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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행어사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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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6 23:07:56

암행어사 박 문 수(御史 朴 文 秀1691~1756)는 어떤 분이었나?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어사 박문수는 민중적 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구전(口傳)되고 있지만 정사(正史)로서의 정리된 활동기록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최근에 와서 학계에서 그분을 재조명한 논문과 저서, 조선왕조실록, 우리 문중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출생과 성장, 그리고 가계(家系)

 

가, 출생과 소년시절

 

박문수는 1691년 9. 8일(음)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옛 진위현 향교동)에서

아버지 박 항한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박문수의 외가이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서울 본가로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할아버지 박 선(朴銑)이 다음해엔 큰아버지 박 태 한(朴泰漢)이 그 이듬해 1698년 11월에는 아버지 박항한(朴恒漢) 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된다.

박 문 수는 이후 외가에서 외삼촌 이 태 좌(李台佐;후에 좌의정)의 지도로 외사촌 동생 이 종성(李宗城;후에 영의정) 과 공부하게 된다.

소년시절의 외가에서의 성장이 그분에게는 강렬한 자의식과 성취의욕을 함께 북돋우었을지도 모른다.

외삼촌 이태좌의 가르침을 받은 박문수를 비롯해서 내외사촌 형제가 후일 모두 암행어사직과 정승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박 문 수 는 어머니와 함께 외조부 이 세 필(李世弼)의 임지(任地)인 삼척과 강원도 감영의 외삼촌 임소에도 다녀왔으며 이때에 형 박 민 수(朴民秀)와 외사촌 이 종 성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나, 어머니 경주이씨(墓碣銘에서본 贈 貞敬夫人)

 

한 인물의 성장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가르침이 따른다. 박 문수의 어머니 경주이씨의 경우도 다름이 없다. 백사(白沙) 이 항 복(李恒福) 이래로 여러 대에 걸쳐서 명관(名官)이 배출된 명문(名門)의 가풍(家風)에서 성장한 분으로 타고난 자품(資稟)이 크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깊었다고 한다.

친족 간의 돈목을 이루는 일과 이웃에게 베푸는 일을 좋아하였으며 아들이 귀하게 되었어도 봉록과 사방에서 오는 선물은 모두 주위에 나누어 주시고 남겨두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입는 옷과 음식은 모두 무명옷과 채소뿐이었다고 한다.

외가에서 자라던 박 문 수가 다섯 살이 되어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박 선(朴 銑 ; 호 止觀齋)이 돌아가시고 다음해 시숙 박 태 한(朴泰漢)이 그 이듬해인 1698.11월에는 남편인 박 항 한(朴 恒漢)마저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의지 할 곳이 없게 된 처지의 경주이씨 부인은 구차한 집안 살림을 동서 두 사람과 함께 길쌈과 바느질로 꾸려나가면서 자질(子姪)교육에 힘썼다.

집안은 비록 궁핍하였지만 박문수의 증조부 박 장 원(朴長遠;이조판서)이래로 3대가 과거에 급제한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도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부인은 자질(子姪)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 은혜와 원한을 분명히 함은 대장부의 일이 아니다. 은혜는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되지만 원한은 기억하지 않을수록 좋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외가의 후원으로 성장한 박 문 수는 열여섯 살에 청풍김씨 집안의 따님을 배필로 맞게 된다.

 

 

다, 가계(家系)

(1), 친가

본관; 고령박씨(高靈朴氏)

-증조부 박 장 원(朴長遠, 1612~1671) 호 구당(久堂), 시호 문효(文孝) 별시문과 급제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공조, 형조, 예조판서 역임

한성부판윤, 우참찬, 홍문관, 예문관, 양관 제학 역임

저서, 구당집 24권(규장각 장서)

 

-조부 박 선(朴 銑,1639~1696) 호 지관재(止觀齋) 진사시합격 공조정랑, 김제군수

여산현감 역임. 염근에 천거됨.

저서; 지관재 유고 1권(규장각 장서)

 

-부친 박 항 한(朴恒漢,1666~1698) 군호, 영은군(靈恩君), 명제(明齋) 윤증(尹 拯,1629~1714)의 문인(門人)

저서; 박영은 유고 1권(규장각 장서)

 

(2), 외가

본관; 경주이씨(慶州李氏)

-외조부 이 세 필(李世弼,1642~1718) 호 구천(龜川) 시호 문경(文敬) 송시열, 박세채의 문인. 공조, 형조 참판,

 

-외삼촌 이 태 좌(李台佐,1660~1739) 호 아곡(鵝谷) 시호, 충정(忠定), 정시문과 병과 급제, 암행어사, 호조, 이조, 병조판서, 좌의정, 봉조하(奉朝賀)

 

-외사촌 이 종 성(李宗城,1692~1759) 호 오천(梧川) 시호 효강(孝剛) 증광문과 병과 급제, 이조, 예조, 형조판서 역임. 영의정.

 

(3), 처가

본관; 청풍김씨(淸風金氏)

부인; 정경부인 (1690~1723)

장인; 김 도 협(金道浹) 상주목사(尙州牧使)

 

 

3, 등과(登科)

1723년(경종3년) 박 문 수는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외숙 이 태 좌에 이어 최 창 대에 사사(師事)한지 4년 만이다.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객사(안성 칠장사라고도 함)에서 잠이 들었을 때 선인(仙人)이 나타나서 시제(詩題)를 말해주고 시의 마지막 행만 말하지 않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4,암행어사 박 문 수

 

암행어사는 대개 왕의 측근 중에서 발탁되었고 나이가 젊은 에리트였다.

사명감과 열정이 충만하였으며 지정된 지방을 누비며 민생을 살피고 왕의 통치방법을 홍보하였다.

지방관속과 토호의 불법과 탐학(貪虐)을 적발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색출 처단하였다.

1727년(영조3년) 영남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유랑민이 많아지자 이들을 안집(安集)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이 때 박 문 수가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추천되어 3개월간의 암행어사 직을 수행 하였다. 지방관리들의 작폐(作弊)와 양역(良役)과 환곡(還穀)의 폐해를 보고하고 대책을 주청하여 부적격한 지방관의 파직을 윤허(允許)받는다.

1731년(영조7년)에 영남진휼어사(嶺南賑恤御史)로 나간다. 이 시기에도 많은 일화가 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의 암행어사는 무려 1,200여명이나 되었음에도 그 중에서 박 문 수가 암행어사의 대명사 같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조정에서 그의 역할이 보다 다양하였음에도 암행어사로서의 업적이나 행적이 크게 부각되었음에는 이유가 있다.

경상도 관찰사, 감진당상(監賑堂上), 함경도 관찰사 등 지방관 내지 휼민관(恤民官)으로서 시정(施政)을 투철하게 한 것이다. 민초(民草)들에게 다가가 민생(民生)을 잘 챙겨줌으로서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박 문 수의 인간애가 암행어사로서의 행적에 투영됨으로서 민초들의 메시아가 된 것이다. 공직자로서의 공평무사한 일 처리, 약자의 편에 서주는 정의의 실현, 일처리 수단의 기발함과 과단성, 기지와 해학을 갖춘 인물로 민초들에게 각인(刻印)된 것이다.

영조(英祖)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신분적, 제도적, 구조적으로 생긴 적폐를 사심 없이, 과단성 있게 척결하였고 그것은 민초들의 불만을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인품이나 행적으로 인해서 그는 김 시 습, 서 경 덕, 이 지 함, 곽 재 우, 김 덕 령, 이 항 복, 김 병 연 등과 함께 민간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널리 전승되어 온 인물이 되었다.

 

5, 이 인 좌(李麟佐)의 난(亂) 평정에 공을 세우다.

1728년(영조4년) 이른 봄, 반란이 일어났다.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권력구조의 재편과정에서 소외된 일부 소론(少論)세력과 남인(南人) 중 일부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종실의 다른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인 좌는 정 희 량, 박 필 현과 김 영 해, 목 시 룡 등과 규합하고 병력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고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장손인 밀풍군(密豊君; 坦)을 왕으로 추대해 그들만의 세력으로 조정을 장악하려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병조판서 오 명 항(吳命恒)이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임명되고 박 문 수는 종사관이 되었다. 1728년 3월 17일이었다. 박 문 수는 군중어사(軍中御史)를 겸직하였다. 토벌군에 대한 독찰과 작전운영에 대하여 도순무사를 보좌하게 된 것이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은 반란무리들의 협박을 받아 이들을 따랐으나 난이 평정되자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전야(田野) 와 촌락은 텅텅 비게 되었다.

박 문 수는 홀로 말을 타고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녀서 도피 한자를 불러오고 협박을 받아 따른 자는 죄를 묻지 않는 다고 일일이 말하여 깨닫게 하고 모두 귀농(歸農)해서 농사지을 양식을 주었다. 백성들이 안도하여 경작을 시작하고 비로소 인심이 진정되었다.

그 들 민초들의 선량함을 믿고 위세로 제압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다가가 그 들을 설득하고 회유해서 안심시키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이때에 난처한 일이 생겼다. 당시 함양현감으로 있던 박 문 수의 친 삼촌인 박 사 한(朴 師 漢)이 난 중에 임지에서 달아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밑에 있던 이방(吏房) 등이 적괴(賊魁) 정 희 량(鄭 希 亮)에게 회유되어 무기와 관곡을 반란군에게 제공한 것이다.

박 문 수는 삼촌 박 사 한을 옥에 가두고 장계(狀啓)로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가 진무(鎭撫)활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영조는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效力奮武功臣) 이등(二等)의 훈호(勳號)를 내리고 가의대부(嘉義大夫) 영성군(靈城君)에 봉했다.

 

 

6, 뛰어난 지방행정가, 그리고 백성의 눈물을 닦아준 휼민관(恤民官)

 

박 문 수가 대중적 존경을 받으며 역사에서 긍정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지방관으로서의 치적도 큰 몫을 하였다.

1728년 李 麟 佐 의 난이 평정된 후 경상도 진무사로서 활약한 후 바로 경상도관찰사가 된다. 이 후로도 여러 관서의 내직(內職)을 거처 연경행진주부사(燕京行陳奏副使)등을 역임한 후에 1739년 함경도 관찰사, 1742 경기도 관찰사, 황해도 수군 절도사, 등으로 활약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그해 여름 관동과 관북지방에 큰 물난리가 났다.

즉시 제민창(濟民倉)의 곡식 3,000곡(1斛; 열 말(斗))을 함경도로 실어 보내도록 했다.

주위에서 조정의 허락 없이는 후일에 문책이 있을 것을 걱정하며 이를 만류했으나 박 문 수는 듣지 않았다.

이 같은 박 문 수의 은덕을 기리고자 함경도 함흥 만세교(萬歲橋) 앞에는 경상도관찰사 박공 문수 북민 감은비(北民感恩碑)가 세워져 있다.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서는 유언비어의 유포로 불안정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천강(城川江)의 치수사업으로 만성적인 수해를 예방했다. (3,600丈 ;10,800미터 제방의 토목공사)

가난해서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백성들을 처지를 가려서 지원(支援)하도록 하고, 혼기(婚期)를 넘긴 처녀들을 조사해서 혼수를 대주고 혼인을 하도록 도와 준 것이 740여건이나 되었다고한다.

 

7, 개혁과 창의로 문제를 풀어나가다.

박 문 수는 생존인물의 사당(生祠堂)과 재임 중인 자의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떠난자의 정사를 사모하여 세운 碑)를 헐어 없애 버렸다(1739.6.17일자 영조실록)

당시 백성으로부터 돈을 거두어 이와 같은 폐단이 성행하였으나 과감하게 철퇴를 가한 것이다.

 

지방의 사대부들이 승려를 학대하여 이들이 흩어질 조짐을 보이자 이를 걱정하고 궁궐에서 일하는 자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품의 접수과정에서 빚어지는 폐단을 지적하고, 지방수령들이 재상(宰相)에게 보내는 선물이 백성들의 고혈(膏血)임을 가슴 아파했다.

 

양역(良役)의 폐단으로 인한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고 호전법(戶錢法)의 시행을 주청하여 영조로 하여금 친히 대궐 밖으로 나와서 신료와 사민, 군민 등의 의견을 묻고 중신들로 하여금 이 법을 연구하여 시행토록 한 것이다.

 

화폐유통의 중요성을 알고서 화폐의 주조(鑄造)를 늘리도록 했고 나라의 재정집행 규칙인 탁지정례(度支定例)를 만들어 국고의 낭비를 막도록 했으며, 국혼정례(國婚定例)를 제정해서 혼인의 규범과 원칙을 지키도록 함으로서 허식과 사치풍조를 없애도록 하였다.

 

양인제도(兩印制度)를 만들어 자재관리(資材管理)를 합리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지금의 회계장부라고 할 수 있는 정간어린책자(井間魚鱗策子)를 만들어 현금의 출납을 정확히 기록하고 관리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화살의 제작방법의 개선, 거북선 모형에 대한 재평가, 한양성곽의 보수 개축을 건의하고 지방행정단위의 재조정, 진보(鎭堡)의 재정비, 불필요한 관원(官員)과 군졸(軍卒)의 감축과 재편성을 강력히 건의 하였다.(1750. 7월)

 

1733.12.19일 노론과 소론만의 탕평책을 비판하고 동서남북의 탕평책을 주창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8, 당쟁의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지키다.

 

박문수는 학맥이나 혈연으로 보아 소론으로 분류된다. 그는 개혁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게 함으로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조직적이고 집요한 저항을 받아야 했다.

1743년에는 박 문 수의 탐욕을 논박하는 어사 홍 계 희(洪啓禧)의 상소로 하옥되는 일이 있었으나 곧 근거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고 홍계희는 삭직되는 일도 있었다.

1749.1.11일자 영조실록에는 호조판서 박 문 수의 상소를 기록하고 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슬픕니다. 인심과 세도가 어찌 이처럼 극에 달하였습니까?

당파 싸움은 불과 같고 윤리와 기강은 크게 허물어 졌습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너는 역적이다. 너는 역적을 감싸준다. 라고 말하기를 너무 쉽게 하니 당파싸움은 장차 서로가 짐승이 된 후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임금과 신하의 큰 윤리가 장차 여기서부터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중략-

9, 인간 박 문 수

영조에게 박 문 수는 고굉지신(股肱之臣; 팔과 다리 같은, 신망이 두터운 신하))으로 통한다. 영조와의 인연은 세제(世弟)신분이었던 때로부터 이어져서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영조는 영명한 군주였고 박 문 수는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영조는 노론의 견제에도 묵묵히 박 문 수를 보호하며 중용하였으며 박 문 수는 때로는 삭직과 좌천의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영조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군신관계를 넘어서는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의 상호신뢰가 두 사람 간에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었던 것이다.

박 문 수는 홀로된 어머니에게는 지극한 효자였고 하나 뿐이 형 민 수에게도 우의가 돈독한 동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항 한과 백부 태 한의 묘기도 그가 준비해서 치산했다고 한다.

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어려웠던 집안사람들을 보살피고 어른을 섬기며 조상을 받드는 일에도 매우 헌신적이고 모범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오늘날 까지 민초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로 전승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인품과 치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초들을 보호하려는 그의 노력은 정적들의 질시를 받았고 부당한 권익을 지키려는 계층으로 부터는 경계의 눈초리와 함께 백안시(白眼視)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그에게 호의적이고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로 경희대학교 이 승 수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

정치관료 로서의 박 문 수는

1, 이론에 경도되지 않고 뛰어난 실무능력을 발휘했다.

2, 권력에 굴종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3, 당색(黨色; 少論)이 분명했으나 적대논리(敵對論理)에 빠지지 않았다.

4, 많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756. 4.24 영조24년 (聚賢坊; 서울 정동)66세로 생애를 마치니 특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영성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 靈城府院君)에 추증되고 부조(不祧)를 명받았으며 시호(諡號)를 충헌(忠憲)으로 받았다. 영조는 친히 제문을 짓고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정리; 楨河-

※참고문헌; 박 문 수 약전(2009); 玄岡 朴 鏞 武 편찬

암행어사 박 문 수(御史 朴 文 秀1691~1756)는 어떤 분이었나?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는 어사 박문수는 민중적 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구전(口傳)되고 있지만 정사(正史)로서의 정리된 활동기록이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최근에 와서 학계에서 그분을 재조명한 논문과 저서, 조선왕조실록, 우리 문중에 남아있는 기록을 통해 생애와 업적을 소개하고자 한다.

 

2, 출생과 성장, 그리고 가계(家系)

 

가, 출생과 소년시절

 

박문수는 1691년 9. 8일(음) 경기도 평택시 진위면 봉남리(옛 진위현 향교동)에서

아버지 박 항한과 어머니 경주이씨 사이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곳은 박문수의 외가이다.

다섯 살이 되던 해 어머니를 따라 서울 본가로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할아버지 박 선(朴銑)이 다음해엔 큰아버지 박 태 한(朴泰漢)이 그 이듬해 1698년 11월에는 아버지 박항한(朴恒漢) 마저 세상을 떠나게 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된다.

박 문 수는 이후 외가에서 외삼촌 이 태 좌(李台佐;후에 좌의정)의 지도로 외사촌 동생 이 종성(李宗城;후에 영의정) 과 공부하게 된다.

소년시절의 외가에서의 성장이 그분에게는 강렬한 자의식과 성취의욕을 함께 북돋우었을지도 모른다.

외삼촌 이태좌의 가르침을 받은 박문수를 비롯해서 내외사촌 형제가 후일 모두 암행어사직과 정승으로서 활약하게 된다.

박 문 수 는 어머니와 함께 외조부 이 세 필(李世弼)의 임지(任地)인 삼척과 강원도 감영의 외삼촌 임소에도 다녀왔으며 이때에 형 박 민 수(朴民秀)와 외사촌 이 종 성과 더불어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나, 어머니 경주이씨(墓碣銘에서본 贈 貞敬夫人)

한 인물의 성장에는 어머니의 희생과 가르침이 따른다. 박 문수의 어머니 경주이씨의 경우도 다름이 없다. 백사(白沙) 이 항 복(李恒福) 이래로 여러 대에 걸쳐서 명관(名官)이 배출된 명문(名門)의 가풍(家風)에서 성장한 분으로 타고난 자품(資稟)이 크고 식견과 도량이 넓고 깊었다고 한다.

친족 간의 돈목을 이루는 일과 이웃에게 베푸는 일을 좋아하였으며 아들이 귀하게 되었어도 봉록과 사방에서 오는 선물은 모두 주위에 나누어 주시고 남겨두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입는 옷과 음식은 모두 무명옷과 채소뿐이었다고 한다.

외가에서 자라던 박 문 수가 다섯 살이 되어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올라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박 선(朴 銑 ; 호 止觀齋)이 돌아가시고 다음해 시숙 박 태 한(朴泰漢)이 그 이듬해인 1698.11월에는 남편인 박 항 한(朴 恒漢)마저 3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의지 할 곳이 없게 된 처지의 경주이씨 부인은 구차한 집안 살림을 동서 두 사람과 함께 길쌈과 바느질로 꾸려나가면서 자질(子姪)교육에 힘썼다.

집안은 비록 궁핍하였지만 박문수의 증조부 박 장 원(朴長遠;이조판서)이래로 3대가 과거에 급제한 집안의 며느리로서의 자존심과 긍지도 역경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부인은 자질(子姪)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 은혜와 원한을 분명히 함은 대장부의 일이 아니다. 은혜는 마땅히 잊어서는 안 되지만 원한은 기억하지 않을수록 좋다」고 하였다.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으며 외가의 후원으로 성장한 박 문 수는 열여섯 살에 청풍김씨 집안의 따님을 배필로 맞게 된다.

 

다, 가계(家系)

(1), 친가

본관; 고령박씨(高靈朴氏)

-증조부 박 장 원(朴長遠, 1612~1671) 호 구당(久堂), 시호 문효(文孝) 별시문과 급제

강원도 관찰사, 대사간, 대사헌, 공조, 형조, 예조판서 역임

한성부판윤, 우참찬, 홍문관, 예문관, 양관 제학 역임

저서, 구당집 24권(규장각 장서)

 

-조부 박 선(朴 銑,1639~1696) 호 지관재(止觀齋) 진사시합격 공조정랑, 김제군수

여산현감 역임. 염근에 천거됨.

저서; 지관재 유고 1권(규장각 장서)

 

-부친 박 항 한(朴恒漢,1666~1698) 군호, 영은군(靈恩君), 명제(明齋) 윤증(尹 拯,1629~1714)의 문인(門人)

저서; 박영은 유고 1권(규장각 장서)

 

(2), 외가

본관; 경주이씨(慶州李氏)

-외조부 이 세 필(李世弼,1642~1718) 호 구천(龜川) 시호 문경(文敬) 송시열, 박세채의 문인. 공조, 형조 참판,

 

-외삼촌 이 태 좌(李台佐,1660~1739) 호 아곡(鵝谷) 시호, 충정(忠定), 정시문과 병과 급제, 암행어사, 호조, 이조, 병조판서, 좌의정, 봉조하(奉朝賀)

 

-외사촌 이 종 성(李宗城,1692~1759) 호 오천(梧川) 시호 효강(孝剛) 증광문과 병과 급제, 이조, 예조, 형조판서 역임. 영의정.

 

(3), 처가

본관; 청풍김씨(淸風金氏)

부인; 정경부인 (1690~1723)

장인; 김 도 협(金道浹) 상주목사(尙州牧使)

 

3, 등과(登科)

1723년(경종3년) 박 문 수는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했다. 외숙 이 태 좌에 이어 최 창 대에 사사(師事)한지 4년 만이다. 과거를 보러가는 길에 객사(안성 칠장사라고도 함)에서 잠이 들었을 때 선인(仙人)이 나타나서 시제(詩題)를 말해주고 시의 마지막 행만 말하지 않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4,암행어사 박 문 수

암행어사는 대개 왕의 측근 중에서 발탁되었고 나이가 젊은 에리트였다.

사명감과 열정이 충만하였으며 지정된 지방을 누비며 민생을 살피고 왕의 통치방법을 홍보하였다.

지방관속과 토호의 불법과 탐학(貪虐)을 적발하고 탐관오리(貪官汚吏)를 색출 처단하였다.

1727년(영조3년) 영남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유랑민이 많아지자 이들을 안집(安集)할 필요가 대두되었다.

이 때 박 문 수가 영남별견어사(嶺南別遣御史)로 추천되어 3개월간의 암행어사 직을 수행 하였다. 지방관리들의 작폐(作弊)와 양역(良役)과 환곡(還穀)의 폐해를 보고하고 대책을 주청하여 부적격한 지방관의 파직을 윤허(允許)받는다.

1731년(영조7년)에 영남진휼어사(嶺南賑恤御史)로 나간다. 이 시기에도 많은 일화가 민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조(朝鮮朝)의 암행어사는 무려 1,200여명이나 되었음에도 그 중에서 박 문 수가 암행어사의 대명사 같은 상징성을 갖고 있다.

조정에서 그의 역할이 보다 다양하였음에도 암행어사로서의 업적이나 행적이 크게 부각되었음에는 이유가 있다.

경상도 관찰사, 감진당상(監賑堂上), 함경도 관찰사 등 지방관 내지 휼민관(恤民官)으로서 시정(施政)을 투철하게 한 것이다. 민초(民草)들에게 다가가 민생(民生)을 잘 챙겨줌으로서 그들로부터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 사랑을 받게 된 것이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박 문 수의 인간애가 암행어사로서의 행적에 투영됨으로서 민초들의 메시아가 된 것이다. 공직자로서의 공평무사한 일 처리, 약자의 편에 서주는 정의의 실현, 일처리 수단의 기발함과 과단성, 기지와 해학을 갖춘 인물로 민초들에게 각인(刻印)된 것이다.

영조(英祖)로부터 크게 신임을 받고 있던 그는 신분적, 제도적, 구조적으로 생긴 적폐를 사심 없이, 과단성 있게 척결하였고 그것은 민초들의 불만을 풀어주는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인품이나 행적으로 인해서 그는 김 시 습, 서 경 덕, 이 지 함, 곽 재 우, 김 덕 령, 이 항 복, 김 병 연 등과 함께 민간설화의 주인공이 되어 널리 전승되어 온 인물이 되었다.

 

5, 이 인 좌(李麟佐)의 난(亂) 평정에 공을 세우다.

1728년(영조4년) 이른 봄, 반란이 일어났다. 탕평책을 시행하면서 권력구조의 재편과정에서 소외된 일부 소론(少論)세력과 남인(南人) 중 일부가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종실의 다른 왕자를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인 좌는 정 희 량, 박 필 현과 김 영 해, 목 시 룡 등과 규합하고 병력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고 영조를 폐위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장손인 밀풍군(密豊君; 坦)을 왕으로 추대해 그들만의 세력으로 조정을 장악하려고 난을 일으킨 것이다.

병조판서 오 명 항(吳命恒)이 사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로 임명되고 박 문 수는 종사관이 되었다. 1728년 3월 17일이었다. 박 문 수는 군중어사(軍中御史)를 겸직하였다. 토벌군에 대한 독찰과 작전운영에 대하여 도순무사를 보좌하게 된 것이다.

여러 고을의 백성들은 반란무리들의 협박을 받아 이들을 따랐으나 난이 평정되자 산골짜기로 숨어들어 전야(田野) 와 촌락은 텅텅 비게 되었다.

박 문 수는 홀로 말을 타고 여러 고을을 두루 다녀서 도피 한자를 불러오고 협박을 받아 따른 자는 죄를 묻지 않는 다고 일일이 말하여 깨닫게 하고 모두 귀농(歸農)해서 농사지을 양식을 주었다. 백성들이 안도하여 경작을 시작하고 비로소 인심이 진정되었다.

그 들 민초들의 선량함을 믿고 위세로 제압하지 않고 낮은 자세로 다가가 그 들을 설득하고 회유해서 안심시키고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다.

이때에 난처한 일이 생겼다. 당시 함양현감으로 있던 박 문 수의 친 삼촌인 박 사 한(朴 師 漢)이 난 중에 임지에서 달아난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 밑에 있던 이방(吏房) 등이 적괴(賊魁) 정 희 량(鄭 希 亮)에게 회유되어 무기와 관곡을 반란군에게 제공한 것이다.

박 문 수는 삼촌 박 사 한을 옥에 가두고 장계(狀啓)로 중앙에 보고하였다.

그가 진무(鎭撫)활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영조는 수충갈성결기효력분무공신(輸忠竭誠決幾效力奮武功臣) 이등(二等)의 훈호(勳號)를 내리고 가의대부(嘉義大夫) 영성군(靈城君)에 봉했다.

 

6, 뛰어난 지방행정가, 그리고 백성의 눈물을 닦아준 휼민관(恤民官)

박 문 수가 대중적 존경을 받으며 역사에서 긍정적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것은 지방관으로서의 치적도 큰 몫을 하였다.

1728년 李 麟 佐 의 난이 평정된 후 경상도 진무사로서 활약한 후 바로 경상도관찰사가 된다. 이 후로도 여러 관서의 내직(內職)을 거처 연경행진주부사(燕京行陳奏副使)등을 역임한 후에 1739년 함경도 관찰사, 1742 경기도 관찰사, 황해도 수군 절도사, 등으로 활약하였다.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그해 여름 관동과 관북지방에 큰 물난리가 났다.

즉시 제민창(濟民倉)의 곡식 3,000곡(1斛; 열 말(斗))을 함경도로 실어 보내도록 했다.

주위에서 조정의 허락 없이는 후일에 문책이 있을 것을 걱정하며 이를 만류했으나 박 문 수는 듣지 않았다.

이 같은 박 문 수의 은덕을 기리고자 함경도 함흥 만세교(萬歲橋) 앞에는 경상도관찰사 박공 문수 북민 감은비(北民感恩碑)가 세워져 있다.

함경도 관찰사로 부임해서는 유언비어의 유포로 불안정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성천강(城川江)의 치수사업으로 만성적인 수해를 예방했다. (3,600丈 ;10,800미터 제방의 토목공사)

가난해서 혼인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백성들을 처지를 가려서 지원(支援)하도록 하고, 혼기(婚期)를 넘긴 처녀들을 조사해서 혼수를 대주고 혼인을 하도록 도와 준 것이 740여건이나 되었다고한다.

 

7, 개혁과 창의로 문제를 풀어나가다.

박 문 수는 생존인물의 사당(生祠堂)과 재임 중인 자의 선정비(善政碑) 거사비(去思碑;떠난자의 정사를 사모하여 세운 碑)를 헐어 없애 버렸다(1739.6.17일자 영조실록)

당시 백성으로부터 돈을 거두어 이와 같은 폐단이 성행하였으나 과감하게 철퇴를 가한 것이다.

 

지방의 사대부들이 승려를 학대하여 이들이 흩어질 조짐을 보이자 이를 걱정하고 궁궐에서 일하는 자들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물품의 접수과정에서 빚어지는 폐단을 지적하고, 지방수령들이 재상(宰相)에게 보내는 선물이 백성들의 고혈(膏血)임을 가슴 아파했다.

 

양역(良役)의 폐단으로 인한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고 호전법(戶錢法)의 시행을 주청하여 영조로 하여금 친히 대궐 밖으로 나와서 신료와 사민, 군민 등의 의견을 묻고 중신들로 하여금 이 법을 연구하여 시행토록 한 것이다.

 

화폐유통의 중요성을 알고서 화폐의 주조(鑄造)를 늘리도록 했고 나라의 재정집행 규칙인 탁지정례(度支定例)를 만들어 국고의 낭비를 막도록 했으며, 국혼정례(國婚定例)를 제정해서 혼인의 규범과 원칙을 지키도록 함으로서 허식과 사치풍조를 없애도록 하였다.

 

양인제도(兩印制度)를 만들어 자재관리(資材管理)를 합리적으로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지금의 회계장부라고 할 수 있는 정간어린책자(井間魚鱗策子)를 만들어 현금의 출납을 정확히 기록하고 관리를 용이하게 하였다.

 

이 밖에도 화살의 제작방법의 개선, 거북선 모형에 대한 재평가, 한양성곽의 보수 개축을 건의하고 지방행정단위의 재조정, 진보(鎭堡)의 재정비, 불필요한 관원(官員)과 군졸(軍卒)의 감축과 재편성을 강력히 건의 하였다.(1750. 7월)

 

1733.12.19일 노론과 소론만의 탕평책을 비판하고 동서남북의 탕평책을 주창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8, 당쟁의 가운데서도 의연함을 지키다.

박문수는 학맥이나 혈연으로 보아 소론으로 분류된다. 그는 개혁적인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게 함으로서 기득권 세력으로부터 조직적이고 집요한 저항을 받아야 했다.

1743년에는 박 문 수의 탐욕을 논박하는 어사 홍 계 희(洪啓禧)의 상소로 하옥되는 일이 있었으나 곧 근거 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고 홍계희는 삭직되는 일도 있었다.

1749.1.11일자 영조실록에는 호조판서 박 문 수의 상소를 기록하고 있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슬픕니다. 인심과 세도가 어찌 이처럼 극에 달하였습니까?

당파 싸움은 불과 같고 윤리와 기강은 크게 허물어 졌습니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너는 역적이다. 너는 역적을 감싸준다. 라고 말하기를 너무 쉽게 하니 당파싸움은 장차 서로가 짐승이 된 후에야 그만 둘 것입니다. 아! 슬픕니다. 임금과 신하의 큰 윤리가 장차 여기서부터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중략-

 

9, 인간 박 문 수

영조에게 박 문 수는 고굉지신(股肱之臣; 팔과 다리 같은, 신망이 두터운 신하))으로 통한다. 영조와의 인연은 세제(世弟)신분이었던 때로부터 이어져서 서로가 마음을 주고받는 관계였다.

영조는 영명한 군주였고 박 문 수는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영조는 노론의 견제에도 묵묵히 박 문 수를 보호하며 중용하였으며 박 문 수는 때로는 삭직과 좌천의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영조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군신관계를 넘어서는 지기지우(知己之友)로서의 상호신뢰가 두 사람 간에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지렛대가 되었던 것이다.

박 문 수는 홀로된 어머니에게는 지극한 효자였고 하나 뿐이 형 민 수에게도 우의가 돈독한 동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 항 한과 백부 태 한의 묘기도 그가 준비해서 치산했다고 한다.

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어려웠던 집안사람들을 보살피고 어른을 섬기며 조상을 받드는 일에도 매우 헌신적이고 모범적이었다고 한다.

그가 오늘날 까지 민초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로 전승되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인품과 치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초들을 보호하려는 그의 노력은 정적들의 질시를 받았고 부당한 권익을 지키려는 계층으로 부터는 경계의 눈초리와 함께 백안시(白眼視)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그에게 호의적이고 긍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에 대한 평가로 경희대학교 이 승 수 교수의 논문을 인용한다.

정치관료 로서의 박 문 수는

1, 이론에 경도되지 않고 뛰어난 실무능력을 발휘했다.

2, 권력에 굴종하거나 눈치를 보지 않았다.

3, 당색(黨色; 少論)이 분명했으나 적대논리(敵對論理)에 빠지지 않았다.

4, 많은 위민정책(爲民政策)을 입안하고 시행했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756. 4.24 영조24년 (聚賢坊; 서울 정동)66세로 생애를 마치니 특별 증직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영성부원군(大匡輔國崇祿大夫 領議政 靈城府院君)에 추증되고 부조(不祧)를 명받았으며 시호(諡號)를 충헌(忠憲)으로 받았다. 영조는 친히 제문을 짓고 제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정리; 楨河-

※참고문헌; 박 문 수 약전(2009); 玄岡 朴 鏞 武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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