3)~1449(世宗31)

(存養齋公)

자(字)는 지화(志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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